Wednesday, March 28, 2018

나귀를 타고 Riding a Donkey


요한12:12-16 나귀를 타고 Riding a Donkey (3/25/18 종려주일)
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자라나고 뻗어가는데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말이겠다. 우리가 미국에 온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서울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가르치고 행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 정책과 가난, 고난에 시달리며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리는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과 큰 기적을 보며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인식이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삼자는 운동을 벌리다. 그를 인정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다. 하나님이 보낸 목적을 이룰 때가 온 것을 알다. 하나님 목적을 위하여는 하나님 예배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정치적 종교적 수도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고 하나님 예배가 있다. 성전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다. 이 제단에서 죄된 인간을 대신하여 양이 죽임을 당하고 이로서 사람이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는 생명의 길이 열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간다. 일년 3차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맞으면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갈릴리 지방에 살고 사역하였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12살 나이에 부모를 따라 절기를 지키러 가다. 성전에서 교사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다. 그 후에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 갔는지 기록된 것 이외에는 알 수가 없지만 요한 복음에 기록된 것은 유월절에 3차례 초막절에 한 번, 수전절에 한 번 모두 다섯번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고 3년간 사역을 하다.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믿게 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말씀하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나라를 정복하고 왕으로 다스리는 일반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에 가시면 그의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하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곧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기대하다.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는 그 때 예수의 좌우 특별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하다. 장소가 중요하지만 시기도 중요하다. 유월절에 맞추어 가시고자 한다. 유월절은 특별한 절기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400년 이상 노예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은 절기다. 애굽 모든 가정의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을 죽이는 벌을 내릴 때 이스라엘 집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문 설주에 발라 둠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감으로 죽는 자가 없을 뿐 아니라 애굽의 종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것을 기억하는 절기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을 기대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욱 큰 죄와 죽음의 압제에서 자기 사람을 해방시키시는 일을 하신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기가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 유월절 양 잡는 날 자기가 잡혀 죽을 것을 내다보시고 그 시간에 맞추신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한다. 유월절 엿새전에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에 가시다. 여기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고 그 두 누이 마리아 마르다 가족이 살고 있다. 큰 잔치를 하다. 그 다음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월절을 지키러 온 큰 무리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를 환영할 준비를 한다. 예수께서 이른 아침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며 나귀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테니 풀어오너라 누가 말하거든 주인이 쓰고 돌려 준다고 하라고 하다. 제자들이 가서 그대로 하여 나귀를 끌고 오다. 사람들은 옷을 나귀 위에 얹고 예수께서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사람들은 길에 종려 나무 가지를 펴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친다. 호산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한다. 아주 특이한 행렬이다. 사람들이 왕으로 생각하고 맞이하는 것이다. 그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당시 왕이 전쟁에 나갈 때나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말을 탄다. 말은 용맹하고 빠르다. 위풍 당당하다. 고대 에집트나 당시 로마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나귀는 말과는 다르다. 크기가 보잘 것 없는데 더욱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다. 모양도 없고 빠르지 않고 고집도 센 모습이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말이 늦게 도입되다. 말 보다는 나귀가 많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 통치자는 말을 타고 다닌다. 위세가 등등하다. 예수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을텐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뜻은 무엇일까?

1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다. 말은 전쟁과 관련된다. 전쟁하여 죽이고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시대에 사용한다. 사람들은 억압자를 정복하고 새 나라 건설을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평화를 가지고 오시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14:27).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안이다. 사람들은 전쟁과 억압에 시달리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가 평안! 샬롬이다. 그만큼 시달렸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사가 안녕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언제나 인사가 안녕이다. 그만큼 고난이 많고 시달렸다. 평안을 원한다. 평안은 전쟁이 없는 것만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염려 걱정이 없고 관계도 평안한 것이다. 주님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평화를 이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세우고자 오셨다. 그가 탄생할 때 천사가 노래하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2:14).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울 때 왕의 나귀를 타고 오게 하였다. 솔로몬 그 이름이 평화, 평화의 왕이다. 솔로몬 재임 시에 그는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다. 그는 피를 흘리고 누구와 전쟁할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시다. 이에 대하여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9:9). 그는 전쟁 도구인 병거와 말을 끊고 활을 끊으리니 이방에 화평을 전할 것이라(9:10)한다. 예수님을 맞이하면 평화가 온다. 마음과 가정에 평안이 있다.

2  일반 평민의 동물이다. 왕이나 장군은 말을 탄다. 일반 평민은 나귀와 가깝다. 말은 높은 지위를 보이나 나귀는평범한 인간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귀하지만 엘리트는 자기 만족에 살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가 태어나기는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 베들레헴이지만 자라난 곳은 나사렛 갈릴리 땅, 사역한 곳은 바닷가 갈릴리 가버나움이다. 배운 것도 없고 신분도 없는 어촌 시골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이곳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은 멸시를 당하며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나 잊혀진 사람들이다. 주님은 이들과 가까이 하다. 주께서 그곳에서 일을 하시자 어둠의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하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나 우리 사람과 같이 되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2:7).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엘리트, 종교 지도자들과 친구가 되지 아니하고 비천하고 어둠의 땅, 멸시 당하는 갈릴리 지역에 본부를 두고 멸시 당하는 어부들과 함께 사역하시다. 가난하고 병들고 눈물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을 풀어주시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 날 베다니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의 집에서 하루를 지나다. 그들을 사랑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구를 보면 모두 보통 사람들이다. 주님이 가까이 하신다. 엘리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나 한다. 그가 한 일들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비평하고 정죄하고자 한다. 그가 나면서부터 나병 걸린 사람을 고쳐주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에 그 병을 고쳤다고하여 죄인이라 한다. 그를 죽일 생각만 하다. 일반 사람은 그를 쉽게 받아드린다.

3  나귀는 불결한 동물로 분류된다. 13: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면 그 목을 꺾을 것이라 한다. 정하고 부정한 동물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부정한 동물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못한다. 만일 나귀를 가정에서 기르려면 양으로 대속한다. 양을 대신 죽게 하고 그 나귀를 소유하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불결한 죄인이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나갔기에 죄인이 되었다. 이 죄인을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시다. 예수님은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 주신다. 사람들은 서로 구분한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은 갈릴리나 사마리아 사는 이스라엘 사람을 천하게 불결하게 생각 한다. 상대할 사람들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직업도 그러하다. 어떤 직업은 매우 부정하게 본다. 세무서원이 된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는 마태를 제자의 하나로, 삭개오를 친구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주시었다. 원수로 취급되는 로마 지배자의 백부장의 하인이 병든 것을 알자 가서 고쳐주리라 하신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불결한 이방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방인도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나병이 걸리면 가장 어려운 병이다. 그는 가족을 떠나 격리된다. 공동체와 결별한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같다. 나병은 불결하다. 그와 접촉하면 불결해진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나는 부정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대고 그를 깨끗하게 해 주시었다. 주 앞에는 정결 부정이 따로 없다. 주께서 만져 주시고 받아주시면 모두 정결하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서 보는 축복이다.
4나귀는 짐을 싣는다. 사람이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싣는다. 나귀는 매우 고집 센 동물로 생각된다. 말을 잘 듣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귀는 처음 사람을 만나면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을 알고 관계를 맺는데는 근 1년의 세월이 걸린다. 나귀가 신뢰하고 신임하면 그 때부터는 주인이 말하는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한다. 그를 인정하고 살펴 준다는 것을 알면 주인을 위하여 헌신한다. 주인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이 나귀를 만나자 그는 주께서 바로 그의 주인인 것을 알고 신뢰한다. 공손히 그를 태우고 예루살렘 으로 간다. 나귀가 신뢰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고 일을 하지 않지만 일단 신뢰하면 그의 무거운 짐을 모두 짊어진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은 그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우리가 지기 힘든 짐을 대신 지신다. 어떤 짐이 있나? 오래 전 전쟁 후 한국이 가난하기도 하고 대중 교통이 발전하지도 않았다. 군대 트럭이 많이 다녔다. 큰 짐을 이고 메고 다니는 여행자가 많다. 트럭이 서서 태워줄 때가 많이 있다.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를 본 트럭 운전사는 자기 할머지 생각이 나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을 묻고 태워 드렸다. 가도 보니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할머니가 짐을 머리에 이고 넘어지지 않겠다고 붙잡고 신음한다. 할머니 짐을 내려 놓으시지요! 내가 탄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타면 미안하여 어떻게! 하였다. 이런 일이 많이 있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짐을 맡기지 못할 때가 많다. 네 짐을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신다(55:22)고 말씀하신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돌보신다 (벧전5:7).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주께서 우리 대신 그 짐을 저 주신 것이다. 그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의 짐을 짊어지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그에게 우리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일1:9)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우리가 죽을 자리에 대신 서 주시고 우리가 피를 흘릴 자리에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주께서 성찬 통하여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 죄를 사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그가 유월절 양 잡는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죽음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졌다. 우리가 그를 믿고 그에게 나의 무거운 짐을 맡겨 드리면 우리는 안식을 가진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그가 하실 일을 보여주심이다. 오늘 여기에 들어오신다. 평화를 가지고 오신다. 주의 평화를 받아드리나! 주님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 자랑할 것이 없는 자를 받아주신다. 비천하고 불결한 죄인을 친구로 삼아주신다. 우리가 신뢰하며 그에게 나의 마음 드릴 수 있나? 믿기만 하면 주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주께서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다. 나의 짐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나? 갈등 많은 세상과 공동체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으로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참 된 평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자.

 동영상은 kpcm.org
Add caption

Wednesday, March 21, 2018

율법의 완성 Fulfillment of the Law


마태복음 5:17-20 율법의 완성 fulfillment of the law (3/18/18 사순절 5주일)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따라가는 삶의 형태, 가치체제, 규범이다. 이스라엘에게는 그 중심이 그들 공동으로 인정하는 가치 체제 곧 율법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자랑하나 로마의 압제, 지도자의 타락과 자기 중심적인 삶,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 그 때 예수께서 나타나다. 그의 삶과 기적 가르침은 놀라운 반응, 이가 그다, 메시아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오면 새로운 세상, 현재의 모든 법과 제도를 뒤집어 엎을 것이다. 흔이 있는 일이다.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는 예수가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폐기한다고 비난한다.

1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다: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율법과 선지자는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삶의 지침이다. 백성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으나 그가 온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 율법을 주셨나?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백성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도록 일정한 법을 주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서로가 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고 타민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를 보여주신다. 바른 관계에 생명이 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 성경 곧 율법과 선지자는 생명과 안정, 자유와 질서를 위한 것이다. 율법을 알고 지키면 생명이 주어진다. 법을 어기는 경우는 생명과 자유 질서 안정이 깨어진다. 율법은 어떤 행동이 법을 어기는 것인지 보여주고 사람의 잘못을 알려준다. 법이 없으면 죄를 모른다. 법을 어기면 심판과 형벌이 있다. 공의다. 공의를 만족시키며 죄의 용서를 위해 제사법을 세우고 동물을 대신 희생하여 죄를 대속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백성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생명 누리고 살도록 하심이다.
선지자는 그 백성들에게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한다. 물론 법이 사람의 잘못을 알려 주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하게 하는 자가 선지자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확립시켜 의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다.
법은 의롭고 선한 것이다(7:12). 잘 사용하면 생명과 안정을 위한 것이나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법을 해석하고 사람들을 이용한다. 이들은 문자에 매어달리거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과 외모를 단장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들의 개혁이 요청된다. 메시야가 오면 큰 개혁이 일어나고 세상이 뒤집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함이 아니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 선지자의 말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꾸거나 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 주신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법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법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평안하게 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른 관계, 막힌 것이 없는 의로운 관계를 위한 것이기에 폐할 것이 아니다.

2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성취하려 함이라 하신다. 율법이 의도한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함이다. 곧 생명과 자유 평안을 이루고자 함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진다. 주의 말씀은 일점 일획 작은 것 하나라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진다. 말씀으로 만든 세상은 지나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24:35) 완전케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동일시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시킨다.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시키나?
1)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 자기 좋은대로 살고 있다. 이 형편에 오신 주님의 처음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드리라. 그들이 받아드리지 않으니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으나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해 예수로 그들을 찾아 오셨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함이다. 바른 관계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복된 사람이다. 어떻게 복된 사람?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며 된다. 예수와 같이 살자는 것이다.

2)율법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다. 사람이 지키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모두 지키신다. 사람은 죄가 있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지킨다. 시험 받을 때 육적인 유혹이 많다. 금식하고 주릴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원칙을 따랐다. 사탄이 천하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 나간다. 사역을 시작하고 일이 많다. 식사할 겨를도 없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수께서 새벽 미명 한적한 곳으로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다. 율법을 그대로 지켜나간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차별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구별된다. 남여의 차별이 심하다. 소외되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자가 많다.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한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들이라 주께서는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돌보신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말씀을 지켜 나가신다. 천대 받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고 그들과 함께 하다.

3)예수께서는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보다 그 의도와 깊은 의미를 해석하고 가르치며 그 대로 사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 대단히 큰 계명이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원한다. 금요일 저녁 해넘어가는 시간에서 토요일 저녁 해 넘어가는 시간 까지가 안식일이다. 그 날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 안식일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던 일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건강한 생명을 누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 맹인을 치유하신다. 바리새인은 문자적인 해석으로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이라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한다. 너희 중에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내 버려 두겠는가? 마귀와 질병에 얽매여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풀어 생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원하신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를 향하여 노하거나 욕을 하거나 미련하다고 하면 그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그 마음의 의도를 말씀한다. 문자적인 살인은 외부적인 것이요 돌이나 종이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살인의 의도가 되는 분노 저주 비난은 속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강조한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행하라 (23:23) 며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책망하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여러가지 제사를 드린다. 많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린다. 하나님은 말씀한다. 이제 그만해라 내가 배부르다. 너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 내 마당만 밟는구나!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신다.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기도하는 것을 알리려고 길거리에 서서 사람들 보는데서 기도하지만 예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외모가 아니라 친밀한 마음 관계를 말씀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처음 돌에 새겼다가 나중 종이에 새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문자에 얽매이면 그것이 죽은 것이 된다. 이제 하나님은 그것을 마음에 새긴다. 31:33 내가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36:26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입기운으로 된다. 하나님의 입기운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면 우리가 살아난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 종이 조각의 죽은 문서가 되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기로 우리 심령에 주어지면 우리 심령이 살아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쁨으로 넘친다. 새로운 생명이 일어난다. 바리새인은 외적 요소를 강조하며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하며 위선을 부리지만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속 심령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이 의도하는 생명과 자유를 가지고 주께서 의롭다고 하신다.

4)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전체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탄생에 대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 (1:22,23). 베들레헴 탄생에 대해서도 선지자 미가가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너희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가 나온다 (18:18) 이렇게 구약이 예수에게 이루어진 것이 351번 나온다. 예수의 삶은 전체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심이다. 누가 24:44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대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품이다. 예수의 탄생과 생애가 율법 완성이지만 그의 십자가 죽으심은 율법을 이루심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죄 없는 자가 없기에 모두 죽음의 형벌을 받는다. 제사제도는 짐승에게 죄를 전가하여 죽여 피를 흘리고 그것으로 사람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실제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을 어찌 바꿀 수 있겠나? 사람의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이 없기에 누구나 자기 죄로 자기가 죽어야 한다. 죄가 없으신 오직 한 분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는 길을 여시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다.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통하여 보여준 대속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면서 실천하시다.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주심으로 율법과 선지자의 본래 의미를 실현하신 것이다. 그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보여 주심이다.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이 예수께 와서 묻다. 율법 중에 어느 것이 제일 큰 것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 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다 (22:37-40). 주님은 친히 하나님을 사랑하시다.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시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으시고 나에게 죄용서와 생명을 허락하시다. 예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하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길을 보여 주셨다.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어 지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지만 주께서는 우리 마음의 변화를 보신다. 주를 따르는 복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도록 하나님을 사모하며 공의를 추구하고 평화를 이룩하는 가운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어제 317일은 센 패트릭 데이다. 아일랜드가 지키는 절기지만 온 세계가 같이 축하한다. 패트릭은 400년대 초반 영국 해변에서 조부 사제, 부친 집사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신앙심은 별로 없었다. 16세에 이웃나라 아일랜드 해적에게 잡혀 가 종으로 팔려 6년동안 양을 치는 양지기가 되었다.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그 사랑을 깨달으며 그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주의 사랑으로 주인과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게 되다. 음성이 들리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배가 준비되어 있다. 도망하여 200마일을 걸어 부두에 가니 배가 있어 타고 천신 만고로 고향에 돌아가 기독교를 공부하다. 어느날 환상 중에 아일랜드 청년이 나타나 거룩한 하나님의 사자여 간청하노니 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다. 그는 유럽에 가서 공부를 하고 사제로 서품 받아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다. 환상을 보았지만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사랑으로 겸손하게 섬기며 소금과 빛의 삶을 살며 복음을 전하고 나누다. 수천 사람에게 세례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여 아일랜드 전체가 우상과 해적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 나라에 율법과 선지자의 의도하는 생명을 일으켰다.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인정 받을 것이라 본다.
주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시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생명을 허락하는 율법을 완성하셨다.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이시다. 주님의 뒤를 따라 주와 함께 동행하며 주의 일을 이루어 생명과 자유를 일으키도록 하자.

 동영상 www.kpcm.org

Monday, March 12, 2018

다리 건설자 Bridge Builders


에스겔 22:23-31 다리 건설자 Bridge Builders (3/11/18)
미네소타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미시시피 강이다. 아이타스카 호수에서 발원하여 10개 주 2320마일을 흘러내리며 미국 곡창의 생명줄이 되다. 강변에 큰 도시가 형성된다. 그러나 강이 흐르기 전에는 평원이 하나였는데 물이 흐르면서 점점 땅이 패이어 지고 강 양쪽이 나누어진다. 물이 깊어질수록 자유롭게 활보하던 평원이 나누어져 갈라지고 내왕이 어려워지다. 건너가려면 배나 뗏목을 타야 한다.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오다. 1854년 트윈 시티 처음 다리 공사를 시작하여 1855년 개통하다. Father Louis Hennepin  다리다. 지금 트윈 시티 지역 전체 다리는 38, 자동차 다리가 26, 기차 다리가 12이 되어 있어 이 다리로 트윈 시티 전체 지역만 아니라 외부 전국과 잘 연결되어 내왕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고 산업이 발달하다. 다리가 큰 역할을 한다. 사람관계도 그렇다. 특히 인종간에 나라별로 서로 남남으로 살고 있다. 결혼이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인종을 초월한 결혼은 다른 인종을 서로 연결하는 정말 귀한 일을 하다. 나라와 나라도 그렇다. 미국과 중국은 선교를 통하여 가까운 나라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었다. 1970년 초 핑퐁 선수를 교환하고 닉슨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하므로 관계가 새롭게 열리게 되었다. 핑퐁 외교라 불린다. 지난 평창 겨울 올림픽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있다. 한국 특사가 북한을 방문하고 그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앞으로 북미가 서로 만나는 길을 열고 있다. 다리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가서 사역하며 평양이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자랑스런 교회 성장이 있었지만 해방과 분리 그리고 전쟁으로 서로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 서로 비난 위협하던 형편에서 다시 연결되어 서로 용납하고 화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분리와 화해 일이 일어나다. 전능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한 때 하나님은 사람과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원하였다. 생명과 사랑, 자유와 평화의 관계였다. 사람이 이 관계를 깨뜨리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복하여 결국 불법을 행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숨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낙원에서 추방하고 불 칼로 생명나무를 지키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다. 이것이 심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가 멀어지게 되다. 낙원에서의 교제, 낙원에서 즐기던 생명과 사랑,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리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두려움으로 자기를 보호하고자 성을 쌓고 외부와 차단한다. 그러나 사람은 본성적으로 에덴의 생명과 사랑, 자유와 안정을 찾는다. 잘 살기 위하여 가축을 기르고 악기와 음악을 개발하고 동과 철로 연장과 무기를 만든다. 사람과 대결하고 종족과 대결 하고 싸움과 전쟁을 한다. 자기 힘이 부족하니 신의 힘을 빌리면서 피흘림과 투쟁, 고통과 불행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이를 보고 계신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 이야기다. 백성과 지도자의 더러움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더러워졌다. 하나님 백성이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지도자들이 저마다 자기 유익만 챙기면서 백성을 압제하고 이용한다. 하나님과 이 백성 사이가 멀리 갈라져 있고 지도자와 백성, 백성과 백성 사이도 서로 분리와 갈등이다. 이제 심판이 임하여 하나님 백성이 바벨론에 멸망할 지경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신다. 강이나 깊은 계곡처럼 양편을 갈라 놓은 형편에 다리를 놓아줄 사람을 찾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과 평안을 갖기를 원한다. 친근한 사랑과 교제를 회복하고 싶다. 서로 대화하고 싶어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20:19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말한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말씀하셨고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한 것 같이 하고 싶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 앞에 나갈 생각을 못한다.

하나님이 세우는 다리: 여기 하나님이 다리 역할 할 사람을 정하여 세우신다. 구약의 중요한 주제로 선지자와 제사장이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지자는 의미가 의, 공의, 사랑 긍휼, 선포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나누고 선포하는 자라는 것이다. 선지자를 선견자라 예언자라 불린다. 선견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일반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고 알리게 된다. 예언자는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도 되지만 예언은 예금한다는 예언으로 하나님이 맡기고 주시는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리고자 한다. 제사장은 성결 순결 희생 제사 가르침의 의미다. 죄지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희생을 드리고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시킨다. 모세와 아론 형제 중 하나님은 모세를 선지자 예언자로 선택하고 아론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게 하신다. 아론은 백성을 중보하는 일을 한다.
1)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우신다. 선지자가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선포한다. 그 내용은
(1)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여 자기 백성이라 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관계 회복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였나? 자녀들이 누구에게 속하나? 내 자식이면 내가 돌본다. 책임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이요 자기가 우리 하나님이라 하심은 우리를 책임지고 돌보신다는 것이다.세상 어디 있으나 우리를 지키고 채워주신다.
(2)내가 내 형상으로 너희를 지었다 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너는 내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게로 돌아오라. 가던 길에서 돌아오라. 욕심의 길 죄의 길 불신 불복과 불법의 길을 버리고 다시 돌아오라. 죽음과 어둠에서 떠나 생명에로 돌아 오라. 회개를 요청한다.
(3)내가 너를 내 백성, 내 사람으로 축복하며 뻗어가게 하리라 약속하신다. 더 이상 나를 떠나지 말고 내 백성으로 같이 지나자 하신다.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길은 십계명에서 표현된 그대로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힘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4)하나님은 자기 대변인으로 세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그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한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사무엘로부터 엘리야 엘리사 등 많은 선지자, 마지막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자기 뜻을 알릴 선지자를 부르셨다. 선지자는 자기가 원하여서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서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5)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그대로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진다. 개인이나 나라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자의 말씀대로 진행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알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한다. 유다가 죄로 인하여 바벨론에 멸망할 운명인데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바벨론에 망할 것이라 한다. 그 때 다른 선지자가 일어나 아니라고 한다.나라가 망하지 않은다고 한다. 왕이나 일반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을 들으며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몰고 감옥에 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만들어 말하는 거짓 선지자가 일어난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말한대로 나라는 망하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 자기 뜻과 계획 할 일을 전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말씀을 들으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이 된다.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며 서로 사랑을 나누고 안정을 누리게 된다. 여기 생명과 평안이 있다.

2 )선지자 다음으로 제사장을 세운다. 본래 의미는 거룩하다  순결하다 희생 제사 다리의 의미가 있다. 제사장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로서 본인이 거룩하고 순결한 자로 하나님 앞에 백성을 위하여 서게 된다.  
(1)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한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바로 제사다. 흠 없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 피를 흘려 사람을 대신하여 죽게 하는 것이다. 대속 속죄다. 그 희생으로 인하여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은 담이 무너지고 둘 사이에 건너지 못한 강과 같은 곳에 다리가 놓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이 일어난다.
16:46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도전한다. 하나님을 도전한다. 고라를 위시하여 250명이 죽임을 당하자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너희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염병이 일어나게 하다. 모세가 알고 아론에게 명한다. 염병이 시작되었으니 얼른 향로에 제단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급히 회중에게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한다. 아론이 달려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설 때 염병이 그쳤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대신 제물드리고 향을 피운다. 이는 중보기도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
(2)제사장의 중요한 또 하나의 사역은 선지자가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잘 풀어 가르치고 지키게 함이다. 그리고 백성들 간에 분쟁이 있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용하여 판결하여 중재하고 법질서가 있게 한다. 백성들이 평온하게 살도록 도운다. 그리고 (3)제사장은 하나님의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4-26), 대속하여 하나님의 백성 으로 살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호와 사랑 평강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하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을 때에 제사장이 중재자로 중간에 서서 제물을 드림으로 용서를 얻는다. 레위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성전 물건이나 사람의 물건과의 관계 등에서 잘못된 것을 회복하기 위한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온다. 하나님은 용서하고 회복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다리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사랑하고 교제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백성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도록 율법을 지도한다. 백성들 간에 다툼이나 분쟁이 없이 평화롭게 살도록 재판하고 중재하며 하나님 축복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의도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과의 사이에 다리 놓을 자를 찾으신다.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시어 주의 백성이 죄를 지은 때 공의로 심판하지 않고 생명을 누리도록 주께 돌아오게 하고 죄의 대속물을 드려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간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선 하나님의 대사로 사람에게 나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대언자로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전하며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격려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되어 서로 연결시키는 일을 한다.
제사장은 사람 편에 서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의 대사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사람의 죄가 용서되게 짐승의 피를 흘려 희생을 드리고 속죄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평화와 질서의 사회가되어 하나님의 복받은 백성이 되도록 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이룩하게 하는 것이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고 교제하며 하나님과 그의 마음을 알게 되면 감사하다.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축복이다. 오늘 우리가 다리 놓은 자를 통하여 죄의 용서 받고 구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가! 이로서 찬양하고 경배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리 놓을 사람을 찾으신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떠나 살면서 개인이나 단체나 나라가 서로 서로가 분리하고 대적하는 형편에서 하나님은 다리가 될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화해와 구원의 생명과 자유를 누리고 이웃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라면 우리가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다리 세우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사람들은 다리 세울 사람들을 찾으신다. 다리를 통하여 세상이 새롭게 회복되어 풍성한 생명,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을 바라보며 내가 이 일을 감당하리라 헌신하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의 은총과 축복이 계속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