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29, 2021

녹음방초 승화시 Better than the Best

녹음방초 승화시 Better than the Best 5/27/2021

5월 하순이 되자 신록이 녹음방초로 변하였다. 얼마 전 나는 봄의 꽃에 감탄을 했다. 긴 겨울이 지난 후 봄철이 오자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고 세상이 새로워지며 꽃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다칠 새라 꺾일 새라 조심하였으나 꽃의 아름다움은 잠시 후에 시들어 사라지고 나무마다 잎이 피어 자라나고 무성하게 되니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라는 옛 시인의 시구가 생각이 난다. 우거진 푸른 숲 향기로운 풀이 꽃피는 시절보다 낫다는 말이다. 이 시는 송나라의 정치가며 문인이던 왕안석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나 우리 나라에서 많이 공감하고 즐기는 구절이 되었다. 고려말기 유학자 이색이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꽃을 보며’라는 시를 쓴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본다. 
綠陰芳草勝花時(녹음방초승화시) 一段淸閑付與誰(일단청한부여수)
坐想病翁丸藥處(좌상병옹환약처) 滿庭微雨囀黃鸝(만정미우전황리)
푸른 잎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좋구나, 한 자락 상큼한 한가로움 누구에게 주겠는가 
병든 노인에게 줄 약을 처방한다면, 뜰에 가득한 보슬비 속 꾀꼬리 노래이리라.

녹음방초승화시가 우리 귀와 입에 익숙하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이 꽃의 화려함보다 무성한 나무와 그 그늘, 향기로운 풀을 더 높이 인정하는 데서 온 것이라 본다. 춘향전을 위시한 많은 민요에도 나오고 최근에는 한혜진의 가야금 앨범에도 이 이름이 붙었다. 나도 짙은 녹음 우거진 숲, 향긋한 내음의 풀과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가까이 나아가 즐기며 걷고 그 아래에 앉기도 눕기도 하며 몸과 마음에 한가로움과 휴식을 더하고 스트레스와 삶의 짐을 내린다. 봄철의 꽃이 최고라 생각하였으나 여름의 녹음은 그 보다 뛰어남을 실감한다. 

이팔청춘 젊은이는 피어나는 꽃과 같이 화사하고 향기롭다. 이 땅에 자기보다 더 아름다움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천하에서 자기가 최고라 생각한다. 그러나 잠깐 후에 그 화려함이 지나간다. 십대가 꽃피는 시절이라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가지는 때는 녹음방초라 할까? 부부가 사랑으로 화합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자녀들이 행복하게 자라나며 싱싱하게 뻗어가고 건강한 안정과 안식을 누린다면 바로 녹음방초승화시가 아닐까?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있으니 십대가 가지던 자기행복감과는 달리 가정의 풍성함을 더욱 느끼며 알게 된다. 자녀와 함께 가정에서 가지는 즐거움은 십대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가? 어떤 사업가가 성공하여 원하는 집에 살고 제일 좋다는 자동차를 굴리며 그리스도인을 보니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사람 같았다. 술도 담배도 오락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가 싶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로 눈이 열리고  상상하지 못하던 삶의 기쁨과 행복,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였다. 그는 예수 믿기 전의 삶을 흑백이라면 그 후의 삶을 총천연색이라고 고백하였다. 
신앙의 많은 선배들은 믿음때문에 가난에 시달리고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게 되니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변화를 받았다. 개인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에도 일어난다. 세계를 제패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며 없애려더니 도리어 기독교 중심국가로 바뀌었고 제일이라 자랑하던 바이킹 해적 스칸디나비아 민족들이 복음을 받고 변화하여 겸손하게 사랑으로 자선하는 민족이 되었다. 이들의 화려하게 자랑하던 이전보다 변화된 이후의 짙은 아름다움에서 녹음방초승화시를 보지 않는가!     
















Thursday, May 27, 2021

생명의 길, 사망의 길 The Way of Life, The Way of Death

생명의 길, 사망의 길 The Way of Life, The Way of Death  5/27/2021

 코비드 팬데믹이 1년 이상 세계를 뒤덮고 수 백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가까운 사람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데도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감염되어 고생하다가 혼자 외롭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마스크를 하고 거리 두기를 지키고 손을 씻는다. 백신이 나오자 대개는 속히 접종을 하겠다고 신청하고 줄을 선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보며 누구나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자 한다. 나는 죽지 않는다고 장담하거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며 방역 규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렘21:8)을 두었다고 하며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 규정을 제시하신다. 바벨론이 그 나라를 침공하여 포위하고 있는 때 그들에게 나아가 항복하는 사람은 살 것이고 자기 성읍에 그대로 머무는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 대대에 주신다고 약속한 땅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지켜 주신다고 하였는데 바벨론 나라가 침공해 왔다. 그 땅을 지키며 살려는 사람은 전쟁과 기근 질병으로 죽임을 당하고 침략자에게 나아가 항복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시니 그들은 정당한 보응 곧 생명의 길을 떠난 고난과 죽음을 당하며 원수 나라 바벨론의 침공을 받는다. 그들이 배역하여도 하나님 백성이라 사랑과 은총으로 생명의 길을 제시한다. 잘못에 대한 채찍에 순응하여 그것을 받아드리면 생명이지만 자기를 고집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하면 죽음 뿐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대로 되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사랑스런 존재이지만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한다. 그 결과는 심판이요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인간 세계 침공이요 포위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다고 한다. 우리를 정죄하고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이다. 나아가 그 앞에 항복하면 생명을 얻지만 자기 자리를 지킨다고 고집하면 그 때는 죽음이다. 우리의 재산 지위 명예 건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타서 없어지고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 앞에 나아가 순응하며 그를 받아드리면 생명을 얻는다. 누구든지 저를 믿고 받아드리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되고 구주 예수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하며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화와 축복을 누리게 된다.

Saturday, May 22, 2021

새끼 둘 보금자리 A Nest to Lay the Young

새끼 둘 보금자리 A Nest to Lay the Young 

 이사하는 계절이다. 나이 든 사람은 살던 집을 정리하고 살림을 줄이며 자녀 가까이, 편리하고 의료시설이 좋고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자녀가 있는 젊은이는 학군과 환경이 좋고 이웃 교류와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양육과 교육에 힘을 기울인다. 부담, 고생이 되어도 자녀들이 잘 자라 뻗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이는 때가 있다. 새나 동물에게는 봄철이 생육하기에 좋은 계절이라 짝짓기를 하고 안전한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품고 인내하며 부화한다. 

 금년 처음으로 비둘기 두 마리가 찾아와 애무하더니 집 뒷문 옆 전나무에 작은 나무가지를 물어 온다. 다람쥐가 접근 못할 안전한 곳이다. 둥지에 앉아 있는 비둘기는 사람이 드려다 보아도 날아가지 않는다. 주인이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 같다. 알을 둘 낳고 암놈은 알을 품고 식음을 전폐하듯 성실하게 앉아 있는데 숫놈은 보이지 않는다. 알이 부화하고 날개가 뻗어 난다. 그러던 때 우박에 상한 지붕을 모두 뜯어내고 바꾸는 작업을 하는데 그 소리가 요란하고 뜯은 지붕을 아래로 던져내리나 비둘기 집은 처마 아래 있기에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지붕 일이 끝나고 비둘기 집에 갔더니 지붕에서 떨어진 조각이 둥지에 떨어져 있고 두 애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수가 있나? 가슴이 철렁한다. 부모가 얼마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울었을까? 처음으로 찾아와 안전하다 생각하고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생각하지 못한 비극과 불행이 온 것이다. 내 마음이 큰 아픔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두 애기를 치우고 정리하였다. 

 일 주일이 지났을까 놀랍게도 두 마리 그 비둘기가 나타나 옛 집을 찾는다. 어느새 암놈이 앉아 있더니 지난 번처럼 두 애기를 부화하였다. 먹이를 먹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데 며칠 사이에 날개와 몸이 자란다. 애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다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날개 훈련도 없이 어느 아침 한 마리가 날아가고 다음 날 남은 것이 집을 떠났다. 기뻐하고 축하하다. 같은 나무 다른 쪽에 라빈이 보금자리를 만들고 알을 낳았다. 라빈은 경계심이 매우 많아 사람이 가까이 가면 날아가며 소리를 지르고 위협할 정도다.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를 먹이고 양육한다. 문 옆의 나무 위에 올려둔 작은 새집에 이름 모를 아주 작은 새가 신혼살림을 차린다. 주인 문 앞이라 다람쥐나 고양이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다. 

금년 처음으로 토끼가 정원 나무 아래 굴을 만들어 새끼를 낳았다. 자기 털을 뽑아 새끼를 덮고 보호하였다.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고양이가 집을 파 해치고 모두를 물어가 버렸다.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였는데 침입자가 밤사이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어디가 참으로 안전한 곳인가?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이 새끼 둘 보금자리라 한다. 전능한 하나님 옆에 있으면 안전함을 가진다. 하나님을 대항할 자 누구인가? 어떤 위험 환난이라도 하나님 집은 자녀를 기를 보금자리다. 하나님 모신 가정, 부모와 형제가 사랑으로 화락하고 평화로울 때 자녀들은 행복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과 기쁨, 화목과 자유를 누리며 믿음과 삶이 자라나 세상에 나가 활동하도록 마련한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새끼 둘 안전한 보금자리여라!












Thursday, May 20, 2021

은혜와 자유의 선포 Jubilee Proclamation

은혜와 자유의 선포 Jubilee Proclamation (올바니 한인 장로 교회 50년 예배 5/23/21)

올바니 한인교회 2대 목사로서 교회 50년 생일을 축하하며 그간 축복하신 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함께 헌신한 여러분을 치하한다. 50년은 성경에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으로 온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다. 모든 노예를 해방하고 남에게 넘어갔던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모든 빚은 탕감되는 은혜와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시작을 한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사야 61장의 말씀 을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기름 부으심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맹인을 볼 수 있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 읽으시고 이것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 곧 자기가 할 일이다며 그 일을 자기의 사명으로 선언하였다. 역사에 이스라엘이 희년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지만 주께서 이 말씀을 읽고 사역을 시작하던 그 때가 희년이라고 어느 성서학자는 말한다. 주께서 희년의 자유와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1 희년의 일은 성령이 임하여 기름부음으로 시작한다. 주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임하여 기름 부어주셨다.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니 성령 충만하여 갈릴리에 돌아오고 복음을 전하며 많은 기적을 베풀고 사역하며 자유를 주셨다. 희년은 바로 주께서 하신 일이요 그것이 사도행전 교회와 오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하면서 목회하지 않고 교수하겠다고 하였기에 교수 준비를 위해 유학을 왔다. 석사를 끝내고 박사과정 입학을 받았는데 이 교회에서 목사 청빙이 왔다. 지도교수의 조언과 당시 형편으로 인하여 3년을 작정하고 1975년 5월 4일 부임하였다. 올바니 시내 웨스트민스터 교회 채플을 빌려 3-40명 정도 모이고 있었다. 목사지만 목회 훈련이 없었다. 나의 마음은 배우면서 섬기는 목회를 하리라 하고 교인만 아니라 100여 세대 주민 전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 주께서 현재 장소로 이전하게 해 주셨다. 
목회를 배우고 은혜 받고 싶으나 다른 한인 교회나 목사가 없기에 미국교회를 찾았더니 메나즈와 스케넥타디의 사도 오순절교회가 주일 저녁 모임이 있어 그곳을 찾고 목사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메나즈에 참석하니 손님 목사가 설교 하다가 나를 향하여 저기 있는 한국 목사 성령 받았나? 그럼요 하였더니 너 방언 말하나? 아니요 하였더니 그렇다면 너는 성령 받지 못하였다 한다. 아니 이런 수가? 목사가 저럴 수가? 놀라면서 속에 분노가 일어나다. 설교 후에 모두 강단 앞으로 나가 기도하는데 나도 나갔더니 담임목사가 나에게 한 마디 하라고 하여 장로교 목사답게 말하다. 성령을 받으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등등이 임하고 마지막 방언과 통역이 나오는데 왜 방언만이 성령 받은 증거인가? 하였으나 그 앞에 나온 사람들은 나의 말과는 상관 없어 모두 둘러 서서 기도를 해준다. 아마도 성령 받지 못한 목사, 성령 받게 해 달라는 것 같았다. 그 사랑에 감격하다. 내 교회로 돌아와 엎드려 기도하는데 음성이 들린다. 종형아 네가 성경을 믿나? 그럼요? 그러면 왜 방언은 믿지 않나? 충격이다. 잘못했습니다. 믿겠습니다. 주의 역사가 일어나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하시는 성령 목회인 것을 확실하게 해 주시다. 성령이 사역하게 한다. 

 2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난한 자는 필요한 것을 가지지 못하여 요구가 많은 사람이다. 가지지 못하여 가난하지만 가지고도 부족을 느끼고 더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 대개가 가난하였다.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가진 것이 많다. 지식 명예 지위 재산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요구가 있었다. 교인이라 하여도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 주님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 주님은 8복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먼저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전 주민을 상대하여 사역하기에 당시6월 셋째 주일에 야외 예배를 하며 모든 한인 초청을 한다. 한국에 서양미술을 소개한 유명한 미술 교수가 사라토가에 살며 올바니 메디컬센터에서 일을 하였는데 이분이 참여하여 예배 중에 계속하여 눈물을 흘리다가 주 앞에 나오게 되었다. 장로가 되어 평생 섬겼다. 많은 의사가 훈련차 와서 교회에 나오는데 한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어 세례 전날 한 숨 자지 못하였다. 부인이 이유를 물으니 절에 이름이 얹혀 있는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데 잠이 오겠어! 그는 변화된 새 사람이 되어 평생 교회 장로로 섬겼다. 대학생, 포스닥이 많은 가운데 주의 은혜가 임하니 한 학생은 학위를 하고 서울공대 교수로 갈 때 학원선교사로 가고 한 포스닥은 대덕단지로 가서 일하다가 연변과학기술대학으로 가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였다. 가난한 심령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고 주의 영이 임함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그들은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하니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기도 하였다.  

3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전쟁 포로를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고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파사왕 고레스를 감동시키니 그가 칙령을 내려 포로들이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다. 5만여명이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돌아갔다. 예수 시대 로마의 압정 아래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해방을 기대하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사람을 주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인가 하면서 자신이 출옥 되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고 좋은 시민이 되라 하신다. 다른 면으로 실제 많은 포로가 있다. 질병과 귀신에 포로되어 자유를 잃고 사는 자가 많다. 자기 지위와 명예, 생활 습관, 약물이나 도박 음란 유행 등에 포로되어 사는 사람이 많다. 예수께서 풀어주셨다. 시카고 홈리스 사역을 하던 중 7명이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한다. 그들은 마약 총기 절도 심지어 무당으로 홈리스가 되어 10년 이상 먹고 자고 하는 혜택을 받았으나 속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홈리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며 성령의 역사로 변화를 받아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직업 교육을 받아 직장을 가지고 아파트를 얻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올바니에 다문화 가정이 많이 있었다. 토요일마다 모여 파티를 하니 주일예배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 종이 되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러자 큰 언니 되는 사람이 주일 예배를 위하여 토요 모임을 폐지하고 교회로 오라고 하였다. 아름답게 섬기는 일을 하였다. 큰 변화다. 주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일이다. 어떤 것에 노예가 되어 있나? 오늘도 주께서 풀어 주신다. 

 4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신다. 주께서 많은 맹인을 고쳐 주시니 밝게 보게 되었다. 한 맹인은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가 눈을 뜨고 보게 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가 내 눈을 뜨게 하였다고 간증한다. 육체의 눈만 아니라 영의 눈을 뜨게 된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안다고 교만하였으나 예수께서 구주라는 것을 몰랐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감옥에 넣던 사람으로 소탕작업에 나섰다. 그가 빛가운데 주님을 만나자 그의 눈이 열려 주를 보고 귀가 열려 주의 음성을 듣고 주를 증거하게 되었다. 그는 보게 되었다. 
여기 교회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장로가 있었다. 장로님 심방 같이 가십시다 하였더니 나는 심방같은 것은 취미 없습니다. 목사님 혼자 가시지요 하던 분이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전화로 눈물을 글썽이며 저녁에 심방을 와달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오늘이 내 생일입니다’ 한다. 그와 그의 아내는 신앙 양상이 달랐다. 부인은 금식과 철야 기도를 많이 한다. 자다 보니 부인이 옆에 없다. 아래층에서 기도를 한다. 화가 나서 이젠 끝장을 내야 하겠다며 내려간다. 아내는 아내 대로 장모는 장모 대로 보내고 자기는 자기 길로 가겠다는 마음이다. 그 말을 하려고 작정하고 부인 앞에 앉는데 나온 첫 말은 ‘여보 미안하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내탓이오’. 두 사람이 얼마나 울며 회개하고 기도하며 변하여 새롭게 되었다. 그는 눈물로 고백한다. 주일 교회 앞에 서서 교인에게 인사할 때 두 마음이었다. 자기와 사회 수준이 비슷한 사람에게는 진심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함께 심방하겠다고 한다. 교회에서 한 시간 가령 떨어진 다문화 가정으로 심방하였더니 그는 그 자매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잘못한 것, 섭섭한 것을 용서하여 달라고 한다. 닫혀 있던 눈이 열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존귀한 것을 보게 되었다. 교회 분위기가 달라지게 되다. 

 5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 가난과 질병, 고통과 염려, 미움과 노여움에 눌려 사는 자가 많으나 주께서는 풀어주신다. 이런 일은 초대교회에도 오늘도 일어난다. 우리가 아이 셋을 데리고 와서 살면서 전 교민을 상대하여 사역하며 거의 매일 저녁 심방하다 보니 아이들을 두고 다닌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아이들을 많이 살펴 주셨다. 그의 딸과 사위가 가발 가게를 하는데 하루는 사위가 일이 있어 딸 혼자 있는데 도와 달라고 한다. 거절할 수가 없다. 그날 교회 여전도회에서는 모여 음식을 준비하는데 사모가 오지 않는다. 가발 가게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한 사람이 전화하더니 ‘야 너 거기서 얼마나 버나? 얼른 오지 못하나?’ 소리 지른다. 가게 주인은 그의 성격을 알기에 속히 가라고 한다. 그 여인이 사모를 보자 부엌 구석으로 몰아 부치며 칼을 가슴에 꽂고 싶다고 하며 욕을 한다. 이런 일이 여기서 일어난 일이나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나? 누구 하나 그를 말리는 사람도 없다. 
사모에게는 사람이 싫고 만나기도 싫어지다. 주일 교회에 오면 예배시작까지 교육관 고장 난 화장실에 들어가 있다. 하루는 본당에서 찬송이 들려온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 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나는 뭐예요? 항의가 나온다. 그러나 찬송에 이끌리어 본당으로 가다. 뒷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눈 앞에 큰 플래카드가 나타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등에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서 주께 드리다. 그랬더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속에서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놀라운 일이다. 
내게 어둔 밤이 있었다. 78년 수난 주간 금식하며 기도하고 은혜로 부활주일을 맞고자 하는데 목요일 저녁 세족식 예배 후에 영혼의 어둔 밤이 왔다. 금요일은 내 인생 가장 어둔 밤이었다 토요일은 무겁게 눌린다. 이런 형편에서 부활주일을 어떻게 맞이하나? 준비를 멈추고 본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앉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나를 만나 주신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지다. 나를 누르던 어둠이 걷히고 밝은 빛과 생명, 감격과 확신이 나를 덮었다. 사모는 아침 성경을 읽다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주님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여 슬픔과 어둠이 그를 눌렀다. 그날 밤 강단 밑에 엎드린 그를 부활하신 주께서 만나 주시니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기쁨으로 크게 고백하였다. 흰 눈이 내려 덮인 부활주일 새벽은 감격 자체였다. 주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이 현실이 되었다. 나와 사모에게 자유함이 함께 주어지다. 주를 찬양하고 높여드린다. 

 6  희년에는 주께서 허락하시는 용서와 탕감, 해방과 자유가 주어지다. 주의 은혜를 경험한다. 여기서 경험한 것이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주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일이다. 목회의 경험이 없던 나를 훈련시키고 확인시키며 영혼을 사랑하게 하는 귀한 일이었다. 계획했던 목회 3년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목사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던 사모가 말한다. 목사가 목회하면 되지 공부 더 해 무엇 하려고요? 그래도 주께서 주신 기회이니 순종하고 따르자고 하며 교회를 떠나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여기서 3년3개월 경험하고 확인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가 나와 사모를 그 후 지금까지 43년동안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한다. 희년의 은혜와 자유가 지금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신대로 주님 사역으로 이루어졌다. 성령강림으로 사도행전 교회에서 일어나고 이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오늘 성령강림주일 성령이 우리 각자에 임하고 기름부어 주시면 지금도 희년의 은혜와 자유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일어난다. 주의 영이 임하여 기름부어 주심으로 가난한 자로 복음을 받고 포로된 데서 자유를 눈 먼데서 보게 함을 눌린 데서 자유를 얻어 주의 은혜의 해, 50년 희년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초청과 기도

Monday, May 17, 2021

여호와의 얼굴 The Face of the LORD

민수기 6:22-27 여호와의 얼굴 The Face of the LORD (5/16/21 은혜와 진리장로교회) 
 
이사야 43:4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이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고백하자. d옆 사람에게도! 
누가 가장 보배롭고 존귀하게 생각하나? 부부, 자녀? 5월 가정의 달 가정마다 부모와 자녀, 조부모와 손자녀, 부부와 형제 모두가 행복한 줄로 안다. (사진을 보인다) 그 중 행복한 순간을 말하면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슴에 안고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며 미소를 짓고 손자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거나 또는 마주 보며 방긋 웃는다. 이것이 가족 모두에게 행복이요 복이다. 

성경 본문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400년간 종 생활을 하며 신음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듣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해방시킨다. 성인 60만이 애굽을 나와 광야를 행진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40년 광야 생활은 너무나 힘들어 일 세대는 약속의 땅을 보지도 못하고 다 죽었다. 약속의 땅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곳은 그들을 환영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의 강한 민족들은 침략자들과 대항하여 전쟁을 하며 자기 땅을 지키려고 한다. 싸움이요 고통이다. 약속의 땅이라고 찾아온 미국에서 살기 위한 24/7 노동, 폭동이 와도 뉴욕 사업가들 철문이 없어 문을 내릴 수도 없이 일을 하지만 항상 소외를 느끼고 오늘 아시안 혐오를 통하여 경험하는 것이 광야의 삶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런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시하여 아론으로 그 백성을 축복하게 하신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신다. 광야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품으며 그들의 행복, 복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품에 안고 내려다 보며 웃고 축복하는 모습이다. 
여기 여호와가 세번 나온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 모든 것을 없는 데서 만드신 창조주,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그 분, 그 이름이 여호와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그는 복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축복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1:28)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에게 복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창12:2)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사장 아론이 백성을 축복하고 오늘 목사가 교인을 축복하고 또 아버지는 자녀를 축복한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려 하는데 리브가는 아버지의 축복을 야곱이 받도록 한다. 에서는 내게도 복을 주소서.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한다. 복이 무엇인가? 이삭의 축복을 보면 야곱에게는 풍성한 양식과 부, 종을 부리는 것이 복이다. 에서에게는 동생을 섬기며 칼을 의지하고 전쟁하며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복이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양을 치며 외사촌과 결혼하고 20년을 살며 열한 자녀가 나고 재산도 많이 모으는 복을 받았다. 외사촌과 외삼촌의 언어와 표정이 달라지고 불편하다. 그곳은 자기가 영주할 곳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형 에서가 20년 전 아버지로부터 받을 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것을 보복하고자 400명 군사를 이끌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다. 야곱에게는 위기다. 자녀들과 아내들과 양들을 종들과 함께 앞서 보내고 자기는 얍복강 가에서 밤새껏 어떤 사람과 씨름한다. 새벽이 되어 상대가 가겠다고 놓으라 하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한다. 무슨 축복인가? 아내와 자녀 많은 재산이 있으나 현재 위기를 벗어나고 생명의 안전과 안녕, 형의 분노가 풀리어 칼을 꽂는 것 그리고 형과의 화해라 본다. 
복복복, 우리가 복을 원하나 이 복은 내가 원한다고 가지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자연 만물과 우리 생명 가정 모든 것을 주시고 주장하시는 이가 여호와시다. 그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여호와 이름으로 복을 주신다. 그 자신이 복이다. 

 여호와는 너에게 복을 주어 너를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복을 주시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나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그 복은 지키신다는 것이다. 광야생활에서 먹을 것, 가는 길, 칼이나 전쟁, 재난이나 흉년, 질병이나 짐승 등의 위험에서 보호한다. 울타리가 된다. 약속의 땅이라도 위험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지키신다.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고 지켰다 하신다. 시121편은 우리 영혼을 지키신다. 육체와 물질도 중요하지만 영혼이 쇠잔하지 않도록 악의 세력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신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한다.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고자 요청하였으나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 집을 나가지만 집에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나? 뉴욕의 한 집사, 한국에서 사업, 외아들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 낚시, 열심히 낚시를 하다 보니 아들이 없어졌다. 찾을 길이 없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집에 돌아오게 하신다. 이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 우리 생명과 영혼이 안전을 누릴 수가 있다. 주께서 지키시면 누가 감히 해할 수 있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이 추격할 때에 주께서 간섭하여 지키셨고 에서의 칼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지켜 주셨다. 요일5:18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주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 

 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 여호와의 얼굴은 햇빛처럼 빛을 비추신다. 얼굴은 여호와 자신이라 곧 빛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때 어둠이 덮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허하고 혼돈하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니 보시기에 좋았다. 빛이 들어오면 볼 수 있고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5월의 햇빛이 비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 자신이 빛이라 그가 임하면 아름다움이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씨름할 때 축복을 구하자 야곱의 이름을 묻고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 그의 빛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그는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어 절둑거리게 되었으나 그가 걸어가는 길에 해가 돋아 비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까지는 내 힘, 생각으로 살았으나 이제는 주의 빛을 따라 살리라. 불기둥이 인도하듯 주의 빛이 그의 길을 비치며 인도하고 있었다. 길이 험하고 에서가 와도 주께서 길을 여신다. 힘차게 나가고 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했으나 어둠을 없애지 않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게 하신다. 대조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하신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어도 빛을 받아드려 낮에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이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이 있다. 애굽의 종생활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빛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은 광야를 행진하며 많은 이적을 친히 보고 체험하였다. 애굽에 많은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분하시는 것, 애굽 사람 집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장자가 더 죽임을 당하는데 이스라엘 집에는 아무런 죽음이 없었다. 홍해가 마른 땅 길을 내어 건너게 되나 애굽 군인은 모두 물속에 수장되는 것, 광야를 지나며 갈 길을 알지 못하는데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것,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강같은 물이 흐르는 등 매일이 기적이었다. 여호와의 얼굴 빛이 함께 하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과는 상관없이 어둠 속에서 불평 원망한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한다. 이들의 심령은 어둠이라 불신과 두려움 우울 고통 무지로 덮여 있다. 
어둘 때는 보이지 않다가 빛이 비치면 얼굴이나 머리 등의 모습이 나타나고 무엇이 부족한지 보인다. 먼지 같은 속의 허물과 죄도 나타난다. 광야 세대에 여호와의 얼굴 빛이 비치니 그들의 죄가 나타나고 정죄되면 그들은 심판을 받고 죽게 된다. 예수께서 빛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요3:19) 죽을 운명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사랑으로 용서하신다. 그들이 행한 대로 하면 심판 받아 죽을 것이지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기에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 절하며 섬기고 춤춘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그들을 멸하고자 하였으나 모세가 중재하며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하다. 용서 못하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한다. 주께서 뜻을 돌이키고 용서하였다. 은혜다. 우리가 잘하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선행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누가 있나? 바울은 자랑이 많은 사람이다. 율법을 따라 흠 없이 살려고 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알고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엄벌할 생각이었다. 햇빛보다 더 밝은 주의 빛이 그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드러지고 그가 자랑하던 자기 지식 자기 경건은 모든 것이 큰 죄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다. 심판 받아 죽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아나니아의 안수함으로 새로운 빛이 들어오니 보지 못하던 하나님 아들 구주 예수를 보게 되고 그 입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행한 대로 갚지 않고 그를 자기 그릇으로 선택하셨다. 그의 은혜로움을 발견하였다. 그는 인간적으로 자랑스런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그에게 복이다. 어둡던 눈이 열리어 생명의 보화를 발견한 것이 복이 아닌가!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나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들고 바라보신다. 잊혀진 존재,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자기 백성을 향하여 눈을 떼지 않고 계신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한 후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다.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 왕상 9:3. 많은 곳 중에서 솔로몬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하고 봉헌한 이 성전에 주의 눈이 항상 살피고 함께 하신다. 우리가 우리를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그에게 드리면 주의 눈은 항상 우리를 향하신다. 어느 사람이 그린 그림이 국전에 입상하여 전시회를 갖는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종일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부족함을 느낀다. 주께서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신 때 이는 창조의 면류관, 보기에 참 좋았다. 좋고도 좋았다. 눈을 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다. 하나님을 피하고 숨는다. 하나님을 피할 곳이 없지만 그래도 숨는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는데 그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게 되어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왜 숨는가? 나오너라 네 얼굴을 보자 얼굴을 들라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신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멀리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모두 잃었다. 흉년이라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것을 먹어야 했다. 그는 고생하며 정신이 난다. 아버지 집은 품꾼이라도 먹을 것이 풍부한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돌아가리라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떠난 후에 언제 아들이 돌아올 것인가 하며 아들이 간 쪽으로 눈을 향하고 있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지가 된 아들이 멀리 오는 것을 보자 뛰어가서 그를 안고 반긴다. 아들은 엎드려 죄를 자복하며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하나 아버지는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고 잃었다가 찾았다고 한다. 관계가 회복되고 화목이 이루어진다. 큰 아들은 불평한다. 나는 어김 없이 아버지를 섬겼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더니! 내 아들아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닌가! 그를 그대로 인정한다. 불평한다고 밀어내지 않는다. 넓은 사랑이다. 주의 백성이 주의 집에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이름 부른다. 내가 너를 보고 싶다. 눈을 들고 찾으신다. 
하나님을 떠나가면 서로 갈라지고 전쟁을 한다. 가운데 담이 생긴다. 그런데 눈을 들고 찾으며 만나자는 것이다. 화해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평강이다. 여기 평강은 샬롬, 전쟁이 없는 것만 아니라 전쟁 중에도 평강이다. 3500년 역사 중에 14351 전쟁, 전쟁이 없던 때는 오직 286년, 설령 전쟁이 없다 해도 이웃과 불화하고 내 스스로의 마음 속에도 전쟁 같은 아픔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형편은 어떠하든지 심령 깊이 안정을 가지는 것이 평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말씀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요14:27) 이런 평강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4:6. 평화의 왕 예수로 인한 평강이다. 1555 Nicholas Ridley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다. 화형 전날 동생이 형을 찾아가 함께 있으며 힘과 위로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형은 그를 돌려 보내며 나는 평소처럼 잠 잘 것이라 하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가득하였다. 샬롬, 평강은 안녕 번영 완전 일치 건강 안전 온전 구원 등 우리에게 좋은 모든 상태를 말한다. 주를 모시면 일어난다. 예수님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 받고 주와 화목하여 하나가 되고 자기 스스로를 받아주어 평안하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 화목한 상태를 가지면 그것이 복이요 평강이다. 

 여기 여호와가 세번 나온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다. 처음은 성부 하나님으로 그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신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의 은혜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가 행한 바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의롭다 하시는 주의 은혜다. 셋째 여호와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다. 죄를 용서하여 중간에 막힌 담이 없어지고 서로 화목하여 하나되고 교제하게 하신다. 이것이 오늘 축도가 된다. 축복은 사모하고 받아야 한다. 축도가 끝이 나면 세상으로 나간다. 세상에서 살게 된다. 

 4  마지막으로 27절 그들은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신다. 내 이름으로 그들에게 축복한다는 말은 원어로 그들 위에 내 이름을 둔다는 말이다. 그들 위에 여호와 이름, 여호와 자신, 여호와의 얼굴 빛을 더하는 것이다. 옷으로 입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다. 주의 사람은 주의 주님 자신 이름 빛을 받아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모세는 신34:10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 하였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내려오니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하여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어느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 교회를 찾고자 하여 어떤 사람에게 교회가 어디인가 물었다. 그는 잘 모르지만 이 골목으로 들어가 보시오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환히 빛나더라고 하였다. 예배를 통하여 주의 이름 주의 빛을 받으면 얼굴이 빛나게 된다. 이것이 주의 백성들의 특권이다. 우리는 주의 이름 주님 자신 곧 주의 빛을 받아 가진 사람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동리가 숨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미국 건국에 동참한 청교도들이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미국은 산 위에 있는 불 켜진 동리다.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투명성도 보지만 우리를 통하여 우리 구주 예수와 하나님과 그의 빛을 보게 된다.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앞장 섰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너는 복이 될 것이라 온 세상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를 통하여 온 세상 만민이 복을 받고 생명을 누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왕이 유다의 여호사밧왕과 에돔왕을 청하여 모압과 전쟁에 나가던 중 물이 없어 곤경에 빠지다. 여호람은 그 지역에 선지자 엘리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3왕이 찾아가다. 엘리사는 만일 유다왕 여호사밧이 아니면 내가 당신을 향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리라 하고는 골자기에 물이 솟아나게 하고 모압을 정복하고 승리하게 하였다 왕하3:14. 여호사밧 덕분에 여호람과 나라가 살아났다. 나로 인하여 누가 살아났나?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가 살아났다.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성을 용서하리라 (렘5:1).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로 인하여 내 이웃과 세상이 구원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얼굴에 주의 빛을 받은 자다 또 우리 속에 비침을 받아 우리 삶에서 주의 영광과 진리가 나타나고 주의 의와 공평 자유가 나타남으로 어디서나 당당하게 주의 크고 위대하심을 전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는 복을 주시는 분이다. 그가 우리를 지키신다. 그의 얼굴 빛으로 우리가 살게 되고 우리 죄가 나타나지만 그의 은혜로 사랑을 받는다. 그는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바라보시며 우리를 부르고 기다리며 우리와 하나되고 화목하여 평화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주의 소원과 그의 축복을 받아드리고 우리가 주의 이름, 빛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세상을 살리는 일에 함께 동참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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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시험 Minister Test

목사 시험 Minister Test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많은 시험을 거치게 된다. 태어나자 성별과 몸의 상태를 테스트하고 죽은 때는 사인을 검사한다. 검사와 시험은 평생 우리와 같이 한다. 학교의 진학과 진급, 자동차 운전, 전문직, 취업과 결혼, 이민과 시민권, 주거지와 주택 결정, 건강생활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시험과 조사를 통하여 결정된다. 

 이민 초창기에는 셋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의사, 자동차 정비사, 그리고 목사였다. 병이 난 때 좋은 의사를 만나야 한다. 당시 자동차는 고장과 문제가 많았다. 정비사가 조사하여 문제를 찾아내고 고친다. 목사가 어떻게 여기 끼이나? 이민자는 힘들고 외로운 현장에서 교회를 통하여 연결과 정보,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위로와 안정, 삶의 힘을 얻고 현실을 넘어 영원에로 안내를 받는다. 의사나 정비사는 교육을 통한 지식 습득과 실습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시험을 통과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말씀을 해석하여 강론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밖에 살면서 행한 많은 잘못, 인생 상처와 아픔을 품어주고 상담하며 치유하는 사역을 하기에 그는 오늘 선지자와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선택한 것과 그가 응답하고 헌신하는 결단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7년간 대학과 신학으로 목사에게 필요한 교육과 2년간의 현장 실습이 요구된다. 많은 교육을 받고도 목사 안수를 위한 시험은 성경 지식, 성경 원어 이해와 해석, 예배와 설교, 교회법과 행정, 교리와 신학, 역사 등의 시험만 아니라 인성검사에 합격해야 한다. 목사 가운의 시작은 그가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학위 표시였다. 
 
과정이 길고 많은 시험이 있지만 한 때 목사는 직업으로는 매우 인기가 없어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오랜 과정을 통과하지만 실제 목사의 삶은 어려운 경제 생활에다 사람을 다루기가 쉽지 않고 교인 개개인은 목사의 인격 진실 정의 공평 충성 등 각 분야의 시험관 노릇을 하기에 항상 문제에 부딪친다. 그러기에 특별한 부르심과 헌신이 아니면 목사 지원자가 되는 것도 어렵다. 
 
시대가 변하며 목사는 인기있는 직업이 되고 너도 나도 원하여 사명보다는 좋은 대우를 선호하며 이로서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흥행인이 되기도 한다. 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고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다가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소망보다는 현실의 만족과 안일에 집중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자 한다. 
 
그래도 목사의 원래 뜻을 따라 주의 선택과 부르심을 확인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성령에 붙들리어 주의 복음을 전하며 고생하는 목사가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시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동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란 마귀의 시험에 합격함으로 성령능력으로 충만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고 각종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는 생명사역을 하였다. 기득권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문제로 그를 시험하더니 모반과 신성모독자로 단정하고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예수께서 시험과 고난을 당했다면 그의 제자인 목사야 더 말할 것이 있겠나? 
 
의로우신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켜 자기 옆에 앉게 한 사실이 목사가 시험을 감당하며 사역하는 힘이 아니겠나! (www.onesoulministry.org)









Monday, May 10, 2021

아빠 Abba

아빠 Abba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조선시대 정철의 시조를 우리가 읊으며 동감한다. 현실은 낳은 아버지보다 가슴에 품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어머님을 더욱 기억하고 기리기에 미국은 어머니주일을 크게 지키고 교회에서 교인들이 연중 세번째로 많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 아버지주일은 6월 세째 주일이나 그날이 있는 것마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이 5월8일을 어머니날에서 어버이날로 바꾼 것은 아버지 없이는 어머니도 없다는 의미이겠다. 
니카라과를 방문한 때 한 여인의 여섯 자녀는 아버지가 다 다르고 아이들 누구도 그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어 태어났지만 이들에게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같았다. 아버지로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모르고 만나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찾아 만나고 싶어한다. 참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자녀를 가르치고 훈계하며 부모가 원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엄격하게 지도한다.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한 외과의사에게 아버지는 매우 엄하였다. 그가 십대에 85점 학교 성적표를 보여드리자 꾸중과 함께 매를 맞았다. 열심히 공부하여 클래스 최고 95점을 받아가니 5점만 더 맞으면 만점이 아니냐며 또 책망을 받았다. 무서운 아버지다. 그가 교회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배우자 그는 자기 아버지 같은 하나님은 싫다며 교회를 떠났다. 아버지의 징계가 무서운 것이나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버지는 가장으로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하며 필요를 공급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시대 아버지는 폭군처럼 자녀들을 때리고 노예로 팔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아버지를 아빠라고도 부른다. 
아빠는 어린아이들의 용어로 아버지가 그를 낳은 것을 알고 그와 친근한 것을 나타내지만 또 그의 호감을 얻고 자기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에 많이 사용한다. 내 외손자를 보니 그러하다. 아빠라면 사랑하는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응하곤 한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빠 아버지라 불렀다. 예수께서 나기 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의 탄생을 예고하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눅1:35) 하였다. 그가 12살에 부모와 같이 성전을 방문한 때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 받는 시간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말씀하고 행하시는 것을 듣고 본대로 사역하시더니 십자가에 달리기 전 날 밤 그는 기도하며 아빠 아버지라 불렀다. 
 여기 아빠는 무슨 의미인가? 마음대로 하려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함이다. 바울은 유대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열성으로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다가 예수를 만나 성령과 아들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롬8:15 갈4:6)라 불렀다. 예수께서는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로서 아버지와 친밀함을 나타내다가 마지막에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기 뜻이 아니라 아빠를 존중하고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에 나가기로 결단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고 순교하기까지 순종하였다. 
아빠!는 존중과 순종을 다짐하는 표현이다. 나도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을까!








Saturday, May 1, 2021

치유와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Healing and Life

치유와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Healing and Life 
 5월 신록은 나를 밖으로 불러낸다. 가까운 공원에 나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며 시원함과 자유를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며 머리와 생각이 맑아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덴 교외의 올리브 숲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부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도를 깨달아 해탈을 하였다. 
 근대에는 삼림의학이 생겨 과학적으로 나무와 건강과의 관련연구가 많다. Roger Ulrich는 1984년 필라델피아 한 병원 환자들의 10년 기록을 분석하여 녹색이 보이는 창쪽에 있던 환자가 다른 환자보다 더 빨리 회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여 녹색 공간에 들어가면 3분만 지나도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나무를 20분간 보기만 하여도 스트레스 홀몬 콜티졸이 13% 낮아짐을 알았다.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은 어디서나 창으로 센터랄 파크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일리노이대학 연구진은 28개 고층 아파트단지에서 나무 가까이 사는 주민이 그렇지 않는 자들보다 신체와 정서가 더 건강하여 이웃과 소통을 잘하고 안정감을 가지며 범죄피해도 52%가 낮은 것을 알았다.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약 이상의 치유효과가 있기에 뉴욕의 한 교인은 큰 사업을 하다가 암에 걸리더니 산속으로 주거를 옮겨 20년 이상 건강을 누리고 있다. 
 일본의 의대교수 Qing Li는 스트레스로 시달리던 한 의대생이 산에서 1주일 캠핑 후 활력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그는 삼림의학자로서 동경에서12명을 선정 3일간 삼림욕을 실험하고 확인하였다. 일본 삼림청은 1982년 시민에게 삼림욕을 권장하더니 현재 62개 치유삼림을 지정하고 연간 5백만이 방문하고 있다. 직접 공원에 나가지 않아도 공원 숲의 영향이 도시와 집 안에 미치고 또 집에서 기르는 화초도 같은 효과를 낸다. 세계의 허파 아마존 밀림과 도시의 공원과 숲은 주민의 건강을 돕는다. 
Ralph W Emerson은 1836년 그의 작품 자연에서 “숲에서는 자연이 치유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무에서 많은 약재가 추출되고 숲에서 몸과 정서의 안정, 수면과 창조력 증가, 기분과 면역 강화, 맥박 혈압 안정, 불안 우울 스트레스가 감소되고 많은 질병이 치유된다. 이는 나무에 있는 피톤 치드(Phytoncides)의 덕분이다. 그것은 벌레에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나 사람에게 의약이 된다. 효력은 나무와 친구되어 가까이하며 6감 곧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고 놀라움을 통하여 증대한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독과 죽음을 주는 나무가 있다. Manchineel은 플로리다 남부, 중남미 북부 해안지방에 서식하며 만지기만 해도 피부에 물집 염증이 생기고 불에 태우면 연기로 실명하는 가장 위험한 나무로 인정된다. 또 자살나무, 번야 소나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사용한 헴록나무, 샌드박스 트리 등이 치명적인 독소를 가지고 있다. 생명나무와 죽음나무는 하나님이 창조한 낙원에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 죽음나무임을 알면서도 첫 사람은 그것을 먹음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생명나무의 길은 막혔다. 
그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 나무로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죽음의 독을 풀고 생명의 길을 열었다. 성경 마지막 회복된 낙원의 생수강 주변에는 만국을 치유하는 나무와 영생을 주는 과일이 풍성하고 저주와 죽음이 사라진 하나님 나라가 주의 백성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기쁨과 감사로 숲을 거닐듯 예수 안에 살기만 하면 생명나무를 항상 즐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