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9, 2020

자가 격리의 하루 A Day of Home Stay

자가 격리의 하루 A Day of Home Stay (4/22/20)
항상 활동적으로 살던 사람에게 자가격리라는 굴레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매일 직장 사업 또는 약속을 위하여 편리한 길을 따라 나다니던 생활을 멈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침마다 아이들을 준비시켜 학교에 보내고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가 이젠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지나야 하고 부부도 낮에는 헤어져 있다가 저녁에 만나는 것이 즐거움인데 계속하여 같이 있다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이 지나쳐 부부 싸움이 많다는 것도 현실이다. 세상을 자유롭게 누비던 사람에게 자가격리는 수용소나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거리두기를 해제하라는 항의시위가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은퇴한 사람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매일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 친구 약속, 자녀 방문, 회의 참석, 샤핑,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 아름다운 공원 행보, 교회의 예배와 성도의 사랑을 나누던 즐거운 일, 그리고 국내외로의 여행이 모두 중단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격리상태를 자원하여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택한 길이겠지만 복잡한 세속과 단절하고 격리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수도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보통 청빈 정절 복종이라는 세가지 서약을 한다. 육적으로 부하거나 넉넉하게 살 생각, 가정이나 이성을 향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의지나 생각등을 모두 내려놓고 빈 그릇으로 새삶을 시작한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로 사는 것, 공동체로서 매일의 계획과 활동이 있는 것, 삶의 중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 존재의 이유와 힘이 되고 있다.
수도원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하여 저녁 8시에 끝이 난다. 개인 기도 시간, 전체 예배 시간이 아침 낮 저녁으로 있고 기도와 노동 (ora et labora)을 따라 오전 오후에 노동 시간이 있고 식사 시간, 개인 연구 시간을 가지며 하루는 짜임새 있게 훈련으로 연결된다. 자가격리가 시작되며 나는 수도원생활 형태를 모방하기로 하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나는 시간은 다르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을 따라간다. 개인 경건과 부부 예배는 중요한 부분으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체험하고 그의 사랑과 뜻을 받아드리는 시간이다. 읽고 듣고 생각하며 눈이 열리고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한 일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언어도 공부한다. 배달되는 재료로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즐거운 감사요 부엌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기쁨이다. 정원에 나가 노동할 일을 만들고 매일 운동을 빼지 않으려 하며 거리두기 중에도 사회적인 접촉은 이전보다 더 넓게 되고 있다. 국내만 아니라 국외 선교지에 있는 동료와 카톡, 이메일, 전화 등으로 연결하고 멀리 있는 가족과는 페이스타임, 웹엑스로 정기적으로 온가족이 얼굴을 보며 담소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다. 자가 격리가 오히려 가족과 친구를 더 가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고마움이 있다. 저녁에는 오페라 영화 오케스트라 세계 테마기행 등을 집에 앉아 즐기니 얼마나 축복인가! 하루를 회고하며 감사하고 깊은 단잠을 자게 되니 이 또한 축복이라 집에 있는 하루가 오히려 짧은 것을 느끼며 매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지나고 있다.






내 영이 주의 전을 사모하여 My Soul Yearns for the House of the Lord

내 영이 주의 전을 사모하여 My Soul Yearns for the House of the Lord (4/29/20)
온 세계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시카고 지역 교회들도 벌써 한 달 반 이상 같이 모이지 못하고 있으니 주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성도는 어디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지만 흩어져 있던 교우들이 정해진 시간에 같은 장소에 모여 함께 찬송하며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요 축복이다. 일반 성도 이상으로 주의 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교역자나 봉사자는 더욱 함께 예배하는 시간을 사모하며 그 기간이 길어지는 것으로 마음이 상하고 기도하게 된다.
성경 시편에서 고라자손이나 아삽은 성전에서 예배 봉사자들이지만 이들이 주의 전에 모여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것으로 마음이 상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나 가지 못하기에 주의 전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의 전을 사모함으로 쇠약하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토로한다(84:1).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하나님의 집으로 가던 때를 기억하며 마음이 상하고 또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지 못하기에 더욱 마음이 상하고 속에서 낙심이 된다고 한탄을 한다(42:2, 74:9).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음에 대한 아픈 마음이다. 이들의 삶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그곳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고 함께 하시기에 거기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며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힘을 얻으면 세상 누구도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제 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한다.

왜 그런 일이 생겼나? 그들이 자원해서든 전쟁 포로가 되어서든 먼지방에 가 있기에 정한 성일에 가서 모일 수가 없다. 원수들이 와서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기물과 조각물을 파괴하고 주의 전을 불살랐기에 더 이상 모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과연 능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며 사람들은 성도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다. 자기들 위에 다른 능한 자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다. 일본 통치 시대나 현 공산주의 체제에서 얼마든지 보는 일이지만 로마나 희랍시대에도 있던 일이다. 성도라는 이름은 있지만 세상 일과 명예를 숭상하는 경우에는 성소와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 성도라도 눈에 끌리는 우상으로 성전을 채우고 섬기며 성소를 더럽힌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할 수가 없어 떠나게 되니 예배와 예배의 대상은 의미가 없게 된다. 괴상한 바이러스가 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왕관을 쓰고 세상을 다스리니 세계는 그 앞에 머리 숙여 쓰러지면서도 왕의 왕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에 더욱 마음이 불안하고 영혼이 낙망한다. 이런 중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희망을 두며 그가 도우실 것을 믿음으로 그를 찬송한다. 주의 얼굴 빛, 오른 팔로 구원하실 것을 희망하자 영혼이 안정되고 만족함을 가진다.
예수께서 오신 때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다. 예수께서 부모와 같이 성전을 방문하고 가족과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예수께서 일행 가운데 계시지 않아 부모가 찾다가 3일만에 성전에서 만났다. 부모가 걱정하였다고 하자 그는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 하신다. 그는 아버지 집을 사모하듯이 성전을 사모하고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하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사역 중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니 성전에 각종 매매하는 자들이 많았다. 예배하러 오는 자들의 편리를 위한다고 예배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팔았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는 자들의 예배를 오히려 가로 막고 있다. 주께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진 것을 노여워하며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몰아내고 상들을 뒤집어 엎으시다. 이를 본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이 그를 삼켰다고 이해하였다(2:17). 더욱 그는 그 성전을 헐어버리고 3일만에 새로운 성전을 일으킬 것을 말씀하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주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 죽음 후 3일만에 부활한 몸으로 이룩할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시다 (2:21). 그 성전은 40년이 못되어 로마 군인들에게 파괴되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국한되어 계시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려고 성전 파괴를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성도가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함께 하시고 그곳은 주의 전이 된다. 개인이나 가정에서 주의 크신 이름을 부르며 그를 인정하고 예배하면 바로 그곳이 성전이 되고 주의 임재가 함께하며 주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왕의 왕인 것을 나타내신다. 또한 주를 믿으면 누구나 그 몸이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으로 주께서 함께 하신다. 내 몸이 하나님의 전이기에 항상 정결하게 하고 주를 경배하기를 소망한다. 성도가 함께 모이는 성전에 가지 못하여 마음이 상하지만 그래도 나와 같이 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예배하면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과 생명으로 채워 주시고 또 세상이 주의 은총과 평안으로 풍성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Tuesday, April 28, 2020

절망을 넘어 Beyond Despair

절망을 넘어 Beyond Despair (4-28-20)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미국 경제는 어느 면에 가장 호황을 맛보았다. 역사상 유례없이 실업률은 낮고 증권값은 최고로 치솟으나 물건 값은 안정이 되고 사람들의 소비는 늘어나며 정말 살기 좋은 때라고 만족지수가 올라갔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달만에 모두 무너지고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움 속에 떨어지고도 얼마나 더 내려갈지 모르는 형편에 있다. 고교 시절 한문책에서 읽은 세옹지마가 기억난다.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을 나갔다. 동네 사람이 모여 위로를 하자 누가 알아요 그것이 복이 될지! 얼마 후에 도망 갔던 말이 여러 야생말을 데리고 돌아 왔다. 주민들이 부자가 됨을 축하하자 누가 알아요 그것이 화가 될지! 아들이 그 중 좋은 말 한 필을 골라 타고 다니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되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누가 알아요 그것이 복이 될지! 얼마 후 오랑캐가 침입하고 젊은이가 징집이 되어 나가 죽거나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데 이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게되자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새옹지마라 하였다.
다윗이 쓴 시편 21-23편에서 그런 일을 본다. 21:1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며 여호와가 그의 힘이요 구원인 것을 노래한다.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부와 영광 건강을 누리는가 하면 그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의 계략은 무효가 되고 그들과 그 후손까지도 모두 땅에서 망하여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주의 권능과 능력을 치하하고 찬송하며 통치의 황금시기를 누린다. 그러더니 22:1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은 벌레와 같이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고 그의 원수는 황소와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들어 찢으며 악한 무리는 개처럼 둘러싸고 공격하여 그의 모든 재산을 탈취하여 가는데도 스스로는 아무런 힘이 없이 죽음의 진토에 버려진 상태에서 절망속에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인생의 흥망이 정말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을 본다.
신앙생활도 그러하다. 신앙여정을 말하는 천로역정은 영국의 죤 번연이 영국국교 이외의 어떤 교회 모임도 금지하는 법령을 어긴 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쓴 소설로서 1678년 출판되어 200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 되어 있다. 주인공 기독도는 자기가 지은 죄의 무거운 짐에 눌려 지옥에 떨어지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가운데 전도자를 만나 그가 보여주는 좁은문을 지나 빛나는 천성으로 가는 길을 안내 받으나 부인과 자녀들은 반대하기에 혼자 멸망성의 자기 집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다. 길이 순조롭지 않다. 많은 시험 유혹 난관 폭풍 율법 행위 불신 허영 위선 아첨 거짓 등이 첩첩이 늪지역과 산으로 가로막는다. 구원의 집에서 언덕위 십자가를 바라보자 어깨를 누르던 죄의 무거운 짐이 벗겨져 굴러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멸망성주 아볼리온의 공격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와 말씀의 무기로만 이길 수 있지만 사망의 골자기를 지나는 고통이다. 실망으로 포기할 위험에서 믿음과 소망 친구들의 격려, 전도자의 바른 길 안내로 절망을 넘어 다시 힘과 용기를 얻어 마침내 천성에 들어간다.
다윗은 원수에게 포위당하는 절망가운데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왕임을 인정하며 찬송하였다. 황금시기만 아니라 절망의 밑바닥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알고 있기에 시23:1에서 여호와는 그의 목자라 항상 그를 인도하여 부족함이 없이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는다. 설령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날 때에도 주의 손이 함께 하기에 두려워하지 않은 가운데 구원을 받고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다윗에게도 절망이 찾아오지만 항상 그것을 넘어 하나님이 새 아침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지금 온 세계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주간지 타임은 희망을 찾아! 특집을 발간하고 저명한 100명의 의견을 실어 절말적인 어려움을 넘어 온 세계가 각각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지구공동체 한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고 개인이나 종족의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 놓고 증오와 살상이 멈춘다. 지구와 대기가 오염을 벗고 깨끗하게 되며 자연이 새롭게 살아 일어난다. 종족간의 분쟁과 싸움이 그치고 잊혀진 자들과 연결이 된다. 드디어 재앙이 끝날 날이 오고 있다. 어둔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고 몹시도 추운 겨울이지만 때가 되니 생명의 봄이 온다. 밤이나 낮, 겨울이나 봄, 질병이나 건강, 절망이나 황금시기 어느 때라도 창조주 하나님은 깨어 지키고 다스리며 본래의 세상으로 회복시킬 것이기에 우리에겐 절망을 넘어 새 날을 향한 희망이 있다.





Monday, April 27, 2020

사슬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Breaking chains and Throwing off Fetters

사슬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Breaking chains and Throwing off Fetters (4/26/20)
               우리가 그 맨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2:3)
사람은 자유를 위하여 태어났기에 어디에 매인 것과 결박을 견디지 못하고 끊고 벗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편으로 사람에게는 자







기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얽어 매고 결박하는 성향도 있기에 이 양편으로 인하여 갈등과 투쟁은 계속된다. 다윗은 왕으로서 그 백성들의 매인 것과 결박을 풀어주려고 하는 동안 다른 열방과 민족들은 정복하고 속박하려고 하며 하나님에게서도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하늘의 하나님이 웃으시며 그 아들 왕을 보내어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질그릇같이 부셔뜨리고 세상에 자유를 줄 것이라 한다. 세상 어디에나 매고 결박하는 것이 난무하지만 결국 하나님 아들의 통치 영역 안에서는 참 자유함이 있음을 보게 한다.
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은 미국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9년 출판되어 퓨리처 상을 받고 다음해에 영화로 나와 미국의 고전이 되었다. 오클라호마 농장에서 대대로 살던 조우드 가족은 그 지역에 오래 계속되는 가뭄과 사막바람으로 농사의 소출을 얻을 수 없는 형편에 농장은 은행에 넘어가고 농사는 기계화로 바뀌면서 다른 가족과 함께 철거를 통보받고 모든 집들은 트랙터에 부셔진다. 대대로 살던 그 땅은 그들의 생명과 같기에 할아버지는 죽을지언정 그곳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땅에 매여 있지만 그곳에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사슬을 끊고 캘리포니아에 일자리가 많고 임금이 좋다는 광고에 매료되어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온 가족이 새 삶의 희망을 가진다. 트랙터가 와서 집을 철거하기 직전에 고물 트럭에 부랴 부랴 모든 짐을 싣고 떠난다. 가는 길이 쉽지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도중에 모두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캘리포니아에 희망이 있다. 800명 구인광고에 수천명이 모여드니 더 이상 일자리도 좋은 임금도 없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래도 꿈을 버릴 수가 없고 또 갈 곳도 없다. 중서부와 오클라호마에서 이민온 사람들이 많고 일자리는 작은데다 임시 집단촌에 산다는 것이 투쟁이며 현지인의 무시와 푸대접을 받지만 하고 그들끼리는 그래도 인간애가 있고 가족은 하나라는 중심이 있다. 농장주 자본가는 넘쳐나는 노동자를 맞으며 임금을 내리고 내리나 그 일도 과일이나 목화를 수확하는 기간 시한부다. 시간당 50전에서 25전으로 내리고도 일하기 싫으면 떠나라고 위협하고 또한 노동자의 항의와 폭동에 대비하여 경찰을 대비시킨다.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목화를 따고 일을 하여도 가족 한 끼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오클라호마 농장에서 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정의를 위하여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탐 조우드와 그와 같이 온 전직 목사 짐 케이시와 몇몇 사람이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다가 경찰과 대치하여 짐이 죽는 과정에 탐이 경찰 한 명을 죽이게 되어 도망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고 가족도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게 된다. 탐의 누이 샤론은 죽은 아이를 분만하며 옆에 노인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자 애기에게 주지 못한 모유를 그에게 나누는 인간애가 있다. 어디에 가면 나를 얽어매는 가난과 굶주림의 사슬과 결박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 기근과 굶주림, 자본과 기계에 밀려 생활터전을 잃고 미지의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는 행렬,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고 감옥을 살다가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정말 자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받는 고통과 신음, 눈물과 하소연이 하나님께 닿아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던 해방과 자유가 주어지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되었다. 애굽이 큰 세력이요 부강한 나라였으나 그와는 아주 다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기다리고 있다. 가는 길이 멀고 거칠어 방황하는 가운데 약속의 땅을 향한 희망과 믿음을 접고 다시 종생활의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다가 일세는 모두 쓰러지고 2세가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비가 적당한 시기에 적절이 내리기에 땅이 비옥하고 결실이 풍부 하여 애굽과는 다르다. 자유와 함께 풍성함이 오니 이들은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삶의 매뉴얼, 광야에서 훈련받으며 듣고 배웠던 법을 팽개치고 그곳 문화 풍습 우상종교를 따라간다. 종에서 벗어나 자유를 가진 백성이 약속의 땅을 받고는 주어진 그 자유를 포기하고 그 땅에서 다시 종이 되기를 선택하였다. 사람은 자유를 원하면서 또 다른 어떤 사슬과 결박 아래 들어가기를 서슴치 않는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여 잘 살게 되고 가난에서 자유를 얻었는가 했으나 이젠 부요와 재물을 따라 집과 자동차 아이들의 학교에 얽매이고 노예가 된다.
미국이 건국부터 언론과 종교의 자유, 가난에서의 자유, 두려움에서의 자유를 기본으로 말하지만 미국이 과연 참 자유를 누리나? 얽어매는 많은 사슬을 본다. 언제나 이런 사슬과 결박을 풀고 참 자유를 누릴까? 학문과 기술, 돈과 상업, 군사와 정치로 하지 못하고 있다. 주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하신다. 욋적인 조건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굴레와 사슬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하여 성질을 조절하고 인내하라는 말을 명심하지만 정의감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어 사람을 죽이고 나니 감옥은 아니라도 도망하고 숨어야 하는 사슬에 얽매인다. 속 사람 문제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종으로 삼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새의 자랑,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풀어주는 것만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새로운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지키며 힘과 용기 방향을 주신다. 삶의 환경이나 형편과 상관 없이 예수 안에서 자유를 가진 자가 어디 한 두명인가! 바리새파 가문에서 자라난 바울은 율법과 전통에 결박당하여 예수의 복음 믿는 자를 향한 분노와 증오의 사슬에 이끌리다가 자유케하시는 주를 만나자 그 삶은 율법 전통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에게 붙잡히었다. 자기가 박해하던 복음을 전하다가 도리어 잡히어 매를 맞고 사슬에 매여 든든히 잠긴 감옥에 던짐 받았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더니 그를 매고 있는 모든 사슬은 풀어지고 감옥문은 열리었다. 두려워하는 간수에게 복음의 자유를 선물하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었다. 이민세상 분노의 포도는 뒤엉키지만 그래도 탐의 어머니 마 조우드는 마음에 평화와 자유를 잃지 않는다. 부자나 착취하는 자는 지나가도 주와 함께 하는 그들의 삶은 영원히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오늘 어떤 어려움과 사슬이 우리를 얽어매어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자유로운 주의 손에 붙잡히어 있는 것이 얼마나 위로요 힘인가! 결박하는 세상에 살면서 오직 자유를 주는 주의 사슬에 매인 것이 삶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Sunday, April 26, 2020

욥이 말하는 인권 The Human Rights by Job

욥이 말하는 인권 The human right by Job 31:13 (4/25/20)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변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31:13)

인권은 오늘 대단히 중요한 기본권리로 인정된다. 미국에서도 인권이 제대로 확립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일을 하는 도구로 이 집 저 집으로 팔려 다녔다. 그들이 정치적 참여를 위한 투표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포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그가 암살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후에도 100년 이상 흑인은 큰 차별을 받았다. 공공 시설, 학교, 버스 등에서 분리가 되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대대적 인권운동을 일으키고 그가 또 암살을 당하면서 법적으로 인정된 흑인의 인권을 실제 삶에 성취하기를 바랐으나 여전이 길은 멀었다.  2008년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인권이 현실화되었지만 아직도 인종차별 해결은 요원하다는 것을 아시아 사람으로서 이민온 우리도 실감한다. 아시안과 백인의 교통사고로 경찰이 왔을 때 잘잘못에 상관없이 아시안이 거의가 가해자로 결정되는 것을 최근에도 경험하였다. 괴상한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이 때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폭행과 피해를 겪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미국이 이러하다면 다른 나라가 어떠할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성경에서 욥은 4천년 이전에 살았지만 그는 스스로 인권을 존중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 갑부의 소리를 듣는 그는 많은 종들이 있었고 그 종들은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시대였지만 그들이 간혹 주인에게 항의하는 일이 있기에 욥은 그들이 나와 변론한다고 표현하였다. 종이 주인과 마주 서서 변론한다는 것은 그들이 주인으로부터 인격적인 권리를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금이라도 불만이나 항의가 있으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도록 엄중한 처벌이 있을 때가 아닌가! 지금이라도 독재 체제에서는 어디 항의나 다른 의견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 그 옛날 단군시대에 욥은 이미 종들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였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길이 아니겠나? 종들의 권리로 그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인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종들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말은 첫번째 권리라 본다. 미국 헌법 개정 첫항목으로 언론의 권리는 제일 처음 나오는 권리지만 말로 남을 해치는 것은 포함되지 않은다. 내가 말하는 권리와 자유가 있지만 그것으로 남을 해친다면 그것은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기에 용납되지 않은다. 욥은 어떻게 종들의 인권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들도 태속에 만드셨다고 한다(31:15). 주인이나 종이나 지으신 이가 같기에 모두 같은 아버지 아래서 지음 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종이나 자유자나 한 아버지의 자녀로 형제가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형제이기에 한 골육인 것을 받아드린다. 맡겨진 일과 하는 일은 달라도 모두가 한 형제라는 사실이다. 내가 배가 고픈 것처럼 그들도 배가 고프고 내가 아픈 것처럼 그들도 아픔을 가지는 것을 받아드린다. 내가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는다면 그들도 음식이 필요하고 내가 아프면 보살피는 손길과 의사나 약이 필요하듯이 그들에게도 꼭 같이 필요한 것을 인정하고 돌보는 것이다. 주인과 종만 아니라 부부나 자녀 친구, 모든 인간 관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욥의 고통 중에 친구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한다면서 오히려 그를 책망하고 정죄하자 욥은 그들을 괴로움을 주는 의사라 불렀다. 그들이 친구의 아픔과 괴로움을 자기 자신이 당하는 것으로 받아드리면 말과 태도가 달라지리라.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이웃은 바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생명마져 위험에 처한 그 사람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이웃이다. 예수께서 바로 우리 같은 몸을 입고 오시어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고 우리를 친히 아시기에 어려움에 있는 우리를 돕고 사랑하신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개인을 참으로 사랑하여 지키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인정받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내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겠나! 너희도 함께 갇힌 자처럼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하는 것이 바로 한 사람의 생명과 삶의 권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인정하며 그들과 함께 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믿음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 인권이 이렇게 인정되고 실천된다면 어떻게 분리와 소란이 일어나겠나? 지금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의 인권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대처하고 이겨나갈 힘이 솟아남을 볼 것이다.



Saturday, April 25, 2020

나에게 작정된 일 What appointed for me

나에게 작정된 일 what appointed for me 욥기23:14 (4-24-20)

살면서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인과응보라는 말대로 내가 한 어떤 일에 대한 댓가로 내가 당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면서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볼 때 저가 누구의 죄로 저렇게 되었나? 그 부모 죄인가 아니면 자신의 죄인가? 이런 질문은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욥은 주전 2000년 당시 큰부자면서 신앙심이 좋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과 동정을 베풀기에 누구나 그를 칭찬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의 많은 소 양 낙타와 목자들이 하루에 다 약탈을 당하고 그의 열자녀가 하루에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다 자기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종기로 뒤덤벅이 되어 가려움을 기와조각으로 긁고 재를 뿌리기까지 하다.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한다. 친구들은 찾아와 죄 없이 고난당하고 망한 자 없으니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한다. 욥은 2 3중 고통 속에서 자기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하나님께 울부짖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앞으로 옆으로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가 없다.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신다 (24:12)며 답답해 한다. 하나님이 눈을 가리고 계시나? 하나님은 이런 참상 가운데 무엇하고 계시나? 질문을 한다. 괴상한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이 호흡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외면하고 계신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욥은 그 심한 고난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욥은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한다. 큰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는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면 그것을 이루시나니 그가 내게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신다고 단정한다. 운명론의 입장 같기도 하다. 내 생애는 어느 힘과 계획에 의하여 정해져 있기에 그것을 바꿀 수 없이 그것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에게는 자기 삶이 운명론적인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 그가 자기 뜻을 이루어가시는 통치와 섭리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의 힘과 능력을 인정한다. 우리 범인이라도 하루나 일년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려 한다. 힘이 있다면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마음이 변하거나 힘이 없어서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지 못할 일이 없기에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29:10).  이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욥은 받아드리고 있다. 욥은 소망을 가진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23:10). 순금은 단련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은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며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기에 적신으로 돌아갈 것이라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니 그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리라 한다. 그는 자기가 누리던 모든 부와 영예, 곧 많은 재산과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어 누리던 것인데 주신 그 분이 거두어 가시면 그것은 그분의 권리라고 인정한다. 그는 크신 하나님의 전권을 그대로 인정한다.
또 사람의 생에는 항상 전쟁 같은 고난이 있음을 인정한다. 부자나 가난한 자, 강한 자나 약한 자, 지혜자나 우매한 자, 권력자나 종된 사람, 신앙인 불신앙인 누구든지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을 가지는 것은 공통이다. 이 공통적인 삶의 현상에서 자기를 예외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고난은 하나의 인생 과정에 오는 것으로 받아드린다.
다음 욥은 환난 속에서 그 자신을 살핀다. 경건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고 또 이웃이나 약한 자들을 위하여 사랑과 자선을 베풀고 자녀들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지만 그래도 속에 있는 부족과 약함을 인정하며 주 앞에서 걸러내고 청산하는 시간으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고통은 견디기 힘든 하나님의 용광로 속에서 자랑스럽고 힘이 있던 자아가 부셔지고 녹아지는 도구가 된다그가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단련으로 받아드리며 결과는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손에서 빛나는 순금으로 나온다는 소망이 가득하다.





그의 아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멀리서 온 그의 친구들이 위로한다면서 어떤 판단과 정죄를 하든지 그는 상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가지신 계획을 보고 있기에 그 입으로 마음으로 죄를 범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서 어려움을 담당하며 인내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의 자랑이 되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욥의 곤경을 회복시키시고 그가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을 배로 채워주셨다.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위로하고 축하한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그를 붙들고 지켜 주시되 계속하여 하나님의 자랑이 되게 하셨다. 가지고 누릴 때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의 신뢰와 자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특권인가!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감사와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겠나!

Thursday, April 23, 2020

나라면 어떻게 할까? What if it is me?

나라면 어떻게 할까? What if it is me? (4-20-20)
4월 중순 밤새 소리없이 내린 눈이 대지를 희게 덮고 집 뒷뜰의 화초와 나무 모든 것을 희게 덮어 아름다움 그대로다. 파해쳐진 흙, 잘라져 여기 저기 흩어진 나무들, 가꾸어지지 않은 잔디, 모두가 흰 눈에 덮여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 햇빛이 비치니 눈은 녹고 이전의 추한 모습이 그대로 들어난다. 잠시 동안 아름다웠다. 이것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 말씀으로 감동 받고 성령의 만져주심으로 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 같더니 얼마 못가 다시 이전 욕심과 자기 중심 고집에 빠지는 내가 아닌가! 어려움 속에서 주와 더욱 가까이하며 주의 뜻을 찾고 말씀과 기도에 시간을 보내더니 형편이 회복되고 좋아지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내가 잘 나서 되어지는 일로 생각하고 여전히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생활하는데서 나의 약함과 미련함을 본다. 이런 나를 보시는 주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이스라엘 왕들에게도 이런 일을 본다. 유다 왕 아사는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각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는 개혁을 일으켰다. 그와 그 백성이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그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 구스의 군사 백만과 병거가 침략해 오자 아사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여호와 밖에는 도와줄 이가 없다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 군대를 격파하였다. 왕은 하나님 제단을 중수하여 예배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하나님은 아사 통치 35년까지 사방에 평안함을 주셨다. 전쟁 없이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이 통치자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다가 아사왕 36년에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왔다. 아사는 은금을 모아 아람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청하여 적군을 막았다. 선견자가 와서 이전 구스의 군대가 많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얻었거늘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하였으니 앞으로는 전쟁이 있으리라 한다. 왕은 노하여 그를 감옥에 넣고 또 사람들을 학대하였다. 그의 발에 병이 생기자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다가 곧 죽음을 맞았다. 처음 35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마지막 6년은 그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여 자기 좋은대로 하였다. 이런 실례는 역사에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 내가 아사라면, 내가 하나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떠할까?
하나님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일을 아시고 다스린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실 때 그들이 정착하여 편안해지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경고에 경고를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그 땅의 풍습을 따랐다. 그걸 아시고도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생활에서 구출하고 아름다운 땅을 주셨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다. 법과 공의로는 그들을 버리고 돌아볼 것도 없지만 배반당할 것을 알면서도 속에서 올라오는 사랑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제자들이 그를 배반하고 떠날 것을 아시지만 그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여 대신 죽고 부활하여 그들을 새롭게 세워주셨다. 오늘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잘나서인가? 오직 그의 사랑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잊지않고 나누며 살 수 있을까!




Tuesday, April 21, 2020

진리로 거룩하게 Sanctify them by Truth

요한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4-21-20)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감하며 십자가로 나가기 전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며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였지만 겟세마네에 이르기 전 다락방에서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떠난 후에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주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떠난 후에 세상에 남는 제자들이 어떻게 될까?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을 도우시겠지만 그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동화되고 부름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 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거룩하게 한다.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이다. 이 둘이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는 중요한 힘이요 열쇠가 되는 것을 본다.
거룩하다는 말은?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말로 그는 하늘과 땅의 어떤 것과도 구별된다 다르다는 의미다.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아버지의 사람들이니 아버지께서 구별되게 지켜달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나타내고 아들을 나타내도록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다른 삶을 살도록 하여 달라는 것이다.
여기 중요한 것은 진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1:1). 말씀은 하나님 속에 있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입에서 나오지만 그 이전 그것은 이미 우리 속에 있다. 만일 속에만 있으면 그것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말이나 글로 나타날 때 그것이 나타난다. 말이나 글은 곧 그 말하는 사람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올 때 그것이 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듣고 전하고 기록하여 사람들로 그 말씀을 알도록 한다.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 마음이요 그것은 진리다.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 변하지 않은 것, 언제나 한결 같은 것이다. 그것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된다 곧 하나님을 닮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1)먼저는 알게 된다 (inform). 누군가가 그 말씀을 전함으로 그 말씀이 내게 다가오면 내가 그 말씀을 듣고 알게 된다. 그 말씀이 지식 정보로 오게 된다.
2)그 말씀 자체가 일을 한다(perform).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떨어지니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다. 예수께서 성난 바다나 귀신 들린 자, 병든 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대로 되었다. 계자씨같이 작은 것이라 해도 마음 밭에 떨어지면 거기서 싹이 나고 자라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4:12) 하나님 말씀은 한 마디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고 성취한다. 변화를 준다.
3)말씀을 따라 산다(conform). 말씀하신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은 그 말씀을 받아드리라는 것이다. 말씀이 명하는대로 행함이다.
4)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transform). 내가 알든 모르든 내 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삶이 새로워진다. 제자들의 삶이 그러하였다. 얼굴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온다. 어떻게 그런 기쁨과 평안이 있오? 내가 100만불을 가지고 그런 기쁨을 살 수 있겠오? 이종문 태권도 사범이 주를 만난 후에 변화된 그의 모습을 본 동료 의사 박이 말하다. 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밖으로 나타난다. 얼굴에 나타나고 삶에 나타나 사람들이 알게 되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수 사람은 무엇인가 다르다 구분된다 하는 말을 듣게 된다.
5)다른 사람과 사회에 변화를 가져온다(reform). 초대 로마 교회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당시 사람과 달리 어린이 여인을 존중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도박, , 음난 거짓을 하지 않으며 깨끗한 삶을 살게 되니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믿는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 한국 선교초기 평양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최치량 주막주인 한 사람의 삶의 변화가 그 지역에 놀라움을 주고 나아가 몇 명 안되는 교인들이 청일전쟁후 콜레라가 창궐할 때 섬기는 모습이 주민들을 산불처럼 주 앞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변화된 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또한 말씀과 삶으로 그 불을 지펴 나가는 것이 선교 역사다.
예수 믿는 성도가 무엇인가 다른 것을 나타내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지만 동시에 이끌리는 사람이 있다. 이는 말씀 자체의 힘이요 성령의 능력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3)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성도 거룩한 무리라 우리 스스로 거룩한 삶을 원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무엇인가 다르다고 인정하기를 바란다. 내 힘으로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나아가 주님을 닮은 거룩함을 가질 수가 있나당신은 예수지요? 이런 말을 어떻게 들을 수가 있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임하면 그 말씀으로 성령이 역사한다. 어려운 일 고통을 이기는 힘이 오고 주의 복음은 나타나고 주께 영광이 돌려지며 주님의 마지막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주께 영광 돌린다. 할렐루야!!


Thursday, April 16, 2020

구출 작전 Rescue Operation

구출 작전 Rescue Operation (4/16/20)
세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보이지 않은 세균에 포위당하여 416일 현재 13만가량이 생명을 잃고 2백만 이상이 포로로 앓고 있는데 미국에는 3만명이 죽고 63만명이 확진되어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 수는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이런 형편에 세계가 하나되어 나라마다 앓는 자와 건강한 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구출작전을 펼지고 있다의료진만 아니라 정부자선단체민간인들이 전선에 뛰어들어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헌신적으로 일을 하며 근본 문제를 풀고자 학계는 백신과 의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싸움에서 전선이 보이지 않은 어려움이 있으나 천하보다 귀한 생명 구출작전은 확실히 성공할 것이다.
근대역사에서 구출작전이 많이 있다한국에서 2011 121일 실시한 아덴만 여명작전은 소말리아 해적단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의 선원 21명을 청해부대의 최영함 특수전 요원들이 구출해낸 것이다. 1950 625일 주일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은 파죽지세로 8월까지 경상남도를 제외한 남한 전체를 삼켰다유엔과 미군이 왔으나 군비와 물자보급 시간이 걸리는 동안 낙동강 방어선에 사활을 걸었다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915일에 진행되어 2주후 서울을 탈환하고 인민군 보급로를 차단하며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갔으나 이번에는 중공의 인해전술로 상상을 초월하는 생명피해를 내며 북이 살아 남과 공존하고 있다.
유대인만큼 역사에서 학대와 살상을 당한 민족은 드물다히틀러의 6백만 유대인 학살만 아니라 지금도 인구 9백만의 이스라엘이 2억이상의 아랍권에 둘러 쌓여 계속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1976 627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출발 프랑스에어 항공이 중간 기착지 아데네를 이륙하며 과격파에 납치되었다우간다 엔테베에 기착납치범은 일반승객 154명을 석방하고 유대인94명만 인질로 잡아 각국에 갇혀 있는 동료 50명을 석방하라고 하다이스라엘 정부는 4천킬로 떨어진 곳에서 73일 구출 작전으로 특공대가 공항 터미날에 들어가 납치범 전원 사살인질 전원을 구출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고 현 총리의 동생 요나단 네탄야후가 진두지휘하며 생명을 잃은 손실을 보았다히틀러 독일이 세계로 뻗어가며 프랑스를 점령하고 서진할 때 1944 66일 영불미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천문학적 피해를 겪으나 프랑스 탈환독일로 진격하여 연합군의 승리로2차대전이 끝나고 유대인은 멸종되지 않고 2천년간 나라 없이 유리하다가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게 된 것은 역사의 기적이요 구출작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구출작전 이야기다롯이 소돔에 살다가 연합적군의 침략과 약탈로 잡혀간 때 그의 삼촌 아브라함이 자기 하인들을 군사로 삼아 적군을 공격하여 모든 소돔 사람과 재산롯과 그 가족을 구출하였다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종생활하며 고통 속에 신음할 때 하나님은 강에 던짐받은 죽음에서 구출한 모세를 세워 그 민족을 구원하였다하나님은 생명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보이지 않은 악한 세력에 종이 되어 고난과 죽음을 겪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하여 구출작전을 전개하시다그는 땅에 와서 죽음그리고 부활로 완전한 승리와 생명을 주신다예수사람을 진멸할 사명의 청년 엘리트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나자 새로운 생명길을 보았다그가 우리를 흑암의 세력에서 구출하여 빛의 나라로 옮겼다고 회고한다우리는 보이지 않은 악한 세력에 눌려 있으나 승리자 주께서 우리를 구출하는 것을 알고 응하면 생명을 얻게된다.

의료진의 환자 진료

                                                            아덴만 여명 작전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우간다 엔테베의 요나단 작전 완료 후

                            어둠의 세력에서 구출하여 빛과 생명의 나라로






Monday, April 13, 2020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요한 19:5)
선거철 유세를 하면 후보자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크게 소개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더욱 추천한다. 회사에 입사할 때도 이력서로 자기를 소개하지만 추천인의 추천을 꼭 요구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례 요한이 그를 소개하며 자기는 그의 신발끈도 풀 수 없는 사람이며 그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니 자기 제자 두 사람이 그를 따라간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하다그 후 많은 사람이 예수를 소개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는가 경멸로 질문하던 나다나엘은 와 보라고 하는 친구의 권유를 따라가 그를 만나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많은 사람의 소개로 그는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로 오셨지만 누구보다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 인과 서기관은 예수를 그들의 전통을 어기는 범법자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규정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식민통치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하였다. 유월절이 닥아오기에 그들은 그들의 법에 따라 부정을 피하고자 이방인 총독 집에는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라고 억압한다.  
빌라도는 로마 법에 따라 그를 매질하고 고문하며 심문한다. 유대인이 고발하는 어떤 죄목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이 그를 시기하여 고발한 것으로 알고 그를 때려 놓아주려 한다. 세번이나 시도하였으나 백성의 소리가 자기 판단을 능가한다. 빌라도는 상처로 피가 나는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백성들 앞에 데리고 나가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한다. 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가? 그를 누구로 소개하는 것일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유대왕이라며 로마에 반역하는 군중을 일으킨다고 하는데 맞추어 경멸적인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왕복을 입혀 그를 조롱하고 고문한 표시를 보이며 그들의 말을 들었다는 뜻에서 너희 왕이 이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자 예수는 그것을 네가 하는 말인가 다른 사람이 네게 하는 말인가 반문한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왕으로 났지만 그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만일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그의 사람들이 와서 그를 넘겨주지 않게 했으리라 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을 권세도 있고 처벌할 권세도 있다고 하자 예수는 위에서 주지 않으면 그가 그 권세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말씀한다. 빌라도는 그를 정신 이상자 또는 이상주의자로 생각하며 이 사람은 아무런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다.
빌라도는 예수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묻자 그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한다. 진리? 로마 정치 세력은 진리보다는 편의와 유익을 앞세웠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말에는 경멸도 있지만 그가 진리와는 생소하다는 말이다진리라면 희랍인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덕이 아닌가? 더욱 빌라도의 아내는 그 의인을 조심하라고 한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철인이나 성인 영역에 속한 자로 보여 자기가 재판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를 석방하려 한다. 손을 씻으며 자기와 상관이 없다며 내가 재판할 수 없는 사람을 보라고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 명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전례를 따라 그를 놓고 싶어 백성들의 의견을 묻자 뜻밖에도 바라바를 놓아달라 한다. 그는 로마에 반역 민란을 일으킨 살인 죄수다. 죄가 없는 예수가 사형수 바라바를 대신하여 죽게 된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 바라바 (사람의 아들)이 삶을 얻는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 온 백성이 죽지 않게 되는 길을 보았다. 빌라도의 마음에 그가 만왕의 왕이라는 마음이 확실하나 십자가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썼다. 바라바의 죽음을 대신하는 자를 보라고 외친다.

이 사람을 보라 많은 예술가의 주제였고 책의 주제가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바가 죽음에서 생명을 얻듯이 생명을 누리게 된다. 독일 작센 지방 백작 진젠돌프는 뒤셀돌프미술관에서 이태리 화가 도메니코 훼티 Domenico Feti의 그림 이 사람을 보라 앞에서 예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림 아래 씌어진 글 귀 나는 너를 위하여 이 고통을 겪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께 온전히 헌신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Frances Havergal 1858 독일 여행 중 이 그림 앞에서 감동을 받아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찬송(185)을 작사하게 되었다. 이 사람을 보라! 누구나 주를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바와 같이 새로운 생명의 축복을 가진다.


Thursday, April 9, 2020

사랑 이야기 Stories of Love

사랑 이야기 Stories of Love (4/9/20)
이상한 바이러스가 가져온 거리두기 행정명령으로 자가격리가 시작되는 3월 중순부터 생활형태가 달라졌다. 사람이 모이는 학교 교회만 아니라 박물관 극장 식당도 문을 닫기에 집에 있는 사람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학교는 영상강의를 하고 교회가 실시간 진행하는 영상예배에 교인들은 집에서 참석한다. 식품과 음식을 집으로 배달하고 또 베르린 교향악,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프로그램을 무료제공하여 누구나 즐기게 한다.

나는 뉴욕 메트로 오페라를 처음 7일간 매일 저녁 보았다. 평생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카르멘, 일트로바토레, 라보엠, 라트라비아타, 연대의 딸, 트리스탄과 이졸데, 예브게니 오네긴 등이다. 음악으로 대화하고 진행하는 연극이라 내용을 잘 알기 위하여 미리 공부도 하였다.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런 오페라를 이전이나 이번 기회에 보았을 것이다.

전체 오페라는 사랑 이야기다. 이 사랑은 카르멘이 부른 하바네라 곧 길들여지지 않은 새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귀족 평민, 부자 가난, 도시 시골, 전쟁 평화, 공녀 군인, 주인 시종, 예술인 유흥가 사이의 모든 격리 담장을 넘어선다. 마음에 들면 남의 애인 약혼자 유부녀라도 유혹하고 탈취하며 질투와 증오로 복수하고 친구와도 대결하고 죽인다. 깊은 사랑을 약속하여도 쉽사리 싫증을 느끼고 배반하며 다른 대상을 찾는다.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다가 순진한 사랑을 만나 안정된 삶을 찾으나 위선과 체면으로 차단당하거나 질병이나 칼의 죽음으로 끝나는 아픔이 현장현실이다. 자기 중심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사랑이다. C S Lewis는 사랑을 Need Love (욕구 사랑)Gift Love (주는 사랑)으로 구분하는데 인간사랑은 대개가 받고자 하는 욕구충족의 사랑에서 시기 질투 배신과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주는 사랑이 있다. 뉴욕의 의료진이 환자와 죽는 자를 미쳐 돌보지 못하는 긴급상황에 아틀란타 의사 간호사 100여명이 찾아가 자원봉사하는 것은 베푸는 사랑이다. 내가 목회하던 뉴욕교회에 2 1녀를 가진 신실한 부부가 있었다. 잘 자라던 첫 아들에게 희귀한 근육 위축 (Muscular Dystrophy) 증세가 나타났다. 휠체어를 타고 오직 손가락으로 조절하나 두뇌는 이상이 없어 버어클리 대학에 다닐 때 찾아가 만나기도 했으나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남동생에게도 다섯 살에 같은 병이 왔다. 너무나 충격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세스나 비행기 회사에 입사하자 부모는 모든 것을 접고 아들 곁으로 가서 24시간 도우미로 10년 이상 삶을 온전히 바치고 있다. 큰 사랑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성자 하나님이 많은 고난과 죽음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찾아와 함께 살며 가난과 질병을 치유하고 도운 것은 부모 사랑과 같지만 인간의 마지막 원수 죽음과 그 원인 죄의 문제는 그대로 있다. 죄가 죽음에 선행하기에 죽음을 해결하기 위하여는 죄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 죄는 그 형벌을 받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고 또 죽음을 불러오기에 죄가 없는 예수께서 인간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며 죄의 요구에 응하였다. 그리고는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였다. 자신을 내어주어 우리 대신 죽음으로 우리 죄를 말소하고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랑을 실행하셨다. 죄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누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사랑의 선물을 받아드려야 하지않겠는가!!

             하바네라를 부르는 카르멘                                   길들여 지지 않은 새

              




              
        뉴욕으로 향하는 아틀란타 의료인                                           "다 이루었다!"

Monday, April 6, 2020

하나님의 슬픔과 고난 The Sorrow and Suffering of God

이사야 53:3 하나님의 슬픔과 고난 (4/7/20 KCBN은목교회 시간 방송)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로 모두가 자가 격리 대피 상태라 이웃과 만나지도 못하고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고 사업의 문을 열어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황량한 세상이다. 어떤 청년은 바이러스 증세가 있어 홀로 자기 집에서 격리하며 앓다가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었다. 이 병은 병원이나 양노원에서 의료인들이 잘 보살피지지만 가족이 찾아가지도 못하다가 혼자 죽는다. 이런 형편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도움이시라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이 우리가 겪는 고난과 아픔을 아시기나 하나?

기독교에서 이번 주간을 수난주간이라 한다. 이 주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고난 당하신 것을 기억한다. 영이라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이 고난 당하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희랍철학에서는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시키고 영은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인간 형편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고 하며 하나님은 감각이 없고 냉담하게 자신을 인간과 분리시킨다고 하며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희랍철학이론이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대로 경험하신다. 무슨 말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속사람이다. 생각하고 알고 느끼고 결단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고난겪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육체만 아니라 속속드리 우리 지정의 모든 부분으로 아픔을 느끼고 경험한다. 하나님이 느끼시고 경험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은 것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나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지 않고 그가 스스로 사랑에 응하고 사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사랑의 품을 떠나게 되다. 하나님 마음이 어떠할까? 희랍철학이라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인격자가 아닌 신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인격이시라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였다(6:6). 우리가 배반당할 때 가지는 아픔을 하나님이 가진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에집트에서 종으로 살며 많은 고역과 학대를 당하며 부르짖을 때 그것을 듣고 보고 알고 내려와 그들을 건져내어 자유로운 땅에 인도하고자 자기를 대신할 모세를 세워 그 일을 하게 하였다(3:7,8). 내가 집을 떠나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첫 딸이 돐도 되기 전에 폐염에 걸렸다. 시부모와 함께 지나면서 딸을 기르던 엄마가 그 아이의 아픔이 자기 아픔이라 그 아이를 업고 지역 돌팔이 의사를 찾았으나 더 악화되어 아이를 업고 뛰어 버스를 타고 경주에까지 가서 병원에 입원시키다. 병원 중환자실에서도 아이를 안고 돌본다. 엄마의 마음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고난 속의 자기 백성을 보고 아파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기 대리자로 모세 같은 선지자를 보내고 아론 같은 제사장을 보내고 다윗 같은 왕을 세워 자기 백성을 잘 돌보아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다.

그래도 그 백성은 하나님을 받아드리지 않고 배반하며 눈에 보이는 다른 세상 신을 따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와 후손을 자기 백성 삼은 것은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이 복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게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자기 백성이나 일반 사람이나 구별없이 모두가 죄라는 병으로 신음하며 고통속에 죽어간다.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스스로 사람이 되어 인간 세상에 오기로 작정하고 아들 예수로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나 그 자리를 잠시 비우고 우리 몸을 입고 우리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왕이 왕의 자리를 비우고 평민 옷을 입고 백성 속에 뛰어든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시골 처녀에게서 우리처럼 태어나고 자라나고 성인이 되었지만 그는 인간의 모든 고난을 다 겪었다. 배고픔 목마름 피곤하고 율법을 어긴다고 하나님 모독이란 비방받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여 눈물 흘리고 잠못자는 일이 많았다. 그는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떡 다섯으로 5천명을 먹이는 놀라운 일을 하고 병자 맹인 귀신 들린 자 등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치유와 생명을 주었지만 그들은 결국은 죽고 만다. 인간을 영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이라 근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그는 매도 맞고 모든 고통을 겪다가 결국 죄인으로서 십자가란 가장 무서운 사형대에서 처형이 되었다. 하나님이 정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나? 그가 슬픔을 알고 우리 고통을 친히 경험한 것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대신한 것이다. 그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은 것은 우리 허물과 죄를 대신한 것이요 우리의 치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받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병에서 우리를 완전히 치유하고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시되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신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 약을 알고 먹으면 효과를 본다. 예수님과 그가 한 일을 알고 받아드려 내것으로 삼으면 그 효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어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우리는 이런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 당하는 많은 사람, 영원한 죽음에 처한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의료인에게 감사하지만 그들이 사람을 영생하게 하지는 못한다. 영생의 길은 오직 하나,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처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 그를 인정하고 높이며 그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요 사명임을 알고 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