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8, 2018

나귀를 타고 Riding a Donkey


요한12:12-16 나귀를 타고 Riding a Donkey (3/25/18 종려주일)
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자라나고 뻗어가는데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말이겠다. 우리가 미국에 온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서울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가르치고 행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 정책과 가난, 고난에 시달리며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리는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과 큰 기적을 보며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인식이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삼자는 운동을 벌리다. 그를 인정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다. 하나님이 보낸 목적을 이룰 때가 온 것을 알다. 하나님 목적을 위하여는 하나님 예배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정치적 종교적 수도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고 하나님 예배가 있다. 성전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다. 이 제단에서 죄된 인간을 대신하여 양이 죽임을 당하고 이로서 사람이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는 생명의 길이 열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간다. 일년 3차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맞으면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갈릴리 지방에 살고 사역하였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12살 나이에 부모를 따라 절기를 지키러 가다. 성전에서 교사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다. 그 후에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 갔는지 기록된 것 이외에는 알 수가 없지만 요한 복음에 기록된 것은 유월절에 3차례 초막절에 한 번, 수전절에 한 번 모두 다섯번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고 3년간 사역을 하다.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믿게 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말씀하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나라를 정복하고 왕으로 다스리는 일반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에 가시면 그의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하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곧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기대하다.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는 그 때 예수의 좌우 특별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하다. 장소가 중요하지만 시기도 중요하다. 유월절에 맞추어 가시고자 한다. 유월절은 특별한 절기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400년 이상 노예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은 절기다. 애굽 모든 가정의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을 죽이는 벌을 내릴 때 이스라엘 집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문 설주에 발라 둠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감으로 죽는 자가 없을 뿐 아니라 애굽의 종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것을 기억하는 절기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을 기대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욱 큰 죄와 죽음의 압제에서 자기 사람을 해방시키시는 일을 하신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기가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 유월절 양 잡는 날 자기가 잡혀 죽을 것을 내다보시고 그 시간에 맞추신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한다. 유월절 엿새전에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에 가시다. 여기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고 그 두 누이 마리아 마르다 가족이 살고 있다. 큰 잔치를 하다. 그 다음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월절을 지키러 온 큰 무리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를 환영할 준비를 한다. 예수께서 이른 아침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며 나귀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테니 풀어오너라 누가 말하거든 주인이 쓰고 돌려 준다고 하라고 하다. 제자들이 가서 그대로 하여 나귀를 끌고 오다. 사람들은 옷을 나귀 위에 얹고 예수께서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사람들은 길에 종려 나무 가지를 펴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친다. 호산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한다. 아주 특이한 행렬이다. 사람들이 왕으로 생각하고 맞이하는 것이다. 그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당시 왕이 전쟁에 나갈 때나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말을 탄다. 말은 용맹하고 빠르다. 위풍 당당하다. 고대 에집트나 당시 로마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나귀는 말과는 다르다. 크기가 보잘 것 없는데 더욱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다. 모양도 없고 빠르지 않고 고집도 센 모습이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말이 늦게 도입되다. 말 보다는 나귀가 많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 통치자는 말을 타고 다닌다. 위세가 등등하다. 예수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을텐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뜻은 무엇일까?

1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다. 말은 전쟁과 관련된다. 전쟁하여 죽이고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시대에 사용한다. 사람들은 억압자를 정복하고 새 나라 건설을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평화를 가지고 오시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14:27).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안이다. 사람들은 전쟁과 억압에 시달리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가 평안! 샬롬이다. 그만큼 시달렸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사가 안녕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언제나 인사가 안녕이다. 그만큼 고난이 많고 시달렸다. 평안을 원한다. 평안은 전쟁이 없는 것만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염려 걱정이 없고 관계도 평안한 것이다. 주님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평화를 이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세우고자 오셨다. 그가 탄생할 때 천사가 노래하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2:14).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울 때 왕의 나귀를 타고 오게 하였다. 솔로몬 그 이름이 평화, 평화의 왕이다. 솔로몬 재임 시에 그는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다. 그는 피를 흘리고 누구와 전쟁할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시다. 이에 대하여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9:9). 그는 전쟁 도구인 병거와 말을 끊고 활을 끊으리니 이방에 화평을 전할 것이라(9:10)한다. 예수님을 맞이하면 평화가 온다. 마음과 가정에 평안이 있다.

2  일반 평민의 동물이다. 왕이나 장군은 말을 탄다. 일반 평민은 나귀와 가깝다. 말은 높은 지위를 보이나 나귀는평범한 인간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귀하지만 엘리트는 자기 만족에 살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가 태어나기는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 베들레헴이지만 자라난 곳은 나사렛 갈릴리 땅, 사역한 곳은 바닷가 갈릴리 가버나움이다. 배운 것도 없고 신분도 없는 어촌 시골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이곳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은 멸시를 당하며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나 잊혀진 사람들이다. 주님은 이들과 가까이 하다. 주께서 그곳에서 일을 하시자 어둠의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하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나 우리 사람과 같이 되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2:7).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엘리트, 종교 지도자들과 친구가 되지 아니하고 비천하고 어둠의 땅, 멸시 당하는 갈릴리 지역에 본부를 두고 멸시 당하는 어부들과 함께 사역하시다. 가난하고 병들고 눈물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을 풀어주시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 날 베다니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의 집에서 하루를 지나다. 그들을 사랑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구를 보면 모두 보통 사람들이다. 주님이 가까이 하신다. 엘리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나 한다. 그가 한 일들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비평하고 정죄하고자 한다. 그가 나면서부터 나병 걸린 사람을 고쳐주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에 그 병을 고쳤다고하여 죄인이라 한다. 그를 죽일 생각만 하다. 일반 사람은 그를 쉽게 받아드린다.

3  나귀는 불결한 동물로 분류된다. 13: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면 그 목을 꺾을 것이라 한다. 정하고 부정한 동물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부정한 동물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못한다. 만일 나귀를 가정에서 기르려면 양으로 대속한다. 양을 대신 죽게 하고 그 나귀를 소유하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불결한 죄인이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나갔기에 죄인이 되었다. 이 죄인을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시다. 예수님은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 주신다. 사람들은 서로 구분한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은 갈릴리나 사마리아 사는 이스라엘 사람을 천하게 불결하게 생각 한다. 상대할 사람들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직업도 그러하다. 어떤 직업은 매우 부정하게 본다. 세무서원이 된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는 마태를 제자의 하나로, 삭개오를 친구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주시었다. 원수로 취급되는 로마 지배자의 백부장의 하인이 병든 것을 알자 가서 고쳐주리라 하신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불결한 이방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방인도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나병이 걸리면 가장 어려운 병이다. 그는 가족을 떠나 격리된다. 공동체와 결별한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같다. 나병은 불결하다. 그와 접촉하면 불결해진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나는 부정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대고 그를 깨끗하게 해 주시었다. 주 앞에는 정결 부정이 따로 없다. 주께서 만져 주시고 받아주시면 모두 정결하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서 보는 축복이다.
4나귀는 짐을 싣는다. 사람이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싣는다. 나귀는 매우 고집 센 동물로 생각된다. 말을 잘 듣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귀는 처음 사람을 만나면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을 알고 관계를 맺는데는 근 1년의 세월이 걸린다. 나귀가 신뢰하고 신임하면 그 때부터는 주인이 말하는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한다. 그를 인정하고 살펴 준다는 것을 알면 주인을 위하여 헌신한다. 주인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이 나귀를 만나자 그는 주께서 바로 그의 주인인 것을 알고 신뢰한다. 공손히 그를 태우고 예루살렘 으로 간다. 나귀가 신뢰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고 일을 하지 않지만 일단 신뢰하면 그의 무거운 짐을 모두 짊어진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은 그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우리가 지기 힘든 짐을 대신 지신다. 어떤 짐이 있나? 오래 전 전쟁 후 한국이 가난하기도 하고 대중 교통이 발전하지도 않았다. 군대 트럭이 많이 다녔다. 큰 짐을 이고 메고 다니는 여행자가 많다. 트럭이 서서 태워줄 때가 많이 있다.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를 본 트럭 운전사는 자기 할머지 생각이 나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을 묻고 태워 드렸다. 가도 보니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할머니가 짐을 머리에 이고 넘어지지 않겠다고 붙잡고 신음한다. 할머니 짐을 내려 놓으시지요! 내가 탄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타면 미안하여 어떻게! 하였다. 이런 일이 많이 있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짐을 맡기지 못할 때가 많다. 네 짐을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신다(55:22)고 말씀하신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돌보신다 (벧전5:7).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주께서 우리 대신 그 짐을 저 주신 것이다. 그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의 짐을 짊어지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그에게 우리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일1:9)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우리가 죽을 자리에 대신 서 주시고 우리가 피를 흘릴 자리에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주께서 성찬 통하여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 죄를 사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그가 유월절 양 잡는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죽음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졌다. 우리가 그를 믿고 그에게 나의 무거운 짐을 맡겨 드리면 우리는 안식을 가진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그가 하실 일을 보여주심이다. 오늘 여기에 들어오신다. 평화를 가지고 오신다. 주의 평화를 받아드리나! 주님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 자랑할 것이 없는 자를 받아주신다. 비천하고 불결한 죄인을 친구로 삼아주신다. 우리가 신뢰하며 그에게 나의 마음 드릴 수 있나? 믿기만 하면 주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주께서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다. 나의 짐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나? 갈등 많은 세상과 공동체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으로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참 된 평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자.

 동영상은 kpc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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