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7, 2019

고난의 절기 Season of Suffering


고난의 절기 Season of Suffering (3/27/19)
기독교는 지금 사순절이라는 40일의 고난 절기를 지나고 있다. 이 기간 많은 사람은 금식과 고행, 절제로 고난을 체험한다. 에티오피아 정교도들은 사순절 앞 뒤 1주일을 추가하여 총 55일의 금식과 고행을 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이요 기독교 핵심은 생명과 평화, 자유와 기쁨인데 왜 이 사순절을 정하고 이런 고난을 겪나?
고난의 근본은 건강한 생명을 위한 경계선을 벗어난 것, 곧 창조주가 정한 생명의 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결과 생명을 잃고 죽음을 겪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 운명 속에서 죽음의 고난을 당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라 죄가 없으시다. 당시 법의 나라 로마 총독 재판장이 심문하고도 죄를 찾지 못하였지만 그를 고발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항의에 못이겨 예수를 채찍질하고 극악한 십자가 처형으로 죽게하였다. 죄 없는 그가 왜 죽으셨나? 죄로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대신한 것이라 주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영원한 죽음의 고난이 없는 것을 알기에 감사함으로 그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의 고난을 맛보며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러면서 금식과 고행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복종시키며 교만과 이기적 욕심, 미움 등을 떠나고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한다. 부모는 많은 고생을 하지만 자녀에게는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밤낮 열심히 일을 한다. 자녀는 부모가 겪은 많은 고난을 겪지 않고 잘 뻗어가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라 생각하고 감사할 때 부모는 모든 고생을 잊고 기쁨을 가진다.
고난이 고난으로 연속되다가 고난으로 끝이 난다면 어찌 그 고난을 기뻐하겠나? 우리가 4계절을 즐기며 지금 봄이 오는 것을 환영하며 기뻐하지만 봄이 없는 찬 겨울의 어둠만 지속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죽음과 어둠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무덤과 죽음을 정복한 영원한 생명의 부활절 아침으로 연결되었기에 그의 고난은 가치 있고 우리가 감사하며 즐기게 된다. 그의 죽음의 고난이 온 세상 만민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가져온다. 우리의 과제는 오늘 나의 고난을 통하여 자녀나 가족만 아니라 이웃과 후세의 고난을 들어주는 축복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헌신하여 생명을 바친 누군가 있기에 나라나 공동체가 자유와 번영, 평화와 질서 가운데 잘 살게 된 것을 우리가 누리며 깨닫는다면 감사함으로 우리도 그 대열에 참여해아 하지 않겠나!!

Monday, March 25, 2019

생명체에 닥친 비극 Life confronting Tragedy


4:36-5:11 생명체에 닥친 비극 Life confronting Tragedy (3/24/19 주일)
오늘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어떻게 오셨나? 차를 타고, 걸어서. 건강한 생명체라는 증거다.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야지 머리와 마음에 생각하고 준비해 이 자리에 왔다. 주중에는 직장이나 사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또 다른 면으로 일을 한다. 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1 생명체 교회: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5:11 온 교회라고 나오는데 행전 6회 중 처음 나오는 말, 교회는 주의 부름받아 주를 경외함으로 함께 모인 사람들이다. 주님이 사역할 때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고 무덤에 장사된 때 그를 따르던 자는 모두 흩어졌다. 주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숨어 있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니 숨어 있던 자리에서 나와 복음 증거하니 3천명이 믿고 세례 받았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구걸하고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며 주를 찬양한다. 많은 사람이 놀라면서 사도들의 설교를 듣더니 믿는 자가 많이 생겨 5천명이 되다. 살아 있는 생명체로 뻗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4:32-  초대교회 생명체의 모습이 나온다.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모인다. 사도의 부활 증거와 가르침을 받아 믿음에서 자란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의 짐을 같이 짊어 진다. 가진 자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가지고 오니 그것을 없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하여 사용한다. 여기 구부로에서 온 요셉이란 사람이 있다. 그의 본명보다는 사도들이 부르는 별명이 알려지다.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란 말이다. 그는 당시 교회에서 많은 사람에게 위로의 역할을 한다. 외로운 자를 찾아주고 가난한 자를 돕고 상한 자를 치유한다. 눌린 자의 짐을 짊어져 준다. 그의 삶에 위로의 모습을 많이 본다. 자기 가진 밭을 팔아 교회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귀한 일을 하다. 그는 사도들과 교회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사울이 예수와 그 복음을 반대하고 박해하다가 주를 만나 변화를 받았지만 사도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신임을 받는 자로서 사울을 보증하며 소개하였다. 나중 바나바는 사울이 자기 고향에 가 있는 것을 알고 안디옥으로 불러내어 함께 성경을 공부하며 교회 사역을 하였다. 바나바는 마가라는 젊은이가 선교 사역 중간에 떠나 실망을 끼쳤지만 실패한 그를 믿음으로 다시 받아 새롭게 세워주었다. 그는 나중 마가복음을 쓰기까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바나바는 누구에게나 위로와 힘이 되는 사람이다. 바나바가 특별히 그런 사람이지만 처음 교회가 대개 그러하다고 보면 된다.

2 찾아온 비극: 교회 생명체가 이렇게 살아 활동하는 가운데 비극이 찾아오다. 오늘 본문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다. 원문에 시작이 그러나로 되어 있다. 활발하게 뻗어 나가는 교회 모습 중에 그와 상반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교회는 항상 도전을 받는다. 외부적 환난과 박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교회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내부적 시험이 들어온다. 우리 몸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건강하게 활동 하는데 때로 외부적인 사고가 생긴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우리 속에 병이 들어온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서로 의논하고 밭을 팔아 그 값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지고 왔다. 그것이 일부라는 것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교인들은 그것이 전부인 줄로 알고 그들을 바나바와 동일 선상에서 인정하고 칭찬할 것이다. 밭 값을 가지고 올 때 아나니아는 칭찬을 받을 줄로 기대하였을 것이나 베드로의 첫 말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가 얼마나 놀랐겠나? 초대 교회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한데 아나니아는 사탄으로 충만하여 있었다. 사탄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 충만과는 정반대되는 삶이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나타났다. 접근은 교만한 마음 주어 그를 높이고자 한다.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그는 엄연히 피조물이라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다. 오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자기를 하나님 자리에 두고자 한다. 자기를 최고로 생각한다. 자기 위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다. 모든 사람에게 주인노릇 하며 명령하고 다스리고자 한다. 한국적인 말로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최고가 되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이기라고 한다. 네가 하나님이 되게 하마! 사탄의 거짓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만 네가 그것 먹으면 죽지 않고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하며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거짓말 한다. 아나니아가 사탄이 가득하고 충만하게 되어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니 먼저 자기를 하나님처럼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 내가 중요한 인물로 칭찬 받기 위하여 거짓을 한다. 밭을 바치면 인정을 받을 것이라 생각 하고 밭을 팔아 바친다는 흉내를 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난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를 위한 것이다. 거짓이요 위선이다. 아나니아는 사탄의 지배를 받으니 자유를 잃어버리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 땅을 팔기 전에 그것은 그들의 땅이고 그것을 판 후에도 그 돈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의 권리다. 그 돈 전체를 사도들 발 앞에 가지고 오든지 일부를 가지고 오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아무도 그들 자유를 침해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 밭값 전체라고 하면서 사실은 일부만 가지고 온 것이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거짓을 말하였다. 아담 하와가 금지의 과실을 먹고 나니 하나님이 두려워 숲속에 숨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는 자유를 잃었다. 아나니아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그가 엎드려져 혼이 떠나 죽었다. 젊은이들이 싸서 메어 나가 장사하였다. 그 아내에게도 꼭 같은 일이 일어나다. 두 사람이 같이 계획한 것이다. 듣는 자가 모두 두려워하다.
교회가 능력을 나타내며 칭찬 받고 뻗어가는데 사람이 죽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인데 이런 일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나 할 수 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여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었다.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 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바로 죽음을 겪은 것이다. 사탄의 거짓에 속은 것이 죽음 자체 였다. 우리 건강한 생명체에 암이 들어온다. 암세포는 일반세포와 다를 것이 없어 친구로 생각하고 그대로 방임한다. 마구 뻗어나간다. 생명체가 사는 길은 암이 뻗어나가기 전에 잘라 내야 한다. 암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 그 거짓과 위선, 자기를 높이는 암덩어리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생명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잘라내는 것이다. 여호수아에 이런 일이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점령하는 첫 성이 여리고다. 처음 승리하여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아무 것도 취하지 말고 모두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지 않고 무엇을 취하면 그 물건만 아니라 그 사람, 그가 속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 죽임을 당한다고 하였다. 아간이 그것을 알고도 외투와 금은을 보며 탐심이 생겨 취하고 자기 집에 숨기다. 그 후 그들은 작은 도성 아이성에서 패배하였다. 슬피 우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 아간과 그의 가족 재산 모두가 아골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에 계속 승리의 전진을 할 수 있었다. 아나니아 삽비라를 제거한 후에 교회 생명체는 5:12에 계속하여 활동하고 뻗어간다. 만일 아나니아 삽비라를 용납하고 아간을 용서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 3의 아나니아가 생겨날 것이고 교회는 힘과 생명을 잃고 사탄이 원하는 일이 일어난다.
오늘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모이는 사람이 없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다. 모두가 거룩하고 의로워서인가? 오늘 세상이 교회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있나? 에티오피아에 외국에서 온 자선단체가 많이 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지 않은다. 너희들은 우리를 팔아서 잘 먹고 잘 산다며 그들을 비난한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빈민을 구호한다면서 그들은 최고급 호텔을 즐기고 그곳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에 대한 비난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비난이 오늘 교회를 향해서도 들릴 수 있다.

3 오늘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말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사탄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나?
무엇보다 우리 하나 하나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야 한다. 성령이 충만해야 내 생각 내려두고 주의 생각 주의 뜻을 따라 살 수가 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이 임할 때 다음의 일이 일어난다.
사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말씀을 깨닫고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다. 우리 모두가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기에 하나님이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수술한다면 몸이 없어질 지경이라 그 때는 약을 사용하게 하신다. 그 약은 주의 말씀 구약 신약으로 훈련 받고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4:12). 말씀은 우리 심령의 생각을 나타내고 수술하지만 동시에 치유하신다.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 (19:7,8)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보호하며 사탄을 대적하여 이기게 하고 나아갈 길을 알게 하신다.
성령이 충만하면 초대교회처럼 우리 마음과 뜻이 하나 되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며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생명 공동체가 된다. 우리가 함께 나란히 앉아 예배하기에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이나 그러나 서로를 모르고 남남이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상대방이 어떤 문제가 있나? 고통, 상처, 오해, 외로움, 심적인 육적인 문제 등을 모르고 무관심 하고 있으면 참된 공동체라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알면 서로 돌보고 채울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집과 땅 등 물질에 집착하나 성령에 이끌리니 초대 교회 성도는 물질을 처분하여 사람들의 필요를 보고 채우고자 다가간다. 사람에게 끌리고 가까이 한다.
우리에게도 비극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으로 우리가 할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여 서로를 인정하며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

 동영상은 www.youtube.com


Wednesday, March 20, 2019

생명과 의약 Life and Medicine


생명과 의약 Life and Medicine (3/20/19)
세상에 약이 많다. 인정된 약이 3700여종, 그 외에 인정되지 않은 것과 전통 의약을 포함하면 모두 1만종이 넘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어떤 약을 복용한다. 건강 곧 생명 본연의 모습을 찾아 회복하려는 것이다. 생명은 건강하게 살 뿐 아니라 활발하게 활동하며 죽지 않고 뻗어가게 되어 있다. 피가 온 몸을 잘 돌아 몸의 구석 구석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5 6부가 돌아가도록 힘이 있어야 생명이 유지된다. 몸만 아니라 정신, 정서, 관계도 건강해야 온전한 삶을 살게 된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문제를 알고 대응함이다. 약을 먹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은다. 음식, 운동, 휴식, 절제 등은 생명에 약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약을 먹으면 된다고 하며 당뇨병 환자가 단 음식을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먹더니 결국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살아 있는 조직은 활동하게 되어 있으나 사람이 병상에 오래 누워있으면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운동은 활동이 부족한 부분을 활성화시킨다. 할 일이 많다고 일에만 집중하여 쉬고 잠자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기계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절제는 좋은 것이라도 오용, 남용으로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게 하고 좋은 것이 되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도 우리 생명은 한계가 있어 약하여 쓰러진다. 생명의 본질을 놓치고 떠났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요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생명과 활력이기에 그 말씀이 생명을 일으키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떠나 살기에 건강과 생명을 잃고 있다. 건강해 보여도 죽음에로 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약을 주시다. 돌판에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을 써 주시고 그대로 따르면 살 것이라 언약하시다. 법의 약, 말씀의 약, 구약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그 약을 먹어 내 것으로 삼지 않고 여전히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하나님은 사람이 건강하게 생명 누리고 살기를 원하시기에 돌에 기록한 약을 폐지하고 새로운 약을 개발하여 사람의 마음판에 기록하시다. 마음에 새겨진 약은 내가 얼마나 생명을 떠나 있는가를 알게하고 생명을 원하게 하여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 신약을 쉽게 갖도록 바로 옆에 친근하게 지나며 마음에 가까이 관계를 맺고자 사람이 되어 찾아 오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시다. 이제 하나님 말씀과 예수를 마음에 받아드리기만 하면 온전한 건강과 영원한 생명에로 회복되고 그것을 누리게 된다. 약은 잃은 건강과 생명을 회복하게 한다. 참 건강과 영생을 주는 것은 오직 신약인 예수시다.

어떤 반응? What Reactions?


사도행전 4:1-12 어떤 반응? What reactions? (3/17/19  전하는 교회 주일 설교)
개구리 나오는 경칩을 지나 춘분이 다가오며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니 완연한 봄기운을 느낀다. 봄이 오면 우리의 옷이 가벼워진다. 방 안에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온다. 변화에 반응을 한다. 몸에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가 여러 조사를 하고 처방 약을 받는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반응한다. 미국으로 이민하여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반응을 하며 사나? 사람은 평생토록 반응하며 산다. 어린 때 가정에서 부모와 형제, 학교에서 교사와 친구, 사회에 나가 직장, 사업에서 만나는 많은 환경과 사람, 제일 큰 것은 가정을 이루는 부부, 모두 관계 속에서 어떤 도전을 받고 그것에 반응하며 배우고 발전한다. 반응이 없다면 죽은 것이지만 살아 있기에 반응한다.

1 복음에 대한 반응:
1)복음의 능력: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첫 이적은 날때부터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다가 베드로 요한을 만나 예수 이름으로 고침받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자 베드로 요한은 이에 대하여 설명하며 복음을 전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건강하게 하였다. 예수 이름 외에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전한다. 예수는 생명이다. 죽은 것 같은 땅에서 생명이 올라오듯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요 능력이다. 병 나은 사람이 증거로 그곳에 같이 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드리고 믿으며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1) 4절 믿는 자가 5천이나 되었다.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가 3천명이었는데 기적을 보면서 복음을 듣자 사람들이 더욱 믿게 된 것이다.
2)지도자의 반응: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와서 보고 듣더니 싫어하여 베드로 요한을 잡아 감옥에 넣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자로 예배와 희생을 담당한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내에서 소란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담당하는 오늘 경찰과 같은 자다. 사두개인은 성전 치리회 담당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올바른지 살피는 자다. 이들은 베드로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한다. 왜 싫어하나?
그들이 볼 때 베드로 요한은 갈릴리 시골 사람들로 유대인 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은 범인이라 (13) 백성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다. 가르치는 내용에 상관 않고 가르치는 자의 자격을 논하고 있다. 소위 자격증 없이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은 이전까지 없었으나 지금은 사실이 되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다. 그들의 믿음과 전통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생각 전통이다.
이들은 사도들을 공회에 고발하다. 다음 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이 모이고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였다. 사도들을 불러 내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 이 질문은 주님이 받은 질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나? (21:23).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 권세를 내세우고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고자 한다. 여기 나오는 이름들, 안나스 가야바는 몇 달 전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다. 어쩌면 베드로 요한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주인 예수와 같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여 있다. 그들은 자기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따르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반응하나?
1)이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고 주와 함께 3년을 지나며 배우고 많은 이적을 보고 실습하였다. 이들의 꿈은 부풀었다. 나라가 새롭게 되고 자기들이 주와 함께 다스리는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그가 행하던 능력이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잡히어 죽을 것을 말씀하고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그들은 주를 모른다 부인하고 도망하였다. 이전 같으면 여기서도 부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풀려나거나 도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2)그런데 이들은 이전의 베드로 요한이 아니다. 무슨 권세로 누구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나? 하는 질문에 아주 대담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이 사람이 병에서 어떻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는지 물으면 확실히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여기 서 있다. 역사상 앉은뱅이로 태어난 자가 일어나 걸은 적이 없고 어떤 의사가 고칠 수 없는데 그가 건강하게 되어 그곳에 있는 것은 능력의 주께서 하신 일이라 한다. 확실하게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심문하던 자들이 다른 말 할 것이 없다.
3)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지만 베드로 요한은 담대하게 너희 말 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20). 병 나은 사람이 그곳에 있고 또 많은 사람이 믿으니 그들이 어찌하지 못하고 풀어주게 되었다. 5장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가다 (5:41). 이들은 대항하거나 분노하거나 싸우지 않고 오로지 예수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분명히 전하면서 박해 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3 사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한 자들로 변하였을까?
1)성령이 충만함이다. 여기 충만하다고 함은 과거 오순절에 성령 충만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함은 주의 영, 주의 생각이 그들의 생각 삶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무슨 생각이 먼저 있다. 생각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어떤 일을 당할 때 내가 주의 뜻 생각 따라 응하나 아니면 내 생각을 따라 응하나? 여기 심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모두 자기 권위 자기 자리 자기 생각 전통을 따라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병자가 고침 받고 하나님 찬양하는 일에 함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한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병자에게 행한 일은 착한 일이요 그가 건강하게 되고 구원의 생명 얻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2)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13). 예수로부터 배우고 훈련 받으며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다. 주의 능력과 기사를 보았다. 생명과 능력의 주를 믿는데 왜 이런 고난이 따르나? 주의 능력이 있는데 왜 물리쳐 주지 않나? 내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어린양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잡히어 심문당하고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정죄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주께서 그렇게 고난 당할 것을 말씀 하셨다. 또한 나를 미워하는 세상이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16:33) 하심을 기억한다. 주님이 당한 고난을 나도 받는다면 그것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담대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뒤를 따른다. 욥이 재산 자식 건강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생할 때 부인은 믿음은 무슨 믿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한다. 욥은 부인에게 어찌 그리 어리석은고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데 재앙은 받지 않겠나?(2:10)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하며 마음으로 입으로 범죄하지 않다.
주께서 고난 당하였고 그 전과 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고난을 당하였다. 나혼자라 생각하면 고통이 심할 수도 있으나 나와 같이 고난 당하는 자가 많이 있음을 알면 잘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면 그대로 되었다. 말 한 마디에 3 6개월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았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시키고 바알신 아세라신 선지자 850명을 모두 죽이다. 3년 반 기근이 끝나고 비가 내릴 것을 말하다. 아합왕이 마차를 타고 갈멜산에서 이스르엘로 돌아갈 때 그 먼 길을 엘리야가 마차 앞에 달려갈 정도로 주의 능력을 힘 입었다. 다음 순간 왕비 이세벨이 아합을 죽이고자 하니 그가 살겠다고 도망하여 먼 길 호렙산으로 가 굴에 숨다. 주를 향한 열심이 특별했으나 나만 홀로 남았으니 나를 죽여 달라고 한다. 살려고 도망했지만 이젠 죽고 싶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남긴다 (왕상19:18) 한다. 엘리야가 새 힘을 얻어 후계자를 세우고 왕을 세우는 일을 한다.
3)사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그와 함께 있었다.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깨치고 영원한 생명, 죽지 않은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 것이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시나? 고난 후에 영광 생명이 있는 것을 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11장 믿음장 마지막에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주의 길을 걸었기에 이런 사람을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11:38)고 한다.
로마에서의 기독교 박해와 순교를 기억한다. 네로로부터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겠다 할 정도로 오가작통법을 적용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화형, 원형극장에 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하는 고통이 왔으나 많은 이들이 감당하다. 그러나 250년이 못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지금 캐톨릭 중심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순교자의 피를 통해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 준다.

4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가?
1)일단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음으로 살고 있음이 감사하다. 베드로 요한 같이는 못 되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 구원과 생명의 감격을 가지고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전하는 교회 교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믿는 그 분을 전하고 나눌 수 있을까?
2)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하나? 부부간이나 친구나 이웃, 교회 안에서 어려움과 아픔이 어떻게 일어나나? 내 생각 내 주장에 이끌려 다른 사람과 그가 하는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나? 또 내가 판단 받고 정죄를 받을 때 나는 어떻게 응하나? 피하거나 아니면 다투거나 갈라지거나 하지 않나? 베드로 요한을 보면서 내가 주 안에서 묵묵히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나?
3)그 비결은 바로 성령 충만이다. 날마나 아침마다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기도하며 주의 말씀과 그의 삶을 기억하고 주께서 하신 일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나? 오늘 피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주의 은혜로 사람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세워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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