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9, 2021

교회와 목사 Church and Pastor

 교회와 목사 Church and Pastor 

교회가 팬데믹으로 1년 이상 모이지 못하고 비대면 예배와 모임을 가지면서 건물은 있지만 비어 있는 가운데 교회가 정말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많은 교인들이 교회와 거리가 생긴 삶에 익숙해져 있어 이전 함께 모이던 교회 모습으로 회복이 쉽게 될까 우려도 있지만 교인보다는 목사에게 더하다.

목사는 교회가 아니라도 사역지가 있어 병원이나 군대, 학교, 봉사기관 선교지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목사가 없으면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교인이 많든지 작든지 교회에는 목사가 ‘양의 목자’로 있지만 양이 없어진다면 목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왜 존재하고 필요한가? 

교회는 인간 재생 산실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물과 성령, 육과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유대교 지도자 니고데모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에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목사는 말씀과 성령의 사람으로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사람의 중생과 변화를 위해 쓰임 받는 존재다. 교회는 중생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 가족으로 자라나는 공동체다.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아버지로 자라난다.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삶에 열매가 있고 교회 안에서 밖에서 섬기며 빛으로 나타나게 됨으로 또 다른 사람을 주의 생명에로 인도한다.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중생과 변화를 받고 자라나고 있는가? 실상은 그러지 못하고 육체로 사는 자, 어린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이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체의 생각과 방식을 따라 살고 행동하기에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을 용납하지 않음으로 시기와 질투, 의견 차이와 분쟁, 갈등과 분리가 일어나고 피차 피곤하고 미워하기까지 하여 편가르기로 갈라서는가 하면 또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많다. 이런 교인을 위하여 일하는 목사가 얼마나 힘들며 교인들의 중생과 성장을 돕지 못한 책임감이 얼마나 클 것인가? 때로는 탈진상태에 빠져 사역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3년6개월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능력으로 바알 선지자를 제압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탈진하여 죽기를 바랐다면 오늘의 목사는 어떠하겠나? 

목사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확인할 것이다. 동기와는 상관없이 일단 목사가 된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고 기름부어 자기 사람 곧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책임지고 돌보시기에 탈진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하고 새롭게 일으키신다. 목사는 주의 뜻을 행하는 주의 종으로서 항상 주를 높이고 자기는 겸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엎드릴 것이다. 주를 섬기기에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면 주께서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할 때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하는 삶과 사역이다.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행하려면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사무엘의 자세가 요구될 것이다. 주의 말씀은 살아 활동하기에 그 말씀을 설교하고 사역하면 먼저 자신이 살고 교회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직분, 복 받은 교회가 아니겠는가!! 









 


Wednesday, September 22, 2021

성경과 노예 Slavery in the Bible

성경과 노예 Slavery in the Bible

노예제도는 인류사회와 함께한다. 고대 희랍에서 노예는 신분을 표시하는 척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만 아니라 기술, 교육, 재무와 가사 관리 등 스스로 다 감당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지만 주인이 노예를 물건처럼 취급하고 학대하는 일이 많았다.

성경은 노예 제도를 어떻게 말하고 있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해방하고 자유를 주어 자기 백성으로 삼고 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는 율법에 노예에 대한 규정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종된 백성으로서 서로를 형제로 대하게 하지만 가난하기에 자기를 팔아 종이 되는 자들이 있다. 그를 산 사람은 그를 노예가 아니라 품꾼으로 생각하고 학대하지 말며 6년 후에는 자유를 주되 양과 곡식 등을 충분히 주어 보내라 한다.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자녀를 낳으면 그 아내와 자녀는 주인에게 속하여 혼자 집을 나가기에 그가 주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송곳으로 귀에 구멍을 내고 종신토록 종으로 살게 하였다, 

성경은 노예의 생명을 귀하게 보았다. 사람을 잡아 노예로 파는 사람은 사형이며 도망한 노예는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원하는 곳에 살게 하였다. 노예를 때려 눈이나 이가 상하면 보상으로 자유를 주고 만일 매를 맞고 바로 죽으면 주인이 살인죄의 형벌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외국인 중에서만 노예를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그들의 소유로 삼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있게 하였다.    

신약 시대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의 통치를 따라야 했다. 로마는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기에 인구의 4분의 3 이상이 노예로서 건설과 사역에 동원되었다. 예수의 능력과 기적을 본 사람들은 그가 로마를 정복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고발 받고 로마의 법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예수께서는 노예제도 폐지나 사회개혁을 말씀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백부장의 종이 병든 것,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면서 대제사장의 종의 떨어진 귀를 고쳐주셨다. 

그는 많은 비유에서 종들의 존재와 형편을 말씀하였다. 탕자가 돌아와 잔치할 때 큰 아들이 종을 불러내어 사연을 물은 것은 당시 종이 많았음을 본다. 주인이 종들을 신임하여 달란트를 맡기며 장사하라 하고 충성스럽게 잘 한 종은 칭찬을 받고 그러지 못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과 함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 주인의 분배를 받도록 보냄 받은 종들을 소작농이 때리고 죽인 것은 당시의 현실이었다. 

노예는 인격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종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하시다. 마가복음은 종으로서 쉴 틈 없이 일하는 주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준다고 하신 그대로 ‘고난 당하는 종’으로 살며 으뜸이 되고자 하면 섬기는 종이 되라 하신다. 그는 사회개혁은 예수 사람으로 거듭난 인간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교회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라, 주인은 종을 공평하게 대하라 하고 도망한 종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며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으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의의 종이 되었기에 주어진 사회구조안에서 주를 섬기며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어 살면 가정과 교회, 사회에 개혁과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지 않겠나!!  








 

Friday, September 17, 2021

혼란의 시대에 세움 받은 지도자 A Leader Ordained in Times of Confusion

 혼란의 시대에 세움 받은 지도자 A Leader Ordained in Times of Confusion (삼상1-3장)

혼란의 사사 시대는 모세와 여호수아 때의 중앙 집권식 생활에서 지파마다 땅을 분배 받고 지파별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저마다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내려오던 하나님 신앙을 떠나 쫓겨나는 민족이 섬기던 신을 받아드리고 눈에 보이는 향락을 따라 사는 추세였다. 하나님은 잊혀지고 있다.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구하고자 그가 사용할 인물을 일으켜 압제와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필요한 때에 사사들을 일으켜 일하시다가 이제 마지막 사사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 사무엘은 삼손과 같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혼란시대에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을 사용하신다. 모든 것이 편안하면 자기 좋은대로 살지만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 한나의 경우 자식이 없는 고통이지만 더욱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그를 더욱 괴롭힌다. 그래도 한나는 한번도 브닌나와 대결하지 않는다. 남편이 한나를 위로하며 스스로 힘이 되어 주나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엘가나와 한나 가족이 성막이 있는 실로에 가서 예배하며 믿음을 지킨다. 한나는 성막을 찾아가면 하나님 앞에 자기 심정을 통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주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다. 놀라운 서원이다. 아내로서 아들 없는 것이 아픔이요 브닌나의 놀림으로 고통이 있기에 아들을 갖고 싶지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을 보면 한나의 심정은 자기 아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모른다. 한나는 실로 성막에서 섬기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도 있었다. 엘리는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술을 끊으라고 할 정도로 영적인 우둔함이 있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임재의 성막과 그가 세우신 제사장 주의 일군을 인정한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알지못하고 영적인 눈이 어두운 상태의 엘리가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축복한 것을 한나가 받아드리고 얼굴에 수색이 없어지고 음식을 먹었다. 영적인 눈이 어둡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해도 그를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인정 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젖뗀 후에 그 귀한 아들을 성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영적 지도에 맡긴다. 젖을 떼고 3살 정도 된 어린 아이를 실로 성막 엘리에게 맡긴다. 엘리는 한나의 외아들 사무엘을 맡으면서 한나를 축복하니 엘가나 한나 사이에 다시 5남매 자녀가 태어나다. 엘리의 삶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가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주께서는 여전히 그를 통하여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어느 면에 실로는 사자의 굴과 같은 곳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로 악행이 많다. 하나님을 경시 하고 죄악을 자행한다. 엘리가 이들에게 충고하여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였기에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악행을 계속한다. 성소에서 섬기는 여인들이나 하나님께 제사하고자 제물을 가지고 가는 자들은 두 아들의 횡포가 두렵고 이를 버려두는 엘리를 신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자 굴과 같은 이곳에서 사무엘이 매일 엘리와 두 아들을 만나고 이들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한나는 서원한대로 아들을 그곳에 맡겼다. 해마다 그는 옷을 지어 사무엘이 입도록 가지고 갔다. 나라 전체가 각자 자기 좋은 대로 하는 혼란이 실로 성막에도 나타나지만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사자 굴에 던짐 받은 다니엘을 지키시고 더욱 그를 세우시듯 하나님은 실로에서 사무엘을 훈련한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맡아 성막에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지도한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하였지만 기도로 받은 아들인 것을 알기에 사무엘을 하나님의 법대로 잘 훈련하고자 한다. 더욱 큰 것은 하나님이 직접 사무엘을 기르시고 훈련하신다. 사무엘이 자다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일어나 엘리에게 간다. 엘리는 자기가 아니라며 잠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런 일이 세번 있자 엘리는 그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잠자리로 돌려보내며 그가 다시 부르시면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가르친다. 아마 엘리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모른다. 올바른 지도다. 주의 종은 무슨 일을 하기 전 주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 사무엘은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지시 받은 대로 응하였더니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엘리 집에 대한 심판으로 무서운 내용이지만 엘리의 말에 순종하여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보고하다. 그래도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적 감각이 무디고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도 사무엘은 영적인 지도자로 양육 받는다. 실로 성막 앞은 그래도 당시 영적 훈련 장소로는 최적이다.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 말씀의 돌판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 임재가 함께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섬기는 제사장 가족은 타락하였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의 제물을 받아 드린다. 어린 사무엘은 거기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의 말씀을 받으며 훈련 받는다. 일찍부터 주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엘가나와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평소처럼 그곳에 가서 엘리의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지도자는 타락하였다 해도 그들을 세운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신실하신 분이라 그를 섬기는 것이다. 교회가 많이 변조되고 주의 종들이 잘못되었다 하여도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일하시며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나이든 엘리가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는 따로 있다.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듣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택함 받은 사람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신다. 

사사시대, 실로의 성막 자체가 아니라 자기 좋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시대와 성막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고 새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사사 시대에도 하나님은 사무엘 같은 일군을 일으키신다 그가 직접 관여하여 돌보신다.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신다. 왕을 세우고 열두 지파 각각으로 나누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였기에 하나님은 세상 왕이 그들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 스스로 그들에게 하는 일이 어떻게 다른가를 백성 스스로 알도록 하신다.

오늘처럼 온 세계와 사회가 혼란과 어려움으로 가득하고 교회도 세상을 닮아가고 있어 실망을 주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의 피로 세운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고 사람을 만나고 일으킨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다. 주의 종도 실수와 허물이 많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때에도 성실하게 일하시며 주의 마음에 드는 자를 세워 일하신다. 주의 택함으로 주의 손에 붙들리어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할 것이다. 



Monday, September 13, 2021

노예 정신 Spirit of the Bond Servant

 노예 (종) 정신  The Spirit of the Bond Servant

한국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정구를 치며 땀 흘리는 것을 보던 갓 쓰고 담뱃대를 문 한 양반이 “선교사 양반, 왜 그리 힘들게 땀을 흘려요? 우리 집 종을 데려다 시키시오”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노동 천시와 게으름만 벗어나면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으리라 관찰하였다. 한국만 아니라 미국에도 3D곧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 (Dirty Difficult Dangerous)은 기피하기에 이런 일은 살기 위해 온 외국인이 주로 한다. 옛날에는 전쟁포로가 노예로서 노동을 하였기에 그리스 로마의 건설이나 문명은 노예들이 이루었다고 본다. 

노예라면 주인이 있고 주인과 노예의 정신이 있다. 주인은 자기 것이 있는 소유주로 그것을 지키고 관리하며 책임감을 가진다. 종은 자기가 없고 생명 시간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하고 주인을 의지하며 주인이 시키는 것만을 하기에 눈치를 보고 책임감이 없다.  

한국은 전쟁포로가 없기에 동족을 노예로 삼은 드문 나라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던 때 가난한 자는 빚을 지다가 가진 것이 다 넘어가고 나중에는 살기 위하여 자기를 종으로 넘기고 양반 세력가는 이들을 압제하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종이 인구의 5%였으나 조선시대에는 40%였다. 조선 학자 성현은 백성 절반이 노비(남자는 노, 여자는 비)며 광대 장인 백정 기생 무당 상여꾼 천민을 합치면 70%가 되고 노비의 가격은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 가량이었다 한다. 홍문관의 이명현은 노비 757명을. 퇴계 이황은 367명을 자녀에게 물려주었다. 이렇게 수가 급증한 것은 세종대왕 이후였다. 세종은 노비를 재산으로 보고 고려와는 달리 양반 노비의 결혼을 허락하고 그 자녀는 노비가 되었다. 세종은 안정을 위하여 나라를 중국에 예속시키고 자기는 천자 아래 제후라며 많은 공물과 환관, 여자들을 바치고 자주국방 의지가 없었다. 그가 과연 성군인가 하는 질문이 오늘 학계에 일고 있다.

개인이 노예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망이기에 세조때에는 도망 노비가 100만명이 되고 이들을 잡기 위한 추노가 발전했으나 영조는 추노 제한, 병역 참가, 소작제를 확대함으로 노예의 수를 줄이다가 1801년 순조는 공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1894 갑오개혁은 신분제를 철폐하고 자유인의 길을 열었으나 “제발 우리를 내치지 마소서 주인님” 하며 종으로 굶을 걱정 없이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아 에브렛 존즈의 “노예는 자기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자랑한다”는 말이 통하였다.  

한국은 해방 이후 이승만이 기독교 정신으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고 1948년 자유 평등과 공화를 약속하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이 설립되었다. 박정희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성취동기를 일으켜 노예정신에서 자주정신, 자신감 책임감으로 정신과 인격에 변화를 가져오고 열심히 일하여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을 만들었다. 잘 살게 되어도 빈부는 언제나 존재하기에 사회주의가 평등을 내세워 부자의 것으로 배급하여 일하지 않고도 먹게 하며 책임감을 말살하는 ‘노예의 길’로 돌아가게 한다.  

생명을 위하여 주인에게 종속하는 종의 정신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종으로 그를 섬기는 것은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성장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보호와 축복을 받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섬기며 자랑스런 선교 교회로 발전한 것은 이 종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이 된다. 











Monday, September 6, 2021

속이 빈 대나무 Hollow Bamboo

 속이 빈 대나무 Hollow Bamboo (9/3/2021)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윤선도 오우가 5수) 는 대나무를 노래하는 것으로 작가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좋아한다. 사철 푸르며 곧게 자라고 든든한 것이 군자의 성품이라 하여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에 속하며 글과 그림에 많이 등장한다. 

대나무는 말레이시아 원산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미 호주 등에서 1500종류로 자라며 쉽게 숲을 이룬다. 대나무로 상징되는 전남 담양은 대나무 박물관이 있고 울산 태화강 10리 대나무 숲은 잘 알려진 장관이다. 

대나무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무쇠처럼 강하나 속이 비어 있어 가볍고 유연하여 ‘신이 준 선물’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물품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바구니, 물컵, 물통, 식기, 베개, 장신구, 피리, 창과 활, 건축자재, 쪼갠 것을 연결하여 종이로 쓰기도 한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고 전구를 만들면서 필라멘트 자료로 1600가지를 시도하다가 대나무 섬유로 성공하였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다년생 상록풀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무가 되려면 단단하게 하는 목질과 굵어지게 하는 형성층 나이테가 있어야 하는데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기에 나무가 아니라 볏과에 속한 풀로 분류된다. 볏과의 벼 보리 옥수수 등은 속이 비어 있어 잘 자라지만 대나무는 가장 잘 자라고 사시 상록으로 일반 나무 4배의 이산화탄소를 마시기에 공기를 청정하게 한다. 

대나무는 보통 5-6년 땅속에서 깊이 뿌리내려 영양을 받고 뻗어가며 한 덩이로 서로 연결하여 든든하게 자라다가 비 오는 어느 날 여기 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올라와 대밭을 이루고 줄기의 많은 마디 하나 하나가 동시에 자라기에 하루에 1미터까지 자라 한철에 30미터까지 키가 다 자란다. 그러면 더 자라거나 굵어지지 않고 뼈대를 단단하게 하며 120년까지 산다. 꽃이 피는 시기는 모르나 일단 화려한 꽃이 피면 나무는 죽는다. 마디에서 나오는 잎과 가지가 땅에 묻히면 뿌리로 자라나서 번식한다. 

대나무 속이 비는 것은 줄기가 빨리 자라는데 속의 세포가 따라가지 못하여 공백으로 남게 된다고 하지만 동시에 줄기 성장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고자 자기를 비운다고 본다. 속이 비었기에 가볍고 단단하여 히로시마 원폭 후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나무로 생명이 끈질기다. 또한 대나무는 유연하여 부러지기 보다는 휘어지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탄력성이 강하다.

대나무에서 신앙의 모습을 본다. 흙 속에서 뿌리가 먼저 든든하게 자라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는 장기간의 내면적 훈련과 인내로 형성된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고서 25년, 모세는 광야의 양지기 40년, 바울은 주를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3년, 이들의 삶은 자기를 비우고 인고한 훈련의 결과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리를 비우고 죄인을 찾아 사랑하고 구원하시다가 그는 죽임을 당하였으나 다시 살고 그에게 연결된 제자를 통하여 그의 생명이 온 세계에 퍼지게 하신다. 뿌리가 하나되어 뻗어가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될 때 세상을 향하여 힘 있게 뻗어가고 많은 박해와 어려움도 이겨내며 유연함과 강인함을 함께 보이지만 교만과 영화는 자멸을 초래한 것이 기독교 역사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비움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받아드리고 진실과 정직으로 올곧게 살며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품으면서 어떤 역경 환난에도 굳굳하게 서서 믿음을 지키고 전파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