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oul Ministry supports mission for one soul Jesus loves more than the whole world (Mark 8:36)
Saturday, April 24, 2021
아빠 아버지 Abba Father
백신의 후유증 Aftereffects of the Vaccine
Monday, April 19, 2021
4 월이 가장 잔인하다고? Is April the Cruelest Month?
4 월이 가장 잔인하다고? Is April the Cruelest Month?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 생기와 향기를 풍기고 새나 사람이나 사랑을 찾아 둥지를 틀며 생산과 회복의 희망과 기쁨이 넘쳐나는 4월을 영국 시인 엘리엇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니 무슨 말인가? 그는 433행 5부작 장시 황무지를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이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든다/ 겨울은 따뜻하였어/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은 마른 구근으로 이어주었지.
1922년에 발표한 황무지의 현실, 영국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차 대전으로 세계는 폐허가 되고 1918-20의 스페인 독감은 1억의 생명을 앗아가며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엘리엇과 그의 부인도 1919년 12월 이 독감으로 앓다가 회복 중에 이 시의 많은 부분을 썼다. 생산과 성장, 회생과 신뢰가 불가능하게 상처 입은 땅에 갇히어 존재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다.
눈이 녹고 꽃이 피어 농사를 시작하고 수확을 내다보는 가운데 젊은이는 사랑을 꿈꾸고 생산과 번성의 희망을 설계하는 4월, 산산조각 깨어지는 희망, 실현못할 가능성이 우리를 조소한다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 아닌가! 낭만과 정서, 신앙에 맞서 근대주의 매마른 지성으로 초월자를 배제하며 오는 덧없는 추억과 공허한 욕망의 황무한 현실, 런던 거리는 단테의 신곡 지옥의 모습이리라.
시카고 대학의 제임스 밀러 교수는 황무지를 엘리엇의 개인 생활에서 찾았다. 엘리엇이 1910년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한 의대생에 특별한 감정을 가졌는데 그가 해군으로 참전하여 1915년 4월 전사하자 큰 충격을 받고 급하게 결혼했지만 바라던 행복은 멀고 불행만 연속, 1921년 결혼관계 회복을 위해 스위스 로잔 호수가에서 휴양하며 쓰기 시작한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잔인한 상실감이라 지적한다.
오늘 코비드 팬데믹으로 세상이 닫히고 겨울같은 1년을 보내며 가까운 친구라도 멀리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문을 닫고 가족이라도 감염되어 혼자 고생하다 회복되지 못하고 쓸쓸하게 떠나다니 희망하며 치유를 기다리던 이에게는 이 보다 더 고통이 있을까! 생명이 사라진듯 겨우내내 앙상하던 나무들이 봄빛 받아 싹을 내고 피어나며 활기를 발산하는데 어떤 것은 매마른 가지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면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는 잔인함이 아닌가! 엘리엇은 시의 마지막에서 황무지에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지만 관건은 봄비를 받아드리는가 함이다.
인생 황무지에 예수께서 나타나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외친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칠까 의혹하는 자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를 잔인하게 직면한다. 주인에게 다섯을 받은 종은 장사하여 다섯을 더 남기는데 하나를 받은 자는 잃을까 두려워 땅에 묻어 둔다. 주인이 계산하며 남긴 자에게 충성되다, 묻어둔 자에게 악하다고 하며 그 하나를 빼앗아 열개 가진 자에게 주라.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데서 무엇을 느끼나? 그를 믿고 받아드리면 신분, 처지에 상관 없이 치유와 생명 구원을 얻는데 그를 멸시하고 외면하며 반대하여 제거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부활 생명으로 풍성한 4월에도 여전히 불신과 거절로 불모와 절망을 고집한다면 이는 가장 잔인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명과 평안과 자유는 누구의 것이기에!!
Tuesday, April 13, 2021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Monday, April 12, 2021
예수의 부활과 그의 제자들 Jesus' Resurrection and His Disciples
예수의 부활과 그의 제자들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His Disciples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것은 많은 사람에게 실망이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삶 전체가 무너지는 좌절과 허탈, 불신과 두려움이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그것을 확인하였으나 부활을 알지 못하였다. 주를 만난 여인을 통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지만 허탄한 말로 들렸다.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 걸고 있다 (요20:19).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주님은 두려움에 눌려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것은 말보다는 만남으로 확인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다. 유령이 아닌가! 놀라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 하시고 음식도 잡수신다. 두려움과 절망이 기쁨으로 변한다. 손으로 만지고 확인해야 믿겠다던 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찬양한다.
목회 초창기 정말 헌신하여 최선을 다하던 수난주간 성금요일에 깊은 영적 어둠의 수렁에 빠졌다. 실망과 의심에 덮여 모든 의욕이 사라지다. 부활주일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고민이다. 토요일 아침 본당 십자가 앞에 앉아 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다.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가 속에서 올라온다. 갈등속에 허우적하던 아내에게도 그날 밤 같은 일이 일어나다. 부활주일 새벽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을 모신 감격과 기쁨이었다.
제자들은 문을 닫아 걸었다. 마음도 잠그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다. 주님은 닫힌 문, 마음을 열고 오신다. 그들이 기뻐하자 평강을 다시 전하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다. 문을 열고 오신 주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어 보내신다. 주님은 닫힌 눈도 여신다. 실망 속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 동행하며 대화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저녁 시간 식탁에서 주님이 축사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바로 다른 제자들을 찾아가 그 일을 알렸다. 예수 사람을 정죄하고 이단으로 척결하려는 교만과 증오의 사울을 주께서 만나시니 그의 눈이 열리고 주를 보게되자 그는 많은 사람의 어둔 눈을 열어 생명의 빛을 보게하였다. 로마는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며 복음에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러나 주께서 콘스탄틴 황제로 문을 여시더니 로마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로 뻗어가게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신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숨은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불어넣은 생기와 같은 성령이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흙의 육체로 살았지만 이제 주의 성령으로 생령 곧 영의 사람이 된다. 거듭남, 중생이 일어나고 육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된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며 어려운 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악한 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첫 말씀이다. 용서는 구원을 위하여 오시고 죽으시는 주께서 원수에 대하여 하신 일이며 주의 생명과 영을 받은 사람의 사명이다. 인종과 언어, 계급과 성별의 차이와 대결 가운데 내가 먼저 용서한다면 중간의 담이 무너지고 화해와 자유가 임하지 않겠나!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에게 변화가 왔다. 주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Monday, April 5, 2021
주님이 부활한 날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 Three changes that happened to disciples on the resurrection day
주님이 무덤에 묻히서도 While He was laid in the Tomb
(토요) 무덤에 묻히어서도 Even while he was laid in the tomb
법의 나라 로마 재판관 빌라도가 유대인들로부터 행악자로 고발당한 예수에게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진리가 무엇이냐”며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를 따라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고 그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6시간만에 운명하였다. 고문을 당하며 많은 매를 맞고 피를 흘린 결과로 보통 보다 빨리 운명한 것이라 본다.
그는 운명하기 전 십자가에 달려서도 일곱마디 말로 그의 사명과 사역을 지속하며 그의 모든 일을 완성하고 아버지 품으로 가셨다. 숨겨진 제자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유대의 법대로 그를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안치하고 무덤문을 큰 돌로 막았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몰았지만 실상은 빌라도의 생각대로 예수로 인하여 그들의 위치에 위협을 느끼며 시기하여 그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어도 제자들이 훔쳐가고는 부활했다 할가! 안심이 되지 않아 무덤 문을 황제의 인을 쳐서 인봉하게 하고 군인들을 세워 무덤을 파수하게 하였다. 아무도 얼신하지 못하게 한다.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숨어 있으나 주를 따르던 여인들은 시체에 바를 향품을 구입하고 안식일이 지나면 무덤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안식일에 쉬지만 마음을 쉴 수가 없다. 이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주님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오셨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겪어야 하나 그는 죄가 없기에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그가 죽지 않으면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죄 없는 그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무덤에 묻힘으로 우리 인간의 마지막 원수 죽음을 친히 맛보신 것이다. 그는 죽어 무덤에 묻힘으로 우리 인간의 완전한 구주가 되시는 것을 확인시키신다. 그가 죽지 않고 구주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참 구주인 것을 나타내셨다. 잠간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다. 빌라도가 죽음을 확인하였는데도 군인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하였다. 3일이라는 시간은 몸이 부패할 수 있는 시간이나 그 시간에도 주께서는 여전히 그의 뜻을 이루신다.
주님은 죽음을 자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말대로 잠자는 것이면 이른 아침이면 깨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곧 일어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으나 일어날 시간을 기다리며 주무신 것이라 본다. 안식일의 휴식이요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준비라 본다.
주님이 무덤에 묻힌 때 어떻게 되었는지는 복음서에 언급이 없지만 수제자인 베드로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영으로 옥에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한다. 이들은 노아 방주 예비할 동안 알지 못하여 믿지 않던 자들이라 한다. 주께서는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선포하셨지만 죽어서 몸은 무덤에 있지만 영으로는 여전히 복음 전파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이 내용이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은 후에도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헬라인이 그를 만나자고 하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 하시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다. 그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열매가 맺혔다. 주님은 아버지 품에 가시지만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며 사역하게 하다. 이보다 큰 일도 하리라 하신 때 오순절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으며 주의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였다. 주님은 이런 준비를 하셨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합니다.
가상 7언 Seven Words on the Cross
(금요) 가상 7언 4/2/21
주님은 3년간 많은 가르침과 행하심으로 사역하셨으나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일곱마디 말씀하신 것은 그의 사역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1눅23:34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고 또 못을 박는 원수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시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심이라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되고 탕감되어야만 한다. 저들 스스로 용서하여 달라고 말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주께서 대신하여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죄용서와 구원이 바로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2 눅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께서 한편 강도에게 허락하신 낙원이다. 꼭 같은 죄로 죽어가는 두 죄인이나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하다 싶이 하나 이 사람은 자기는 죄인이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이제 그의 나라로 가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부탁한 것은 그의 믿음이요 또한 의탁이다. 주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저들의 죄 용서를 구하신 주께서 강도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새 나라를 허락하셨다.
3요19:26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다 십자가 아래서 가슴아파하시는 어머니를 보신다. 아들의 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들렸을 때 마리아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리라 하는 말씀을 들은 그대로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 하신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하였다. 이 말은 여자를 향한 존대어다. 그는 구주로서 마리아의 구주가 되기도 하고 또 모자 관계를 넘어서서 구주를 세상에 오게하는 도구가 된 어머니는 가장 귀한 여인이다. 존귀한 여인에게 자기를 아들로 인식시킨다.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표현한 주께서 사람의 아들로 일반 인간과 꼭 같은 사람으로 여인을 통하여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마리아에게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지만 주님은 그 옆에 있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위임하다. 어머니를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요한은 평생 마리아를 편하게 잘 모셨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음으로 사람관계 중 부모 자식의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게 하신다.
4 막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이 부르짖은 기도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은 죄다. 죄로 인하여 길이 막히고 버림받는 것을 안다. 버린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다. 예수 자신에게는 죄가 없지만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에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담이 생기고 버림 받은 주님이시다. 주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버림 받았기에 이제는 백성들을 버릴 이유가 없나이다 하는 의미다.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듯이 이제 모든 인류를 주의 손에 의탁하는 것이나 같다.
5요19:28 내가 목마르다. 육체적인 목마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40일간 금식하며 광야에 있을 때에 물을 마셨다는 근거가 없다. 여기 목마름은 주께서 8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신 그 목마름이다. 세상에 의가 없고 진리가 없어 주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 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세상에 많은 영적인 목마름을 말한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마시라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다. 주님의 목마름은 그가 함께 하는 인류의 목마름이다. 누가 채워주나? 군인이 제대로 마실 수도 없는 물을 주의 입에 갖다 대어 주었다. 목마른 심령을 누가 채워주나?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 물을 원할 때 세 용사가 적진을 뚫고 가서 물을 길러 왔다. 세상에서 복음이 없어 목마를 자의 목을 누가 채워주나? 오늘 우리는 복음의 생수를 들고 목마를 자를 찾아 채워주어야 할 것이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일의 완성이다. 빚을 다 갚았다.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저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려 함이라. 죄를 대신 처리하고 그들이 짊어질 죄의 값을 다 치루었다. 자유를 선물한다. 그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소식을 전하고 구원 완성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7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가상 7언은 아버지로 시작하여 아버지로 끝이 난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였다. 땅에 보내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이제 그가 떠나 왔던 아버지의 품, 그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품에 자기를 맡기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저녁 잠자리에 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던 기도다. 아버지 품에 자신을 맡긴다. 한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한 주님이 자기를 아버지 손에 부탁하고 맡겨드린다. 땅의 모든 여정이 끝난 후에 이를 곳이다.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신대로 그가 먼저 우리를 위한 처소를 준비하고 기다리면 우리의 때가 될 때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한다고 기도하며 주의 나라로 가는 기대와 소망을 가짐이 우리에게 기쁨이요 감사요 믿음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생명의 백신 The Vaccine of Life
생명의 백신 (The Vaccine of Life)
중국 후베이에서 2019년 11월 17일 첫 환자로 시작하여 미국은 2020년 1월20일 첫 진단 이후 원인이 이상한 바이러스 코비드 19로 알려지고 2021년 3월말 현재 미국에서 3100여만 감염에 56만4천명 이상이 사망, 세계 221나라에서 1억2천900여만명 감염, 282여만명이 죽는 세계적 팬데믹이 되었다. 일년 이상 마스크에 사회적 거리두기와 공식 모임 폐지 속에 시대말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역사에는 이보다 더 큰 역병이 여러 번 있었다. 로마는 앤토닌 역병(165-180)으로 황제가 죽고 5백만 이상이 죽음으로 군대가 힘을 잃게 되고 저스티니안 역병(541-2)으로4천만 이상이 죽어 ‘문명의 종말이요 인류가 소멸될 위협’ (역사가 스노우덴)이 되었다. 중세의 흑사병(1347-52)은 2억을 죽이는 최대 재난이었고 신대륙에 도착한 개척자가 전달한 병으로 100여년간 원주민5천만 가량이 죽어 90%정도가 사라졌다. 근대에는 스페인(1918) 훌루로 5천만이 죽고 그 외에도 콜레라 황열병 천연두 등으로 많은 생명을 잃었다. 처음에는 예방이나 치료제가 없다가 근대에 에드워드 제너, 루이 파스투어 같은 과학자들의 연구로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어 그 후로는 많은 생명을 구하고 많은 역병이 사라지게 되었다.
1년 이상의 팬데믹은 일상의 제한 이상으로 감염과 격리, 호흡 곤란과 죽음의 두려움을 준다. 가까이서 감염되고 외롭게 고생하다가 호흡이 멈추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지만 바이러스를 잡는 약과 치료가 없다는 것이 더욱 아픔이었다. 다행한 것은 여러가지 백신이 나와 접종순서를 정하고 접종을 시작하였으나 아직 공인된 백신은 없는 형편이다. 그래도 저마다 먼저 백신을 맞으려고 등록하고 기다리는데 내가 사는 카운티에는 2달 동안 동록조차 못하다가 이제야 1차 접종을 하였다. 접종이 효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접종카드를 가지면 여행이 가능하고 사람을 만나고 모임에 참여할 수 있기에 마음이 놓이고 다소 자유로워진다.
백신이란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약하게 처리하거나 죽여 만든 단백질 또는 핵산을 인체에 주입하여 인체로 병원체 정보를 습득하여 항체를 형성케 하고 면역을 생기게 하여 예방하게 한다. 병에 따라 백신이 다르고 또 병원체에 변이가 생기면 그 백신은 무용하게 된다. 코비드 19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코비드19의 감염을 막아 고통과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다.
백신으로 어떤 병에 감염되어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결국은 죽는 것이 인간이다. 죽는 것은 생의 진리요 누구나 겪어야 하는 길인데도 그것이 두려워 죽지 않기를 바란다. 죽음 후의 세상이 더 좋다면 죽는 것을 왜 싫어할까? 한국의 가난 속에서 미국이 잘 산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국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미국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 미국에도 여전히 가난과 아픔은 있다.
좋은 소식은 영원히 죽음을 이겨내는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고 죽었을 때 그는 죄가 없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다시 죽지 않는 생명체가 되게 하고 생명의 백신으로 만드셨다. 누구든지 그를 받아드리면 그 속에 죄와 죽음을 대항하는 항체와 면역이 형성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아픔과 죽임이 없는 천국을 주와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축복은 바로 나 자신의 결단과 생명의 백신 접종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