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4, 2021

아빠 아버지 Abba Father

아빠 아버지 Abba Father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 곁을 떠나 가셨다. 목회에 전념한다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녀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있지만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좀 더 잘 해주고 싶다. 그러면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고 있지만 실제 삶이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전통과 달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그가 12살에 부모와 함께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그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며 (눅2:49) 요셉이 옆에 있는데도 예수는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또 확인시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은 그가 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창조주요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가 되신다. 
아버지는 권위가 있어 가정에서 무엇이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매우 엄격하고 두려운 존재로 인정되었다. 내가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한 외과의사는 10대에 아버지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학교 성적을 가지고 가면 아버지는 항상 꾸중과 채찍으로 대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배우자 그는 아버지같은 하나님은 싫다며 교회와 하나님을 떠났다고 한다. 
예수께서 일찍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듣자 그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버지라’는 확신이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제자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평생 아버지와 그의 나라를 전하고 사역하며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하였다. 
아빠 아버지는 중복된 표현 같다. 아빠는 우리 말 아빠나 영어 Daddy같이 어린아이의 말로 생각되나 사실 그 말은 아람말 Abba로 어린아이의 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성인이 아버지에게 또는 제자가 스승에게 정교회에서는 교회 총책임자에게 더하는 칭호다. 아버지는 헬라말 Pater로 생명을 낳은 창조자를 의미하는 하나님 칭호가 되나 접근이 어려운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아버지에 아빠가 더하여지면 뜻이 더욱 명확하게 된다. 목회 초창기 성경공부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로 불러보자고 했더니 한 사람은 불경한 일이라며 자리를 떠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기도하셨다. 여기 아빠 아버지는 무슨 의미인가?  
아빠는 관계의 친밀함과 신뢰를 의식이 아니라 일상 말로 표현함이다. 친밀함이 없는 관계가 많다. 예수께서는 “그가 나를 알고 내가 그를 안다”. 그가 하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요 그의 행함은 그의 행함을 본 것이다. 그는 말과 행동 생각, 몸의 구조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친밀함을 느낀다. 예수께서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끝내며 아빠 앞에 나아가고 피곤과 어려움, 반대와 고통을 직면해도 항상 그의 손을 붙잡으며 힘을 얻었다. 변화산에서는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확인을 다시 받았다. 
아빠는 존경과 순종을 표현함이다. 말과 행함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를 기쁘시게 한다. 아버지는 전지 전능하기에 12령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모든 원수와 십자가의 잔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그 잔을 받아드리고 순종하며 자신을 아빠 손에 온전히 맡겼다.  
나도 주를 따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을까? 바울은 성령과 아들의 영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고 한다(롬8:15 갈4:6). 그는 자랑스런 교육 신분 전통을 의지하여 예수를 박해하였지만 “사울아 사울아” 다정하게 부르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의 역사로 그를 영접함으로 중생을 확실히 경험하게 되니 이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신앙 년조가 아니라 성령으로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일어난 일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와 친밀하게 지나고 신뢰하며 그를 높이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사랑하여 구하는 생명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믿게 하였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상속 받고 주의 나라에서 주와 함께 다스린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걸어가며 기대하는 바가 아니겠나!

백신의 후유증 Aftereffects of the Vaccine

백신의 후유증 Aftereffects of the Vaccine 
일년 이상 코비드 팬데믹으로 생활이 위축되고 제한되었으나 백신이 나와 5월까지면 미국 인구 대부분이 접종할 것이라니 한층 자유와 안전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백신 접종으로 그 질병에 감염되지 않고 보호 받도록 되어 있기에 모든 사람이 접종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백신에는 후유증이 있다. 이는 백신이 몸 속에 항체를 형성하여 보호체제를 만드는 징표이기에 정상적인 것이다. 코비드 백신의 후유증은 주사 맞은 곳이 붉고 아프고 붓거나, 몸이 피곤, 머리와 근육통, 오한과 열, 메시끄움이 일어나며 1차보다는 2차가 더 심하다. 후유증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내게는 이틀간 몸이 나른하고 한기에 약간의 두통이 있었다. 백신은 이런 후유증을 가져오지만 큰 위험을 막고 건강한 삶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사람은 꿈을 찾아 이동한다. 가난과 무지,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1900년 초 조선에서 많은 사람이 간도 연해주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자기 집을 떠난 낯선 땅이 고생이지만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이다. 연해주에 간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그 지역을 새롭게 발전시켰지만 스타린은 1937년 고려인을 일본의 간첩 위협으로 생각하여 중앙 아시아 황량한 벌판에 실어다 버렸다. 그곳에서 맨손으로 토굴을 만들어 겨울을 지나며 황야 개척자의 삶 전체가 고난이라도 희망이 있기에 굴하지 않고 훈련과 인내를 쌓았다. 한 세대가 지나 이들 중에서 타지키스탄의 넬리 김은 1976, 1980올림픽 체조에서 5개의 금메달을 얻고 후진양성과 국제심판으로 활약하도록 뻗어나갔다. 
1960-70년대 미국 이민은 한국의 가난을 벗어나는 숨통이었지만 미국이라고 이주 후유증이 없는 편한 삶은 아니다. 언어와 문화 풍습 용모가 다르기에 소통 불편에다 소외를 느끼면서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밤낮 없이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다. 뉴욕의 많은 사업처는 일년 365일 24/7 개업이라 철문설치가 필요없기에 인종폭동이 일어날 때도 내릴 문이 없었다. 돈을 많이 벌면서도 그 돈을 헤아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시간만 있으면 쉬고 싶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오직 교회가 안식과 격려를 더하는 곳이었다. 90년대에 한국이 잘 살게 되며 고생하는 이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지만 여기 이민자는 심한 고생을 겪으며 자녀를 교육하여 사회에 진출시키고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  
문제는 돈을 벌어도 그 돈이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돈은 모았으나 많은 이가 건강을 잃고 결국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 세상 후의 일을 내다보고 많은 종교가 일어났지만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그 실체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그곳으로 안내하는 복음이다. 누구든지 주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고 한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한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후유증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신대로 남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 받고 죽어 무덤에 장사되는 고통이다. 그러나 죽음은 죽지 않은 생명의 부활로 연결되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영생과 천국에로 나간다. 고난이 싫어 주님을 거절한다면 영원한 죽음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지만 영생의 천국 복락을 누리려면 자기 부인과 십자가 고통의 후유증이 있다해도 생명 백신 예수님을 받아드려야 하지 않겠나!










Monday, April 19, 2021

4 월이 가장 잔인하다고? Is April the Cruelest Month?

 4 월이 가장 잔인하다고? Is April the Cruelest Month?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 생기와 향기를 풍기고 새나 사람이나 사랑을 찾아 둥지를 틀며 생산과 회복의 희망과 기쁨이 넘쳐나는 4월을 영국 시인 엘리엇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니 무슨 말인가? 그는 433행 5부작 장시 황무지를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이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든다/ 겨울은 따뜻하였어/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은 마른 구근으로 이어주었지. 

1922년에 발표한 황무지의 현실, 영국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차 대전으로 세계는 폐허가 되고 1918-20의 스페인 독감은 1억의 생명을 앗아가며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엘리엇과 그의 부인도 1919년 12월 이 독감으로 앓다가 회복 중에 이 시의 많은 부분을 썼다. 생산과 성장, 회생과 신뢰가 불가능하게 상처 입은 땅에 갇히어 존재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다. 

눈이 녹고 꽃이 피어 농사를 시작하고 수확을 내다보는 가운데 젊은이는 사랑을 꿈꾸고 생산과 번성의 희망을 설계하는 4월, 산산조각 깨어지는 희망, 실현못할 가능성이 우리를 조소한다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 아닌가! 낭만과 정서, 신앙에 맞서 근대주의 매마른 지성으로 초월자를 배제하며 오는 덧없는 추억과 공허한 욕망의 황무한 현실, 런던 거리는 단테의 신곡 지옥의 모습이리라. 

시카고 대학의 제임스 밀러 교수는 황무지를 엘리엇의 개인 생활에서 찾았다. 엘리엇이 1910년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한 의대생에 특별한 감정을 가졌는데 그가 해군으로 참전하여 1915년 4월 전사하자 큰 충격을 받고 급하게 결혼했지만 바라던 행복은 멀고 불행만 연속, 1921년 결혼관계 회복을 위해 스위스 로잔 호수가에서 휴양하며 쓰기 시작한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잔인한 상실감이라 지적한다.   

오늘 코비드 팬데믹으로 세상이 닫히고 겨울같은 1년을 보내며 가까운 친구라도 멀리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문을 닫고 가족이라도 감염되어 혼자 고생하다 회복되지 못하고 쓸쓸하게 떠나다니 희망하며 치유를 기다리던 이에게는 이 보다 더 고통이 있을까! 생명이 사라진듯 겨우내내 앙상하던 나무들이 봄빛 받아 싹을 내고 피어나며 활기를 발산하는데 어떤 것은 매마른 가지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면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는 잔인함이 아닌가! 엘리엇은 시의 마지막에서 황무지에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지만 관건은 봄비를 받아드리는가 함이다.

인생 황무지에 예수께서 나타나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외친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칠까 의혹하는 자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를 잔인하게 직면한다. 주인에게 다섯을 받은 종은 장사하여 다섯을 더 남기는데 하나를 받은 자는 잃을까 두려워 땅에 묻어 둔다. 주인이 계산하며 남긴 자에게 충성되다, 묻어둔 자에게 악하다고 하며 그 하나를 빼앗아 열개 가진 자에게 주라.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데서 무엇을 느끼나? 그를 믿고 받아드리면 신분, 처지에 상관 없이 치유와 생명 구원을 얻는데 그를 멸시하고 외면하며 반대하여 제거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부활 생명으로 풍성한 4월에도 여전히 불신과 거절로 불모와 절망을 고집한다면 이는 가장 잔인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명과 평안과 자유는 누구의 것이기에!! 











Tuesday, April 13, 2021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요한 19:5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 장로들이 군인을 인솔하여 예수께서 기도하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를 체포하였다. 제자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항하고 주를 보호하려 할 때 칼을 꽂아라. 열두 령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말한 것이 응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알고 끌려간다. 조롱과 채찍을 맞는다. 종교재판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신성모독의 죽을 죄라는 것에 합의하고 사법권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압송한다. 빌라도가 고발자에게 묻는다. 
무슨 죄로 이를 고발하나? 
그는 행악자라 한다. 빌라도의 심문이 시작된다. 첫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응답은 그것을 누가 하는 말인가? 네가 하는 말인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인가? 네가 무슨 일을 하였나? 행악자라는 고발이니 그 내용을 알고 싶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내 종들이 싸우고 나를 유대인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네가 왕이 아닌가? 나는 왕이다. 이를 위하여 태어나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한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로마가 법을 추구하나 진리에 대한 냉소라 본다. 로마의 법이나 빌라도 자신이나 진리 보다는 법을 빙자하여 편리와 유익을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조롱과 멸시가 시작된다.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옷을 입힌다. 경멸이다. 왕의 차림을 보이며 조롱하고 채찍질한다. 채찍은 몸의 살이 찢어지는 형벌 도구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고발한 군중 앞에 내세우며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두 번이나 말을 한다. 
이 사람을 보라! 무슨 말인가? 
너희들이 행악자라고 고발하던 그 사람이다. 유대인들과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그를 미워하고 없애겠다는 사람이다. 빌라도는 그들의 시기로 그가 고발되는 것을 알았다. 너희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이다. 적대자가 되고 너희들의 권위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다. 그것이 악한 일로 보일 것이다. 이미 매를 많이 맞았다. 너희가 비웃는 그대로 조롱스런 옷과 관을 입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내가 심문할 때 잘못을 찾지 못한 무죄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말한 행악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국가 반역행위에 속하는 왕인가 하여 심문했으나 그런 증거가 없다. 만일 그가 왕이라면 그의 신하들이 일어나 싸울 것이 아닌가! 너희들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왕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상주의자 아니면 정신 착난을 일으킨 자로 본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나라를 말하고 있기에 그는 이 세상 질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진리를 말하는 망상가라 본다는 것이다. 그는 죽일만한 죄가 없다.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이 사람은 너희 왕이다. 너희가 추구하는 왕이다. 너희들이 구하는 왕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가이사 한 사람 외에는 왕이 없다고 응한다. 이들이 정말 그러한가? 그들은 독립과 왕을 원한다는 진리를 숨기며 그들은 그를 반역자요 행악자로 십자가 처형하라고 고발한 사람이다. 가이사가 있는데 그가 왕이라면 반역이라 죽일 죄가 된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빌라도는 그의 피에 자기는 관련이 없다고 책임을 피하며 손을 씻자 유대인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이 지겠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국가와 국가의 대항 싸움이다. 빌라도는 그와 대결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원하는대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었다. 그는 죄가 없으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드리다. 

이 사람을 보라 함은 그를 처다보는 사람은 그의 백성으로 그의 통치와 생명을 받아드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로마 법으로 죽을 죄가 없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메시아다. 그가 죽음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함이다. 그가 채찍에 맞고 고난 당하고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참으로 왕이요 메시아다. 온 인류의 메시아다. 빌라도의 지시에 따라 십자가 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였다. 예수는 탄생할 때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찾은 유대인의 왕이다. 그의 가르침이나 행함은 어떤 왕도 할 수 없는 왕중의 왕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과 법을 말씀하고 그 백성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을 나타내었다. 그를 바라보는 자는 모두 새롭게 되었다.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눌림 받는 자가 자유를 얻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된다. 
바울로 변한 사울에게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다 행22:14고 하다.  진젠돌프 백작은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며 그 아래 써 있는 문구, 나는 너를 위해 몸을 주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하는 물음 앞에 자기를 드리며 자기의 위치 재산 모든 것을 드리고 주의 사람이 되고 모라비안 교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펄전의 소년 시절 사45:22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중생을 체험하고 세계적인 전도자 설교가가 되었다.  

오늘도 이 사람을 보라는 말씀은 능력이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기에 죄인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왕중의 왕이시라 그 앞에 나아가면 참 평안과 자유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이제 그는 우리 앞에 서 계신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 사람을 보라 그리하면 살리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를 바라보고 영접하여 새생명, 영생을 얻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지 않겠나?

Monday, April 12, 2021

예수의 부활과 그의 제자들 Jesus' Resurrection and His Disciples

예수의 부활과 그의 제자들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His Disciples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것은 많은 사람에게 실망이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삶 전체가 무너지는 좌절과 허탈, 불신과 두려움이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그것을 확인하였으나 부활을 알지 못하였다. 주를 만난 여인을 통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지만 허탄한 말로 들렸다.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 걸고 있다 (요20:19).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주님은 두려움에 눌려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것은 말보다는 만남으로 확인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다. 유령이 아닌가! 놀라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 하시고 음식도 잡수신다. 두려움과 절망이 기쁨으로 변한다. 손으로 만지고 확인해야 믿겠다던 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찬양한다.

목회 초창기 정말 헌신하여 최선을 다하던 수난주간 성금요일에 깊은 영적 어둠의 수렁에 빠졌다. 실망과 의심에 덮여 모든 의욕이 사라지다. 부활주일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고민이다.  토요일 아침 본당 십자가 앞에 앉아 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다.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가 속에서 올라온다. 갈등속에 허우적하던 아내에게도 그날 밤 같은 일이 일어나다. 부활주일 새벽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을 모신 감격과 기쁨이었다. 

 

제자들은 문을 닫아 걸었다. 마음도 잠그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다. 주님은 닫힌 문, 마음을 열고 오신다. 그들이 기뻐하자 평강을 다시 전하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다. 문을 열고 오신 주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어 보내신다. 주님은 닫힌 눈도 여신다. 실망 속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 동행하며 대화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저녁 시간 식탁에서 주님이 축사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바로 다른 제자들을 찾아가 그 일을 알렸다. 예수 사람을 정죄하고 이단으로 척결하려는 교만과 증오의 사울을 주께서 만나시니 그의 눈이 열리고 주를 보게되자 그는 많은 사람의 어둔 눈을 열어 생명의 빛을 보게하였다. 로마는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며 복음에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러나 주께서 콘스탄틴 황제로 문을 여시더니 로마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로 뻗어가게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신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숨은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불어넣은 생기와 같은 성령이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흙의 육체로 살았지만 이제 주의 성령으로 생령 곧 영의 사람이 된다. 거듭남, 중생이 일어나고 육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된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며 어려운 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악한 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첫 말씀이다. 용서는 구원을 위하여 오시고 죽으시는 주께서 원수에 대하여 하신 일이며 주의 생명과 영을 받은 사람의 사명이다. 인종과 언어, 계급과 성별의 차이와 대결 가운데 내가 먼저 용서한다면 중간의 담이 무너지고 화해와 자유가 임하지 않겠나!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에게 변화가 왔다. 주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Monday, April 5, 2021

주님이 부활한 날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 Three changes that happened to disciples on the resurrection day

예수님 부활한 날 일어난 제자들의 변화 요20:19-23 

예수님은 죄 없는 죄인으로 십자가 처형되고 무덤에 묻히었다. 갈릴리에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도망하고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알리다. 베드로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은 확인하였으나 부활은 알지 못하고 돌아가 함께 있다. 무덤을 들여다보던 마리아가 흰옷 입은 두 천사로부터 누구를 찾는가 질문을 받고 돌아보며 부활한 주님을 만나나 동산지기인 줄로 알다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주님을 알았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으나 주님은 그를 보내며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한다. 제자들은 여인이 허탄한 소리를 한다고만 생각하고 믿지 않는다. 여전히 두려움과 실망, 의심 가운데 있다. 천사가 말한대로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던대로 살아 나셨다. 주님은 살아계시기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본문에 적어도 세가지 변화를 본다. 
두려움이 기쁨, 실망이 소망,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다. 부활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믿지 못하고 의혹 중에 있다. 스스로는 실망이다. 주께서 평화의 인사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매우 놀란다. 유령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주님은 손과 옆구리 보이시며 십자가에 달렸던 그들의 주라는 것을 확인시키며 평화를 준다. 의심할 수가 없다. 큰 기쁨이었다.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기에 그에게 그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그는 믿지 못한다고 한다.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하다. 주님은 그가 다른 제자와 함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셨다.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고서도 그를 믿을 수가 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불신과 의혹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과 소망, 찬양 고백으로 변한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현장이다. 
사울은 예수 부활 증거하는 자를 이단이라 하고 그들을 발본색원하는데 앞장 서게 되었다. 스데반을 죽이는 증인이 되고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을 체포할 권한을 받았다. 다메섹 가까이 가는 길 대낮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는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다. 그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를 만난 것이다. 그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사울의 눈이 어두워지고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으면서 그의 눈이 열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의 삶은 변화하였다. 
내게 영혼의 가장 어둡고 답답한 시간, 1978년 3월 23일 목요일 밤에서 25일 아침 11시까지 힘들고 어려운 의혹과 불신이 내 마음을 채웠다. 강단 앞에 있는 나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시는 것만으로 나의 삶은 기쁨과 고백으로 채워졌다. 주님이 오시면 변화가 일어난다. 두려워하던 그들에게 샬롬 평안이 임하고 기쁨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다.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ㄴ 것이다. 주님이 들어오셨다. 어떻게 오셨는지는 몰라도 그는 와 계신다. 그들을 만나시더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다. 문을 열고 그들을 내어 보내신다. 주께서 문을 열어 주신다. 닫힌 문을 여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주님을 무덤에 장례하고 유대인과 로마 군인은 큰 돌로 무덤을 막아 닫았다.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의 돌을 굴려주리오! 주의 천사가 이미 돌을 옮기었다. 
무덤은 열려 있다. 주께서 무덤에서 나오기 위함이 아니라 무덤이 열린 것을 밖에서 보고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덤 안에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여인도 베드로 요한도 들어가 보았다. 수의와 머리를 싼 수건은 그대로 있었다. 주께서는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나오듯이 수의에서 나온 것이다. 잠을 잘 때는 이불을 덮지만 깨어 일어나면 이불을 저치고 나온다. 더 이상 이불이 그를 누르지 못한다. 주님의 부활은 그를 수의로 묶어 둘 수 없고 무덤이 그를 덮을 수가 없는 것을 보여준다. 죽음이 생명을 누를 수 없다. 무덤은 영원히 열리게 된다. 
주께서 열면 닫힌 문이 열린다. 로마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기독교에 문을 닫으며 많은 사람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문을 열었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고 나간다.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구었지만 주를 만난 기쁨이 충만한데다 주께서 그들을 보내시니 그들은 뛰어 나간다. 가며 주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들의 증거는 주의 부활과 부활한 그가 구주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문을 잠그고 있다. 서로 믿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한다. 코비드로 인한 격리가 아니라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인종과 계급 사이에 장벽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교류가 없다. 주께서는 닫힌 문을 여시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과 세리, 이방인 세계의 문을 열었다.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면 온 세계로 문이 열린다. 이것이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주님은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그의 숨과 성령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 곧 하나님의 숨길을 불어 넣으니 그가 생령이 되었다. 주님의 생기는 생명을 일으킨다. 특히 주님은 부활하여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이 되었기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숨은 하나님의 생기다. 제자들이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 생명이다. 중생이 필요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나야 영적 생명을 가지게 된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중생한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나가서 부활의 증인이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을 옛날의 갈릴리 사람들로 그들의 약점과 한계를 보지만 이제는 새로워진 사람이 되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존경 받는 사람이나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 첫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도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령으로 나야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영의 사람이 되어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자, 손해를 끼치고 박해하는 자를 어떻게 하나? 피하거나 욕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가 없다. 용서하면 평화와 자유가 있다. 주께서 하신 일이다. 십자가에서 첫 말씀은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죄 용서는 주께서 하신 첫 째 일이다.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주시기 위하여 오시었다. 그런데 죄용서가 쉽지 않기에 성령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가능해진다. 그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우리 관계의 삶에는 서로 받아주고 용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역에 필요한 능력을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지만 먼저는 중생하여 새 사람되는데 주의 숨을 받아 성령을 받아 생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새롭게 되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서 능력을 받으면 폭도가 된다. 에스겔이 경험한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에게 생기가 들어가게 하니 그들에게 살이 덮이었으나 생명의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생기가 들어가게 하니 대군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생명으로 새로워지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여 주의 부활과 구주 되심을 전파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주를 믿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령이 역사한 것이다.  

이 세가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 힘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요 은혜다. 주를 믿는 자로서 이런 감격과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이 무덤에 묻히서도 While He was laid in the Tomb

 (토요) 무덤에 묻히어서도 Even while he was laid in the tomb  

법의 나라 로마 재판관 빌라도가 유대인들로부터 행악자로 고발당한 예수에게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진리가 무엇이냐”며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를 따라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고 그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6시간만에 운명하였다. 고문을 당하며 많은 매를 맞고 피를 흘린 결과로 보통 보다 빨리 운명한 것이라 본다. 

그는 운명하기 전 십자가에 달려서도 일곱마디 말로 그의 사명과 사역을 지속하며 그의 모든 일을 완성하고 아버지 품으로 가셨다. 숨겨진 제자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유대의 법대로 그를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안치하고 무덤문을 큰 돌로 막았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몰았지만 실상은 빌라도의 생각대로 예수로 인하여 그들의 위치에 위협을 느끼며 시기하여 그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어도 제자들이 훔쳐가고는 부활했다 할가! 안심이 되지 않아 무덤 문을 황제의 인을 쳐서 인봉하게 하고 군인들을 세워 무덤을 파수하게 하였다. 아무도 얼신하지 못하게 한다.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숨어 있으나 주를 따르던 여인들은 시체에 바를 향품을 구입하고 안식일이 지나면 무덤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안식일에 쉬지만 마음을 쉴 수가 없다. 이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주님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오셨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겪어야 하나 그는 죄가 없기에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그가 죽지 않으면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죄 없는 그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무덤에 묻힘으로 우리 인간의 마지막 원수 죽음을 친히 맛보신 것이다. 그는 죽어 무덤에 묻힘으로 우리 인간의 완전한 구주가 되시는 것을 확인시키신다. 그가 죽지 않고 구주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참 구주인 것을 나타내셨다. 잠간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다. 빌라도가 죽음을 확인하였는데도 군인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하였다. 3일이라는 시간은 몸이 부패할 수 있는 시간이나 그 시간에도 주께서는 여전히 그의 뜻을 이루신다. 

 주님은 죽음을 자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말대로 잠자는 것이면 이른 아침이면 깨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곧 일어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으나 일어날 시간을 기다리며 주무신 것이라 본다. 안식일의 휴식이요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준비라 본다. 

 주님이 무덤에 묻힌 때 어떻게 되었는지는 복음서에 언급이 없지만 수제자인 베드로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영으로 옥에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한다. 이들은 노아 방주 예비할 동안 알지 못하여 믿지 않던 자들이라 한다. 주께서는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선포하셨지만 죽어서 몸은 무덤에 있지만 영으로는 여전히 복음 전파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이 내용이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은 후에도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헬라인이 그를 만나자고 하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 하시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다. 그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열매가 맺혔다. 주님은 아버지 품에 가시지만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며 사역하게 하다. 이보다 큰 일도 하리라 하신 때 오순절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으며 주의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였다. 주님은 이런 준비를 하셨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합니다.

가상 7언 Seven Words on the Cross

 (금요) 가상 7언 4/2/21 

주님은 3년간 많은 가르침과 행하심으로 사역하셨으나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일곱마디 말씀하신 것은 그의 사역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1눅23:34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고 또 못을 박는 원수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시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심이라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되고 탕감되어야만 한다. 저들 스스로 용서하여 달라고 말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주께서 대신하여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죄용서와 구원이 바로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2 눅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께서 한편 강도에게 허락하신 낙원이다. 꼭 같은 죄로 죽어가는 두 죄인이나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하다 싶이 하나 이 사람은 자기는 죄인이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이제 그의 나라로 가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부탁한 것은 그의 믿음이요 또한 의탁이다. 주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저들의 죄 용서를 구하신 주께서 강도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새 나라를 허락하셨다.  

3요19:26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다 십자가 아래서 가슴아파하시는 어머니를 보신다. 아들의 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들렸을 때 마리아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리라 하는 말씀을 들은 그대로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 하신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하였다. 이 말은 여자를 향한 존대어다. 그는 구주로서 마리아의 구주가 되기도 하고 또 모자 관계를 넘어서서 구주를 세상에 오게하는 도구가 된 어머니는 가장 귀한 여인이다. 존귀한 여인에게 자기를 아들로 인식시킨다.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표현한 주께서 사람의 아들로 일반 인간과 꼭 같은 사람으로 여인을 통하여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마리아에게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지만 주님은 그 옆에 있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위임하다. 어머니를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요한은 평생 마리아를 편하게 잘 모셨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음으로 사람관계 중 부모 자식의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게 하신다. 

 4 막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이 부르짖은 기도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은 죄다. 죄로 인하여 길이 막히고 버림받는 것을 안다. 버린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다. 예수 자신에게는 죄가 없지만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에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담이 생기고 버림 받은 주님이시다. 주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버림 받았기에 이제는 백성들을 버릴 이유가 없나이다 하는 의미다.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듯이 이제 모든 인류를 주의 손에 의탁하는 것이나 같다. 

 5요19:28 내가 목마르다. 육체적인 목마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40일간 금식하며 광야에 있을 때에 물을 마셨다는 근거가 없다. 여기 목마름은 주께서 8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신 그 목마름이다. 세상에 의가 없고 진리가 없어 주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 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세상에 많은 영적인 목마름을 말한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마시라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다. 주님의 목마름은 그가 함께 하는 인류의 목마름이다. 누가 채워주나? 군인이 제대로 마실 수도 없는 물을 주의 입에 갖다 대어 주었다. 목마른 심령을 누가 채워주나?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 물을 원할 때 세 용사가 적진을 뚫고 가서 물을 길러 왔다. 세상에서 복음이 없어 목마를 자의 목을 누가 채워주나? 오늘 우리는 복음의 생수를 들고 목마를 자를 찾아 채워주어야 할 것이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일의 완성이다. 빚을 다 갚았다.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저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려 함이라. 죄를 대신 처리하고 그들이 짊어질 죄의 값을 다 치루었다. 자유를 선물한다. 그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소식을 전하고 구원 완성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7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가상 7언은 아버지로 시작하여 아버지로 끝이 난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였다. 땅에 보내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이제 그가 떠나 왔던 아버지의 품, 그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품에 자기를 맡기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저녁 잠자리에 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던 기도다. 아버지 품에 자신을 맡긴다. 한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한 주님이 자기를 아버지 손에 부탁하고 맡겨드린다. 땅의 모든 여정이 끝난 후에 이를 곳이다.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신대로 그가 먼저 우리를 위한 처소를 준비하고 기다리면 우리의 때가 될 때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한다고 기도하며 주의 나라로 가는 기대와 소망을 가짐이 우리에게 기쁨이요 감사요 믿음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생명의 백신 The Vaccine of Life

 생명의 백신 (The Vaccine of Life)

중국 후베이에서 2019년 11월 17일 첫 환자로 시작하여 미국은  2020년 1월20일 첫 진단 이후 원인이 이상한 바이러스 코비드 19로 알려지고 2021년 3월말 현재 미국에서 3100여만 감염에 56만4천명 이상이 사망, 세계 221나라에서 1억2천900여만명 감염, 282여만명이 죽는 세계적 팬데믹이 되었다.  일년 이상 마스크에 사회적 거리두기와 공식 모임 폐지 속에 시대말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역사에는 이보다 더 큰 역병이 여러 번 있었다. 로마는 앤토닌 역병(165-180)으로 황제가 죽고 5백만 이상이 죽음으로 군대가 힘을 잃게 되고 저스티니안 역병(541-2)으로4천만 이상이 죽어 ‘문명의 종말이요 인류가 소멸될 위협’ (역사가 스노우덴)이 되었다. 중세의 흑사병(1347-52)은 2억을 죽이는 최대 재난이었고 신대륙에 도착한 개척자가 전달한 병으로 100여년간 원주민5천만 가량이 죽어 90%정도가 사라졌다. 근대에는 스페인(1918) 훌루로 5천만이 죽고 그 외에도 콜레라 황열병 천연두 등으로 많은 생명을 잃었다. 처음에는 예방이나 치료제가 없다가 근대에 에드워드 제너, 루이 파스투어 같은 과학자들의 연구로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어 그 후로는 많은 생명을 구하고 많은 역병이 사라지게 되었다. 

1년 이상의 팬데믹은 일상의 제한 이상으로 감염과 격리, 호흡 곤란과 죽음의 두려움을 준다. 가까이서 감염되고 외롭게 고생하다가 호흡이 멈추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지만 바이러스를 잡는 약과 치료가 없다는 것이 더욱 아픔이었다. 다행한 것은 여러가지 백신이 나와 접종순서를 정하고 접종을 시작하였으나 아직 공인된 백신은 없는 형편이다. 그래도 저마다 먼저 백신을 맞으려고 등록하고 기다리는데 내가 사는 카운티에는 2달 동안 동록조차 못하다가 이제야 1차 접종을 하였다. 접종이 효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접종카드를 가지면 여행이 가능하고 사람을 만나고 모임에 참여할 수 있기에 마음이 놓이고 다소 자유로워진다. 

백신이란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약하게 처리하거나 죽여 만든 단백질 또는 핵산을 인체에 주입하여 인체로 병원체 정보를 습득하여 항체를 형성케 하고 면역을 생기게 하여 예방하게 한다. 병에 따라 백신이 다르고 또 병원체에 변이가 생기면 그 백신은 무용하게 된다. 코비드 19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코비드19의 감염을 막아 고통과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다. 

백신으로 어떤 병에 감염되어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결국은 죽는 것이 인간이다. 죽는 것은 생의 진리요 누구나 겪어야 하는 길인데도 그것이 두려워 죽지 않기를 바란다. 죽음 후의 세상이 더 좋다면 죽는 것을 왜 싫어할까? 한국의 가난 속에서 미국이 잘 산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국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미국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 미국에도 여전히 가난과 아픔은 있다. 

좋은 소식은 영원히 죽음을 이겨내는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고 죽었을 때 그는 죄가 없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다시 죽지 않는 생명체가 되게 하고 생명의 백신으로 만드셨다. 누구든지 그를 받아드리면 그 속에 죄와 죽음을 대항하는 항체와 면역이 형성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아픔과 죽임이 없는 천국을 주와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축복은 바로 나 자신의 결단과 생명의 백신 접종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