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29, 2021

무거운 짐 Heavy Burdens

 무거운 짐 (Heavy Burdens)

일제에서 해방의 감격을 가진 한 시골 소년이 아이들과 함께 산넘어 국민학교에 다닌다. 책과 도시락 보따리를 어깨나 허리에 멘다. 여기에 힘 쓰는 아이가 있어 자기에게 짐이 되는 책보따리를 나에게 맡기며 가지고 오라 한다. 키가 작고 힘이 약한 나는 저항 못하고 짐이 무거우니 그 아이가 싫고 밉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다. 짐이란 없으면 쉽지만 짐은 힘을 길러주고 책임과 인내를 키워준다. 가난과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일하고 배우고 교육하며 이주도 하지만 어느것 하나 가벼운 것이 없으나 가족부양과 자녀교육은 기쁨이요 전체적으로 교육 과학 기술, 직업은 발전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한 여인을 만나 교제하며 목사가 될 것이라 하니 그는 목사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목사는 가난하고 고생하고 거룩한 위선자 같다는 것이다. 목회하는 목사인 것 같다. 목사라도 교수라면 괜찮다고 하여 결혼하다. 신학을 하고 교수가 되고자 유학하며 가족을 초청한 것은 즐거움이지만 학생이 5명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박사과정 입학이 되고 석사를 끝내는데 한 교회의 초청이 왔다. 뜻밖의 일이다. 지도교수는 가족과 함께하는 박사공부는 몹시 힘드니 교회의 초청을 받으라고 권한다. 3년 기한을 생각하고 초청을 수락하지만 큰 도전이다. 

그 교회는 이민 초창기 의사 간호사 전문직, 유학생, 다문화 가정등 100여 세대 한인이 있는 중소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목회훈련이 없는 나는 오직 섬기는 자로서 열심을 다하여 교인만 아니라 전체 한인을 심방하고 교회 안과 밖으로 사역을 확장시키며 노회가 허락한 자체 건물로 이전하다. 

가발가게를 하는 이웃의 모친이 손녀들을 돌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자주 돌보아 주었다. 하루는 부인 혼자이기에 제 아내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수가 없다. 그날 교회에서는 여성도들이 행사 음식 준비를 하는데 사모가 없다. 가발가게에 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한 사람이 전화에서 욕설로 소리를 지른다. 그의 성격을 아는 가게 주인은 대꾸말고 얼른 가라고 한다. 사모를 보더니 코너에 몰고 갖은 위협을 한다. 온갖 수욕을 참고 감정을 억제하다가 칼에 손을 다친다. 저녁에 나는 오히려 가해자를 심방하니 아무 일 없는듯이 음식을 준비하고 웃으며 반긴다. 아내는 사람이 더욱 싫어 한국으로 도망하고 싶다. 주일 교회에서 사람들이 싫어 별관의 고장 난 화장실에 숨으나 냄새가 심하여 창문을 여니 찬양 소리가 들린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길이 길이 변함 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나는 뭐에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하소하다 찬송소리에 이끌리어 본당으로 간다. 눈물이 쏟아지는데 앞에 현수막이 나타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한다. 순간 그 무거운 짐을 벗어 주께 드린다. 가벼움만 아니라 속에서 기쁨이 올라온다. 놀라운 일이다. 삶이 달라진다. 3년후 공부하러 갈 때가 되자 “목사가 목회하면 되지 공부 더 하면 무엇하느냐” 할 정도다. 사모의 위치와 일은 그대로인데  그것이 더 이상 짐이 아니라 기쁨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은 등의 짐이 크고 무거워 신음하고 방황하다가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 짐이 굴러간다. 우리의 짐이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선택할 일이 아니겠나! 














Tuesday, March 23, 2021

섬기는 삶 The Life of a Servant

 

섬기는 삶 The Life of a Servant 
인디언 부족공동체는 추장 한 사람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추장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추장으로 주장하고 다스리며 명령하고 세력을 부리며 대접 받고자 한다. 모두가 추장이고 그를 따르는 인디언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길은 종들이 만들었고 로마의 기술자 의료인 교사 예술인 대개는 주인이 부리는 종으로서 로마를 로마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예수 공동체를 이룬 제자들은 부름받기 전 사회에서 별로 인정 받는 존재가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다른 동료를 무시하고 잔치의 상좌를 좋아하며 로마의 압제를 풀고 주의 나라에서 주의 좌우에 앉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나간다는 주님을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책망하기도 하고 사마리아가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불을 내려 멸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주님은,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삶을 보여주신다. 그들이 스승과 함께 잔치에 앉아 식사를 하던 중 주님은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 주신다. 이들의 관습은 식사 자리에 앉기 전 발을 씻지만 그들은 발을 씻지 않았다. 발을 씻는 일은 종이 하는 것이다 하는 식이다. 주님은 섬기는 종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는 그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하신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는 절대 군주로서 귀족의 항거를 진압하고 봉건제도를 폐지하여 중앙집권 왕정을 설립하고 ‘짐이 국가다’ 하며 전쟁으로 나라를 유럽 최강으로 만들고 많은 일을 하였다. 반면 1세기 후 독일 변방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짐은 국가의 공복이라’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라 섬기는 군주로서 국민의 행복이 군주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며 국력을 최대로 신장하여 최고의 군주로 인정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 때 사람들은 그에게 부왕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부왕을 모셨던 대신들은 ‘왕이 만일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이라’ 하였지만 그는 젊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포학한 말로 대답하자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는 둘로 분리되었다. 
섬김이란 무엇인가? 상대를 인정하고 높여준다. 성경에서 섬김의 원어는 예배란 의미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임이다. 한 때 최고의 백화점을 이루었던 제이씨 페니는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를, 씨어즈는 ‘손님을 왕으로 섬긴다’를 회사 모토로 삼았다. 포춘잡지가 선정한 100대 기업 회장은 ‘리더는 머슴이다 사장은 머슴이다’ 라는 경영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교회와 지도자, 선교사는 섬기는 사람들이다. 인정받고 섬김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나? 
섬김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준다. 사람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고 병자를 치료하는 등등 삶에 필요한 것을 알고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큰 요구는 건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모든 조건을 갖추었지만 영생의 보장이 없다면 불안이요 두려움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과 영생이기에 그를 전달함이 가장 큰 섬김이다. 
섬김은 헌신이요 행복이다. 코비드로 죽어가는 자를 치료하고 강도 만난 자를 구하는 것은 헌신이며 행복이다. 예수님은 섬기고 섬기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삶을 사셨다. 그를 믿음으로 영생 얻는 것은 우리의 복이요 그의 기쁨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Monday, March 15, 2021

용서와 용납 Forgiveness and Forbearance

 

용서와 용납 Forgiveness and Forbearance 
살면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물질로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만 또 상처와 아픔을 겪은 적도 있을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말, 행동 또는 물질로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베푼 적이 있을 것이고 또 고통이나 해를 끼친 적도 있으리라. 
서로 어떤 반응을 하는가? 은혜의 고마움을 인정하고 인사를 주고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말과 행동에서 불만 또는 배신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이 인생이라 사람 관계는 기쁨과 감사, 아픔과 비난, 무관심 무표정이 엇갈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삶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성경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피차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 (골3:13) 한다. 용납이란 나와 다름이나 불편, 손해를 참으며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고 용서는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풀어주며 그 기록을 지우는 것이다. 
목동 다윗이 참전 중인 형들을 면회하러 갔더니 적장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아군은 두려워 도망하고 있었다. 다윗이 물매로 적장의 이마를 명중하여 죽임으로 아군이 이겼다. 왕 사울은 기뻐하여 다윗을 그와 함께 머물게 하고 어디를 보내든지 승리를 하니 그를 군대 장관으로 삼았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노래하자 사울은 다윗을 용납하지 못하고 죽이려 한다. 도망하는 다윗을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할 때 다윗은 그를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으나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을 해칠 수 없다고 그의 옷자락을 베거나 그의 물병과 창을 취하며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 맡겼다. “나는 너를 학대하지만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네가 더 의로우며 왕이 될 것이라”고 사울은 고백한다. 사울이 나중 전사하자 다윗이 그를 애곡하고 높여줌은 그를 용납한 것만 아니라 용서한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보통 사람들이다. 입이 빠른 베드로와 자기 중심의 성급한 야고보 요한은 비천한 어부, 로마 세무서원 마태, 보아야 믿겠다는 도마, 돈을 받고 스승을 배신하는 유다 등을 알면서도 주님은 그들을 원하여 택하였다. 주님은 그들을 용납하고 인내하며 성령이 임하면 그들이 능력 얻어 새롭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용납에는 소망이 있다. 후에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은 십자가에서 처형자들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닮은 모습이다. 
용납과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기에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하라 하신다. 1만 달란트 (1달란트는 6천데나리온) 빚진 자가 주인 앞에 불려오자 “다 갚을테니 참아달라” 한다. 주인은 그의 모든 빚을 용서해 주었다. 그가 용서받고 나가더니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1데나리온 하루 품삯) 빚진 자를 잡아 감옥에 넣으며 당장 빚을 갚으라 한다. 이를 들은 주인이 그를 불러 내가 너를 용서한 것같이 너도 친구를 용서해야 하지 않는가? 하며 그를 감옥에 넣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누구든지 언제나 실수하고 잘못한다. 얼마나 용서가 필요할까? 일곱 번? 주님은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하라 하신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를 날마다 삶으로 기도하며 우리는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우리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Monday, March 8, 2021

행인의 덮개 벗기기 Uncovering the Man’s Cover

행인의 덮개 벗기기 Uncovering the Man’s Cover

바람이 태양과 내기를 한 이솝 이야기가 있다. 바람이 태양 앞에서 자기 힘이 강하다고 자랑하며 길을 가는 행인의 외투를 벗기는 내기를 하자고 한다. 먼저 바람이 실력을 나타내며 세차게 불고 또 불자 행인은 외투를 더욱 단단히 동인다. 다음으로 태양이 웃으며 조용히 비치고 행인을 포옹하자 그는 덮개를 점점 열더니 결국 벗는다. 바람이 태양에게 비결을 묻자 태양은 그것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품어주는 것이라 한다.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난 겨울 우리 지역은 눈이 한꺼번에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자주 자주 내려 적설량은 2-3자가 되도록 쌓이고 춥고 추웠다. 제설 차량이 힘차게 차도의 눈을 치우며 집 앞으로 몰아부친다. 나는 드라이브 웨이의 눈을 치우기가 바쁘다. 힘이 약한 기계로 치우기가 어려워 삽으로 밀어내려니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눈이 세상을 덮고 얼어 붙어 단단하기에 그 위를 걸을 수도 있다. 여기 봄의 기운이 온다. 햇빛이 웃으며 자기를 쏟아주니 기온이 올라간다. 꽁꽁 얼은 땅을 덮고 있던 눈이 맥없이 손을 놓고 풀이 꺾이어 덮개를 열기 시작한다. 하루가 다르게 덮인 눈이 녹으며 걷힌다. 나무를 덮고 있던 덮개가 열리고 이른 싹과 꽃이 피어나온다. 차가운 바람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찾아오는 따뜻한 햇빛을 받아드리면서 된다. 문을 닫고 집안에 갇혀 있다가 공원으로 나가니 마음이 열리고 얼어붙은 세상과 마음이 풀리는 것을 본다.  

사람은 덮개 위에 덮개를 첩첩이 가지고 있다. 시련과 고난, 비평과 소외의 바람에 자기를 가리는 것이다. 속의 약함과 허물을 감추며 위선으로 덮는다. 바람은 세차게 그것을 들추어 내려고 하지만 사람은 더욱 두꺼운 덮개로 그것을 숨기고자 한다. 

겨울보다 더 차가운 인간 세상, 정치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속삭인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너의 부족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을 없는 것처럼 지운단다. 내가 너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대신하여 욕을 먹고 비방을 받다가 죽음으로 네가 치를 댓가를 지불하였단다. 너는 더 이상 빚진 자처럼 쫓길 것이 없고 숨기며 가릴 것도 없단다” 하신다. 마음이 열리고 주님의 그 사랑과 용서를 받아드리며 그를 믿게 된다. 내게 자유가 찾아온다.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한 예수님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죄에 눌리거나 덮개로 가리울 필요가 없어진다. 덮개를 벗으니 나의 본래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그의 자녀가 되니 그것을 나누고 싶어진다.

나의 참 자아를 가리는 덮개를 어떻게 벗을 수 있을까? 내 노력이나 돈, 학문, 기술을 내세우니 더욱 차별과 계층의 자랑과 아픔을 느끼며 자기 정당화와 이론적 변명의 두꺼운 덮개로 더욱 자기를 방어하다가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봄철(Lent 사순절)의 품어주는 온기에 얼어붙은 땅이 녹아 제모습이 나오듯이 예수님의 자기를 부어주시는 봄철 햇빛으로 부드럽게 감싸주는 그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열고 녹이며 덮개를 걷어내니 속에 있는 내 모습은 존귀하기만 하다. 바쁜 행인으로 살아가는데 두꺼운 덮개가 더 이상 필요없다면 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운 삶이겠는가! 











Monday, March 1, 2021

경건 훈련 Exercises of Piety

 

경건 훈련 Exercises of Piety 
건강에는 음식과 운동, 휴식이 필수적이다. 나이 들면서 근육이 줄어들고 따라서 힘이 약해지기에 근육을 보전하고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육운동을 하라고 한다. 영적인 삶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교회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지만 사순절 기간은 개인적으로 경건 훈련의 좋은 기회가 된다. 
 유대인 경건생활의 내용은 기도와 금식, 구제며 예수께서도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신앙생활이 하나님, 나 자신,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결이며 교신이다. 그가 내게 말씀하고 내가 그에게 말하며 친밀함을 발전 시키고 결국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로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이런 일은 사람 사이에도 일어난다. 서로가 존중하고 신뢰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다른 것에 마음을 쓰거나 또는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말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알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를 골방기도라 하신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합왕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선지자들을 모아 물었더니 400명이 이구동성으로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 한다.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아합은 그가 싫어하는 미가야라는 선지자를 불렀더니 그는 양이 목자를 잃을 것, 곧 왕이 죽을 것이라 한다. 한 선지자가 미가야를 때리며 하나님이 어디서 그런 말씀을 하더냐 하자 그는 네가 골방에 들어가 숨는 날에 보리라 한다. 하나님과의 골방 관계는 공간적인 개념보다 집중하는 관계로 생각된다. 아침에 일어나 셀폰을 열기 전 먼저 주 앞에 나아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금식은 나를 비우는 훈련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소식, 80%만 채우기, 또는 간헐적 단식 곧 하루 16시간 금식을 권한다. 너무 먹어서 오히려 병이 나기에 먹는 것을 줄이자는 것이다. 경건훈련의 금식은 나의 욕심과 자랑을 내려놓고 내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실천함이다. 나를 비우면 주께서 말씀과 능력으로 채워 주신다.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이 충만하여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나타내셨다. 깊은 바다에 사는 고기가 큰 수압에도 살아남는 것은 몸 속에 공백이 있어서 그것이 압력을 조절한다고 한다. 금식으로 만들어진 공백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환난과 시험이 많은 세상을 이겨 나간다면 얼굴에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 않겠나! 
구제는 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콩 한 조각이라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진 것은 받은 것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라고 인식함이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기에 주께서 기뻐하고 상을 주신다. 탈무드에는 구제할 때 얼굴을 보지 않게 돌아서서 하라고 한다. 받는 사람의 얼굴이나 주는 사람의 얼굴을 피차 기억하지 않게 한다.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모르게 하여 사람의 칭찬이나 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경건을 생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