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6, 2021

질그릇에 보배를 The Treasure in a Clay Jar

질그릇에 보배를 The Treasure in a Clay Jar 고후4:6-10

625 71주년, 전쟁을 경험하였거나 전쟁 후 한 세대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며 고난을 겪은 자가 많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미소의 한반도 분단, 일본인 철수 후 총선거로 정부수립 의도, 북에서 응하지 않아 남한에서만 선거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북은 남한 해방, 적화통일을 목표로 625 주일 새벽 소련제 장갑차와 무기로 남침, 남한은 전혀 대비가 없었다. 3일만에 서울 함락, 한달이 지나며 중부 서부는 모두 점령되고 동부의 경주 안강지역에서 8월9일-9월14일 격전, 대한민국이 사라지는 위기에 처하였다. 경주가 넘어가면 부산이 남는 것 뿐이다. 이런 위기를 맞고 있는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시간이내에 유엔안전보장 이사회가 북의 침략 중지와 38이북 철수를 요구하나 묵살당하자, 27일 트루만 대통령이 해공군으로 한국군 지원 지시, 28일 맥아더 한국 도착, 육군 파병 요청, 7월7일 유엔이 파병 결정,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 16개국이 참전, 9월15일 인천 상륙 작전, 서울 탈환과 북한군 보급로 차단하고 북진, 그해 크리스마스 안에 전쟁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1.4후퇴, 밀고 밀리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많은 피해를 남기다.

인적 손실은 군인 민간의 사망 부상 실종을 합쳐 230만, 북한은 290만, 이산가족 1천만과 고아, 유엔군은 미군을 포함 26만, 중공은 100만이었다. 산업과 건물 가옥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 중에는 친구 아니면 원수라 서로 불신하며 적대하는 마음을 가진다.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피해다. 


이런 형편에 우리나라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다. 볼품은 없지만 쓸모는 있다. 좋은 질그릇이 되기 위하여 여러 번 구워 낸다. 불의 고통을 통하여 좋은 그릇으로 만들어진다. 

이 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제일 좋은 이름, 한 분, 하늘, 크다 등의 의미다. 한국은 하나님을 모신 나라 곧 보배를 담은 나라라는 말이 아니겠나?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후4:8,9)는 말이 우리에게 해당된다. 

1)전쟁을 통하여 우리는 질그릇이요 주님은 보배임을 확인하다. 전쟁은 역경과 고난의 풀무라 우리를 굽고 또 구웠다. 고통 중에 예배와 기도의 생활화로 주의 능력과 도우심을 믿고 주님 중심으로 살려 하다. 교회마다 새벽 철야기도, 산마다 기도원이 생겨나다. 

2)전쟁을 통하여 한국이 세계에 알려지고 섬같은 은둔의 나라가 세계와 연결 교류하고 여행 유학 이민으로 세계인의 반열에 참여하다. 국내 이산 가족은 지역과 풍습의 벽을 넘는다. 함께 살고 융화하는 삶의 지혜가 이민생활의 길을 놓아준다. 실망, 낙심하지 않는다.

3)잿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용기를 가지다. 사61:3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한다. 하나님의 도움이 실제로 미국을 통하여 오다. 미국의 후원 53-61년 사이 23억불 원조가 바탕이 되고 힘이 된다. 경제 원조, 유학, 입양, 이민 등이 한국 산업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며 인정 받게 되다. 53년 개인소득 67불로 밑에서 두 번째로 가난하던 나라가 3만불로 10위내에 들어가게 되니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겠나? 주를 높이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고 하였다.

4))질그릇이 쓰임 받는다. 주의 복을 받았기에 이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일에 함께 한다. 세계 160국 3만명 선교사 파송, 그리고 많은 어려운 자들을 구호하는 일에 함께 하며 주의 사랑을 나눌 것이다. 

문제는 부와 평안을 누리며 고난을 모르는 것이다. 고난 통하여 훈련한다. 역경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에 계신 보배이신 주께서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으신다.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하자. 주께 감사하자. 










 

Friday, June 25, 2021

6.25 전쟁이 남긴 것 What the Korean War Has Left Behind

6.25 전쟁이 남긴 것 What the Korean War Has Left Behind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1953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훈련된 북한군이 한반도 적화통일을 목표로 소련제 장갑차와 무기로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남한은 대비가 없는 상태에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밀렸다. 경주의 안강 전투는 대한민국이 사라질 위기였다. 놀라운 일은 전쟁 발발 10시간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군의 침략 중지와 38선 북으로 철수”를 결의하고 통보했으나 묵살당하자 6월27일 트루만 대통령이 미해공군의 한국군 지원을 명하고 6월28일 일본주재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내한, 지상군 파병을 요청하다. 7월7일 유엔이 “북한의 무력공격 격퇴, 국제 평화와 한반도 안정”을 목적으로 파병을 결의하고 맥아더가 참전 유엔 16개국 군사령관이 되다. 맥아더는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인민군 보급선을 차단하며 북진하여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나리라 낙관하였다. 예상 밖에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밀고 밀리다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을 하였으나 아직도 전쟁은 진행되고 있다.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무엇을 남겼나? 인적 물적 정신적 막대한 손실이다. 군인 민간의 사망 부상 실종을 합쳐 230만, 북한은 290만, 이산가족 1천만과 고아, 유엔군은 미군을 포함 26만, 중공은 100만의 인적 손실을 보았다. 휴전 당시 개인 소득 67불에 국민총생산의 배가 되는 액수의 산업과 공공건물 주택이 재로 변하였다. 전쟁은 아군 아니면 원수로 양분하고 관계에 불신과 적대감을 고조한 엄청난 피해였다. 

전쟁은 또한 유익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이 없어질 위기에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5년 전 조직된 유엔의 가맹국가들이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도운 것은 집단 안보 정신의 발동이며 세계 평화를 함께 지킨다는 사명을 실현함으로 유엔이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은둔의 나라 한국이 세계에 알려지는 기회가 되었다. 전혀 모르는 나라와 사람들을 위하여 생명과 자원을 바친 이들이 관심과 사랑으로 품고 보도하며 세계인이 한국을 찾고 많은 한인도 외국으로 나가 한국과 세계가 연결되었다. 국내에는 민족 대이동으로 지역과 풍습의 벽을 넘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은근과 끈기의 한국인은 백절불굴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잿더미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꿈과 용기, 근면과 열정으로 새롭게 시작하였다. 1953-1961년사이 미국의 23억불 원조는 한국의 재건 의욕을 활성화하고 경제성장과 세계적인 기업 육성의 토대가 되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6.25전쟁 경험 세대로 이루어진 미주 초창기 이민은 미국 이민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교육과 경제, 교회 설립과 생활안정에서 뛰어남을 보였다. 

전쟁을 통하여 교회의 역할을 확인하였다. 내일이 불투명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의지하며 예배와 기도로 깨어 전능자에게 나아가고 도우심과 힘을 얻었기에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었다. 이 믿음이 세계로 뻗어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전쟁은 공산주의 민주주의 체제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이 해방된 때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나누어 일본인을 철수시키고 선거로 자주 한국을 만들려는데 북에서 불응하자 남한에서만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남침과 점령으로 그들의 실체를 보여주었고 전쟁을 통하여 중국 소련이 불화 분리하고 붕괴함으로 민주체제가 우월함을 증명하였다.  

한국은 지금 누리는 부와 안정이 전쟁에 바친 생명과 물질 덕분임을 알고 겸손하게 빚진 심정으로 세계에 기여하며 감사로 살아야 할 것이다.  













 

Sunday, June 20, 2021

심판과 은혜 Judgement and Grace

 심판과 은혜 Judgement and Grace 사사기 20-21장

사사기는 왕이 없어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던 때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그들의 왕이 없었기에 결국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한다. 이들이 애굽에서 종 생활할 때 바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며 그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남의 나라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입양된 왕자라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수배를 받으며 도망하여 미디안에서 40년간 남의 양을 치며 살던 모세를 하나님이 불러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내라 하신다. 모세는 두려움으로 찼으나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고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였다. 종이 되어 400년을 지내던 이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훈련이 없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며 그들은 누가 그들의 참 왕이며 누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누구의 말이 이루어지는가를 알도록 훈련 받는 기간이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신 여호와로서 생명 얻는 율법을 그들에게 주시고 모세를 통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셨다. 

모세가 떠난 후 그의 시종 여호수아의 인도로 그들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고 지파별로 땅을 분배 받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지만 그 땅에는 강한 민족이 살고 있기에 그들을 쫓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새롭게 정착하는 이들이 그 땅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 눈에 보이는 여러 신을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었다. 여호수아가 죽을 때 그들은 하나님 한 분을 섬길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이 얼마나 약한 가를 바로 보여준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였으나 그는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정복을 당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원주민의 신을 섬기고 그 주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젠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도 없었지만 지파별로 땅을 분배 받았기에 지파 중심이 되고 이전처럼 민족 전체를 인도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인다. 

이들은 주변 많은 나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침략과 약탈을 당한다.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운명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그 지방 풍습과 신을 섬기며 따른 결과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고 부르짖자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시고 얼마 동안 평화를 주시다. 이들은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던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따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하였다. 사람의 계획과 행함은 하나님을 거스리고 노하게 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칼과 염병, 기근으로 임하였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는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의 역사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을 당하고 죽음으로 레위인이 그를 12 토막을 내고 각 지파에 보내었다. 그 결과는 그를 능욕하고 죽게한 이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대표자가 모여 결정한 것은 함께 동맹하여 범죄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기브아만 아니라 그것이 속한 벤냐민 지파 전체가 모여 범죄자를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연합군과 대결한다. 숫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연합군이 첫 날 둘 째 날 패배하고 22천이라는 많은 이가 죽임을 당하다. 전쟁의 승패는 숫자에 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엎드려 통곡하며 부르짖다. 죄인을 심판하려는 이들이 왜 패배하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야 하나? 하는 질문에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 같다. 너희들이 죄를 심판하려 하지만 너희는 죄가 없는가? 깨닫게 하신다. 실패와 죽음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더욱 통곡한 줄로 안다. 제 3일에는 이들이 승리한다. 2만명 이상의 벤냐민 군인을 죽이다. 림몬 바위로 도망한 600명 이외에는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벤냐민을 공격하여 모든 사람 짐승을 죽이고 모든 것을 불로 살랐다. 죄에 대한 큰 심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었으니 심판 받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핑계할 길이 없다.

600명이 림몬 바위로 도망하였을 때 연합군이 그들을 계속 추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추격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벤냐민 지파는 완전히 없어진다. 오른 손의 아들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600명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살도록 한다.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니다. 오직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을 보내어 그들에게 평화를 공포한다. 그들이 받아드린다. 그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제 이들이 살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는 일이 남았다. 이들 스스로는 그들에게 아내 될 사람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기에 맹세에 참여 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진멸하되 그들 가운데서 처녀를 살리고 남겨 벤냐민 군인들과 가정을 이루게 한다. 그래도 200명이 모자라는 것은 실로의 무도회에 가는 처녀들 중에서 그들이 골라 아내를 삼게 하였다. 가정을 새롭게 이룩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뻗어가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임하였다.

우리가 이런 형편이다. 죄로 인하여 심판 받고 죽을 운명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는 그를 받아 드림으로 구원 얻게 되었다. 우리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은 살아남고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생산하고 대를 이어가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지파다. 뒷 날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한 때 하나님이 허락하며 벤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택하게 하신다. 그는 이스라엘 많은 사람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 사울은 자기의 소속과 출신을 알기에 왕으로 선택되는 자리에서 숨을 정도로 겸손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면 자랑할 것이 없다. 주만 높이고 찬양할 것 뿐이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게 하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고 아들 예수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시며 하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나의 업적이나 인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주의 이름을 높이며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를 함께 누리게 된다.

사사기는 각자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혼돈의 시대, 오늘과 같은 근대 후기, 마지막 때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주의 은혜로 우리가 다 멸망하지 않고 살 길을 열어주신 주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감사한다. 겸손하게 엎드려 주를 높이고 찬양하는 우리의 삶이 되며 다른 사람을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삶을 주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Saturday, June 19, 2021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시리라

 여호수아 17:6-13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시리라

사사기 시대는 왕이 없기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하며 살던 때다. 방종과 무질서라 정욕과 힘이 지배하고 있다. 지도자나 평민이나 가진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누구든지 자기 생각이 있고 그대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복을 받기를 원한다. 복이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복 받으라고 인사한다. 무엇이 복인가?

수부강령이 옛 어른들이 말하는 복이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재물이 많은데다 걱정 없이 평안을 누리는 것이 복이다. 열심히 일을 하여 재물을 모으려 하지만 자기 땅도 없지만 할 일이 없는 경우도 많다.

오늘 본문에 미가의 어머니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은 천백을 잃었다. 얼마 중에 그 액수를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잃었다. 그리고는 저주하였다. 저주는 복의 반대다. 자기가 복이라 생각하던 은을 잃었으니 그 은을 가져간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는 말이겠다. 돈을 가질 때는 좋아하다가 그것을 잃는 것은 저주라 생각하고 그 돈을 가지고 간 사람을 저주한다. 그런데 그 돈이 아들 미가에게 있다. 미가가 훔친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그에게 잘못 넣은 것인지 모르지만 그 돈을 아들이 찾아 어머니에게 가지고 간다. 아들도 그 돈 액수를 알지만 저주가 두렵기도 하고 또 자기는 돈 임자가 아니기에 그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주인에게 넘겨 준다. 어머니에게도 문제가 생기다. 돈을 찾았지만 그 저주가 자기 아들에게 임하는 것은 그가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그 저주를 복으로 바꿀 길이 있을까?

하나님의 복을 임하게 하는 매개체를 두는 일이다. 천백에서 2백을 은장색에게 주어 신상을 부어 새겨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신당에 두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으로 삼았다. 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드라빔과 신상을 섬기면 하나님이 저주를 변하여 복을 주시리라 믿었다. 물질의 복보다 더 귀하고 큰 것이 바로 이런 종교 의식에서 오는 줄로 알았다. 이런 방식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 주민들이 종교 관행이라 눈에 보이는 그 의식을 따랐다.

그러던 중 미가가 한 레위인을 만나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 살다가 거주할 땅을 찾아 다니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례위인에게는 땅의 기업이 없다. 각 지파에 속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보이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의 복이 임하게 하는 자다.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와 에봇을 입고 주 앞에서 섬기게 되며 레위인과 제사장은 지파의 십일조를 받아 생활한다. 그를 미가 집의 제사장으로 청빙하여 일을 하게 하며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중보한다. 그가 있어 일을 하면 주의 복이 임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기에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한다. 

물질은 가지다가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항상 함께 하시어 지키시고 복을 주신다. 미가는 신상과 에봇 드라빔을 통하여 그런 믿음을 가지고 위로와 힘, 평안을 가진다. 그것이 참으로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단지파 사람들이 살곳을 찾아가며 미가와 그가 관리하던 신상과 에봇 드라빔 모든 것을 빼앗아 가다. 미가가 추적하여 추궁하였으나 개인과 지파의 숫자와 힘에 밀려 축복이라 생각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여야 했다. 단 지파는 힘이 강한 것을 빙자하여 약한 자의 것을 약탈하고 라이스 족을 전멸시키고 자기들의 도성을 삼았다. 이제 그들은 안정을 누리고 제사장을 모셨으니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복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상을 불러드린 지파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지파 명단에는 제외되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 단 지파나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옳으면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는 어떤 형상에 비하여 만들지 말고 만든 어떤 상을 가지거나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보이는 어떤 것에 비교될 분이 아니다. 참 복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원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예수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중보하게 하시며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하였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요 평화시다. 그는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공급이시다. 그는 우리의 목자시다. 어떤 형편에 상관 없이 항상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며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참 제사장 참 목자시다. 그 안에서 참 복을 누린다. 그를 모시는 복을 누리다.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

 사사기 19:16-30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

사사기 시대는 왕이 없어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여 어둠과 혼돈, 공허한 시대였다. 오늘 본문에는 어둠이지만 그래도 빛이 나타나 보이는 장면이 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레위 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 그 첩이 행음하고는 베들레헴 친가로 돌아갔다는 것은 어둠의 일이다. 레위인이 본처 이외에 첩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따라 행하는 일이다. 그 첩이 행음하였다는 것은 창기의 일을 한 것이라 스스로 집을 나간 것인지 아니면 남편이 그를 보내었는지 모르나 그 첩이 베들레헴 자기 부모 집으로 돌아갔다. 행음하고 살 수 없어 친정으로 돌아온 딸을 쫓아 내지 않고 받아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 뿐 아니라 넉 달을 지나자 그의 남편이 그를 찾아가다. 본처가 있기에 첩이 행음하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면 그를 버릴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편이 하인을 데리고 그를 찾아가 그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데려오려고 하였다. 배신한 여자이지만 남편이 그를 용납하여 데리러 간 것은 어두운 밤에 보는 빛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환영하고 최대한 접대한다. 그가 어떻게 하였기에 딸이 행음하게 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나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텐데 그러지 않고 사위를 오래동안 접대하고 접대한다. 아름다운 관계라 본다.

5일째 되는 날에는 늦은 시간이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첩과 사환과 같이 출발한다. 해가 넘어갈 시간이 다가오니 어느 곳에서 하루 밤 유숙을 하여야 한다. 하인은 나중에 예루살렘이 되는 여부스를 제안하였으나 레위인은 이방인 지역보다는 동족의 땅을 택하자며 벤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로 들어가 성안 광장에 도착하다. 당시 여인숙이나 여관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습은 황혼이 다가오는데 광장에 사람이 있다면 이는 길 가는 나그네라 숙소가 필요하기에 먼저 보는 사람이 숙소를 제안하게 되는데 기브아 사람은 아무도 그의 일행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들이 거리에서 노숙해야 할지 모를 형편이다. 어두운 밤이요 인심이다. 그런데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나그네를 만나다.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 사람인가? 에브라임 사람으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돌아가는 중인데 아무도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자가 없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그를 초청한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귀와 사람을 접대하겠다고 한다. 이 나그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겠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 기브아인지 모르나 거기 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이 나그네에게는 만족이다. 그것도 기브아 본토인이 아니라 에브라임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다. 이주해 온 사람이 나그네의 형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나그네를 접대하라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음식을 대접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그것도 잠깐이다.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린다. 

불량배들이 그 집을 포위하고 문을 두들긴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관계하리라 한다. 성관계를 맺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나그네로 지나가는 그 남자와 관계를 가지겠다고 한다. 소돔의 모습을 여기서도 본다. 집주인 노인이 그들에게 말한다. 내 형제들아 내가 청하노니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은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그들의 하는 일을 가하다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 집에 유하러 온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주변 사정보다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모습을 본다.

노인이 불량배를 당할 힘이 없다. 손님을 보호하면서 자기 딸을 대신 희생하고자 한다. 그만 아니라 나그네가 함께 온 첩도 함께 제공한다. 사실 이 여인은 많은 남자를 상대한 사람이라 그런 일에 익숙한지 모른다. 그러자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어두운 밤, 자기 좋은대로 행하는 때에 비록 소수라 하여도 진리를 따라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그도 이주해 온 사람이다. 그의 주변은 모두 타락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망령된 일을 행하고 있지만 그는 정당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의 사명이 여기 있다. 레위인은 자기를 보호해 주기 위하여 그 집 주인이 자기 처녀 딸을 희생하려는 것을 알고 자기 첩을 내어 놓는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밤새껏 능욕하였다. 이 여인은 주인이 묵는 집 앞에 왔으나 문을 열 힘이 없을 정도로 문 앞에서 기진하여 죽게 되었다. 한 여인의 운명이 이렇게 끝이 났다. 귀한 딸로 태어났으나 레위인의 첩이 되고 행음을 하다가 친정에 가서 살게 될 형편이었으나 다시 남편의 사랑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이런 집단적인 치욕을 받은 후에 생명을 마쳤다.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레위인이 죽은 첩을 나귀에 싣고 가 그 시체를 열 두 토막에 내어 각 지파에게로 보낸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후 지금까지 없던 일이다. 없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항할 힘이 없으니 당할 만큼 당하고는 그 시체를 조각내어 보내며 형편을 알린 것이다. 지파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일을 보자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였다. 결국 사연을 모두 들은 후 그 행악자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처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기브아 사람이나 기브온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거나 행악자를 내어주면 좋았겠지만 그들을 옹호하며 함께 일어나 대항하는 것이다. 악을 추궁하고 책임을 물으며 형벌하는 정당한 길을 걷는 자가 있다는 것이 희망이요 빛이다. 

벤냐민 지파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도망한 600명만 남았다. 한 지파가 없어지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동맹하여 형벌한 자들이 뉘우치고 이들을 위하여 여자를 얻을 길을 제시하여 지파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있다.

다수는 타락하고 어둠의 길을 달린다 하여도 진리와 정의를 지키는 소수가 남아 있어 이들로 역사를 이어가는 힘과 방향이 된다. 

이민으로서의 소수자, 소외와 혐오를 많이 받고 있지만 그래도 믿음과 함께 진리와 정의를 지켜 나감으로 아름다운 날을 기다린다.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룻기에서 보는 룻은 이방인이요 소수에 속한 자이지만 그를 통하여 앞으로 다윗이 나오고 예수께서 출생하는 길을 여는 조상이 일어난다. 오늘 진리를 지키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고 내다보며 믿음의 길 진리의 길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란다.  


다양과 조화 Diversity and Unity

 다양과 조화 Diversity and Unity

각급 학교의 졸업시즌이다. 졸업(Commencement)은 끝남과 함께 시작이란 의미가 있어 한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하거나 사회에 나가 직장을 가진다. 학교 과목에서 초등학교는 간단하지만 대학 대학원으로 가면 그 수가 점점 많아져 각자가 개성과 원하는 바를 따라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면 수 많은 종류의 많은 직장과 일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 

과목만 아니라 학생들도 다양하다. 미국 대학원에 왔더니 미국인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 대만 독일 등만 아니라 트리니다드 피지 등 생소한 나라 사람도 있다. 딸이 다니던 뉴욕 고등학교의 졸업반은 102개 나라 이민자의 자녀로 되었다. 다양한 인종을 만나며 처음은 어색하고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함께 지나면서 점점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받아주며 조화를 이루게 되니 나의 세계가 넓어지고 커지고 있었다.

학업의 졸업장은 그 학교나 미국이라는 한 제품 증서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색깔 재능 개성을 가진 채로 전공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능력을 발휘하여 각 방면에서 기여함으로 보다 좋은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미국이1782년 독립의회에서 미국 상징 인장(Seal)에 E Pluribus Unum (다수에서 하나, 다양과 조화란 라틴어)을 넣기로 결정하고 1786년 처음 주화에 그 말을 넣어 지금도 사용하며 대통령 부통령 인장과 여권에도 들어가게 한 것이 이 나라의 정체성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나 꽃들이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이루는 조화는 획일이 아니다. 공산주의 전체주의는 획일지향이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때 첫 단계 교육기관을 국민학교라 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한 종류의 신민으로 찍어 내겠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박연미가 북한에서 13살 때 엄마와 함께 사선을 넘어 한국에 도착하여 공부하다가 큰 꿈을 가지고 미국 명문 콜럼비아 대학으로 유학하였다. 그가 폭스 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이 며칠 전 나왔다. 오리엔테이션에서 그가 교수에게 소설가 제인 오스틴 (대표작 오만과 편견)의 책들을 좋아한다고 하자 교수가 반응함에 놀랐다. “저자는 식민지 정신, 인종주의, 편견으로 세뇌시키는 것을 아는가?” 하며 저자를 배척하고 그 학교는 반미, 반서방선전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수들은 남녀 성별을 말하는 ‘그’, ‘그녀’를 ‘그들’로 사용하게 하여 창의적인 비평정신을 박탈하며 자기의 북한 경험을 기억시키는 것을 느꼈다. 이렇다면 미국도 북한의 운명으로 나가게 된다고 경고를 하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종혐오 범죄, 자기와 다른 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정서는 사회와 관계를 분열 파괴하고 있다. 어느 두 사람도 생각이나 취향이 같을 수가 없다. 서로 달라도 개성을 존중하며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건강한 조직과 사회를 만들고 적응력과 창의성으로 온 세계를 연결하게 한다. 

하나님은 남녀를 다르게 만들었으나 하나로 조화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각자가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고 그들이 성령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며 인종 성별 직업 계급의 구분을 넘어 모든 사람을 만나 품고 사역하는 것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세계 모든 족속 사람에게로 보내시며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베드로를 로마 장교 고넬료 집에 보내고 안디옥의 처음 교회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오늘 교회의 모형이 된다. 다양의 수용과 조화로 함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 아니겠나!!













 


Saturday, June 12, 2021

Pride Month 자랑의 달

Pride Month 자랑의 달 (6/11/21)

바이든 대통령은 금년 6월을 동성애자 (LGBTQ+) 자랑의 달로 선포하고 그들도 미국인이 가지는 “동등 자유 정의”에 따라 살도록 그들을 인정하며 보이는 공동체로 함께 즐기고 개인은 자기의 가치와 존엄성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공포한 배경에는 동성애자들이 오래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차별과 소외, 지탄을 받고 법적으로 고용과 주택 정책 등에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반동성애법으로 탄압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견디며 용감하게 항거한 것을 인정한 것이라 본다. 
동성애자 스스로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사회의 낙인을 받으며 ‘숨어 사는’ 형편에서 뉴욕 맨하탄 스톤월 여관은 이들이 모이는 클럽이었다. 1968년 6월28일 뉴욕경찰이 이 여관을 급습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6일동안 동성애자들과 경찰이 대치하여 ‘스톤월 폭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해 이날에는 수 천명이 참가하여 스톤월에서 센트럴파크까지 행진하고 그 후 매년 이 날을 전후하여 행진하며 그들이 사회 권리를 보호받지 못한 것을 기억하는 날이라 하다가 Gay is good에서 발전하여 Gay Pride란 말을 미네소타의 Thom Higgins가 만들고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자 Harvey Milk가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시 감독관으로 선출되며 제작되었다. 해마다 참가하는 나라와 숫자가 많아지고 지금은 수 백만명이 ‘벽장에서 나와’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표현하며 미디어만 아니라 회사와 군대, 학교에서도 정당한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양분된다. 인간을 앞세우는 헬라 로마 문화의 가부장 제도에서 남자는 힘이 있고 능동적인 정복정신으로 노예 청소년 남창 등과 동성애 관계를 가지는 것이 남다른 일로 보였고 철학자 정치가 중에 동성애자가 다수 있었다. 오늘 인본적인 민주주의의 사회 정의 이름으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고 존중 받아야 한다며 자기 생각이나 욕정 대로 생활하는 자의 숫자가 많아지며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의 처음 뉴욕 행진 거리를 National Monument로 정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Pride Month’를 선포하였다. 
다른 면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유대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여 최초의 공동체 가정을 만드셨기에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받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심각한 죄로 말한다. 

오늘 동성애자가 어디에나 있고 크리스천의 가정도 예외가 아닌 형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게 된다. 
동성애의 생활 형태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확실히 떠난 것이 분명하지만 나 자신도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나를 받아주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그도 용서하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도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나도 그를 받아주고 사랑할 것이다. 동성애의 생활 형태를 사람이나 교훈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하여도 예수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 새롭게 회복할 수 있음을 믿고 기도하며 그로 주와 만나는 기회를 만들도록 할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오염 방지 운동을 일으키고 있듯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가정 형태 회복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Saturday, June 5, 2021

소원의 항구 Your Desired Haven

소원의 항구 Your Desired Haven 

메모리얼데이를 맞아 초등학생에게 그 날이 무엇인가 물으니 수영장을 개장하는 날이라 한다고 힐러리 클린턴이 말하더니 금년 해리스 부통령은 긴 휴일을 즐기라는 트위터를 올리고 비평을 받았다. 메모리얼데이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1865년 5월1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챨스턴에 모여 종전을 기념하고 노예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북군을 애도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짐 다운스 교수는 말하지만 공식은 북군의 죤 로건 장군이 자유 방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장병들의 묘지에 1868년 5월30일에 헌화하라고 공포하고 그 날 알링턴 묘지에 모인 5천명 앞에서 제임즈 가필드 장군이 그곳에 묻힌 2만명 전몰자를 추모하며 연설하고 헌화함으로 시작되어 매년 그날을 ‘장식일 Decoration Day’로 지키다가1971년에 5월 마지막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전몰한 군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미국 국시인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는 남북전쟁을 통해 이루어지고 2009년 오바마가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증명되었다. ‘성조기는 자유인의 땅 용감한 자의 집 위에 펄럭이고 있다’고 미국 국가를 애창하며 많은 대가와 희생을 용감하게 치르고서야 ‘평등과 자유’라는 소원의 항구에 이르게 됨을 다짐한다. 

뉴욕 항구에 세워진 자유의 여인상 받침대에 새겨진 엠마 라자루스의 시구는 “너희 피곤하고 가난한 자들, 자유를 갈망하여 해매는 무리들, 풍성한 해안에서 버려진 쓰레기들, 집 없고 폭풍에 길 잃은 자들을 내게로 보내라. 내가 황금문 옆에서 등불을 들어 주리라”한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 항구에 오기 위하여 거친 풍랑을 해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소원의 항구’가 되어 수많은 타국인이 찾아와 살고 있다. 자랑스런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을 바이든 대통령이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하기 전 5월21일 한국전쟁에 참전 청천강 전투에서 1950년 11월20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인해전술 중공군과 사투하다가 수류탄 파편 부상을 받았지만 부대를 지휘하던 랠프 퍼킷(94) 중위 (퇴역 대령)의 용맹을 기리며 최고의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문 대통령을 외국 정상으로 처음 초대하였다. 무엇을 말하나? 친중반미하는 그에게 한미혈맹, 중국이 공동의 적이었던 것 그리고 오늘의 한국은 미국의 헌신과 희생에서 온 것을 기억시키는 것이 아니겠나?

풍랑 없이 소원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원하던 그 항구의 고마움을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이 없다 (No pain no gain).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한곳에서 사역하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다. 건너 편은 휴식과 또 다른 사역이 있는 소원의 항구다. 주님은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진다. 갑자기 풍랑이 일어난다. 제자 중 여럿이 어부 출신이라 그곳 항해에는 익숙하지만 바람은 거세고 물결은 배에 가득하여 배를 삼킬 것 같다.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하며 주님을 깨운다. 주께서 깨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며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즉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지고 그들은 가려던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하다(막4:39 시107:30). 그들은 주님이 자연도 다스리시는 창조주임을 알고 놀라며 경배하게 된다. 

우리 소원의 항구는 어디인가? 그곳에 도착하였는가? 도착했다면 어떤 경로를 겪었는가? 아직도 항해 중이라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가? 영원한 안식의 항구는 팔을 벌리고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