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2, 2018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The Root of Quarrels and Fights


야고보 4:1-3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source of quarrels and fights (7/15/18 주일)
어떤 초등학생이 아빠께 묻는다. 일차 세계 대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공격하여 시작하였지. 엄마가 옆에서 듣다가 말한다. 아니 바르게 가르쳐야지요? 왕위 계승자가 암살 당한데서 시작하였지. 아빠가 큰 소리로 말한다. 당신께 물은거야 내게 물은거야 왜 참견을 하나? 엄마가 속이 상하여 문을 쾅 닫고 가더니 부엌 그릇이 깨어지듯 소리가 난다. 아들이 아빠 알겠어요 됬어요. 일차대전은 1914 7월에 시작4년 이상34개국이 참전 양쪽 군인 사상자가 3천만, 민간으로 죽은 자가 770만이 되다. 성경에도 이런 일이 있다. 사사기 19장 벤냐민에 속한 기브아 사람들이 그 지역을 방문한 한 레위인의 첩을 성 희롱하여 죽게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벤냐민을 대하여 그 악행한 자들을 넘기라고 하자 오히려 대항하다. 이로서 전쟁이 일어나고 벤냐민 지파는 도망갔던 600명 이외 모두 죽임을 당하고 지파가 없어지는 위기에 처하였다.
인생이 이런 갈등과 투쟁으로 되어 있다. 7:1 세상에 사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우리 인사는 안녕, 중동 에티오피아의 인사는 샬롬, 항상 안녕과 평화를 원한다. 너무나 싸움에 시달려 평안을 원하는 마음이나 싸움과 전쟁이 줄곧 있다. 지난 3400년 역사에 1천명 이상의 생명을 잃은 전쟁이 없던 해수는 268년이라 한다. 인명 피해가 적은 전쟁은 더 많은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만 지난 70년 이상 전쟁 상태다. 세계 많은 나라에 있는 일이다. 세상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도 일어난다. 본문 4:1 싸움과 다툼을 말한다. 싸움은 무기를 들고 서로 죽이는 것, 다툼은 무기 없이 말로 서로 죽이는 것이다. 말이나 무기나 결국 상대를 제압 정복하여 죽이고 내가 이기고 살겠다는 것이다. 5:15 너희가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다. 상대만 아니라 나도 죽음을 겪는다.

1  이런 전쟁이 어떻게 시작하나?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서부터 나나?
부부간에는 아들 앞에서 엄머가 아빠의 위신과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어 싸우게 되면 결국 같이 살지 못하고 해어지게 된다. 많은 이혼의 일차적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일차대전은 오스트리아 왕위세습자 대공작 프랜시스 페라디난드가 사례예보에서 암살 당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사과가 없이 그 문제가 풀리지 않음으로 역사상 그 때까지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난 전쟁이 되다. 성경의 기브아인의 문제는 내가 잘못했오 하고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인데 그럴 사람이 없은 것이다.
싸움과 다툼은 현실이나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몸이 아프다. 대증치료로 나타난 증세를 제거하면 이유가 제거된다고 하여 많은 진통제를 사용하지만 근본 이유는 해결 되지 않는다. 병원에 가면 중요한 것은 근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피검사, 소변검사, 엑스 레이를 찍어 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찾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를 알아 내면 치료의 길이 보인다. 우리는 문제의 외부 증상만 보는 경향이지만 외부 증세는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 속이 중요하다.
성경은 싸움과 다툼은 사람의 지체 곧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외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믿는 사람이 되어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면서 연결하여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육체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 육체를 가지고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7:19). 내 속에 나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다른 법 곧 악이 있음을 알았다 한다. 그것이 나를 주장하여 자기를 내 세우게 하고 분노하고 질투 시기하고 미워하고 음난하게 한다. 이것들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나와 싸우는 원수다. 우리의 원수는 세상 어떤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라고 한다.  이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다. 죄가 들어 오지 않은 에덴동산에서 활동하며 하와와 아담에게 하나님처럼 된다는 교만한 마음을 넣었다. 자기 중심 이기심이 들어오니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진짜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이 탐스러워 보인다. 원수는 친구처럼 접근하여 듣고 볼때는 그럴사 하고 나를 위하여 주는 것 같으나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와 분리되고 두려움과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부부도 대적하게 되고 아들 대에는 죽이는 일이 일어나다. 마귀가 첫 사람을 넘어뜨리다. 이 일을 계속한다. 1절 내 지체 중에 싸우는 정욕이라, 싸운다는 말은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의미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 속 심령에 교만 욕심과 시기를 일으키고 상처와 좌절을 준다. 자기 정욕을 따르게 한다. 자기를 주장하고 남을 받아 주지 못하게 한다. 결과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시기하고 살인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기도하여도 정욕으로 구하면 받지 못한다. 결국 허탈, 좌절, 죽음에로 가고 하나님과도 원수가 된다고 한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싸움과 다툼이 오게 한다.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어떤 부자가 죽음의 병상에서 변호사를 불러 유언을 쓴다. 아내가 증인으로 옆에 있다. 먼저 차를 정리한다. 내 롤스로이스는 아들 바비에게 준다. 아내가 옆에서 그것은 조카 죤에게 주면 더 좋아요 그가 운전을 더 잘하고 관리를 잘 할거요. 그래. 캐딜락은 딸 수잔에게 주지. 아내가 그것은 아들 톰에게 주어요. 그가 막내로 아빠를 많이 사랑하지요. 그래. 볼보는 질녀에게 주지. 아내가 그것은 수잔에게 주어야 해요. 부자가 말한다. 여보 그만해요 내가 죽는거요 당신이 죽는거요. 남편이 죽는 자리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이래라 저래라 주장하는 자세를 가진다. 내 주장하는 자세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원인을 알게 된다.
1800년대 말 카나다에 감리교 목사 Ralph Horner. 하루 저녁 설교를 하는데 그의 넥타이가 이상하게 손에 감긴다. 마귀가 설교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생각, 타이를 풀어 찢어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으며 타이는 설교를 방해하는 마귀의 도구라 하다. 그리고 넥타이는 성도의 삶을 얽어매는 도구니 매지말라고 하다. 많은 논쟁을 하다가 결국 교단을 갈라 나가다. Hornerites 또는 no tie 교회라 불리다. 자기 생각의 이런 사소한 것으로 논쟁하고 갈라진다. 자기를 나타내고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이다. 교회 분리의 배경에 얼마든지 보는 일이다. 중국의 장군 왕양명이 내가 산의 도적은 소탕하지만 내 속에 있는 도적은 누가 잡아주나? 사람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런 글을 썼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부족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 들었다. 학력은 높아 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 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지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은 잊어버렸고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 평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더 줄어들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나 세계 지도자로서 인간의 문제를 인간 속 마음에서 본 것이다.

2  싸움과 다툼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나? 싸움과 다툼을 해결하려면 먼저 그 뿌리인 우리 마음을 보고 자기 진단을 먼저 한다. 내 자신의 이기적 자기 중심 생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정욕 시기 미움 분노 음욕 등 내 속에 일어나는 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내 주인이 되어 내 중심으로 살며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도 꼭 같은 실수와 허물이 있지만 그의 허물을 보기 전 나의 이기심, 나의 죄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병이 들면 의사를 찾아간다. 찾아가면 내가 어디 무엇이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내 심령의 문제를 보면 영의 의사인 주님을 찾아 그에게 나의 부족과 병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하는 것이다. 내 죄의 병을 해결하는 길은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나를 용서하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나를 받아주신다. 기도는 초점과 중심 전환이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 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친구가 되고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을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 한다(4:4). 마귀는 세상 것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하나님이 인정하고 세운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사울이다. 그의 용모는 이스라엘에서 따라 갈 자가 없었다. 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 나갈 때 하나님은 원수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 하다. 전쟁 경험도 없는 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전히 승리한다. 사울이 그곳의 소와 양을 보니 너무 기름지고 탐스럽다.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전리품이 없으면 그가 전쟁에 승리했다는 증거가 없을 것이라 왕을 생포하고 소와 양을 끌고 가다. 자기 중심의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세상 영예와 자기 욕심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다. 사무엘을 통하여 네가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는 통첩을 받다. 그는 돌아 서서 고칠 생각을 않고 자기를 정당화하며 하나님과 다투며 비극적 길을 걷다. 하나님과 갈등하고 싸우니 자기에게 충성하는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며 그는 자기를 스스로 무너뜨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다. 성경은 겸손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에게 복종하라 한다. 마음의 병, 교만한 이기심을 인식하고 겸손한 심정으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에게로 향하여 갈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속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으면 원수인 마귀를 대적할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4:7). 그를 대적하는 길은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굶고 있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응답하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마귀의 시험을 대할 때 마귀를 이기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면 떠나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면 떠난다.
이웃과의 관계도 풀려나간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리라 (16:7)  어느 수도원에 두 수도사가 있었다. A가 오래 동안 수도원에 있으니 지루하고 단조롭다. B에게 우리 좀 다른 것을 해 보자. 세상이 하는 것 해보자. B도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어 세상에서 무엇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세상이 무엇하지? A가 말한다. 한 가지는 세상은 서로 다툰다. B 어떻게 다투나? A 예를 들면 여기 이 돌을 둘 사이에 놓고 이것 내 것이다 하면 상대가 그것은 자기 것이라 하여 다투게 되지. 그러면서 A가 그 돌을 그들 사이에 놓고 이것은 내것이다 한다. 그러자 B는 생각을 하더니 그래 그것이 네것이면 네가 가져라 한다. 싸움이 되지 않은다. 남을 인정하고 그에게 베풀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장난명, 한 손바닥으로 소리 나지 않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싸움과 다툼을 벗어나 화목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갈등은 우리 삶의 현실이다. 내가 없으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내가 살아 있고 나를 내세우고 주장하기에 논쟁과 싸움에 가담하는 나 자신을 본다. 자기를 알고 원수를 알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 내 약함 병든 것을 인식하고 마음과 삶을 고치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원수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친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주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나눈다면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고 주의 평화가 올 것이다. 우리 가운데 싸움과 다툼이 있을 때 그것이 어디서 왔나?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자신을 보면서 나를 살핌으로 참 평화를 가지게 된다.
동영상 www.kpcm.org

Monday, July 9, 2018

세상의 소금과 빛 The Salt and the Light of the World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The Salt and the Light of the World (7/8/18 주일)
찬양대의 매주일 은혜로운 찬양을 감사. 지휘자가 다음 주일 그 다음 찬양곡을 선정할 때 찬양의 주제 내용과 은혜를 많이 기도하며 생각한다. 반주자 또는 위원과 의논도 할 것이다. 목사가 설교할 때에도 같은 일이다. 어떤 성경본문 무슨 주제로 설교 하는가 많이 기도하고 생각한다.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 때부터 안식일마다 읽는 성경 구절을 정해 두었다고 하고 그것이 예수님 시대에도 내려 오다. 4:16예수께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시니 그에게 이사야 성경을 드렸다. 예수께서 사 61:1-2 읽으며 그의 사명을 선언하신 내용은 그 날에 주어진 말씀이라 본다. 이 전통이 기독교에 그대로 들어와 절기와 날에 따라 구약과 신약 시편을 주일마다 고루 고루 읽도록 정해둔 3년치 일과표를 만들어 두고 있어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동시에 회중이 궁금하게 생각하거나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를 설교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예배와 설교 위원회가 있어 일년 동안 듣기를 원하는 분야나 주제를 정하기도 한다. 내가 이번에 와서 처음으로 예배 담당자에게 물어보았다. 행여 어느 특별한 부분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였으나 쉽지 않다. 설교는 전적으로 목사에게 달린 것이라 누가 간섭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다 7월 목장 모임을 위한 준비 공부를 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여 달라는 부탁을 처음으로 받고 오늘 설교를 하게 되다.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한 사람인가? 우리 삶에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언제 어떻게 알게 되나? 제일 먼저 엄마 품에 안겨 너는 내 아들 내 딸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눈을 뜨게 된다. 지어준 이름, 그 이름 부를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서 스승을 만나면서 나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발전한다. 직장에 가면 직책과 일이 주어지며 나를 더욱 발견하게 된다.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서로를 대하는 것에 따라 자기가 누군가를 알게 된다. 내가 어제 아내로부터 카드를 받다. (앞의 첫 줄은 생략하고,)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듯, 종형 그 이름 나는 다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 사랑을 그 사랑 말 할 수 없어서 비밀이 되었네. 내 영혼에 새겨진, 내 마음에 새겨진 그 이름 아름다운 보석 아름다운 노래 되었네 그대는 나의 영원한 애인. 그가 나를 대하며 부르는 것에서 내가 나를 본다. 가정과 세상에 살면서 여러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가 정해지고 그에 대한 기대가 있지만 다른 환경에 가면 또 다른 사람 되기도 한다. 우리 자녀들이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와 사회에 나가면서 자녀들은 혼동을 가질 때가 많다. 미국에서 났으니 미국 사람이라 하고 영어를 누구보다 잘 하고 지식과 기술 뛰어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사회에 나가면 이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너는 어디서 왔나 물으며 우리를 미국인으로 받아드리지 않은 일이 많이 있다. 그렇다고 부모를 따라 한국에 가면 모두 생김새는 같은데 내가 한국 사람 아닌 것을 실감한다. 내가 누구인가?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혼동이 온다. 어떤 2세는 자기를 Korean-American 이라 하나 자기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고 그 중간에 있는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Korean 또는 American이라는 존재 가치를 모르고 점 하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니 그 아픔이 얼마나 크겠나? 그렇다면 나에게 생명을 주시어 태어나게 하신 나의 창조자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 하시나? 43:1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창조하고 지었고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기에 너는 내 것이라 하신다. 너는 내게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복 받은 자라 하신다. 매우 힘과 위로가 된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를 죄와 고통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라 하시나? 5:3첫 말씀에서 복 있는 자라 한다. 어떤 형편이라 복을 받았다고 하나? 주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가난하고 슬픔이 많고 힘이 없다. 억울하게 억압과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정하고 부패한 사회가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힘이 없어 대항하지 못하여 참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향하여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니 복이 있다.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기에 복이 있다. 주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니 복이 있다. 복 받은 사람이니 어떤 형편에서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신다. 그러면서 주께서 우리가 내가 누구,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한다. 복있는 자다 말씀하신 직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정의하면서 우리가 할 일,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말씀한다. 소금이라 빛이라 하심은 무슨 말씀인가?
1)소금은 맛을 내는 것이다. 음식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 연어든지 쇠고기라도 소금이 없으면 맛이 없다. 소금이 무슨 맛을 내나? 연어나 쇠고기 본래의 맛을 내게 한다. 소금은 각자의 제맛을 나게 하는 일을 한다. 소금은 또한 생명을 일으킨다. 차마고도라는 오래던 다큐를 본적이 있다. 히말라야 고도 지방에 야크 같은 짐승으로 물건을 운반하는데 그들에게 소금이 필수품이다. 사람만 아니라 짐승에게 소금을 먹인다. 소금은 생명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제 아버지께서 너무 약해져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병원으로 가서 조사하니 몸에 소금기가 없다고 하며 소금물 주사를 하였다. 그러자 끄져가는 불이 살아나듯이 생명과 힘이 회복되다. 소금은 사람 본래의 맛을 내고 생명과 힘을 더한다. 빛은 무슨 일? 비친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기 전 세상은 어둠에 덮여 있다. 어두우면 어디가 어디,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빛은 나타나게 한다. 산과 들, 물과 숲, 동물과 사람을 보고 알게 한다. 아름답고 보기에 좋다. 빛이 없으면 알려지지 않던 것이 나타나 알게 된다. 빛은 사물의 제모습을 보게 하고 알게 한다. 빛이 있으면 얼굴을 보고 누구인가 알게 된다. 동시에 빛은 생명을 일으킨다. 빛이 없으면 생명이 나지 않은다. 빛은 생명과 에너지를 준다. 소금과 빛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제 모습을 보게 하고 본래 자기 맛이 무엇인지 그것을 발휘하게 하고 생명과 삶의 에너지를 준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한다. 세상은 사람이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고 제 맛을 내지 못하게 한다. 사람이 사탄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죽음에 처하여 어둠 속에서 자기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람으로서의 본래의 가치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생명을 잃고 삶의 힘을 잃고 있다.
2)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소금과 빛으로 오셨다. 예수께서 소금으로 일을 하셨다. 세상 사람이 자기 맛을 잃고 있다. 가난에 시달리며 자기를 펴지 못하고 병들어 고통 가운데 누워 있고 눌리고 억압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어 있다. 자유와 평화를 가지게 되어 있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외면을 당하고 여자라고 무시를 당하고 어린이라고 소외되는 문화였다. 어떤 직종은 사회 에서 인정 받지 못하는 죄인이요 죄를 지은 사람은 설 곳이 없다. 인간으로서 삶의 맛을 누리지 못한다. 이런 자를 주님은 만나 주시고 만나 주시면 풀어주시고 자유를 주신다. 기뻐 뛰어 일어나게 하신다.  중풍병이 걸려 한번도 일어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던 사람,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어 신세만 지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자 자유롭게 일어나 걷고 뛰게 된다. 생명을 찾고 삶의 맛을 자기가 누리며 살게 된다.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격리 되어 이곳 저곳도 아닌 중간지대에 살고 있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고 가운데 점하나에 불과한 위치다. 이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더니 확실하게 새 사람이 되어 가정과 사회에 돌아가 자기 구실을 하게 된다.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산다. 세무서의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할이요 또 돈을 모을 수 있는 직장이라 누군가가 취직하고 진급하여 서장에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이다 세무서장이다가 아니라 죄인으로 분류되어 손가락질 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주께서 그를 만나시자 삭개오야 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 순결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그를 더러운 죄인이라 하나 주님은 그를 순결한 사람이라 부르며 그를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신다. 그집에 가서 하루 밤 같이 자야 하겠다 곧 그를 친구라 하신다. 주님은 세상에서 자기를 찾지 못해 진정한 맛을 내지 못하고 어둠에 가려 있던 그의 모습을 벗기고 빛으로 그의 참 모습을 보게해 주신다. 사람들은 이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죄인으로만 보고 있었다. 삭개오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어떤 반응을 하나?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겠다. 그것이 그가 자기 원래 모습을 발견한 때 가지는 자유다. 본래의 자기 맛을 내는 것이다. 당시 문화는 어린아이들은 항상 무시되고 소외를 당한다. 예수께로 모여 오니 심지어 제자들도 그들을 꾸짖으며 떠나가라고 한다. 그들은 존재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에 안아주시며 이 아이들이 바로 천국의 주인이라 하신다(18:19).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여인이 귀신들려 18년 동안 전혀 몸을 펴지 못하고 꼬부라져 있다. 주께서 그를 풀어 주시자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회당장이 시비를 한다. 주께서 말씀한다. 아브라함의 딸이 18년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는 것을 안식일에 풀어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어야 하지 않나? 예수께서는 소금으로 빛으로 사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3)어떻게 소금과 빛이 기능을 하게 되나? 소금이 기능을 하려면 자기가 녹아 존재가 없어 저야 한다. 소금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좋은 명품 그대로 유지하겠다며 녹지 않으면 맛을 내지 못한다. 자기를 녹이고 자기를 없애야 맛이 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나 그 자리를 비우시다. 하나님이라 주장하지 않고 우리 같은 모습, 인간으로 오시되 섬기는 종으로 오시다. 자기를 부인하시다. 하나님 자리를 고집하면 죄인 속으로 들어오시지 못한다. 그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되시다. 천대 받는 갈릴리 시골에 가서 일을 하고 개같은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와 이방 지역에도 가시다. 격리된 나환자 촌에도 가시다. 한 점에 해당하는 사람의 생명을 회복하고 삶의 맛을 주시기 위함이다. 소금으로서 자기를 녹이시다. 빛은 자기를 태움으로 빛을 낸다. 자기를 희생하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시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아픔을 담당하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자기를 희생하신 것은 우리를 죄인에서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을 만난 나는 어떻게 되었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신다. 그를 믿는 우리도 그와 같이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소금이요 빛이면 먼저 우리가 주 앞에서 우리 모습을 보아야 한다.

3  소금과 빛에 대한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1)거절하는 자가 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은 눌림 받고 살아야 하는데 그들이 일어나 사람 구실하는 것을 마땅하지 않게 생각 하는 자가 있다. 평생 맹인이 보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일에 보게 하였다고 그를 박해하고 예수를 박해한다. 특히 기득권 바리새인들은 빛이신 예수 앞에 서면 자기 들의 허물과 죄가 보인다.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하자 모두 자기 죄가 생각 나서 하나 하나 돌을 놓고 떠나가다. 자기 죄가 보이니 감당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죄를 짓고 살다가 빛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으니 빛이신 예수를 끄려고 한 것이다. 공산주의가 들어가면 제일 먼저 숙청하는 것이 교회와 교인이다. 사람이 제 구실 제 가치 내는 것을 받아주지 못한다. 사람을 이용가치 있는 도구로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외면 당하고 아픔을 당하고 떠난다. 교회를 반대하는 그룹에 속한다. 또 소금과 빛이 기능을 하지 못하여 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져 밟힌다. 박해와 외면을 당한다. 아픈 현실이다.
2)소금과 빛으로 기능을 다하면 자기 원래 모습 생명을 찾아 원래의 맛을 내기를 원하는 자는 모여 든다. 주께로 온다. 소금 빛으로 몰려 온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제 맛을 내게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 전체가 다 주께로 몰려 오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주께 있다. 인도에 큰 변화가 올뻔 하였다. 간디가 인도의 아픔을 안다. 계급제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접촉 5개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가 예수의 복음서를 읽으며 산상 설교에 깊히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도에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사우스아프리카를 방문 중에 교회를 찾았다. 문앞에서 안내 하던 사람이 간디를 보더니 주보를 주며 안내하지 않고 당신이 잘못 왔으니 저 건너 저 교회로 가라고 하였다. 그가 찾아간 곳은 백인교회였기에 흑인 교회로 가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기독교의 실상 이라면 나는 평생 힌두로 남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금과 빛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개인과 나라 문화에 변혁을 가져온 것이 역사다. 앵글로 색슨, 프랑크족, 게르만족 모두가 무서운 야만족들이나 그들이 소금과 빛의 복음을 받자 변화,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이루어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다. 바이킹스 스칸디나비아 해적 생활하던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자 그들 정체를 새롭게 발견하고 참 맛을 내면서 세계 각곳에 아름다운 일을 하며 미네소타를 세우는데 중심적인 일을 하다. 이것은 역사다.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 상륙하기 전 그들의 꿈은 미국을 주의 빛을 받은 산 위의 동리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들의 참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고 숨김 없이 투명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정신으로 어려움이 덮여 있는 온 세계에 나가 소금과 빛으로 섬기며 생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미국은 하나님이 쓰시는 힘 있는 나라가 되고 있다. 레이건도 대통령 퇴임사에서 산 위의 동리로서 세계를 향한 사명을 기억시켰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누구인가? Korean-American? 예수님을 만나고 내 참 모습, 하나님 형상을 발견하고 나의 본래 맛을 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내가 만난 누구에게 그의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맛을 내게 하고 참 생명을 누리게 하였나? 그러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소금과 빛인 주님을 참으로 모시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가?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 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내가 나를 녹이고 나를 태우고 희생하며 섬기고 있는가? 내가 너무 나를 주장 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참 모습을 보게 하고 원래의 맛을 내게 한다면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얻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 큰 기쁨과 감격이 될 것이다. 주의 은총이 우리 개인 개인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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