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31, 2020

새해 새 아침 A New Year, A New Dawn

새해 새 아침 A New Year, A New Dawn (2021-1-1) 
 
힘들고 어려웠던 2020년이 지나고 희망의 새해를 맞으며 새로운 변화가 오기를 기대한다. 팬데믹을 물리칠 수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왔으니 걱정을 풀게 되고 대통령 선거도 잘 마무리되어 정국이 안정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달력을 넘기면서 새해가 되었지만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이 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그대로지만 우리가 새해에 새로운 날을 기대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이 달라진 변화다. 그러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작년과 달라질 것이 없는 또 한 해가 될 것이다. 
 여기 삶이 달라지고 인생에 새해 새 아침을 만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라 이름이 그에게서 나온 야곱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이름을 야곱, 경쟁과 술수, 씨름과 다툼으로 평생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형 에서는 들 사람으로 사냥을 즐기나 야곱은 집에서 엄마를 도우면서도 언제나 형이 되고픈 마음이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명분을 넘겨받는 술수를 하고 나중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지만 형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된다. 중간 광야 벧엘에서 하루 밤을 지나며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함께 하고 복을 준다는 약속을 받는다. 라반의 차녀 라헬을 사랑하여 7년간 양을 치고 받은 것은 장녀 레아로 속임당하고, 다시 라헬 값으로 7년을 일하다. 20년 양을 치는 동안 라반을 부자가 되게 하고 자기는 더 큰 부자가 되는 재간을 부리지만 라반은 열 번이나 품삯을 바꾸더니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마음을 나타내자 야곱은 아내와 여종, 자녀와 양을 모두 이끌고 고향으로 야간 도주하게 된다. 라반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를 해치지 못한다. 
한 산을 넘었으나 더 큰 산이 앞에 있다. 형 에서가 동생 소식을 듣고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 야곱은 두려움으로 선물을 준비하고 아내와 종들을 나누어 앞서 보내고 자기는 홀로 강가에 남아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한다. 새벽이 되어 상대는 가겠다고 야곱의 허벅지를 쳤지만 야곱은 축복하지 않으면 놓치 않겠다고 한다. 야곱을 이스라엘 곧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전능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지만 간절히 그를 붙잡는 자의 소원에는 넘어가신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브니엘의 밤이 지났다. 해가 돋았고 야곱은 환도뼈로 인하여 절룩거리며 출발한다 (창32:31). 
아침의 돋는 해는 전날과 다름이 없지만 그의 생은 달라진 새아침이다.  그가 자기 꾀, 자기 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람을 속이고 넘어뜨리며 이익을 취하던 때는 지나갔다. 더 이상 자기 힘을 쓸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위기를 만나 아빠의 손을 붙잡는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다가 오는 에서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려 형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며 그의 처분만 기다리니 에서는 오히려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자세와 삶이 그를 승리자 이스라엘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복의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떠한가? 2020년은 나의 절룸발이 무력함을 현저하게 보여주었기에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새아침 새삶을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형의 장자 명분을 넘겨 준다면!

                                         도망하는 야곱에게 네가 너와 함께 하리라

                                                흰양이 점과 무늬 있는 양으로

                                                  라반을 피하여 야간 도주

                                                      밤새도록 씨름하는 야곱

                                                        절름발이로 새날을 맞아

최악의 형편에서 In the Worst Situation

 

최악의 형편에서 In the Worst Situation 

타임은 금년 2020년을 최악의 해라는 표지(12/14)를 내었다. 코비드 19 팬데믹이 세계를 덮쳐 서로 격리하며 모든 활동이 10달 동안 거의 마비상태에 있으나 다시 3차 파도가 일고 있다. 오스트랄리아와 캘리포니아에 끄질 줄 모르는 산불이 몇 달간 계속되며 자연 재해의 심각성을 보여 주었다. 조지 플로이드가 사소한 일로 미네소타에서 경찰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흑인의 생명이 귀하다’는 민중운동이 미국에서 세계로 번져 나갔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미궁이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개가 피곤과 싫증, 좌절과 암울에 허덕이는 최악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임은 적절한 대처의 길을 말하지 않는다. 저마다 위기를 피하여 숨거나 도망하지만 안전한 곳이 없다. 참고 기다리던 중 백신이 나왔다고 하지만 한계를 본다.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열심히 일을 하고 도우며 해쳐 나가는 영웅도 있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 아니라 인간 역사와 같이 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를 실감하며 인간은 자기 밖의 초월적 신을 찾아 의지한다. 전쟁도 옛날에는 신과 신의 대결로 어느 신이 더 강한가를 보여주었다. 
 욥은 동방의 갑부로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의로운 사람이지만 삽시간에 그의 많은 재산을 다 잃고 열 자녀가 모여 잔치하던 집이 태풍에 무너지며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욥 자신은 온 몸의 악성 종양으로 죽음 같은 고통에 처하였다. 부인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은 위로할 말을 잊고 그의 잘못을 회개하라 촉구하여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욥은 최악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더니 결국 그의 모든 것이 이전보다 배로 회복되었다. 사람이 욥의 하나님을 믿고 싶으나 그 하나님은 신상이 있는 다른 신과는 달리 신상이 없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지킬 삶의 규칙을 주시고 그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나중 성전을 짓고 모시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이 있는 곳,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이기에 사람이 전쟁 기근 질병 등의 위기를 만나며 이 성전에서 또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말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얻는다. 앗수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하라고 신의 이름으로 위협할 때 히스기야왕은 대항할 능력이 없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그날 밤 적군이 모두 시체로 변한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 백성은 모든 최악 형편에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며 살 힘을 가진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성전예배가 형식화되자 하나님은 떠나고 건물은 파괴되고 사람은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과 만나고 싶어하시기에 최악의 형편인 세상에 예수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이라 그를 만남이 곧 하나님을 만남이지만 누구나 그를 진정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원하고 초청하면 그는 응하여 성전에서처럼 우리를 만나신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요 축복이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최악의 죽음 상태에서 우리와 함께하러 오신 예수님을 맞아드리는 기회다. 내 삶 속으로 그를 주로 환영할 수 있겠나!

                                             코비드 19 Pandemic over the world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영웅들

                                                    산불을 어떻게 하나?

                                          동방 최고의 갑부 욥이 당하는 시련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

                                                     히스기야 왕의 성전 기도

왕중의 왕 예수께서 오시다


Monday, December 21, 2020

최대의 유일한 희망 The Only Greatest Hope



최대의 유일한 희망 The Only Greatest Hope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은 산타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고 싶다는 소원 목록을 만들지만 어른들도 무엇을 갖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다. 비싼 침대에 누우면 불면이 풀리고 잠이 잘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근대 서구는 교육과 과학, 법률, 자선을 발전시키면 이상적 평화가 올 것이라 희망하였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허탈에 빠졌다. 희망하고 투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일이 많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어둔 밤 지나서 밝은 아침이 온다는 자연이치는 확실하지만 사람은 희망과는 달리 여전히 가난과 억압, 고통과 분리 속에서 신음하고 한탄한다.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세균에게 활동과 자유를 내어주고 있다. “흑인의 생명이 귀하다”는 행진을 하며 폭동과 약탈, 방화와 살인을 자행하는 현실이요 정직과 공정이 민주주의의 기반이지만 거짓과 술수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릴까? 좌절과 한탄의 늪에 빠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하는 옛 성도의 음성이 오늘 나를 일깨운다. 
 어둠 속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하늘의 빛과 함께 천사가 나타나 온 세상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며 평화의 구주가 났다고 한다. 동방에서 천체를 연구하던 세명의 박사들은 왕의 별이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는 것을 발견하다. 목자나 박사는 듣고 본대로 희망을 찾아 나서다. 기쁨과 평화는 비천한 목자나 고상한 연구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인류의 희망, 기쁨과 평화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그가 인간에게 구원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특이하지만 그는 목자와 박사의 경배와 선물을 받으면서 또한 그를 제거하겠다는 시기와 미움의 칼날도 그가 임한 세상의 현실이다. 여기서 그의 삶과 행보는 어떠하였나? 
그는 ‘자기 죽음’의 세례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고 세상에 나타나다.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에게 치유와 해방, 자유를 선물한다. 소외되고 멸시 받는 이들을 찾아 친구가 될 뿐 아니라 가지고 누리는 자라도 그를 찾으면 그의 소원도 허락한다. 배반과 거절, 미움을 받아도 그는 배반하고 거절하고 미워하는 자를 용납하며 평화와 자유를 나눈다. 그는 사람의 깊은 소원에 응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한다. 무엇을 말씀하나? 
길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한다. 나누어진 장소와 시간, 관계를 연결한다.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이 분리하고 반목하며 고통하는 현실에서 자신이 그 중간의 막힌 담을 헐고 길을 낸다는 말이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모든 것 되는 하나님’, 그와의 관계를 막고 있는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을 열어 주신다. 진리는 본질이다. 하나님은 누구며 사람은 무엇이며 사람의 기본 필요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신다. 생명은 누림이다. 오늘의100세 시대나 옛 900년 시대에도 더 누리고 싶은 것, 죽지 않은 생명이 소원이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있을까? 예수님만이 이 소원에 응답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Monday, December 14, 2020

 

자기를 비움 Self-Emptying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면 서로를 생각하며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는다. 이전에 많은 카드와 선물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지고 잊혀진 존재처럼 된다면 어떤 마음일까! 
남이 나를 잊은 것보다 내 스스로를 잊고 살 때가 있었다. 이민 초창기 언어 문화 풍습이 다른 이 땅에서 전문직이 아닌 일반인은 대개 고국에서의 이름 지위 업적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을 알자 과거의 자기를 잊고 겸손하게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며 꿈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자기를 잊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면서 남은 인정하고 받아주지 못하여 비판과 경쟁, 분리가 일어난다. 인정받고자 성취하려다가 불안 고통 탈진에 빠진다. 바로 자기중심적인 교만이다. 교만이 삶을 살벌하고 추하게 하고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신다. 아름다운 삶의 관계에는 남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자기 잊음이 중요하다. C S 루이스는 자기 잊음의 아름다움을 셋으로 말한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곧 석양, 심포니, 소설 등을 진심으로 좋아하며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다. 인생을 즐기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동감하고 언제나 잘 웃는다. 자기 작품이 최고 수준이라도 그것을 남과 같이 즐기기는 하지만 자기가 한 것이라 내세우지 않은다. 이는 겸손, 자기 잊음,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이요 삶의 미덕이다.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바울은 그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나 자기를 비우고 우리 몸을 입고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한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 부정, 자기 잊음이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인 자기를 비운 것이다. 비우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쏟아 부어 다른 그릇을 채워 줌이다. 
두 아들을 가진 홀 엄마가 빚으로 팔려 종이 될 형편인데 선지자 엘리사가 그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기름 한 병 뿐이라 한다. 동리에 나가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 하고 빌려온 그릇에 그 기름을 부으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그릇이 모두 꽉 찼다.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로 편하게 살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 사랑 평화의 인격이시나 사람은 자기 중심의 교만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다가 죽음과 갈등 고통에 빠지고 사탄과 거짓의 종이 되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고자 자기에게 가득한 하나님 본체를 비워 인간에게 채워 주시려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생명의 피를 쏟은 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채움 받으려면 그릇을 먼저 비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자기 부정, 비움이다. 거짓과 교만으로 가득한 내 그릇을 비울 때 그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본체로 채울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비워 우리에게 채워 주시니 생명 얻은 모든 사람이 그를 주로 인정하고 높이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내가 주님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하고 확인할 때다. 나를 비워 빈 그릇으로 주님 앞에 내어드릴 때다. 나의 빈 그릇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움 받은 것을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는 때다. 인생 광야에서 아직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 속에 채워져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비우고 부어주는 때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가 내게 살아나기를 기대한다.







Monday, December 7, 2020

기다림 Waiting

 

기다림 Waiting 

 중학교 시절 전체 조례 교감의 훈시에서 “거센 파도가 굳센 사공을 만든다”고 한 말은 내 가슴에 큰 파장으로 남았다. 준비 없이 맞은 전쟁에서 밀리고 밀려 경주에서 부산까지 경상도 일부만이 남아 있어 나라가 살아남을 여망이 없었지만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진하며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강산은 초토가 되고 수 백만 생명이 손실되는 좌절과 아픔 속에서 휴전이 되고 국민은 새 나라를 내다보고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여 오늘이 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잡힌 바울은 배로 로마에 호송되는 과정에 큰 풍랑을 만나 276명을 태운 큰 배라도 구출 희망이 없었다.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배는 잃어도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며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주리고 먹지 못한 지가 14일이라 이제 음식 먹기를 권한다”하고 떡을 들고 감사기도 후 같이 먹고는 힘을 얻었다. 곧 로마에서 멀지 않은 섬에 상륙하며 죄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인생의 어려운 파도가 휘몰아친다. 오랜 코비드 팬데믹으로 직장에서 레이오프가 되며 살길이 없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지난 10월 2158명이 자살을 택하였다. 어찌 일본 뿐이겠나?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여러가지로 표현되지만 인생은 기다림 바로 그것이다. 식품점이나 우체국에서의 긴 줄, 사춘기에서 성인, 씨를 뿌려 싹과 열매를 보는 것,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은 모두 기다림이다. 이런 기다림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교회는 지금 대림절기로 구주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가난과 고통, 질병과 죽음, 부정과 불의, 분리와 대결이 큰 파도로 밀려오는 세상에 치유와 생명, 자유와 평화, 정의와 사랑으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림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주는 아름다움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을 주노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시는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 받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키케로가 “숨쉬는 동안 희망할 것이라” 하였지만 주를 기다림은 우리 삶의 힘이요 희망이다. 

 기다림은 자기를 살피고 정리하는 기회다. 팬데믹으로 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은 집안 정리를 많이 한다. 바울이 탄 배가 큰 파도 속에서 무거운 짐을 모두 버렸다. 기다리며 나의 교만과 자랑, 욕심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겸손과 인내를 배우고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웃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모세는 40년간 양을 치며 기다리는 동안 살인하도록 성급한 목표 달성과 자기 영화를 뒤로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지도자로 변화하였다. 

 기다림은 지난 날 나의 삶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더욱 그와 친근한 관계를 갖게 하며 내 계획 내 방식보다는 하나님의 시간과 뜻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부인과 자기 방식대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후에 받은 약속의 아들 이삭과 대조와 갈등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더욱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일 하실 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회개의 세례로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는 평화와 생명이 우리 가슴과 사회에 일어나도록 희망과 믿음으로 자기 정리를 하며 기다려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