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30, 2022

카르페 디엠 Carpe Diem: Seize the Day

카르페 디엠 Carpe Diem: Seize the Day (7/30/2022)
해리스버그 전환기 교회 목회시 교회에서 가까운 언덕 위 풍광 좋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옆으로 교회와 묘지가 있어 우리 부부는 산책코스로 그 주변을 걸었다. 100년 전 무덤, 최근의 무덤, 90세 노인, 17세 중학교 운동 선수도 묻혀 있다. 죽음은 어느 때나 나이에 상관 없이 찾아온다. 내가 2018년 도미니카 선교지에서 30여명 앞에서 연속 강의를 하던 중 코가 막히어 강의를 중단해야겠다 하였는데 아내가 보니 내가 뒤로 쓰러지고 모두가 놀라 나가보니 죽은 상태라 90도 더운 날씨에 금방 썩을텐데 하는 걱정이 앞서더라 했다. 참석자 중에서 심폐운동을 시키고 둘러 서서 기도하고 아내는 바늘로 내 발가락을 찔러 피를 내고 했단다. 얼마를 지나서인지 찬송과 기도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죽음은 순간적으로 오기에 어느 때나 죽음준비를 해야함을 깨달었다.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개선하고 돌아오며 열렬한 환호를 받는 때 그는 마차에서 자기 뒤에 한 종을 세워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당신이 죽어야 함을 기억하시오)를 반복하여 말하게 하였다. 그가 많은 적군을 죽이고 승리한 그 영화와 자랑의 절정에 그도 죽음을 실감하며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로마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전도서에 헛되다(hevel)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는 안개 입김 바람으로 그것을 잡으려 하지만 잡히지 않고 사라진다는 의미다. 지혜 부 권력 영화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려고 하나 바람을 잡는 것과 같고 악인이나 짐승이나 다름 없이 어느 순간 죽음을 맞는다. 100세 시대가 아니라 1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결국 한 곳으로 가는 순간에 불과하다. 
한 순간에 죽는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는 그의 시(Odes)에서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이라 한다. 꽃이나 과일을 때맞추어 거두라로 날을 붙잡으라(Seize the Day)이다. 성경은 우리 날 계수함을 알게 해 달라, 세월을 아끼라 한다.
우리가 누리는 시간과 날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라 주인이 따로 있다. 전도서는 그 주인을 기억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라 한다. ‘경외’는 여호와는 나와 다른 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고 새날을 맞으면 그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분복이기에 그날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이 지혜요 행복이다.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 몫이니라.” 
죽음 맞을 준비를 한다. 몬테인은 “죽음 연습이 자유 연습”이라 하듯 매일 잠자리에 드는 것을 죽음 연습으로 삼고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영생으로 이주하는 관문이라면 기쁨으로 환영할 수 있지 않겠나?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베풀고 유익을 끼친다. “네 떡을 물위에 던지라” 물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고기를 위하여 자선하고 나 외의 다른 생명을 기억하며 나눈다. 주님은 그것이 곧 주를 위한 것이라며 기억하고 상을 주신다. 카르페 디엠!











Monday, July 25, 2022

깨어진 질그릇 Broken Clay Pot

깨어진 질그릇 Broken Clay Pot (7/23/22)
집에 여러가지 많은 그릇이 있는 가운데 나는 뚝배기를 잘 사용한다. 아침은 내가 담당하기에 오트밀을 끓일 때 그것을 사용하고 아내는 찌개나 다른 많은 것을 그것으로 요리하기에 소중하게 여기는 그릇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은 이긴 흙을 녹로로 돌리면서 용도를 생각하고 마음에 들게 형태를 만들고 색깔을 칠하여 불에 구워 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석기시대 이전부터 진흙으로 크고 작은 각종 옹기를 만들어 다양하게 사용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바로 이 질그릇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질그릇은 사용이 편리하나 쉽게 깨어지고 깨어지면 못쓰게 된다. 못쓰게 되면 오늘은 쉽게 버리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께서 깨어진 조각을 수액으로 붙이고 태를 매워 굳어지기를 기다려 다시 사용하였다. 이렇게 깨어진 그릇을 복원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킨쯔기라는 예술로 발전하여 원래의 그릇보다 더 아름답고 든든하도록 하고 이를 보면서 깨어진 인간이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일어나도록 격려하고 있다. 
제대로 기능하며 살려다가 깨어지고 버려진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버려진 채로 더욱 밟히든가 또는 자포 자기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도 한없이 많다. 
성경은 깨어진 질그릇을 회복하는 놀라운 예술의 고장이다. 두 아들을 가진 부부가 기근을 피하여 베들레헴(떡집)을 떠나 풍요한 곳 모압으로 이민하여 살며 그곳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정착하는데 가장과 두 아들이 모두 죽는다. 가정은 깨어지고 당시 문화에서 버려진 존재인 세 여인 나오미와 오르바, 룻만 힘 없이 남았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을 하고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삶을 회복하라 권고하지만 룻은 어머니의 백성과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삼아 같이 살고 같이 죽겠다며 그를 따른다. 고향 사람들은 나오미 (기쁨)를 환영하나 그는  풍족하게 떠났지만 하나님이 쳐서 깨뜨린 빈그릇이라며 마라 (괴로움)로 부르라 한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마침 추수기라 룻은 추수 후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자 밭으로 나간다. 하나님은 일찍 나그네와 과부, 고아를 위하여 추수군에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남겨두라고 하셨다. 룻은 이방 여인이요 과부라 인격대우를 받을 위치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획아래 나오미의 친족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고 보아스를 만나며 결국 그와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룩하고 아들을 낳아 기쁨을 회복하고 나오미의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오벳이라 하고 그는 다윗의 조부가 되었다. 깨어진 그릇을 원상보다 더 아름답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본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이며 메시아 예수의 조상이 되는 다윗도 한 때 “깨어진 그릇과 같이” 잊어버린 바 되었던 것을 시로 표현한다. 그는 사울왕에게 쫓기며 양털을 깎던 부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때 괄시를 받았고 그와 일행이 살던 동리가 약탈을 당한 때는 일행이 그를 돌로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를 만들고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주를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힘을 얻고 최고의 그릇으로 재생되었다. 
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이지만 부셔진 것이라도 주의 손에 들어가면 보다 훌륭한 그릇이 된다. 우리는 깨어지기 쉽고 깨어진 질그릇이나 예수를 믿으면 질그릇에 가장 귀한 보배를 가지고 있기에 그 보배가 빛을 내고 세상을 밝히며 새롭게 하니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있겠나!









Monday, July 18, 2022

드림 팀 Dream Team

드림 팀 Dream Team (7/16/22)
6-70년대 한국이 세계 최빈국가에 속하여 국민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많은 사람은 가난을 벗어나 잘 살아보려는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꿈을 이루고자 부부가 팀이 되어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한 사람은 일찍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한대로 일에나 삶에는 혼자 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창조시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하와를 만들어 그에게 데리고 가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평생 함께 삶을 나눌 드림팀이 되었다.
올림픽 위원회가 1972년부터 전문인 참석의 길을 열자 미국 농구팀은 불즈의 마이클 조단을 위시하여 유명한 선수들로 팀을 구성하여 세계 어느 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였다. 팀원들은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서로 책임을 지고 협력하며 코치의 지도를 따라 드림을 이루었다. 
멜리나와 트레보르는 친구로서 멜리나는 천성적 병으로 휠체어를 타고 트레보르는 녹내장으로 실명 상태였다. 이들은 콜로라도 자연을 즐기는 등산 계획을 세우고 출발하여 가다가 오르막에서는 트레보르가 멜리나를 등에 업고 멜리나의 안내를 따라 감격스럽게 등산을 완성하였다. 자기 약점으로 좌절하지 않고 가진 것으로 서로 보충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부족하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협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이루실 때 대개 사람과 팀이 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부인을 따라 바알 숭배의 극치에 이른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인 것을 확인시켰다. 이에 왕비가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도망하여 굴속에 숨었지만 하나님은 약한 그를 통하여 계속 큰 일을 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고 생명을 구하고자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때 예수께서는 홀로 일하지 않고 팀을 만들었다. 그는 이름 있는 종교인, 학자, 정치적 세력을 가지는 공회원이 아니라 시골 갈릴리 지방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찾았다. 어부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하여 세리 마태, 그 외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 수도 없지만 12명 각자에게 나를 따르라고 불렀다. 부름을 받자 그들은 하던 일과 있던 자리를 떠나 주님을 따랐다. 이들은 생각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르고 자기 중심적이지만 주님은 이들을 3년간 훈련시켰다. 
시몬이 예수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자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많은 일을 하였으나 주의 십자가 계획을 제지하고 풍랑을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지고 하녀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약한 존재였다. 주님은 그래도 그를 계속 세워 일을 하셨다. 주께서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능력 받아 설교하자 3천명이 회개하고 주를 믿는 일이 일어나고 그는 끝까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기까지 주와 팀이 되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팀이 되어 주의 나라와 구원의 꿈을 이루심을 보여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많은 지체가 팀을 이루어 몸의 기능을 하듯이 지체인 교인들이 목사의 지도와 훈련으로 협력할 때 교회의 사명을 이루게 된다. 
이제 나는 누구와 팀인가? 하나님과 드림팀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Saturday, July 9, 2022

그대의 몸은? Thy Body?

그대의 몸은? Thy Body?
우리는 우주 국가 가정을 한문으로 집이라 이해한다. 집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어떤 생명체가 사는 곳으로 국가 가정은 우리 삶을 위한 거처로 본다. 집이라면 자기가 지을 수도 있고 남이 지은 집을 사거나 빌리기도 하지만 집 자체의 값은 모두가 다르다. 가치가 어떠하든 자기가 사는 집이라면 거기서 평안과 휴식, 사랑과 자유를 누리며 삶의 힘을 얻고 자손을 생산하고 뻗어가기에 누구나 자기 집을 갖고자 한다. 고생하는 이민자의 소원이 집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나! 
성경은 우리 몸을 집이라 표현한다. 고난 당하는 욥을 찾아 온 한 친구는 사람을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도 무너질 자, 하루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는 자라 한다. 우리의 몸은 약한 티끌로 된 흙집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놀다가 몸을 다치면 거기에 흙을 뿌리며 흙이 네 어미다 하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평생 이 흙집에서 살며 이 몸을 가꾸고자 많은 노력을 한다. 음식과 운동, 스트레스 해소와 잠, 친구와 오락을 가진다. 헬스클럽에 가는 자들은 힘을 다해 열심히 운동하고 근육이 잘 발달한 몸짱들은 자기를 과시하는듯 하고 많은 이는 그를 부러워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흙은 흙이라 언젠가 무너질 날이 오고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 저기 불편을 느낀다. 소화불량을 모르다가 언제부터인지 트림을 하게 되고 뼈마디가 아프고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가 고치기 어려운 질병을 만난다. 내가 주인 노릇하고 있는 집에 무엇인가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비드를 막기 위하여 지난 2년 반 이상 많은 방비를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는 투쟁, 조심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고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며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을 실감한다. 
하나님이 태초에 땅의 먼지로 형체를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은 때 움직이는 생령이 되었다. 우리 몸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힘은 하나님의 생기 곧 그의 본체에서 온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된다. 우리 몸에 거처하던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나는 바로 흙이 되고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조요 계획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악하게 되자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과 함께 거할 수 없어 떠나게 되니 사람은 흙덩어리의 삶을 살며 육체가 원하는 것을 행하여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며 하나님을 배제하니 힘이 있다고 하나 결국 흙과 먼지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다시 자기 집으로, 자기 소유로 삼고자 아들을 보내시고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치셨다. 예수의 생명으로 내 몸을 사셨으니 내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 되었다. 또한 주님은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들어가서 정결하게 하고 거하시는 집으로 만드신다. 아들이 있는 자는 아버지가 있기에 아들을 영접하면 아버지도 오시어 생기인 성령을 부어시어 우리를 생령이 되게 하신다. 내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주의 집이기에 나는 그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는 삶을 살며 영원한 주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   










Sunday, July 3, 2022

생명 존중 Honor of Life

생명 존중 Honor of Life (7/2/2022)
유학 와서 만난 한 친구는 자기 자녀가 셋인 데도 세 아이를 입양하여 여섯 자녀로 큰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세 아이를 기르고 돌보는 것이 힘들고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는 불쌍하고 가여운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능력을 감안하여 세 아이를 입양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생명 사랑과 존중에 감탄하였다. 나의 방 창문 옆 나무에 라빈이 집을 지었다. 봄에 알 넷을 낳아 새끼를 부화하여 가더니 이제 다시 알 셋을 품고 있다. 고양이나 다람쥐가 오지 않는 안전한 집이라 생각된다. 내가 저녁에 호박 오이 고추 등에 물을 주려고 근방에 다가가면 주인을 모르는 듯 어느새 날아 나와 나를 공격하듯 가까이 하여 소리지르며 멀리 쫓아 보내려 한다. 생명이 들어있는 알을 보호하고 새끼를 뜨겁게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본다. 
생명과 자식 사랑에도 변질이 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여 쳐죽이고 그 후에는 살인이 빈번하다. 일반 사람만 아니라 태아도 죽이지만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낙태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인권의 이름으로 자유를 누리겠다며 낙태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며 텍사스에서 Jane Roe가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법에 고발을 하고 결국 대법원은 헌법 수정 14조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은 법적 절차가 아니면 박탈될 수 없고 나아가 그것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개인의 낙태권리를 인정한 것이 1973년의 Roe vs Wade 판결이다. 여성들은 개인의 건강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유로 낙태를 선호하고 또 낙태 시술소가 전국에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1973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에서 시술된 낙태는  63,459,781건이었고  일리노이 주에서는 2020년까지 2,367,944로 집계되고 있다. 낙태 합법화 이후 48년동안 한국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의 태아가 사멸되었다. 그들 중에 어떤 인물이 있었을까 상상할 수 있을까? 
이런 형편에 미시시피 주는 임신 15주에는 낙태가 불가하도록 소송을 하고 대법원은 지난 6월24일 그것을 허락하고 이어서 Roe v Wade법안을 뒤집고 각주에서 마지막 결정하도록 하였다. 대법원이 결정한 법안이지만 헌법 수정 14조에나 어디에나 낙태권리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이전 법안을 폐기하였다. 이에 생명이냐 자유이냐가 주로 나누어지게 되고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이 결정한 날을 “법원과 국가에 슬픈 날”이라 하고 일리노이 주 지사는 낙태를 옹호한다고 공언하며 낙태가 금지된 타주 여성들을 환영하는 인상을 주고 또 아마존은 타주에 가서 낙태 시술하는 자들의 경비를 지급하겠다고 한다. 시술만 아니라 약물 낙태가 있기에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태아는 아직 사람이 아니기에 낙태를 살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가 많고 따라서 출생 후 1년에 한 살이라 하지만 한국에서 출생하며 한 살이라는 것은 태아부터 생명으로 존중하는 귀한 문화임을 보인다. 
더욱 하나님은 우리가 태중에 형성되기 전부터 계획하고 알고 태어나게 하심을 다윗, 예레미야, 구주 예수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어떤 다툼으로 임산부나 태아가 상하거나 낙태를 하는 경우 사고든 고의든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라고 규정하여(출21:23) 태아를 한 생명으로 존중한다. 죄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시고 자기 생명을 주셨으니 내 생명이 천하보다 존귀함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