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6, 2018

공의와 사랑 Justice and Love


미가 6:6-8 공의와 사랑 Justice and Love (2-18-18 사순절 1주일)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에게 잘 하고 싶어한다. 특히 가족일 경우 부모는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나 자녀는 그것을 부모의 사랑으로 고맙게 받아드리지 않은 경우가 많다. 부모가 자기 위주로 하는 것이지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부도 서로를 위한다. 음식을 잘 해도 상대방이 그렇게 즐기지 못할 때가 있다. 요리하는 사람이 상대방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 좋아하는 식으로 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하나님 관계에도 일어난다.
오늘 미가서의 배경은 유다가 어려운 형편에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이웃 나라와 동맹을 하여 안전을 추구한다.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고 백성들은 고통을 당한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겠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나? 그들은 번제를 드린다. 일천 수양을 드린다. 심지어 자기 맏아들을 드릴 정도로 나간다. 그래서 하나님 호의를 받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한다.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누가 그것을 요구하더뇨 너희는 내 마당만 밟는다 (1:11,12)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은 많은 제물보다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더 기뻐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신 것,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4)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원하신다.

1  공의를 행하라 하신다. 이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라는 것이다. 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신다. 9:8,9 여호와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시요 환난 때의 요새라. 성경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공의로운 분이라 한다. 공의는 무엇인가?
1) 바른 관계를 위한 것이다. 생명과 평안 조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 생명과 안녕을 누리게 된다. 이를 위하여 법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라 하고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하시며 바른 관계를 위하여 그들이 살아갈 길을 보여 주시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하며 그와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씀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이 생명과 축복의 길이다. 예수께서 이를 가장 큰 계명 모든 율법 중에 가장 핵심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이 법을 주신 것은 생명과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것이다. 그 관계를  깨뜨리면 그 결과로 생명을 잃고 평안을 잃는다. 법을 어긴 결과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법을 어긴 아담을 하나님이 심판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것이 공의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수요일 플로리다 파크랜드의 고등학교에 19살 니콜라스 크루즈라는 괴한이 자기 모교인 그 학교에 총을 가지고 가 17명 학생 교사를 무차별 죽였다. 생명과 평안을 파괴하였다. 가족과 공동체에 큰 고통을 더하다. 이런 경우 그 범인에게 그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공의다. 그를 용서하고 내 버려 두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2) 공의를 실행할 때는 공평함이 있다. 증인이 법정에서 증언할 때 부자라고 두둔할 것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박대할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공평하게 대하라 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꼭 같이 창조함을 입은 생명으로 존중을 받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공의다. 하나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서 고생하며 인격 대우를 받지 못하다. 하나님이 공의로 그들을 자유인으로 구하여 내었다. 너희들이 종으로 살다가 해방되었은즉 종을 부리지 말라. 공의요 공평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공평한 대우를 받기 위하여 300년간 투쟁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된 그 때에 누구나 동등한 것이 증명되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대우 받는 것이 공의다. 성경에는 공의와 관련하여 9 종류의 사람 곧 과부 고아 아버지 없는 자, 가난한 자, 주린 자, 나그네, 없는 자, 약한 자, 눌린 자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꼭 같이 대한다. 압제 당하는 자의 요새요 환난시의 요새시다. 예수께서 여기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다. 야고보는 교회에서 차별 대우를 본다.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또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 (2:2,3). 오늘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교회 안에 공의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사랑하여 피흘리고 구한 사람을 너희가 멸시하나!
3) 공의는 빚진 것을 갚는 것이다.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한다. 집을 사기 위하여 돈을 빌린다. 그리고는 다달이 그 돈을 갚는다. 그것이 바른 길이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을 하면 댓가를 바르게 치르는 것이 공의다. 그래야 관계가 유지되고 사회의 안녕이 지속된다. 세금 낼 것을 낸다. 우리가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있나(고전 4:7)? 우리 생명 재능 모두 우리가 받은 것이다. 빌린 것이다. 언젠가 돌려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을 빌리고 받아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사용료를 얼마를 내고 있나? 빚을 갚지 못하면 문제다. 집 값을 내지 못하면 집이 차압된다. 그것이 공의의 실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다. 하나님이 얼마를 요구하시나? 시간의 경우 7일에 하루 그 날을 하나님 예배에 드리라 한다. 물질의 경우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리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공의로운 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생명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주셨다. 나는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의를 행하나?
공의를 행하면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의를 행하는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생명 사랑하고 모든 사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사랑이 기본이 되어 공의가 실천된다.  

2   인자를 사랑하라. 인자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7:8 여호와 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었다. 요한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 하나님은 삼위일체 간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가 만든 세상과 사람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돌보시고 사랑하신다. 버려두지 않으신다. 어디서나 항상 같이 한다. 지켜준다. 우리가 그의 것이기에 사랑하고 돌보신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와 그 자손을 자기 사람으로 삼고 복을 주신다고 언약을 맺고 사랑한다. 그의 후손이 어디 있든지 언제나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변치 않고 사랑하신다. 아브라함 후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사랑도 그렇다.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한 주의 백성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우리를 성령의 전이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시니 참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변치 않고 사랑한다. 우리 삶이 많은 언약 약속으로 된다. 부부가 결혼할 때 평생을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한다. 그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것이 신실한 사랑이다. 목사 장로 집사가 될 때 서약을 한다. 주께서 약속을 지키듯이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세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 또 한 교회의 교인이 될 때 교인 서약이 있고 그 서약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다.
2) 우리가 배반하고 잘못하여 죄를 범할 때에도 사랑하신다. 자식이 잘못하는 것을 버려두지 않고 채찍하고 징계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의 백성이 잘못하고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린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간 둘 째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흉년을 만나 남의 돼지를 치다가 먹을 것이 없던 차에 부모 집을 생각하고 뉘우치며 돌이켜 찾아가다.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있다가 뛰어나가 반갑게 맞는다. 옷을 갈아 입히고 잔치한다.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큰 아들이 들에서 돌아와 되어지는 일을 보고 분개하여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아버지가 나와 위로한다. 내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 아닌가? 네 동생은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하고 받아준다.
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공격해 온 때 대항할 힘이 없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18 5천 아수르 침략군을 모두 송장이 되게 한 믿음의 왕이다. 죽을 병이 든 때 눈물로 기도하자 15년 생을 연장 받은 왕이다. 이런 왕의 아들이 므낫세다. 므낫세는 잊어버리게 하는 자라는 의미다. 55년 가장 오랜 기간 통치를 하면서 어떤 왕보다도 더 악한 일을 많이 하다. 하나님 성전에 우상을 세우고 심지어 아들을 우상에게 바치기도 할 정도다.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일로 나라를 심판하시다. 아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이 므낫세를 사로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다. 그 환난을 당하자 그때에 깨닫는다. 그가 겸손하게 조상의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시 왕위에 앉게 하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인 줄 알고 (대하 33:11-13)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고 이스라엘 하나님만 섬기게 하였다. 겸손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신다.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멸하려 하였지만 그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용서하였다. 요나는 그럴 줄 알고 도망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노를 돌이켜 용서하실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예수의 제자들은 온 세상에 나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지옥의 뗄감이라 생각하고 멸시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신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랑으로 선택하여 영적인 이스라엘로 생명과 복을 받게 하셨다. 사랑이다.
3) 끝까지 희생할 정도로 사랑한다. 주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13:1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 죄를 묵과하는 것 아니다. 고치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은즉 그런 사랑을 하라고 한다. 잘못하는 사람을 받아주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사랑을 베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기도한다.

공의와 사랑은 같이 가지 못할 것 같다. 공의는 사랑 없는 심판이요 사랑은 모든 잘못을 묵과하여 공의가 없는 것으로 보여 서로 반대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공의의 기초는 생명과 안녕을 사랑하기에 행해진다. 사랑도 온전한 생명과 안녕, 질서를 위해 징계하는 공의를 보인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 주께서 바라는 생명 평안이 이루어진다. 사순절 기간은 이 둘이 예수님 안에서 서로 만나고 조화를 이루어 우리 모두가 참생명과 평강을 누리게 됨을 기억한다. 우리가 관계를 깨뜨리고 심판 받을 존재이지만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택하고 인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겸손해진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예배하게 된다. 우리 이웃에 대해서도 주께서 공의와 사랑으로 대하기에 나도 겸손히 그를 받아 드릴 때 참 생명과 안녕의 삶을 누릴 것이다. 공의와 사랑, 겸손으로 주의 생명과 평안을 최대한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동영상 www.kpcm.org

아담과 하와의 가죽 옷 Coa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창세기 3:14-21 아담과 하와의 가죽 옷 Coats of Skin for Adam and Eve (2/25/18 사순절 2주)




여러분 각자가 특정한 옷을 입고 이 자리에 왔다. 어떤 옷을 어떤 생각으로 입었나? 지난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각국 선수단이 각각 다른 옷을 입었다. 추운 겨울이니 가죽 옷을 입은 자도 있고 또 자기 나라 화려한 복장을 한 자들이 있고 남태평양 통가에서 온 대표는 옷을 벗고 입장하다. 물론 그 나라 전통이라 볼 수 있다. 옷을 입지 않고 사는 자가 있고 가죽으로 옷을 입는 자가 있다. 인류의 시조가 살던 낙원 에덴동산에서 옷의 문화가 발전하였다. 벗고 살던 때가 있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때가 있고 가죽옷을 입은 때가 있었다.

1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벌거 벗고 살았다(2:25). 벌거 벗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1)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다.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그들에게서 비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통가에서 온 선수는 근육이 뛰어나고 몸매가 좋아 그대로가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여인의 몸이 남자보다 뛰어나게 아름답다.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보기에 좋다. 자랑스런 일이다.
2)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 사이에 가리거나 숨길 것이 없다. 그대로 다 보여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어떤 형편에나 자유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환경이 최적이다. 환경이 그들 삶에 맞추어 준다고 본다. 그들은 벌거 벗고 사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2벗고 살던 아담과 그 아내가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3:7). 어떻게 되었나?
1)이들이 뱀을 통한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다. 뱀은 선악과 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며 여자로 하나님이 되라고 부축인다. 여인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뱀의 말을 따라 그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뱀의 사람이 되다. 하나님의 영광이 같이 머물 수 없어 떠나게 되다. 하나님 영광의 광채가 떠나니 그들 자신의 몸이 보잘 것 없는 추한 모습이 되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 가리게 된다. 추한 것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옷은 속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한다. 옷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도록 만든다.
2)뱀의 말을 듣고 그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분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렸으니 하나님이 두렵고 그 앞에 부끄럽다. 그동안 하나님을 만나 함께 걷고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었으나 이제 만나는 것이 두렵다. 숨고 싶다. 자기를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다. 하나님 만나기가 두렵게 되다. 마지막 심판 때 사람들이 굴과 바위틈에 숨어 우리를 덮어 하나님의 얼굴에서 우리를 가리라 (6:16)하는 것과 같다.  
3)아담과 그 아내는 잘못한 것에 대하여 뉘우칠 생각을 않고 오히려 원망한다. 아담은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핑계한다. 그러면서 그 여자가 주기에 먹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아담이 여자를 향하여 내 살중의 살이요 내 뼈중의 뼈라 우린 하나라 고백하며 사랑하더니 이제는 저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하며 그를 원망하고 자기 책임을 전가한다.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다. 자유롭지 못하다. 둘 사이에 담이 생기다. 여자는 아담에게 좋은 배필이 되어야 하는데 뱀의 말을 듣고 속아서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고 함께 죄를 지어 돕는 배필이 되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숨고 싶다. 부끄러운 죄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지 않아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를 가리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가리고 숨고 싶어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3  이들이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덮었지만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을까?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에게는 숨길 수가 없다. 겉이 어떻게 되었던 어디에 있던 하나님은 모두를 아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숨어 있지만 그것을 아시고 그가 선악과 먹은 것도 아신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 생각마져도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벗은 것처럼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잘못하면 그에 대한 당연한 결과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요 공의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한 대로 그들은 죽었다.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지만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다. 이들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 흙인 육체만 남았다. 공의로운 심판이다. 선고가 따른다.
1)뱀을 향한 결과 선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했으니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라. 배를 땅에 붙이고 흙을 먹고 살라고 하다.  흙은 아담이다. 곧 사람이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여 넘어뜨리고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다.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3:15). 서로 원수가 된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닌다(벧전5:8). 아름답고 친근미가 나던 뱀은 대적자 마귀 사탄의 대명사가 되고 그 후 사람과 원수가 되다. 인간 세상에 원수관계, 갈등과 아픔이 들어오다. 하나님은 그러나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그를 끝낼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결국 사탄을 정복하고 멸망시킬 것을 말씀한다. 사탄의 종말은 하나님 백성의 자유로운 평안, 천국이다.
2)여자를 향한 심판 선고다. 임신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를 가진다. 임신하여 애기를 낳고 양육하는 고통이 오다. 고통이지만 생명 출산의 길을 주신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 축복의 말씀은 이제 고통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린다고 하다. 하나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진 것을 본다.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사랑과 지배를 받으며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제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말을 듣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다.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여자는 그 결과를 알고 멈추어야 하는데 그것을 남편에게 주어 먹게 하다. 자기가 지은 잘못과 죄를 남편도 짓게 하다. 남편에게 주어 먹게 하는 것은 남편을 자기 길로 인도한 것이다. 네가 남편을 사모한다, 원한다는 말은 네가 남편을 갖고 싶다. 마음대로 하고 싶다. 뱀의 말을 듣고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온 일이다. 자기 중심, 자기 원하는 길로 남편을 인도하고 싶은 것이다. 범죄 후 여자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것이다. 이전에는 사랑으로 인도하였으나 이젠 갈등 관계에서 힘으로 다스리는 자리에 이른다. 이런 형편은 오늘까지 내려오는 가정의 비극이요 아픔이다. 그러나 그 후손이 그를 넘어뜨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복음을 주신다. 그는 수고로워도 그 후손을 기다리며 후손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3)아담을 향한 선고가 있다. 그가 지음 받은 흙,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 밭을 가꾸어 채소를 먹도록 하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에게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갔지만 이제 그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 완전한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랑과 소망을 본다.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 하다. 하와는 생명이란 말로 자기 아내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이름 짓다. 하나님의 심판 선고에서 여자를 통한 희망을 보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가 자식을 낳을 것이다. 그와 그의 후손이 뱀과 그 후손과 원수가 되어 싸울 것이지만 결국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그를 끝내게 할 것이라는 데서 하나님의 계획과 희망을 본다. 믿음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이 희망을 본 아담이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지었다. 여자 또는 아내는 남자에게서 나온 자, 약하다는 의미나 이제 하와, 생명이요  모든 산자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범죄하여 죽음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이기고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날 것을 본다.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와를 통하여 생명이 일어날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들을 짓고 축복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그 일을 하와를 통하여 이루어 나간다.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다. 가인과 아벨을 낳다. 사탄의 역사로 갈등과 대적 관계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셋을 주시고 그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과 생명을 전하여 내려 가다. 에녹 노아를 통하고 아브라함 다윗 예수에게로 내려가는 길을 여시다. 어떻게 그 일을 하시나?

4  가죽 옷은 하나님의 사랑의 조처다.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다. 아담과 그 아내는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나 그것은 곧 시들고 말라져 옷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의 허물 죄는 나타난다. 그러나 가죽 옷은 영구한 의미가 있다. 없어지지 않는다.
1)가죽옷은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자리에서 짐승이 대신 죽어 피를 흘렸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형벌을 받지만 그 형벌을 짐승이 대신 받고 죽은 것이다.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 아담과 하와가 살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은 자기들이 입고 있는 가죽 옷을 볼 때마다 그들 대신 짐승이 죽은 것을 깨닫고 주께 감사하며 주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을 가진다. 짐승이 피를 흘려 죽어 죄의 형벌을 받았기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죄의 가리움을 받은 것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32:1). 이것이 지성소에서 일어난다. 지성소 안에 언약궤, 그 안에 세 가지가 들어 있다.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삯난 지팡이다. 언약궤 뚜껑이 있고 그 위에 하나님 그룹 천사 둘이 서서 내려다 본다. 하나님이 언약궤 속을 들여다 보면 분노가 일어난다. 십계명 돌판은 처음 것은 깨뜨리고 다시 만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계속 우상을 섬긴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계속 원망하고 불평한다. 하나님이 아론을 세웠지만 그들이 아론을 거절하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한다. 하나님이 분노하신다. 그 때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 양의 피를 가지고 와서 언약궤 뚜껑에 뿌린다. 백성의 반역과 죄를 대신해 양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이다. 천사가 내려다 보는데 누군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을 알게 된다. 백성의 죄는 생명의 피로 덮어지고 하나님의 분노가 가라 앉는다. 그래서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 한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짐승의 피가 그들 죄를 덮어 주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지 않고 짐승이 피를 흘려 죽은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다. 가죽 옷을 입으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지 않고 짐승이 대신 죽은 것을 봄으로 죄의 결과 심판은 행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만난 것이다. 아벨이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바로 이 대속 은혜를 표현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숫양을 주시어 그를 대신하여 드리게 하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방되어 나올 때 애굽 모든 초태생은 죽는 밤에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 문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 그 집안에 있는 자는 아무도 죽지 않게 되고 해방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유월절이 되다. 어린양이 대신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또한 사랑과 은혜의 조치다.
2)가죽 옷은 여자의 후손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면서도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 그의 피를 의지하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길이다. 사람을 대신하여 짐승이 죽는 것은 그림으로서 참 사람 예수께서 하실 일을 내다 보고 준비하게 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 어린양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주신 가죽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말한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의를 따라 의로움을 입는다. 놀라운 하나님 사랑이다.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개 더하심이라. 누가 15장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 주었다. 잔치에 초대 받아 갈 때 그 집에서 주는 예복을 받아 입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복은 그리스도의 옷이다. 13: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으로 어그스틴이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나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믿음으로 주를 영접하면 예수로 옷 입게 된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주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의 축복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나? 벌거 벗고 사는 자는 자리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자랑한다. 무화과 잎의 옷을 입은 자는 자기의 더러움 두려움을 숨기고 옷을 자랑한다. 가죽 옷을 입는 자는 나를 구원하여 생명 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 내게는 옷에 대한 어떤 자랑이 있나? 세상의 어떤 옷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지 못한다.  오직 어린양 예수의 피로 죄를 씻는 그 의가 우리를 덮어 줄 때만 우리를 구원과 영생으로 가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처리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가슴에 안고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사순절 매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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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February 11, 2018

날마다 새롭게 Renewed day by day

고후 4:7-16 날마다 새롭게 Renewed day by day (1/7/2018 주일)


2018년 새해 첫 주일 예배하러 모인 여러분에게 주의 축복이 함께 하기 바란다. 새해 맞으면서 새롭게 시작한다. 내 삶과 형편이 새로워지고 복과 평안이 임하기를 바란다. 일 주일이 지났는데 지난 날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되고 있나?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거나 아니면 그 사이 실망할 일도 있을 것이다.
1 바울은 고후 4장에서 자기가 낙심할 수 있음을 세번이나 말한다. 1, 8, 16. 1절은 자기 직분 받아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는데 복음을 가로막아 혼잡 하게 하는 자가 있고 또 삶이 복음과 달라 복음의 빛을 가리고 있는 자가 있어 낙심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주를 믿으면서 목사 장로 집사 성도로서 복음을 받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복음을 나타내지 못하는 일로 인하여 낙심될 때가 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나는 금년 첫날부터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었다. 신년 감사예배를 위하여 출발 준비를 하면서 사모에게 이제 출발 시간 15분 남았다고 하였는데 상대는 내가 화가 나서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무서웠다고 한다. 나는 전혀 화를 낸 것이 아닌데 상대가 그렇게 듣고 반응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상한 것을 알려준 것이다. 내 생각과 달리 상대는 마음을 상하고 낙심할 수가 있고 나도 낙심할 일이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에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여 답답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 이다.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8절에는 외부에서 오는 고통과 반대로 인함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많은 어려운 박해를 받다. 사방에 원수가 있어 미움을 받고 고통을 겪다.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시달리는 일이 많다. 주의 일을 하는데 왜 이런 고통이 있나? 왜 이런 어려움을 면하게 해주지 않나? 하나님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낙심이 될 수 있다. 내가 진실되게 열심히 일을 하고 세금도 잘 내는데 왜 일이 잘 되지 않나? 왜 경제 문제 친구 문제가 원활하지 않고 관계가 힘들고 고통이 있나? 낙심이 될 수도 있다.
16절에는 겉 사람이 낡아지고 있음이 실망스럽고 낙심될 일이다. 새해를 맞이한 것이 좋은 일이다. 빨리 성인이 되고 할 일을 하겠다는 젊은이에게는 좋은 일이나 중년을 지난 사람에게는 새해가 온다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이라 늙어가는 것을 실감 하게 된다. 여기 낡아진다는 것은 늙어간다 죽어간다는 말이다. 겉 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는 외모를 말한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 색갈이 희어지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이전과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오는 현상 이다. 사람은 외모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 그리스 로마 문화는 육체를 숭상한다. 미모와 체력을 숭상하는 것이 조각과 예술에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에서도 점점 많은 여인들이 미용수술을 한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고 낡아만 간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어도 병이 나고 세상을 떠나는 것에 낙심한다. 우리 몸은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세포의 수가 50-100, 60킬로 사람은 60조의 세포가 된다 한다. 그 중 하루에 500억 내지 700 억 세포가 죽는다. 210종의 세포 중에 적혈구 세포를 예로 들면 1초에 250만개가 죽는다. 상상하기 어렵다. 세포의 수명은 3-4일에서 120일 이다. 세포나 몸은 수명이 다하면 낡아지고 죽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 모습이다.

2 바울은 낙심할 형편에 있지만 낙심하지 않은다고 말한다. 직분을 받은 자로서 복음의 빛이 가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할 수 있으나 복음 자체가 빛이기에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깜깜한 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침 태양이 올라와 어둠을 해치고 영광스런 광채를 비친다. 구름이 빛을 가리는 것 같으나 또 걷히고 빛이 나타 난다. 복음의 빛이 힘 있게 비친다. 어두운데 빛을 비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바울이 양사방 원수에게 둘러 싸이고 고통을 겪으며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생명의 부활이 오는 것을 보자 힘을 얻고 낙심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이 말씀은 사슬에 매이지 않고 전파된다. 처음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박해하니 그 복음이 사마리아와 안디옥 등 다른 지역으로 넓게 퍼져 나간다. 생명의 말씀이 능력으로 뻗어간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겉 사람은 낡아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면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기에 낙심하지 않은다. 많은 세포가 죽어 가지만 또 그만큼 많은 새로운 세포가 태어난다. 피부 세포는 2주만에 전체가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 간은 매년 전체가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 우리 뼈는 전체가 10년 만에 새로운 것으로 몸 전체는 6년만에 만에 바뀐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낡아지고 죽는 것 같으나 새로운 생명이 일어나니 낙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 생겨 생명이 유지된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바울은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 몸을 다스리는 영과 마음 생각이 새로워진다고 한다.

3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중요한 일이다. 어떻게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나?
1)날마다 관점을 새롭게 한다. 안경을 바꾼다. 문제에 초점이 아니라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다. 빛이 막혀 어둔 밤인가 하면 올라오고 빛은 다시 올라오고 있다. 박해로 복음 전도의 길이 막히는가 했더니 더 넓은 길이 열리고 새로운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보이는 것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본다. 잠간 있을 것만 아니라 영원한 것을 본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 약속을 받아 고향을 떠나다. 그 자손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줄 것이라 한다. 자손이 나지 않은다. 집에서 기른 종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하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한다.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 약속을 이룰 생각을 하다. 아니라고 한다. 사라를 통하여 날 자식이 후계자가 된다고 한다. 점점 나이 든다. 생산할 능력이 없고 실망이 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밤에 불러 내어 하늘을 처다보며 별을 다 해아릴 수 있나? 아니오! 네 자손이 그와 같다. 그 때부터 그의 관점이 달라진다. 현실은 사라에게 자식이 없다. 그러나 저녁마다 하늘을 처다본다. 내 자손이 저렇게! 믿음과 함께 웃음이 난다. 100세에 아들이 나자 웃음이라는 의미의 이삭이라 하다. 관점을 하나님께로 향하면 낙심이 변하여 기쁨과 웃음의 찬양이 된다. 날마다 주를 보며 찬양할 수 있으리라. 예수께서 오신 때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자 설 곳이 없다. 사회에서 버려진 자들, 이들에게 주님의 시선이 가다. 초점이 생기다. 신발 회사들이 아프리카에 신발을 팔 수 있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다. 돌아오더니 한 사람은 그곳에는 신발이 소용없다. 모두 맨발로 살고 있으니 신이 필요 없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당장 10만 켜레를 만들어 그들 모두에게 신을 신기자 한다. 관점이 다르다. 현실만 보는가 아니면 새로운 내일을 보는가, 중요한 것이다. 이 관점은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번 도미니카 공화국 시니어 미션 스쿨은 은퇴한 사람들이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는 기회다. 은퇴한 자들이 내 일이 끝났다. 이젠 쉬는 것이다. 날마다 내 자신 살기 위하여 시간을 보내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 받은 주의 빛을 나누도록 돕고 격려함이다. 관심을 나 밖의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며 그곳에 할 일이 많이 있다.
2)마음의 문을 연다. 어둔 밤이 지나 아침 해가 올라온다. 어둡던 세상이 밝아진다. 내가 창문을 닫고 커텐을 내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을 열고 빛을 받아드릴 것인가. 이는 매일 아침 하는 일이다. 날마다 새롭게 할 일이다. 우리는 질그릇 같이 잘 깨어지는 연약한 존재이나 속에 보배가 있다. 우리가 받은 영광의 복음과 믿음으로 새로워진 피조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다. 그런데도 답답하고 침울하다. 예수님의 삶, 매일 아침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나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연다. 기도하며 아버지를 받아드린다. 어떤 사람이 프랑스 여행을 하고 돌아오며 아내를 위하여 특별 보석을 하나 사 왔다. 그것은 밤에 빛이 나는 것이다. 그 날 밤 아내가 기대에 부풀어 불을 끄고 그 보석을 보니 빛이 나지 않는다. 속은 생각이 든다. 다음 아침 일어나 자세히 보니 내가 빛이 나는 것을 보려거든 낮 시간 나를 햇빛에 두라고 한다. 낮에 햇빛을 보게 하였더니 밤에 광채가 난다. 우리 속에 주님이 들어오면 어둠이 걷히고 주의 빛이 나타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의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연다. 주께서 그 날을 인도하고 다스리도록 기도로 영접할 수 있을까? 주의 빛이 임하면 삶의 구석 구석을 비친다. 우리 생각이 밝아진다. 얼굴에 기쁨이 보인다. 삶이 새로워진다. 날마다 새로워 진다. 송명희 시인을 안다. 그가 뇌성마비로 엄마 등에 엎혀 연희동장로교회에 나올 때 보았다. 몸을 이기지 못한다. 말도 제대로 못한다. 정말 엄마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엄마의 기도로 그에게 주의 빛이 임하다. 주께서 그에게 새로운 생명과 소망을 주시다.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릴 때 나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 나의 눈길을 드릴 때
나에게 하나님의 눈길을 주시네
하나님께 입술의 말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네
하나님께 내 모든 것 드릴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주시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35 ;28)
매일 마음과 눈길 말과 삶을주께 드리며 주의 빛 가운데 살게 된다. 미래를 향한 삶을 연다.
3)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한다. 아침을 먹었는데 점심 때가 되면 배가 고파진다. 저녁이면 다시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힘이 없다. 의욕도 줄어든다. 먹어야 한다. 매일 음식을 먹어야 살 힘이 생기고 새로워진다. 속 사람이 새로워지도록 매일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한다. 말씀을 먹는다. 알면서도 먹지 않으니 굶은 상태요 낙심으로 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 광야에 나가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와 먹듯이 우린 주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그는 곧 말씀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통독 순서대로나 아니면 다른 계획을 따라 말씀을 읽을 때 주께서 만나 주신다. 한 말씀이 새 힘을 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유명한 지휘자 작곡가 연주자인 Leonard Bernstein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3일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놀라운 말이다. 예술가도 매일 훈련이 필요한데 주의 백성이 낙심하지 않고 힘을 얻어 매일 새롭게 살기 위하여는 매일 말씀의 양식을 받아야 한다. 먼저 내게 살 힘이 생기고 그리고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일어난다.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일어난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어려운 일, 죄에 빠질 때가 많다. 어렵지 않은 일에 낙심이 오고 불평스런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 주장을 하고 교만 정욕 비판이 생긴다. 말하기는 좋아하나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자기 중심이다.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져야 이런 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다.
4)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와 함께 죽는 일에 참여한다. 바울은 많은 사역 어려움 고통 속에서 스스로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다. 주께서는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죽은 사람은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은 유혹 받을 것이 없다. 나는 죽었다고 단언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내가 죽었다고 하면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목사,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설득 권유 말로 해결하려고 하나 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홀로 강단 앞에 누워 자기를 죽은 자로 드린다. 내가 주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가 풀린다. 새로워 진다. 주의 죽음에 참여하니 주의 생명이 일어남을 본다.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는 말이 이루어진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주님께서 생명 일을 하시는 것을 본다. 부활한 주님의 새로운 생명의 기쁨과 감격을 누린다. 하늘의 즐거움 감사가 있다. 오늘 성찬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참여하는 것이나 동시에 그의 부활 생명에 함께 한다. 우리 속 사람이 새로워지니 삶에 힘이 일어난다.

세상에 낙심할 것이 많다. 눈에 보이는 것, 잠시 있을 것들로 인함이다. 우리 스스로 점점 낡아지고 사라지는 것이 낙심이다. 낡아지는 것으로 끝낼 것인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잠시 있는 것을 넘어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낡아지는 것을 넘어 새로워지는 것을 봄으로 낙심을 이겨 내고 우리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힘 있는 승리의 삶을 살것인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돕기를 원하시며 격려하심을 받고 주와 함께 달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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