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9, 2021

친구 참 친구 Friend Real Friend

 친구 참 친구 Friend Real Friend

소꿉 친구는 어릴 때 같이 놀고 자라며 좋고 험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영향을 미치며 형제보다 더 가까운 관계다. 도시화 아파트 문화로 바뀌며 소꿉 친구라는 말이 생소하게 되고 더욱 이민으로 친근하던 것을 뒤로하고 생소한 곳으로 오면서 친구도 달라지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며 정착에 분주한 꿈과 혼란의 삶을 살며 교회와 직장 사업 학교 행사 모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며 친구를 만들다가 은퇴에 이른다. 대학에서 50년을 가르치는 어느 교수는 친구가 없다고 한탄하는데 평생을 목회에 전념하고 은퇴한 목사도 같은 외로움을 가진다. 친구가 필요하기에 페이스북, 카카오 톡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서로 연결하고 친구를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친구인가? 

친구로 생각하던 자들이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없고 연락을 해도 응답이 없을 뿐 아니라 등을 지고 험담하는 경우에는 버림 받고 배반 당한 기분으로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겪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친구라도 대개는 그 관계를 통하여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기 중심이다가 그것에 맞지 않다거나 다른 의견이나 정직한 충고를 용납하지 못하고 갈라 서는 현실이다. 내가 친구라 생각하는 그 사람이 나를 또한 친구라 생각하는가 하는 연구에 의하면 절반 정도가 그렇다고 한다. 서로의 친밀감이 다르게 나타난다.

참 친구는 어떠한가? 떠나 있으면 생각이 나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힘을 얻고 삶에 생기가 생긴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고 실수가 용납되고 약점 수치도 부담 없이 들어내고 필요한 때는 항상 거기 있다. 이런 친구가 있는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는 누군가 자기를 찾아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고 택하여 친구가 되어 제자로 훈련한다. 그는 멸시 받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가난하고 병든 자, 귀신들린 자의 짐을 풀어 주신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산다.

친구는 말을 듣고 행한다. 로마 백부장이 예수를 찾아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고쳐 달라고 하자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신다. 맹인이 멀리서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자 그를 불러오게 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물으니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바로 보게 하여 주신다. 주께서 우리 기도와 요구에 친구로서 응하신다. 우리는 주의 말씀과 요구를 듣고 따르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친구가 된다. 

친구는 어려움과 배반에도 친구다.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폭도를 이끌고 그를 잡으러 온 때에 주님은 그를 친구라 부르며 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이면 그는 언제나 친구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의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가끔 있지만 주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고자 대신하여 죽으시고 생명의 길을 주셨다.  

친구는 항상 같이 한다. 주께서 우리 위한 거처를 준비하시고 우리로 영원토록 그와 함께 살게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 삼고자 찾아오셨으니 우리가 그를 믿고 친구 삼으면 영원토록 그와 함께 사는 것이 참 친구로서 우리의 즐거운 바람이 아니겠나!












Tuesday, November 23, 2021

낙엽의 감사 Thanksgiving of Fallen Leaves

 낙엽의 감사 Thanksgiving of Fallen Leaves

나는 가까이 있는 숲길을 자주 걷는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는 생의 신비를 즐기는데 신록과 녹음이 덮이더니 어느새 오색 찬란한 아름다움을 주던 나무 잎이 한 잎 두 일 떨어지며 나풀나풀 춤을 추듯 내려 온다. 무엇이 좋아 그렇게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가 물으니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렇게 감사한가 하니 낙엽이 말하는 감사 제목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무성한 잎으로 왕성하게 햇빛을 받으며 깊은 호흡으로 나무에 영양을 충분하게 저장하여 나무가 긴 겨울을 나도록 준비가 되었으니 다가오는 추위에 넓은 잎으로 나무가 떨며 얼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자기 자리를 비우고 떠나면 나무가 살고 봄이 되면 자기는 새 싹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에 감사하다 한다. 

잎이 나무에 붙어있을 때는 물과 영양의 공급원인 땅에 고마움을 가지면서도 친밀하게 가까이 못하고 멀리 있었다. 이제는 땅을 만나 껴안고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잎 두 잎 쌓인 이불로 땅을 덮어 따뜻하게 감싸주며 깊은 정을 나누고 함께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또한 푹신한 카펫이 되어 길을 걷는 행인의 발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무에서 떨어지며 낙엽이 되자 바람이 부는 대로 여기 저기 날아 여행하며 마음껏 세상을 즐기는 자유를 누린다. 원하는 곳 원하지 않은 곳, 넓은 세상, 구석진 곳, 복잡한 인생 살이, 어깨에 앉고 창가에 앉아 안을 들여다 보고 문간에 앉아 드나드는 모든 것을 바라본다. 웃음과 울음, 잔치와 고독, 사랑과 미움, 동정과 분노, 빈부와 욕정, 칭찬과 원망, 건강과 질고, 삶과 죽음이 얽혀 있는 인간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놀랍다. 

낙엽은 불에 타서 재가 되든 썩어서 거름이 되든 생명을 키우는 영양분이 되어 삶을 풍성하게 한다. 풀과 꽃과 나무로 정원과 숲을 이루고 맑은 공기 잎과 열매로 동물과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니 이 어찌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닌가 한다. 

추수와 감사의 계절에 떨어지고 쌓이며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이 말하는 감사를 들으며 교회는 대림절 곧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를 맞는다. 이때 나는 낙엽의 감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적용되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하나며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이시나 누가 그것을 알며 그것이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사람은 여기 땅 위에 있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경험되고 인식되는 것은 하늘 자리를 지킴이 아니라 그 자리를 비우고 떠나 사람 사이에 들어옴으로 된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함께 하며 실천할 때 사랑이 되고 인식된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비우고 떠나 자기를 낮추어 사람과 같이 되어 사람에게 오셨다. 그는 성령 바람을 따라 어디서나 사랑과 섬김으로 품고 감싸며 생명을 일으키고 회복하셨다. 병들고 소외되고 죽은 자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고 자기를 희생하여 영생을 허락하셨다. 누구나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나아가 그를 닮아 하나의 낙엽처럼 감사하며 살게 되니 이 어찌 참 감사가 아니겠는가! 












Monday, November 15, 2021

차이와 인정 Difference and Recognition

차이와 인정 Difference and Recognition

쌍둥이도 세대차가 있다는데 형제, 부모 자녀가 외모 생각 성향이 다르다면 부부를 위시하여 남남의 경우는 어떠할까? 지식과 소유 가문 지역은 그 차이를 더할 것이다. 세계가 연결되고 열리면서 난민과 이민의 요구와 유입이 많아지고 사회는 서로 다른 인종 종교 문화가 함께 하여 다양함을 가진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하나? 무시 수용 갈등 차별 소외 또는 제거를 하나?  차이가 상대에게 불편 손해 위협이 된다면 관계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차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인과 아벨 형제는 차이로 살인을 일으키고 쌍둥이 에서와 야곱은 태에서부터 평생 가지던 갈등 투쟁을 후손들도 계속한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고 생명의 길과 진리를 보여주며 많은 기적을 행하자 종교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이 하는 일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일이 종교개혁에 일어났다. 로마카톨릭이 성경이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달리 행함과 의식에 치중하던 가운데 ‘오직 성경, 오직 믿음’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로마카톨릭은 권위와 세력으로 회유 위협 파문 출교 사형으로 응하였지만 유럽의 많은 나라와 사람들은 자기 말로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에 눈이 열리고 맹목적 신앙(fides implicita)에서 성경적인 신앙을 택하게 되어 개신교는 확장되었다. 로마카톨릭은 개신교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각 나라는 통치자가 로마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정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1555).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드 2세가 즉위하며 종교 단일화를 위하여 로마카톨릭을 강요하자 개신교도 국가들이 반발하여 전쟁이 일어나 30년간 지속되며 정치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독일을 비롯한 구라파 많은 땅은 초토가 되고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동물적인 삶을 연명하며 800만명이 생명을 잃고 신성로마제국은 와해되고 있었다. 이에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되고(1648) 1555년 조약을 확인하여 로마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가지도록 하였다. 차이가 해결된 것이 아니지만 서로를 인정한 것이다. 더 이상 피해를 일으키지 말자는 것이다. 동시에 많은 나라도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하여 자유국가가 되었다. 개신교는 루터교 개혁교 침례교 영국교 등으로 더욱 분파 발전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교파마다 차이가 있으나 성경 전체의 진리를 한 교파가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루터교와 개혁교는 성찬에서 떡과 잔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해석에 차이가 있다. 침례교와 개혁교는 세례가 개인의 믿음이냐 가족공동체의 신앙인가 하는 것이다. 개혁교와 나중의 감리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인가 하는 차이지만 서로를 보충하고 인정하며 함께 발전하되 모두가 성경에 기반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예수께서 선택한 12제자는 배경 생각이나 인성이 모두 달랐다. 그들은 이전에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형편이었지만 주님의 선택 교훈과 사랑을 받으며 그와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서로 자기를 주장하고 높이려고 하였다. 주님은 그들을 용납하고 조화시켜 주의 큰 일을 맡기고 성령을 부어주시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되 각자 다른 모습으로 특별하게 하도록 하였다. 

인종 문화 종교의 차이로 인하여 사회에 많은 갈등 투쟁이 있지만 다양한 꽃이 있어 더 아름답고 몸의 많은 지체가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기능을 하듯이 각자 재능을 인정받아 모자익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나! 










 


 

Thursday, November 11, 2021

개혁과 변화 Reformation and Transformation

개혁과 변화 Reformation and Transformation 

인류의 삶과 문화 사회구조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산업에서 증기기관 발명으로 이루어진 방직과 대량생산은 농사와 수공업에서 벗어나며 도시화를 이루고 강철업 석유산업 발전으로 신속한 수송과 이동을 이루고 컴퓨터로 지식 정보와 서비스 산업이 활성화되고 오늘은 인공지능 빅데어타 드론 등으로 편리와 함께 온 우주를 즐기고 있다. 개혁 혁명으로 일어난 삶의 변화다.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의 정당성을 성경에 비추어 토의하자는 95개조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함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만 아니라 유럽의 사회 경제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와 전통이 최상의 권위인 때 성경이 교회의 전통과 권위 위에 있음을 확인하다. 루터가 보름즈 의회에 소환되어 그의 모든 이론을 철회하도록 요청받자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다. 내가 잘못된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여 달라”며 당당하게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성경은 당시 라틴어로 번역된 것으로 일부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어 일반인은 접촉할 길이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것이 구텐베르그의 인쇄물로 전파됨으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가 있고 이로서 자유롭게 질문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루터 이전 영국에서 위클리프는 교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글과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이 발전되고 스위스에서 칼빈은 모든 아이들을 위한 공교육 제도를 시작하였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도 교육을 우선적으로 진행하고 계몽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왕 귀족 교황 감독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존귀함을 인정받아야 하고 계급 학대 노예 제도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루터 자신은 민주주의를 생각하지는 못했으나 결국 백성의 소리가 들리고 인정 받게 되었다. 정부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권선징악으로 백성의 안녕을 도모하되 그들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으며 백성은 정부에 저항하고 제거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남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기에 사제 앞에서의 고해와 보속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고 믿음으로 은혜로 용서받고 구원받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성속을 구분하여 사제직이 최고라고 인정되었으나 이제는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고 선하다고 함으로 농부 광부 상인 기술자의 일도 신성하게 되고 노동자가 정직 근면하게 일하여 이익을 남기고 모으는 일이 인정되며 재생산에 투자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게 하여 새로운 중산층이 생기고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길이 열리었고 막스 웨버는 개신교의 노동윤리가 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하였다. 한국경제가 1962-89년 사이 27억에서 2300억불로 성장한 시기는 개신교가 2.5%에서 27%가 되는 시기와 맞물렸다. 

성경이 보급되며 성경적 세계관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근대과학이 자라났다고 옥스포드의 죤 브루커 교수가 말하듯이 많은 과학 기술이 발전되었다.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며 권위와 부를 누리고 타락함으로 권력투쟁이 많고 백성이 피해를 보았지만 종교개혁으로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었다. 개신교는 작은 차이들로 많은 교파가 생기고 절대권을 가졌던 캐톨릭도 하나의 교파가 되고 자체 개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개혁과 변화는 성경에서 온 것이라 우리도 성경을 읽고 따름으로 우리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하지 않겠나! 










 

Wednesday, November 3, 2021

면죄부 (Indulgence)

 면죄부 (Indulgence)

죄에는 형벌이 있기에 누구나 죄의 용서와 사면을 바란다. 법을 어기는 범죄는 형벌로 추방, 투옥 또는 사형으로 다스린다. 죄는 형벌을 다 받아야 석방되고 자유를 가진다. 때로는 집행 유예, 노동이나 봉사활동, 또는 벌금으로 자유를 누리고 때로는 통치자가 사면권으로 특정인 또는 어떤 범죄자 전체를 풀어주기도 한다. 안전과 자유를 위해 누구나 법을 지키게 되어 있지만 알게 모르게 법을 어기는 것이 사람이다.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천국과 지옥이 있기에 누구나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 한다.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살도록 되어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지음으로 그 후손은 모두 그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 하나님 없이 자기 좋은 대로 살다가 결국은 죄의 형벌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국으로 회복시키고자 그 아들 예수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지옥을 경험하고 부활함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을 이루셨기에 누구나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복음이요 교회의 가르침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사람이 세례로 타고난 죄는 용서받으며 그 후에 죄를 짓는 것은 고해성사와 선행의 보속으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 용서받는다고 가르쳤다. 지옥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면 살아서 보속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연옥에서 고난으로 보속을 완수해야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하였다. 

죄의 형벌을 제거하기에 선행의 공덕이 충분해야 보속이 되나 보통은 그러하지 못하다. 성모 마리아는 무흠하기에 그의 기도와 선행은 자기 구원에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모두가 공덕으로 쌓이고 성자나 순교자들의 공덕은 자신을 구원하고 남기에 그것도 쌓이며 이런 저장된 공덕은 교황이 맡고 있어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고 교인은 그것을 살 수도 있었다. 감독과 사제는 교인의 고해성사와 보속을 부과하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았다.

11세기 성지 예루살렘이 모슬렘에게 점령되자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지를 회복하고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참전자에게 죄의 형벌 면제를 선언하고 참전하지 않아도 전쟁 비용 부담에 참가하는 자에게도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가 로마에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고자 면죄부를 부활시키고 독일 교구에도 부과하여 판매액의 절반을 교황에게 납부하게 하였다. 요한 테첼이 면죄부 판매의 책임을 맡아 윗텐베르그 근방에서 선전하며 면죄부는 산 자만 아니라 죽은 자, 연옥에 있는 자의 죄도 사한다고 청중의 부모나 친구가 연옥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실감나게 소리를 내고는 면죄부를 사는 동전이 궤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 낙원으로 옮겨진다고 하였다. 

이에 윗텐베르그 대학 교수 마르틴 루터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면죄부의 타당성을 토의하자고 95개조를 써서 1517년 10월31일 교회 정문에 붙였다. 처음 둘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고 하고 나머지는 이 둘을 설명하고 면죄부를 비판하였다. 교황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권위를 가지며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하였다. 11월1일 만성절에 교회로 모이는 많은 사람이 게시물을 보며 그 내용이 퍼지고 또 구텐베르그 인쇄물로 반포되며 개혁의 물결이 전파되게 되었다. 면죄부가 아니라 오직 대속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 확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