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31, 2021

첫째 날 The First Day (1-1-2022)

 첫째 날 The First Day (1-1-2022)

한 해의 계획은 그해 첫 날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일년지계재어단 일일지계재어효)는 말대로 누구나 새해 첫날에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특히 농경시대에는 그 계획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했지만 오늘 인공지능 시대에도 새해를 맞으면 새로운 계획과 결단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첫째 날은 어떠하였을까?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천지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이 덮여 있었다. 보이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어둠에 빛이 비치자 형체가 나타나고 아름다움이 들어난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창세기 서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첫째 날에 계획하고 행하신 일은 빛을 창조하여 보기에 좋도록 하심이다. 빛이 왔지만 전체가 빛이 된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낮과 밤이 공존하면서 대조를 이루어 아름답게 하셨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빛 가운데 계속되어 마지막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완성되었고 밤과 낮이 교차하며 모든 것이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사람이 번성하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뻗어가는 가운데 서로 대결과 투쟁, 살상으로 삶은 혼돈과 공허, 어둠에 빠지게 되고 빛을 찾으나 발견하지 못하여 어둠의 세계에서 신음한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빛을 보낼 계획을 하시다가 때가 되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예수께서 자기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빛은 길을 보여준다. 깜깜 어둔 밤 비바람이 심할 때 번개가 치는 순간 길을 보고 나간 경험을 기억한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며 사람의 갈 길을 보여주신다. 그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어둠에 헤매지 않고 빛을 받아 살게 된다. 빛은 길만 아니라 잘잘못 형편을 보여준다. 잘못이 들어나는 것을 싫어하여 빛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종교인과 정치인에게 심하다. 사울은 교육받은 종교인으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전염병같은 이단으로 단정하고 척결하는 일에 하수인이 되어 외국에까지 파송되었다.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추자 그는 땅에 엎드러지고 소리가 들린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그가 박해하던 예수를 빛으로 만나자 자신이 얼마나 맹인이며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붙잡힌 빛의 사람이 되었다.

육체적 정욕과 철학사상에 빠져 방황하며 한계를 느끼던 탕아 어거스틴은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 “집어서 읽어라”는 말을 듣자 앞에 있는 책을 집어 읽으니 “닞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하는 말이 빛으로 임하여 그는 꼬꾸라지고 변화하게 되었다. 그 구절은 변화한 사울,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낸 로마서의 한 부분이다, 예수를 만난 바울과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공헌을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다. 책망 받을 일이 없는 빛의 자녀로서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덮인 세상에 생명 길을 보여주라는 말씀이다. 바울, 어거스틴, 수많은 성도에게는 빛이신 예수를 만난 것이 새로운 삶의 첫째 날이다. 내 삶의 첫째 날은 어떠한가?











Sunday, December 26, 2021

처음과 나중The First and the Last

 요한계시록 22:12-14 알파와 오메가 Alpha and Omega (12/26/2021 은목교회설교)

금년 마지막 주일에 주의 크신 은혜와 위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금년 첫날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팬데믹으로 활동이 많이 제한되어 있지만 시간은 7-80마일로 빨리 달리고 하루, 한해가 매우 빨리 지나는 것을 느낀다. 금년만 아니라 매년이 그렇게 지나 주님 이후 2천년이 하루 같이 지났다. 우리 개인으로는 해가 지나며 나이 들고 몸은 늙어가다가 결국 삶을 마치고 떠난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옆을 떠난 회원이 여럿 있지만 여기 저기서 동료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는 내가 떠날 순서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만 아니다 예수께서도 성탄에 태어나서 짧은 33년으로 땅의 삶을 마감하셨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1:1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고 16:19은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리어 가셨다. 시작이 있었고 마침이 있었다. 그의 공생애사역은 3년 정도였다. 그것이 그의 전체 삶이고 사역인가? 요한복음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요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라 한다. 여기 태초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태초보다 훨씬 앞선 태초다. 창조는 시공의 시작 그 때를 말하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조 이전 하나님이 영원히 계신 것을 말한다. 그런 영원하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많은 능한 일을 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40일간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옮기시며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그의 지상 사역은 끝이 났다. 

세상에서 끝나면 마지막인가?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제자들과 함께 하여 일하고 계셨다. 마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다. 그는 가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성령으로 항상 그의 제자들과 함께하고 사역하신다. 우리가 경험한 것이다. 우리가 사역할 때 혼자가 아니라 항상 주께서 함께 하시어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일하며 살았다. 주님은 우리 이전에도 또 우리 이후에도 주의 종들과 함께 일하신다. 주님은 영원토록 함께 하여 일하신다. 주님은 태초에 계시고 세상 끝까지 영원토록 살아 계신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시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자와 마지막 자,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이사야 41:4 처음에도 나요 나중에도 나, 계1:8, 21:6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일체시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엘로힘, 복수형,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말씀으로 창조하시다. 삼위가 함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신다.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라 하신 그는 영원 자존자, 나는 나다 이시다. 그는 처음에도 나, 나중에도 나로 시간 공간의 창조자요 주인으로 통치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신다. 

알파와 오메가인 그가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나? 예레미야에게 그를 태중에 짓기 전에 알고 선택하였다 하시다(렘1:7). 다윗은 주께서 모태에서 나를 만들었다 고백한다 (시139:13)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나 부모의 생각이 아니라 주의 계획안에 우리의 생명과 삶이 있었다. 그의 때에 우리 생명은 그에게서 나와 태어나고 그의 인도와 보살핌아래 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나 삶은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시라 그가 약속하신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준비하시면 나를 그곳으로 이사하게 하여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하니 그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시다. 우리의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 모든 것이 주님이시라 그가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알파와 오메가 그 분이 속히 오시리라 하신다. 속히, 빨리, 갑자기 오신다. 세상 마지막 재림을 말하지만 우리 개인의 삶에서 오는 마지막도 된다. 우리 삶이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그 날이 갑자기 임한다. 주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우리 사명이 끝이 난 것이다. 모세는 120세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흐리지 않아 느보산에 오르고 그 산에서 멀리 약속의 땅 사방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명은 거기 까지기에 주께서 그를 데리고 가셨다.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우리 사명은 끝이 났는가? 은퇴를 하였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40년 사역 은퇴를 하며 끝난 줄을 알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는데 하나님은 아니라며 팬데믹 전까지 일을 하게 하시는데 이전과 달리 자유와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주께서 오시는 이유가 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하신다. 상은 보상이다. 일하는 자에게 보상이 있는 것이다. 주어진 사명을 받아 열심히 달린다. 달릴 때 응원하시던 주님은 경주가 끝나 사명을 다하면 손에 상을 들고 기다리며 환영하신다. 행한 대로 상을 주신다. 

1)받은 사명을 가지고 내 달릴 길을 달릴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고 그만큼 남긴 종에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네게 맡기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받은 달란트는 모두가 달라도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사람을 주님은 인정하신다. 평생 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의 백성을 섬긴 사람이 받는 상은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하는 축복이다. 이 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영어 흠정역 KJV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신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하고는 마지막 7번째 복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2)계명을 지키는 자라 하는데 계명은 무엇인가? 전체 계명을 종합하는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명을 행해도 사랑이 없을 때가 있다. 마25장 주께서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하신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감옥에 걷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요?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을 베풀고 실천할 때 주님이 받으신다.

3)(성결한 삶)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자주 세탁한다. 우리 삶은 어떠한가? 나는 잘못이 없다, 나처럼 믿고 섬기는 자도 없을 것이라며 자기를 내세우지는 않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보시나? 잔의 겉은 깨끗하나 그 안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하신다. 곧 탐욕과 음란, 이기심 미움등이다. 이를 씻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려고 흘려주신 주의 피로 씻지 않으면 우리는 깨끗한 옷을 입을 수가 없다. 나의 생각 말 행동에 있어 부족함을 본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를 인정하고 주 앞에 고백하는 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입혀 성결하게 하신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상의 내용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는 권세다. 

1)생명 나무는 에덴동산에 선악과와 나란히 있었다. 선악과는 사람이 그것을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왜?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취하지 말라, 선악의 구별과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인데 아담이 그것을 취하였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우리 스스로 남의 선악을 얼마나 많이 판단하고 있나?  그러기에 생명 나무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 생명 나무의 과일을 먹으면 그대로 영생하게 된다. 죄인으로 영원히 살면 그것이 지옥의 삶이지만 이제 두루마기를 씻으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고 거룩한 자로 삼아 생명 나무에 나가는 상 곧 영생을 주신다. 

2)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주신다. 성은 하나님의 나라다. 새 예루살렘이다. 주와 함께 영원토록 다스리며 기쁨을 누리고 주를 찬양한다. 사명을 다하여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 주님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신다 눅22:28 너희가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 하심이 이루어진다.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 주께서 오시면 일어나는 일이라 이것을 기다린다. 알파로 시작한 우리 삶이 주 안에서 오메가로 끝이 나 영원을 누리게 된다. 

예수께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시다. 그가 모든 일을 하시고 다스리신다. 우리의 삶은 어떤 지점에 있나? 시작이 주로부터 되었고 마지막이 주의 손에 있지만 그 중간 모든 것도 주께서 인도하신다. 초림의 주님이 오셨고 재림하는 주님을 기다리나 우리 개인에게 마지막이 온다. 갑자기 임한다. 주께서 상을 주신다. 우리는 달리고 달리며 결승점에 이르고 우리의 달리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 생명 있는 동안 주를 섬기며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 그래도 나의 부족을 인정하고 두루마기를 씻어 성결하게 할 것이다. 생명 나무의 과일로 영생을 얻고 주의 성에 들어가 주와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된다. 이런 복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동안 사명을 감당하고 서로 사랑하되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는 가운데 알파와 오메가 주님이 오시는 것, 우리의 마지막을 기다리며 환영하는 우리가 되자.


 


Friday, December 24, 2021

홀로 살기? Living Alone?

홀로 살기? Living Alone?

지난 4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 Nomadland는 주연 펀이 네바다 엠파이어의 석고회사에서 오래동안 일을 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고 남편이 죽자 그 슬픔을 이기려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밴을 구입하여 직장을 구하며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임시직 일을 하며 떠돌이로 안정이 없는 중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알고 거기서 위로와 힘을 얻고 길거리 홀로 살기의 안내를 받는다. 자연과 자유, 자기와 능력을 발견하고 원하는대로 하는 용기를 좋아하여 자동차 하나로 유랑생활하는 자들이 미국에 300만이 된다고 한다.  

달라진 삶의 방식이다. 내가 유학 온 학교 관리인의 아이가 15명이라 하여 놀랐지만 사실 내 아내도 13명 중의 11번째였다. 당시 대가족이 보통이었으나 점차로 핵가족이 되다가 홀로 살기를 택하는 자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에 홀로 사는 자가 3600만으로 대개 50세 이상이며 18-35세는 500만 (1950년보다 10배)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홀로 살기에 좋은 점이 있지만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많다. 영화에서 펀의 자동차가 고장이 난 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자 다른 이의 도움을 얻어야 했고 본인이 감당하지 못하는 수리비를 위해 동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가야 하고 같은 유랑민이라도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영원한 이별은 없다며 또 만날 것을 기대한다. 사람은 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존재와 도움이 필요한 약함과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면 사람의 처음은 어떠하였나?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와 만물이 보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여 그와 교제하고 또 자기가 만든 만물을 즐기며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분이기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 새들을 그에게 인도하여 이름을 짓게 하였으나 그와 맞는 짝이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를 뽑아 살로 채워 여자를 만들었더니 아담은 그를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며 환호하였다. 배필은 맞는 자, 돕는다(ezer)는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구원과 강함의 의미가 있다. 도움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자는 아담과 한 몸이라 그와 맞는 자로 눈에 보이고 옆에 있으며 하나님의 도움이 되니 ‘보기에 매우 좋았다’.  

이제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그를 배반하고 떠나더니 둘은 서로 핑계하고 반목하고 미워하며 결국 분쟁과 살인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살상으로 이루어지고 개인이나 나라는 투쟁에서 이기고자 스스로 강하게 힘을 기르고 또 남의 도움을 구한다. 문화와 과학의 발달은 이와 관련되지만 사람이나 과학은 한계가 있고 인류의 고통과 죽음은 끝이 없다. 

참된 도움과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영원하고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번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 예수로 오시어 항상 사람과 함께 하여 돕는 임마누엘로 확인시킨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병들고 귀신들린 자, 눈멀고 귀먹은 자, 죄와 심판.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 무엇에나 시달리며 부르짖는 자를 찾아 강한 힘으로 도와 구하시고 지금도 그렇게 하신다. 크리스마스에 탄생하신 주님을 맞아 그와 함께 살면 그는 확실하게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되신다.  











 

Monday, December 20, 2021

가장 큰 기다림 The Most Expectant Waiting

 가장 큰 기다림 The Most Expectant Waiting

삶의 일부인 인터넷의 월사용료가 너무 올라가 다른 회사로 옮기려 설치하는 날짜를 받고 그 날과 시간을 기다린다. 기사가 약속대로 찾아온다. 그로서리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몸의 중한 통증을 조사하고 결과를 기다리거나 삶은 많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 기다리며 소망과 기쁨, 초조함을 가지고 인내를 기른다.

오래 전 새무얼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블라디미어와 에스트라곤이 시골 잎 떨어진 나무 옆에서 종일토록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한 소년이 해질녘에 나타나 고도가 그날은 오지 않고 다음 날 온다고 한다.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고도는 오지 않고 이들은 실망하여 나무에 목을 매고 싶지만 끈이 없어 그러지 못한다.  

이타카왕국의 왕비 페넬로페는 남편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한 10년 동안 국정을 대신 맡았다. 전쟁은 끝나고 모두 귀환하는데 오디세이는 트로이를 떠났다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중간에서 변을 당하였을 것이라며 많은 귀족들이 미모의 페넬로페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며 구애를 거절하는 구실로 시부의 수의를 먼저 다 만들어야 한다며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수의를 푸는 일을 하며 정절을 지키다가 20년만에 돌아온 남편 오디세이를 만나고 행복을 누린다. 

결과가 없는 기다림이나 부부의 행복을 가져오는 기다림이 귀하지만 이보다 더 큰 기다림은 어떤 것일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며 당시 국민병이라는 폐결핵 말기로 피를 토하며 군에 입대도 취직도 못하고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있었다. 특효약이나 치료책이 없는 형편에 삶의 소망과 의미를 잃고는 죽고 싶어도 죽을 힘도 없었다. 요양병원에 가서 살든지 죽든지 때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입원 전날 밤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행사를 선포하리라’는 주의 약속이 임하였다. 믿고 받아드릴 수 있을까? 마음의 기쁨과 감격으로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다. 결혼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유학을 하고 이민 목회를 하는데 몸살 이외의 다른 병이 없다가 은퇴에 이르렀다. 주의 사역 40년이라 이제는 즐기며 자유롭게 살자고 하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몹시 아파왔다. 의사 말이 대상포진으로 약이 없고 아플만큼 아파야 한단다. 진통제도 듣지 않고 그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라 한달 동안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다가 하나님께 “어떻게 된겁니까” 물었다. 대답은 “40년 일하였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겠다고? 내 약속을 잊었나?” 기억시키시니 “잘못했어요. 따르겠습니다” 하였더니 그 다음 날 부름이 왔고 순종하였더니 통증을 잊고 여기 저기서 섬기다가 팬데믹을 만났다. 내게는 생사와 격심한 통증에서의 해방이 큰 기다림이었고 응답을 받아 감사하다. 개인만이 아니다. 나라가 외국의 억압으로 눌린 때 얼마나 해방을 기다리는가? 우리가 일제에서 경험한 바다. 역사상 많은 침략과 수탈을 당한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예수께서 그들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것을 기대했으나 실망하고 그를 배척하였다. 

육체적 정치적인 것보다 더 큰 기다림이 있다. 죄의 형벌과 영원한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염원과 기다림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천사가 두려워하지 말라며 인류에게 죄의 용서와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구세주가 태어났다고 알려주었다. 인류의 가장 큰 기다림이 예수의 탄생으로 성취되기에 우리는 기쁨으로 그를 환영하고 축하한다.  










Saturday, December 18, 2021

알파와 오메가 Alpha and Omega

                   알파와 오메가 Alpha and Omega                  이종형 (시카고)

NCKPC희년을 맞으며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성경에서 희년은 노예를 해방하고 빚을 탕감하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 자유를 선포하는 해다. 우리는 이 희년의 주체로서 자유를 선포하는가 아니면 객체로서 자유를 얻는가, 또는 둘 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동양에서 50세는 지천명으로 하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해라 한다. 이 둘을 합치면 하나님의 뜻은 자유와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으로 본다. NCKPC조직은 50년이지만 한인교회가 미국장로교에 처음 가입한 것은 115년 전이다. 한인 교회 수가 많아지면서 협의회가 생기고 3개 한어 노회를 허락 받고 한어 문서 교육자료가 발간되고 교단 한인 총회장과 지도력이 일어나 사역하며 모두가 함께 광야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뛰고 달려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 모두가 바라고 꿈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와 비슷하게 광야를 달린 모세와 이스라엘이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 몇 사람이 애굽에서 200만 큰 민족이 되었지만 그들은 노예로 고생하며 탄식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백성의 정체와 자유를 찾아 누리도록 80세의 도피자 모세를 불렀다. 모세의 지도 아래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릴 꿈을 가지고 풍요의 애굽을 떠났으나 그들의 여정은 길이 없고 먹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였다.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고 광야의 불편과 방황이 오래되고 심해지자 이들은 불만과 불평으로 일관하다가 출애굽 세대는 모두 죽은 뒤에야 광야의 끝자락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모세로 높은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 사방을 보게 하고는 그는 들어가지 못한다니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직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흐리지 않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중간의 모든 것이 되심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자기 삶을 정리한다. 

모세의 삶은 출생부터 그때까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 곧 전부였다. 아브라함의 선택, 그 자손의 종 생활,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광야 행진에서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고 이루시는 처음과 나중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종에서 해방시켜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이 살아갈 생명의 법을 주신다. 그들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확인하고 그의 법을 생활수칙으로 받아드린다. 하나님은 광야의 역경과 고난으로 자기 백성을 훈련하신다. 어디서나 삶은 전쟁이라 강한 군대가 되게 하신다. 원망과 불평 반항이 심하여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 그들을 품으시며 그의 크신 능력과 권위, 용서와 사랑을 알게 하신다. 광야를 통과하는 일세는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 이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삶이 끝난다. 모세의 사명도 끝이 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들은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부르게 먹다가 바로의 종으로 죽을 수 있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죽었으나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모세의 마지막 일은 하나님의 법을 듣지 못한 2세에게 그 법을 복사(신명기)하여 주고 강론한다. 그들이 생명과 자유, 평안의 복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악과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 역사를 다스리는 분임을 인정하고 백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현재 함께 하심을 확인한다.  

동시에 그들은 동료 이웃에 대하여도 그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압제하지 않고 서로 용서하며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주의 복을 길이 누리게 된다.  

모세는 원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고 함께 하여 구원하고 인도할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 각각을 축복하며 그들이 행복한 자임을 인식시킨다. 

모세는 떠나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는 진행되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이기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그에게 바톤을 넘긴다. 모세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새 일을 하시며 자기 뜻을 계속 이루어 가신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가 약속 받은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후대를 위하여 남겨두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어떤 형편에서도 역사를 주관하는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의 백성인 행복자로 지금도 살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때가 되어 죄와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세상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구주 예수를 보내셨다. 그는 하나님 사랑의 법을 성취하여 만나는 이에게 자유와 해방, 풍성한 생명을 주시더니 결국 자기 생명을 바침으로 땅의 삶을 마쳤으나 이제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나 구원 얻는 길을 여시고 알파와 오메가로 역사를 다스리신다. 죄와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 우리는 그로부터 받은 구원의 자유와 생명을 이웃과 만방에 나누고 전파함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받았으니 우리가 어찌 복받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Tuesday, December 14, 2021

섬기는 종으로 Born to Serve

 

섬기는 종으로 Born to Serve 

선거철이면 후보자들이 저마다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방을 폄하하는 것을 본다. 당선이 되면 그 자리를 최대한 지키려 하고 나아가 종신토록 누리며 왕이 되어 권세를 부리고 자기 뜻을 펴고자 한다. 높임을 받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동서고금 역사다. 

예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자 제자들과 민중은 그가 왕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니 제자 중 두 사람이 주의 영광 중에 그들을 좌우에 앉게하여 달라고 요청하자 다른 제자들은 시기하며 서로가 높다고 다투었다. 주의 제자로서 주와 같은 인정과 대접을 받겠다는 마음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 (고난)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죽음)를 받을 수 있겠나 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자유 위한 빚지불)로 주기 위함이라 하시다. 여기 인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영광스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 섬김과 예배를 받아야하지만 자기는 섬기는 종으로 났다고 하며 평생 섬기는 일을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이는 종의 일이다. 베드로는 주께서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한다고 하자 주께서는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주의 섬김을 받아야 주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자와 상한 자를 고치고 맹인을 보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한 곳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벗은 몸으로 쇠사슬에 매이어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데 예수께서 찾아가자 “주께서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소리지른다. 주께서 그를 풀고 자유를 주셨더니 귀신이 나와 그곳에 있던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들이 비탈을 달려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이 예수에게 떠나라 요청하며 그와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주와 관계를 맺고 그의 섬김을 받아드린 사람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많으나 가장 두려운 적은 죽음이요 이는 죄의 대가라 피할 자가 아무도 없다. 예수께서 죄 없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어 죄의 값을 치르시기에 누구든지 그를 믿고 받아드리면 용서와 자유 영생을 얻는다. 한 강도가 처형되는 자리에서도 주의 긍휼을 구하자 그는 낙원에 함께 있을 구원을 허락받았다. 

구원과 자유를 얻으면 보답하고 싶다. 귀신 나간 사람이 주와 같이 있겠다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큰 일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신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생명의 자유를 온 세상에 알리고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주신다.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방문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같이 간 의사와 함께 의료선으로 강을 따라 마을 마을에서 사역하는 기회가 있었다. 브라질 정부는 그들이 할 일을 선교사가 한다고 감사하며 치과의사 간호사 영양사 기사를 제공하였다. 하루는 오직 모녀가 사는 한 집 마을을 보트로 찾아가 섬김에 놀랐다. 그 선교사는 30년간 밀림에서 주민을 섬기며 건강을 잃으면서도 주의 뒤를 따르고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어디서나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섬기는 종으로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 

선거철이면 후보자들이 저마다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방을 폄하하는 것을 본다. 당선이 되면 그 자리를 최대한 지키려 하고 나아가 종신토록 누리며 왕이 되어 권세를 부리고 자기 뜻을 펴고자 한다. 높임을 받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동서고금 역사다. 

예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자 제자들과 민중은 그가 왕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니 제자 중 두 사람이 주의 영광 중에 그들을 좌우에 앉게하여 달라고 요청하자 다른 제자들은 시기하며 서로가 높다고 다투었다. 주의 제자로서 주와 같은 인정과 대접을 받겠다는 마음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 (고난)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죽음)를 받을 수 있겠나 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자유 위한 빚지불)로 주기 위함이라 하시다. 여기 인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영광스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 섬김과 예배를 받아야하지만 자기는 섬기는 종으로 났다고 하며 평생 섬기는 일을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이는 종의 일이다. 베드로는 주께서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한다고 하자 주께서는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주의 섬김을 받아야 주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자와 상한 자를 고치고 맹인을 보게 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한 곳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벗은 몸으로 쇠사슬에 매이어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데 예수께서 찾아가자 “주께서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소리지른다. 주께서 그를 풀고 자유를 주셨더니 귀신이 나와 그곳에 있던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들이 비탈을 달려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이 예수에게 떠나라 요청하며 그와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주와 관계를 맺고 그의 섬김을 받아드린 사람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많으나 가장 두려운 적은 죽음이요 이는 죄의 대가라 피할 자가 아무도 없다. 예수께서 죄 없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어 죄의 값을 치르시기에 누구든지 그를 믿고 받아드리면 용서와 자유 영생을 얻는다. 한 강도가 처형되는 자리에서도 주의 긍휼을 구하자 그는 낙원에 함께 있을 구원을 허락받았다. 

구원과 자유를 얻으면 보답하고 싶다. 귀신 나간 사람이 주와 같이 있겠다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큰 일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신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생명의 자유를 온 세상에 알리고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주신다.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방문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같이 간 의사와 함께 의료선으로 강을 따라 마을 마을에서 사역하는 기회가 있었다. 브라질 정부는 그들이 할 일을 선교사가 한다고 감사하며 치과의사 간호사 영양사 기사를 제공하였다. 하루는 오직 모녀가 사는 한 집 마을을 보트로 찾아가 섬김에 놀랐다. 그 선교사는 30년간 밀림에서 주민을 섬기며 건강을 잃으면서도 주의 뒤를 따르고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어디서나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섬기는 종으로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 










Monday, December 6, 2021

나는 나다 (I Am Who I Am)

 나는 나다 (I Am Who I Am)

우리가 Korean-American으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때로 혼란을 가진다. 미국에 평생을 살아도 미국인이라 할 수도 없고 한국에 가면 외모는 같은데 한국인이 아닌 것을 발견한다. 인종 혐오 범죄로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여기가 내 나라인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고민하며 나는 코리언도 아메리칸도 아닌 중간의 점에 불과하다며 자기가 없이 살다가도 내가 누구라는 이름이 있기에 그 이름에 따라 살려고도 한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의 후손도 같은 운명을 가진다. 아브라함의 증손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가는 대상들에게 종으로 팔리고 그는 파라오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나라를 7년 기근에서 구해 내는 위대한 총리가 되고 자기 가족을 이집트의 비옥한 땅으로 이주시켰다. 세월이 지나며 이들이 번성하자 이집트인은 이들을 히브리인 (건너온 자, 유랑민)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여 노예로 삼고 고역을 시키면서도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산파에게 명령하다가 남자가 태어나면 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석달을 부모와 같이 있다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던짐을 받았다. 왕의 공주가 발견하여 모세(건져 내다)라 이름하고 왕궁에서 양육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히브리인이었다. 그가 장성하여 자기 백성이 이집트인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자 이집트인을 죽임으로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양치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인가? 이집트인 히브리인, 아니면 미디안인가? 하루는 양을 치는 그 앞에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 없어지지 않는 광경이 나타나 가까이 갔더니 불꽃 속에서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부른다. 그는 그의 조상의 하나님이라며 노예로 신음하는 그 백성을 구하여 내라고 한다. 잊혀졌던 모세라는 이름 값을 하라는 것인가? 모세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집트의 많은 신은 모두 이름이 있는데 그를 보내는 그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나는 나다’라 한다. 이상한 이름이다. ‘나는 나다’는 히브리어 YHWH 네 글자로 발음은 야훼로 생각되나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듯이 히브리인은 그를 Adonai (나의 주 LORD)라 부르고 그 모음을 붙여 여호와라 하였다. ‘나는 나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백성을 건져내라고 함은 그가 이집트의 신들을 정복하고 자기 백성을 억압에서 해방하여 히브리인에서 ‘나는 나다’의 백성이라는 정체를 주겠다는 것으로 구약에 6828회(하나님은 2838회)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다

‘나는 나다’ 는 무엇을 말하나?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살아 있어 모든 존재를 있게 하고 없게 하는 자, 눈에 보이지 않으나 만나고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행하는 능력이 있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분이다. 그는 시간의 시작과 끝이 되나 동시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불변하는 분으로 참으로 신비하다. 그가 자기 백성을 해방하여 인도하고 다스리며 히브리를 이스라엘(하나님이 다스리다)로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나는 나다’ 하나님이 온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예수 (구원자)를 보내셨다. 예수는 자신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는 ‘나는 나다’로 생명 빛 진리 길 목자 떡과 생수라 하며 누구든지 그를 믿고 받아드리면 언제나 그와 함께하여 ‘나는 나다’ 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 안에서 확실하게 ‘나는 나다’하며 살 수 있을까!  


                                                      네 나라로 돌아가라!! 인종 혐오

애굽인을 죽이는 공주의 아들 모세

왕궁에서 광야로, 양치며 꺼지지 않는 불앞에서

나는 나다! 만주의 주!

바다를 가르시기도 하고

종교지도자 앞에서 "나는 나다"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주의 뒤를 따르는 자 "나는 나다"









Monday, November 29, 2021

친구 참 친구 Friend Real Friend

 친구 참 친구 Friend Real Friend

소꿉 친구는 어릴 때 같이 놀고 자라며 좋고 험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영향을 미치며 형제보다 더 가까운 관계다. 도시화 아파트 문화로 바뀌며 소꿉 친구라는 말이 생소하게 되고 더욱 이민으로 친근하던 것을 뒤로하고 생소한 곳으로 오면서 친구도 달라지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며 정착에 분주한 꿈과 혼란의 삶을 살며 교회와 직장 사업 학교 행사 모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며 친구를 만들다가 은퇴에 이른다. 대학에서 50년을 가르치는 어느 교수는 친구가 없다고 한탄하는데 평생을 목회에 전념하고 은퇴한 목사도 같은 외로움을 가진다. 친구가 필요하기에 페이스북, 카카오 톡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서로 연결하고 친구를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친구인가? 

친구로 생각하던 자들이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없고 연락을 해도 응답이 없을 뿐 아니라 등을 지고 험담하는 경우에는 버림 받고 배반 당한 기분으로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겪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친구라도 대개는 그 관계를 통하여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기 중심이다가 그것에 맞지 않다거나 다른 의견이나 정직한 충고를 용납하지 못하고 갈라 서는 현실이다. 내가 친구라 생각하는 그 사람이 나를 또한 친구라 생각하는가 하는 연구에 의하면 절반 정도가 그렇다고 한다. 서로의 친밀감이 다르게 나타난다.

참 친구는 어떠한가? 떠나 있으면 생각이 나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힘을 얻고 삶에 생기가 생긴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고 실수가 용납되고 약점 수치도 부담 없이 들어내고 필요한 때는 항상 거기 있다. 이런 친구가 있는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는 누군가 자기를 찾아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고 택하여 친구가 되어 제자로 훈련한다. 그는 멸시 받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가난하고 병든 자, 귀신들린 자의 짐을 풀어 주신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산다.

친구는 말을 듣고 행한다. 로마 백부장이 예수를 찾아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고쳐 달라고 하자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신다. 맹인이 멀리서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자 그를 불러오게 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물으니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바로 보게 하여 주신다. 주께서 우리 기도와 요구에 친구로서 응하신다. 우리는 주의 말씀과 요구를 듣고 따르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친구가 된다. 

친구는 어려움과 배반에도 친구다.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폭도를 이끌고 그를 잡으러 온 때에 주님은 그를 친구라 부르며 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이면 그는 언제나 친구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의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가끔 있지만 주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고자 대신하여 죽으시고 생명의 길을 주셨다.  

친구는 항상 같이 한다. 주께서 우리 위한 거처를 준비하시고 우리로 영원토록 그와 함께 살게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 삼고자 찾아오셨으니 우리가 그를 믿고 친구 삼으면 영원토록 그와 함께 사는 것이 참 친구로서 우리의 즐거운 바람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