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31, 2020

새해 새 아침 A New Year, A New Dawn

새해 새 아침 A New Year, A New Dawn (2021-1-1) 
 
힘들고 어려웠던 2020년이 지나고 희망의 새해를 맞으며 새로운 변화가 오기를 기대한다. 팬데믹을 물리칠 수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왔으니 걱정을 풀게 되고 대통령 선거도 잘 마무리되어 정국이 안정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달력을 넘기면서 새해가 되었지만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이 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그대로지만 우리가 새해에 새로운 날을 기대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이 달라진 변화다. 그러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작년과 달라질 것이 없는 또 한 해가 될 것이다. 
 여기 삶이 달라지고 인생에 새해 새 아침을 만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라 이름이 그에게서 나온 야곱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이름을 야곱, 경쟁과 술수, 씨름과 다툼으로 평생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형 에서는 들 사람으로 사냥을 즐기나 야곱은 집에서 엄마를 도우면서도 언제나 형이 되고픈 마음이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명분을 넘겨받는 술수를 하고 나중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지만 형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된다. 중간 광야 벧엘에서 하루 밤을 지나며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함께 하고 복을 준다는 약속을 받는다. 라반의 차녀 라헬을 사랑하여 7년간 양을 치고 받은 것은 장녀 레아로 속임당하고, 다시 라헬 값으로 7년을 일하다. 20년 양을 치는 동안 라반을 부자가 되게 하고 자기는 더 큰 부자가 되는 재간을 부리지만 라반은 열 번이나 품삯을 바꾸더니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마음을 나타내자 야곱은 아내와 여종, 자녀와 양을 모두 이끌고 고향으로 야간 도주하게 된다. 라반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를 해치지 못한다. 
한 산을 넘었으나 더 큰 산이 앞에 있다. 형 에서가 동생 소식을 듣고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 야곱은 두려움으로 선물을 준비하고 아내와 종들을 나누어 앞서 보내고 자기는 홀로 강가에 남아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한다. 새벽이 되어 상대는 가겠다고 야곱의 허벅지를 쳤지만 야곱은 축복하지 않으면 놓치 않겠다고 한다. 야곱을 이스라엘 곧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전능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지만 간절히 그를 붙잡는 자의 소원에는 넘어가신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브니엘의 밤이 지났다. 해가 돋았고 야곱은 환도뼈로 인하여 절룩거리며 출발한다 (창32:31). 
아침의 돋는 해는 전날과 다름이 없지만 그의 생은 달라진 새아침이다.  그가 자기 꾀, 자기 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람을 속이고 넘어뜨리며 이익을 취하던 때는 지나갔다. 더 이상 자기 힘을 쓸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위기를 만나 아빠의 손을 붙잡는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다가 오는 에서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려 형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며 그의 처분만 기다리니 에서는 오히려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자세와 삶이 그를 승리자 이스라엘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복의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떠한가? 2020년은 나의 절룸발이 무력함을 현저하게 보여주었기에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새아침 새삶을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형의 장자 명분을 넘겨 준다면!

                                         도망하는 야곱에게 네가 너와 함께 하리라

                                                흰양이 점과 무늬 있는 양으로

                                                  라반을 피하여 야간 도주

                                                      밤새도록 씨름하는 야곱

                                                        절름발이로 새날을 맞아

최악의 형편에서 In the Worst Situation

 

최악의 형편에서 In the Worst Situation 

타임은 금년 2020년을 최악의 해라는 표지(12/14)를 내었다. 코비드 19 팬데믹이 세계를 덮쳐 서로 격리하며 모든 활동이 10달 동안 거의 마비상태에 있으나 다시 3차 파도가 일고 있다. 오스트랄리아와 캘리포니아에 끄질 줄 모르는 산불이 몇 달간 계속되며 자연 재해의 심각성을 보여 주었다. 조지 플로이드가 사소한 일로 미네소타에서 경찰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흑인의 생명이 귀하다’는 민중운동이 미국에서 세계로 번져 나갔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미궁이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개가 피곤과 싫증, 좌절과 암울에 허덕이는 최악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임은 적절한 대처의 길을 말하지 않는다. 저마다 위기를 피하여 숨거나 도망하지만 안전한 곳이 없다. 참고 기다리던 중 백신이 나왔다고 하지만 한계를 본다.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열심히 일을 하고 도우며 해쳐 나가는 영웅도 있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 아니라 인간 역사와 같이 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를 실감하며 인간은 자기 밖의 초월적 신을 찾아 의지한다. 전쟁도 옛날에는 신과 신의 대결로 어느 신이 더 강한가를 보여주었다. 
 욥은 동방의 갑부로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의로운 사람이지만 삽시간에 그의 많은 재산을 다 잃고 열 자녀가 모여 잔치하던 집이 태풍에 무너지며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욥 자신은 온 몸의 악성 종양으로 죽음 같은 고통에 처하였다. 부인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은 위로할 말을 잊고 그의 잘못을 회개하라 촉구하여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욥은 최악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더니 결국 그의 모든 것이 이전보다 배로 회복되었다. 사람이 욥의 하나님을 믿고 싶으나 그 하나님은 신상이 있는 다른 신과는 달리 신상이 없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지킬 삶의 규칙을 주시고 그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나중 성전을 짓고 모시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이 있는 곳,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이기에 사람이 전쟁 기근 질병 등의 위기를 만나며 이 성전에서 또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말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얻는다. 앗수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하라고 신의 이름으로 위협할 때 히스기야왕은 대항할 능력이 없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그날 밤 적군이 모두 시체로 변한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 백성은 모든 최악 형편에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며 살 힘을 가진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성전예배가 형식화되자 하나님은 떠나고 건물은 파괴되고 사람은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과 만나고 싶어하시기에 최악의 형편인 세상에 예수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이라 그를 만남이 곧 하나님을 만남이지만 누구나 그를 진정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원하고 초청하면 그는 응하여 성전에서처럼 우리를 만나신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요 축복이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최악의 죽음 상태에서 우리와 함께하러 오신 예수님을 맞아드리는 기회다. 내 삶 속으로 그를 주로 환영할 수 있겠나!

                                             코비드 19 Pandemic over the world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영웅들

                                                    산불을 어떻게 하나?

                                          동방 최고의 갑부 욥이 당하는 시련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

                                                     히스기야 왕의 성전 기도

왕중의 왕 예수께서 오시다


Monday, December 21, 2020

최대의 유일한 희망 The Only Greatest Hope



최대의 유일한 희망 The Only Greatest Hope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은 산타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고 싶다는 소원 목록을 만들지만 어른들도 무엇을 갖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다. 비싼 침대에 누우면 불면이 풀리고 잠이 잘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근대 서구는 교육과 과학, 법률, 자선을 발전시키면 이상적 평화가 올 것이라 희망하였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허탈에 빠졌다. 희망하고 투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일이 많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어둔 밤 지나서 밝은 아침이 온다는 자연이치는 확실하지만 사람은 희망과는 달리 여전히 가난과 억압, 고통과 분리 속에서 신음하고 한탄한다.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세균에게 활동과 자유를 내어주고 있다. “흑인의 생명이 귀하다”는 행진을 하며 폭동과 약탈, 방화와 살인을 자행하는 현실이요 정직과 공정이 민주주의의 기반이지만 거짓과 술수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릴까? 좌절과 한탄의 늪에 빠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하는 옛 성도의 음성이 오늘 나를 일깨운다. 
 어둠 속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하늘의 빛과 함께 천사가 나타나 온 세상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며 평화의 구주가 났다고 한다. 동방에서 천체를 연구하던 세명의 박사들은 왕의 별이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는 것을 발견하다. 목자나 박사는 듣고 본대로 희망을 찾아 나서다. 기쁨과 평화는 비천한 목자나 고상한 연구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인류의 희망, 기쁨과 평화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그가 인간에게 구원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특이하지만 그는 목자와 박사의 경배와 선물을 받으면서 또한 그를 제거하겠다는 시기와 미움의 칼날도 그가 임한 세상의 현실이다. 여기서 그의 삶과 행보는 어떠하였나? 
그는 ‘자기 죽음’의 세례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고 세상에 나타나다.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에게 치유와 해방, 자유를 선물한다. 소외되고 멸시 받는 이들을 찾아 친구가 될 뿐 아니라 가지고 누리는 자라도 그를 찾으면 그의 소원도 허락한다. 배반과 거절, 미움을 받아도 그는 배반하고 거절하고 미워하는 자를 용납하며 평화와 자유를 나눈다. 그는 사람의 깊은 소원에 응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한다. 무엇을 말씀하나? 
길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한다. 나누어진 장소와 시간, 관계를 연결한다.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이 분리하고 반목하며 고통하는 현실에서 자신이 그 중간의 막힌 담을 헐고 길을 낸다는 말이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모든 것 되는 하나님’, 그와의 관계를 막고 있는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을 열어 주신다. 진리는 본질이다. 하나님은 누구며 사람은 무엇이며 사람의 기본 필요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신다. 생명은 누림이다. 오늘의100세 시대나 옛 900년 시대에도 더 누리고 싶은 것, 죽지 않은 생명이 소원이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있을까? 예수님만이 이 소원에 응답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Monday, December 14, 2020

 

자기를 비움 Self-Emptying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면 서로를 생각하며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는다. 이전에 많은 카드와 선물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지고 잊혀진 존재처럼 된다면 어떤 마음일까! 
남이 나를 잊은 것보다 내 스스로를 잊고 살 때가 있었다. 이민 초창기 언어 문화 풍습이 다른 이 땅에서 전문직이 아닌 일반인은 대개 고국에서의 이름 지위 업적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을 알자 과거의 자기를 잊고 겸손하게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며 꿈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자기를 잊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면서 남은 인정하고 받아주지 못하여 비판과 경쟁, 분리가 일어난다. 인정받고자 성취하려다가 불안 고통 탈진에 빠진다. 바로 자기중심적인 교만이다. 교만이 삶을 살벌하고 추하게 하고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신다. 아름다운 삶의 관계에는 남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자기 잊음이 중요하다. C S 루이스는 자기 잊음의 아름다움을 셋으로 말한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곧 석양, 심포니, 소설 등을 진심으로 좋아하며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다. 인생을 즐기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동감하고 언제나 잘 웃는다. 자기 작품이 최고 수준이라도 그것을 남과 같이 즐기기는 하지만 자기가 한 것이라 내세우지 않은다. 이는 겸손, 자기 잊음,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이요 삶의 미덕이다.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바울은 그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나 자기를 비우고 우리 몸을 입고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한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 부정, 자기 잊음이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인 자기를 비운 것이다. 비우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쏟아 부어 다른 그릇을 채워 줌이다. 
두 아들을 가진 홀 엄마가 빚으로 팔려 종이 될 형편인데 선지자 엘리사가 그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기름 한 병 뿐이라 한다. 동리에 나가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 하고 빌려온 그릇에 그 기름을 부으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그릇이 모두 꽉 찼다.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로 편하게 살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 사랑 평화의 인격이시나 사람은 자기 중심의 교만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다가 죽음과 갈등 고통에 빠지고 사탄과 거짓의 종이 되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고자 자기에게 가득한 하나님 본체를 비워 인간에게 채워 주시려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생명의 피를 쏟은 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채움 받으려면 그릇을 먼저 비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자기 부정, 비움이다. 거짓과 교만으로 가득한 내 그릇을 비울 때 그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본체로 채울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비워 우리에게 채워 주시니 생명 얻은 모든 사람이 그를 주로 인정하고 높이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내가 주님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하고 확인할 때다. 나를 비워 빈 그릇으로 주님 앞에 내어드릴 때다. 나의 빈 그릇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움 받은 것을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는 때다. 인생 광야에서 아직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 속에 채워져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비우고 부어주는 때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가 내게 살아나기를 기대한다.







Monday, December 7, 2020

기다림 Waiting

 

기다림 Waiting 

 중학교 시절 전체 조례 교감의 훈시에서 “거센 파도가 굳센 사공을 만든다”고 한 말은 내 가슴에 큰 파장으로 남았다. 준비 없이 맞은 전쟁에서 밀리고 밀려 경주에서 부산까지 경상도 일부만이 남아 있어 나라가 살아남을 여망이 없었지만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진하며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강산은 초토가 되고 수 백만 생명이 손실되는 좌절과 아픔 속에서 휴전이 되고 국민은 새 나라를 내다보고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여 오늘이 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잡힌 바울은 배로 로마에 호송되는 과정에 큰 풍랑을 만나 276명을 태운 큰 배라도 구출 희망이 없었다.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배는 잃어도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며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주리고 먹지 못한 지가 14일이라 이제 음식 먹기를 권한다”하고 떡을 들고 감사기도 후 같이 먹고는 힘을 얻었다. 곧 로마에서 멀지 않은 섬에 상륙하며 죄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인생의 어려운 파도가 휘몰아친다. 오랜 코비드 팬데믹으로 직장에서 레이오프가 되며 살길이 없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지난 10월 2158명이 자살을 택하였다. 어찌 일본 뿐이겠나?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여러가지로 표현되지만 인생은 기다림 바로 그것이다. 식품점이나 우체국에서의 긴 줄, 사춘기에서 성인, 씨를 뿌려 싹과 열매를 보는 것,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은 모두 기다림이다. 이런 기다림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교회는 지금 대림절기로 구주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가난과 고통, 질병과 죽음, 부정과 불의, 분리와 대결이 큰 파도로 밀려오는 세상에 치유와 생명, 자유와 평화, 정의와 사랑으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림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주는 아름다움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을 주노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시는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 받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키케로가 “숨쉬는 동안 희망할 것이라” 하였지만 주를 기다림은 우리 삶의 힘이요 희망이다. 

 기다림은 자기를 살피고 정리하는 기회다. 팬데믹으로 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은 집안 정리를 많이 한다. 바울이 탄 배가 큰 파도 속에서 무거운 짐을 모두 버렸다. 기다리며 나의 교만과 자랑, 욕심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겸손과 인내를 배우고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웃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모세는 40년간 양을 치며 기다리는 동안 살인하도록 성급한 목표 달성과 자기 영화를 뒤로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지도자로 변화하였다. 

 기다림은 지난 날 나의 삶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더욱 그와 친근한 관계를 갖게 하며 내 계획 내 방식보다는 하나님의 시간과 뜻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부인과 자기 방식대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후에 받은 약속의 아들 이삭과 대조와 갈등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더욱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일 하실 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회개의 세례로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는 평화와 생명이 우리 가슴과 사회에 일어나도록 희망과 믿음으로 자기 정리를 하며 기다려야 하겠다.








Saturday, November 28, 2020

마지막 만찬의 감사Thanksgiving over the Last Supper

마지막 만찬의 감사Thanksgiving over the Last Supper 

 미국으로 이민 올 때 한국에서 가족 친지와의 마지막 음식을 나눌 때 무슨 기도, 어떤 말을 하였는가? 그런가 하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전쟁에 나가는 아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눈다면 어떨까? 미국이 자유인의 땅, 용감한 자의 집이기에 감사할 수 있을까?  

예수님 지상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온 때 그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을 원하였다. 제자 중 하나는 이미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고 다른 제자들도 몇 시간 안으로 모두 스승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과 함께 모였다. 제자들은 각자 자기가 높다고 생각하지만 예수께서는 종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다. 음식을 나누던 중에 주님은 떡을 들고 감사한 후에 떼어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고 감사한 후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 하신다.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식사가 끝난 후 주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시다. 주님은 기도하시다가 제자 유다가 인도하는 악당들에게 잡혀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 죽음을 당한다. 고통과 환난, 비참한 최후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찢길 몸, 쏟을 피를 들고 감사를 한다. 자기 생명을 내어주며 어떻게 감사기도를 할 수 있을까? 

유대인은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하고 음식을 먹는다.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24기도중 12번이 감사기도인데 10회는 음식을 먹기 전 감사다. 음식은 살기 위해 먹지만 그의 몸과 피는 죽지 않은 영생을 주는 참된 양식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들은 유월절 만찬으로 모였다. 이집트의 초태생 모든 남자와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밤에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음식을 먹고 있는 이스라엘 집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400년간 죽음같은 종살이에서 해방을 맞는다. 죽음이 지나갔기에 유월절이라 부르는 이 절기 만찬은 처음 유월절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새로운 능력의 삶을 시작하기에 가장 의미 있는 감사의 음식이다. 예수님은 이 만찬으로 앞으로의 새로운 유월절 곧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림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기 생명을 줌으로 세상에 온 목적 곧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감사하며 순종한다.  

이제 주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면 주께서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되고 동시에 그의 생명과 사명도 우리와 연합하기에 우리 삶을 통하여 주님이 나타나고 전파된다. 주를 모르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를 전하고 생명을 나누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기에 성도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주님을 전파할 것을 내다보며 감사한다. 

주의 몸과 피로 하나된 사람들은 모두 주의 사람으로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주님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주의 교회로 연결되어 모두 하나가 되고 그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것을 보며 감사함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 감사절 만찬을 나누며 이런 주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Saturday, November 21, 2020

나무와 잎 Trees and Leaves

                                            






 

나무와 잎 Trees and Leaves 

며칠 전 집 가까이 있는 프랫 삼림 보존 구역 공원을 찾아갔다. 짙은 숲을 이루었던 나무의 모든 잎은 떨어지고 벗은 몸이지만 호수에 비친 대칭의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나무는 잎이 떨어진 자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아물게 하며 새 봄에 다시 싹을 내기 위한 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보면서 나무와 잎을 생각하게 된다.  

따뜻한 봄기운이 오면 봉오리 속에 있는 작은 생명은 더 이상 갇혀 있을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고 나온다. 찬 겨울 휴식의 오랜 기다림을 지나 새로운 시작과 성장의 희망으로 부풀어 싹과 잎, 꽃을 피우며 찾아가는 우리에게 신기함과 생명의 힘을 더한다. 잎은 이산화탄소(탄산가스)와 물, 햇빛을 받아 광합작용의 부엌에서 영양이 풍부한 당분 음식과 에너지를 요리하여 나무에 공급한다. 잎이 푸른 것은 왕성한 광합작용으로 건강하다는 표시이며 나무를 옷 입히고 무성하게 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우리 생명을 위한 산소를 내어 뿜는다. 아마존을 세계의 허파라고 하는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산소가 세계를 살린다는 말이다. 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물은 소량이기에 뿌리가 빨아드린 과량의 물은 잎이 저장하다가 뜨거운 여름에 잎의 잔잔한 구멍을 통하여 발산함으로 더위를 식혀준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우리도 시원함과 함께 가슴을 펴서 산소를 받고 탄산가스를 내어주며 깊은 호흡으로 생명을 교류한다. 잎으로 덮인 산과 숲의 생명력은 약물과 의술로 치료되지 않은 여러 병을 회복시키는 실례가 많거니와 그 생명력으로 나무는 크게 자라고 뻗어나 관상이나 목재로 훌륭하게 사용된다. 

 잎이나 나무는 자연에 그대로 순응한다. 항상 봄이나 여름이 아니다. 가을과 겨울에 대비하여 여름 동안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양식을 만들어 저장하는 가운데 성큼 가을이 다가온다. 날씨가 시원해지면 잎은 광합작용을 중지하고 양식과 엽록소를 만들지 않으면서 잎의 색갈이 빨강 노랑 또는 주황으로 바뀌어 보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주기에 우리는 단풍을 즐기고자 멀리 찾아가기도 한다. 이 아름다움은 추수와 저장을 알리는 잎의 황금기요 나무의 겨울양식이 준비되었기에 잎은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표시다. 일이 끝나기도 하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잎이 있으므로 무거운 나무는 눈과 얼음의 추위와 강한 바람에 넘어갈 수 있기에 잎은 나무를 위하여 물러 앉고자 있는 곳을 스스로 떠나거나 또는 밀려나더라도 항거 없이 내리며 미풍에도 날려 여기 저기로 흩어진다. 잎은 어느 곳에 앉든지 뿌리를 감싸주는 이불이 되고 자기를 썩히며 땅을 새롭게 하여 생명을 일으키는 준비를 한다. 잎이 없는 나무는 겨울 동안 저장된 양식을 소비하며 생명의 봄을 기다린다. 

잎이 없으면 나무는 건강하고 힘있게 뻗어갈 수 없지만 동시에 잎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지면 그의 생명은 다한 것이다. 잎은 나무에 붙어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생명의 주인은 말씀한다. 우리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생명이 일어나고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잎인 우리가 없이는 나무가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없기에 나무와 잎은 생명과 활동의 상관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Sunday, November 15, 2020

원수를 친구로 Turning Enemies into Friends

원수를 친구로 Turning enemies into friends  

첫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관의 의무관으로 1884년 9월 입국한 때 그 이전 100년 한국 카톨릭 역사는 다섯 차례의 박해로 수 천명이 순교한 터전이었다. 갑신정변에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알렌이 수술하여 회복시킴으로 그는 왕실의 신임을 받아 광혜원 병원을 세우고 참판이라는 벼슬을 받고 그 뒤의 혜론 의사와 언더우드도 이 병원에서 일을 하며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마포 선교사가 도착하여 선교와 정치가 연계된 것을 보며 정치에는 항상 찬반 세력과 변화가 있기에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으므로 선교와 정치는 독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치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민 사회에서 친한 친구로 지나다가 작은 일에 생각이 달라 서로 갈라지며 아이들까지도 희생을 당하는 경우를 본다.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목동 다윗은 충성을 다하였다. 왕이 우울에 빠지면 악기를 연주하여 회복시키고 이웃 나라의 공격으로 전쟁하며 왕과 군인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다윗이 적장을 죽이고 승리를 가져오자 왕은 그를 시위대장으로 삼았다. 그런데 전쟁에서 다윗이 사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민심을 알자 사울은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질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울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지금도 정치나 사회에서 흔히 목격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평화와 생명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자가 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갔지만 13년 후에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풍년 흉년을 잘 관리하였다. 각국 사람들이 양식을 사러 온 때 요셉의 형들도 있었고 이들이 서로를 알게 되자 형들의 놀람과 두려움은 당연하였다.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니 내가 형님들과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창50:20). 그들은 함께 뻗어가며 세월이 지나 인구 200만의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이 노예문제로 고통하던 어려운 때의 대통령이다. 남부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가 대부분이라 노예제도를 원하고 북부는 고용을 통한 공장 산업 중심이라 노예 철폐를 주장하는데 링컨은 성경에 근거하여 인권의 동등을 믿고 노예 철폐를 제창하였다. 많은 반대와 인신공격이 있었다. 그는 고릴라 같다. 배우지 못했다. 그는 남부의 대통령은 아니다 등이었다. 남부가 독립하려고 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은 가장 중요한 전쟁(국방)장관에 이전 검찰총장을 지낸 에드윈 스탠튼을 임명하고자 하다. 참모들의 반대가 많다. 링컨이 일리노이에서 변호사로 있을 때 선배 변호사 스탠튼은 그를 모욕적인 태도로 무시하였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를 존중하지 않은 것을 링컨도 안다. 링컨은 그러나 남북전쟁을 해결하고 난국을 극복할 적격자는 스탠튼이라며 임명하였다. 스탠튼도 놀라며 받으드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링컨이 저격을 당하자 목놓아 울고 임종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 있다”고 하였다. 비판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품은 관용이 이룬 역사다.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 (잠16:7), 원수를 사랑하라(마태5:44)는 주의 말씀이 평화와 생명의 길임을 보여준다.

                                사울왕이 우울할 때 다윗이 수금 연주로 그를 회복시킴

                                                     다윗이 블레셋 적장을 무너뜨림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함  

                                                        형들이 요셉을 대상에게 팔다

                                        이집트의 총리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주다

                            링컨이 그를 비평하는 스탠튼을 남북전쟁 장관으로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