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September 19, 2020

준비가 되어 있나? Are you prepared?

준비가 되어 있나? Are you prepared? 

2001년 9월11일 모슬렘 과격단체 알카에다 소속 19명이 보스턴을 출발하는 4대 비행기에 분승하여 두 대는 뉴욕 금융의 자랑이던 세계 무역관 둘을 아침 8시 45분, 그리고 18 분 후에 각각 치고 받아 불덩이로 만들고 셋째는 9시45분 미국의 힘 워싱턴 국방성 건물로 돌진하고 넷째는 승객이 정보를 알고 납치범을 제압하여 펜실베니아 들에 추락함으로 도합 2,996명이 죽는 미국의 최대 비극이 일어났다. 이 테러 집단은 미국의 이스라엘 후원에 대한 보복이라 공언하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미국이 그간 테러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의 공격이 제일 큰 건물의 기초는 흔들었지만 미국 기초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건물의 철강은 흔들었으나 미국인 결단의 철강은 굽히지 못한다”고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바로 이 날을 국가 봉사와 자선의 날로 정하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보다 폭넓은 자선을 행하는 일로 나아갔다. 일년 후 국토 안전부를 신설하고 테러방지, 국경안전, 이민정책, 재난대책을 새롭게 실행하며 군사 행동으로 알카에다를 약화시키고 주모자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 제거하여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서부 3개 주는8월부터200여 산불이 나서 말세적인 큰 산불로 발전, 수 만 에어커의 산을 태우고 30여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어 산불철이 되니 불길은 잡을 길 없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퍼지고 있다. 오랜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무와 풀은 불쏘시개가 되어 파티의 폭죽, 홈레스가 싸우다가 던진 불, 달리던 자동차 바퀴의 쇠가 돌에 닿으며 번쩍한 것 등에 점화되고 110도 고온에 강한 바람으로 삽시간 불길은 번지게 되었다. 소방서원과 헬리콥터가 동원되나 불길을 잡지 못한다. 1970년대와 비교하면 그 때보다 지금 건기가 더 오래 계속하고 산불은 75일 더 많고 규모가 더욱 커졌다고 한다. 이러다가 겨울비가 내리면 사태가 밀려와 동리를 덮기도 한다. 홍수 지역의 피해도 갈수록 심하여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홍수가 덮친다. 서부의 지진, 남부의 태풍, 중서부의 토네이도는 매년 강도가 높아진다. 이런 재난은 기후변화 때문이라 하지만 이를 막을 길이 없는 것이 과학과 기술의 한계다. 반복되는 자연 재난을 대비하는 길은 개인이 보험과 비상금을 준비하고 주거지를 정할 때 바다 경치를 즐기고자 산 언덕에 집을 짓고 강과 호수를 즐기고자 물가를 선택하는 것을 재고할 일이다. 

 코비드 19의 세계적 재난도 대책 없이 당하고 있지만 정책을 따라 개인이 대비해야 한다. 개인의 결단과 시행이 중요한 관건이다. 성경은 인류의 종말을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전쟁과 지진, 가뭄과 역병이 온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 그 날은 아무도 모르기에 평소에 이 날을 바라보고 대비하라 경고한다. 준비의 길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심판 받아 죽고 부활하여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 안에 살면 마지막 날의 어떤 환난 고통에서도 구원 받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린다. 바로 오늘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를 믿고 받아드리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World Trade Center NY
                                     
                                                          Al Qaeda Attack on WTC

                                                Freedom Tower on the site of WTC

                                            Houses on the mountain with ocean view

                                              Wildfires sweeping over all CA

                                               Jesus Christ returning as King of all

Friday, September 11, 2020

어디에서 잃었나? Where did you lose it?

어디에서 잃었나? Where did you lose it?

이민 초창기 교회는 지금과는 달리 몰려오는 이민의 당장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였다. 공항 픽업, 아파트 입주, 자녀 학교 입학, 직장 연결, 운전 교육 등등 목사가 분주하게 일을 하여도 손이 모자랐다. 소위 복덕방 목회를 잘 하면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모인다. 설교를 준비할 틈도 없이 주일을 만나면 타임 잡지를 들고 지난 주간 일어난 일을 말하며 스스로 목회의 성공이라 자부한다. 많아지는 교인을 돌보기 위하여 청빙한 부목사는 성경 말씀과 기도로 교인들을 훈련하며 그들의 냇적 필요를 채워준다. 얼마 후 부목사가 떠나는데 반 이상 교인들이 그를 따라 간다. 담임목사는 허탈감에 빠져 회의를 느끼며 목회를 접을 생각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로 하다. 목회가 무엇인가?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

선지자 엘리사 시대 학생들이 많아지니 학생들의 제안을 따라 지역을 옮겨 집을 크게 짓고 확장하기로 하고 학생들이 직접 나무를 자르고 집을 짓는다. 모두 열심히 일을 하는 중 한 학생이 강가에서 도끼로 나무를 자르다가 도끼날이 빠져 강에 떨어진다. 그것은 빌려온 것이다. 기쁨과 감격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도끼날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 소리는 나는데 나무가 잘라지지 않기에 보니 날이 빠진 것이다. 도끼는 날이 핵심이지만 일에 얽매여 그것을 점검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울먹이며 스승 엘리사에게 그것은 빌려온 것이라 한다. 내 것이 아니다. 목회나 삶의 본질은 내가 만든 내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맡겨진 것이다. 주인이 따로 있어 언젠가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만 아니라 어느 직업이나 어떤 삶에나 이런 일이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돈을 벌고 맡겨진 일을 하는데도 무엇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좋은 지역에 좋은 집을 마련하고 제일 좋은 자동차를 굴리며 성공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이것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걱정이 생기며 잠을 자지 못한다. 인정 받으며 만족스럽게 일을 하다가 은퇴를 하면서 모든 것을 뒤에 남기고 떠난다. 일과 동료 모두를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 같아 속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외로움을 가진다. 무엇을 위한 일이며 삶인가 기본 목적과 본질이 무엇인가 묻는다.

엘리사의 생도가 도끼날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많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그 때에 스승을 찾고 도움을 구한다. 어디서 잃었는지 알게 되자 엘리사는 한 나뭇가지를 그곳에 던지니 도끼가 떠 오르고 그것을 손으로 잡으라 한다. 새로운 삶과 사역이 펼쳐진다. 본질을 잃고 있는 곳에 던져진 나뭇가지가 무엇인지 말이 없지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잃어진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어 있으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며 모든 것을 잃었다.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어 우리의 교만과 시기, 소외와 갈등, 무지와 억압, 질병과 죽음 등을 현장 체험하며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생명의 길을 여셨다. 이 십자가가 우뚝 높이 서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잃어진 모습을 알고 그 나무 아래 서기만 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출발이 된다.

예수님과 노동 (Jesus and Labor)

예수님과 노동 (Jesus and Labor) (9/10/20)

9월 첫 월요일은 미국의 노동절이다. 노동절이라면 여름이 끝나는 날이라 많은 가족이 여행을 떠나거나 그러지 않으면 집에서 친지가 모여 바베큐를 하고 즐기며 이 날이 지나면 학교가 일제히 개학을 하기에 여름의 마지막 휴일로 생각한다. 사실 노동절은 1894년 미국이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쉬는 날을 주기 위하여 정하였다. 19세기에는 과히 미국의 산업혁명이라 할만큼 시카고를 위시해서 많은 곳에 공장이 세워지고 제조업이 크게 발전하여 일손이 부족하기에 하루 12시간 작업에 주 7일 돌아가기에 심지어 5살 아이도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안전 설비가 부족하고 임금은 매우 낮아도 그것이 삶의 기반이 되었기에 노동 조건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1894년 풀만 스트라이크로 30명이 죽게 되자 그 해 노동절이 생겼다.

사실 노동은 신생국가 미국을 강하게 하였다. 미국민 자체의 경제 생활이 향상되고 미국 제품이 세계로 뻗어나가며 미제라면 무엇이나 믿을 수 있게 되고 수요가 늘어나니 그것이 미국의 힘이 되고 그 힘은 바로 노동자에게서 온 것이라 노동은 신성하고 노동자의 자부심은 그만큼 강하였다. 노동에는 육체 정신, 기능 비기능, 전문 비전문직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결과로 인하여 자신과 남에게 각종 댓가를 준다.

사람은 태어나며 어떤 일을 하게 된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이들이 있으나 교육과 훈련, 이주를 통하여 보다 좋은 일을 찾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한 때 그가 사는 동산을 지키고 관리하게 했으나 타락한 후에는 가시의 아픔과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생산하게 하여 이를 노동(labor)이라 부른다.

예수께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며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한 것으로 안다. 목수는 희랍어(tektōn: τέκτων)로 손으로 일하는 자라는 의미로 주로 집을 짓는다. 예수께서 30세에 세상에 나타나 외친 첫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 것은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를 건설하는 새로운 형태의 목수로 온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는 고기 잡는 자, 세관에서 일하는 자를 불러 제자로 삼고 그의 가르침은 씨를 뿌리고 고기를 잡고 진주를 찾는 자, 포도원 일군, 추수할 일군 등 일하는 자를 말씀하였다. 특히 유명한 산상 설교 결론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어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시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였다. 그는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으로 안식일을 범한다는 고발을 받았으나 반문하신다. 그들의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고 건져내지 않겠는가? 평생을 마귀에 종이 되어 고통당하는 자를 풀어내지 않겠는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행하는 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 (5:17,19).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를 완성하고 7일에 안식하심으로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셨지만 창조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며 회복하는 일을 쉬지 않으신다. 타락한 인간 구원의 일은 끊임 없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천국을 건설하는 일이라 여기 성도들이 동참하도록 부르신다. 응하면 없어질 보상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보상을 얻게 된다.









Saturday, September 5, 2020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A Song of Ascents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A Song of Ascents (9/04/20)

지난 주일은 5개월만에 처음으로 성전에 가서 예배를 하였다. 아내가 시편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읽다가 감동을 받아 제안한 것이다. 팬데믹 현상으로 집에 머물면서 온라인 예배를 하는 것이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빠져 있다. 어디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집에서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전 예배로 목회자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 성도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로서 주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말 귀하다.

작년 8월 루마니아 선교여행을 하였다. 그곳 개신 교회는 예배 시간이 3시간 정도로 한 시간은 기도와 간증, 한 시간은 독창 중창 합창 등의 찬양, 그리고 한 시간은 말씀으로 되어 있지만 교인들은 한 사람도 주의가 흩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예배가 끝난 후에도 헤어지기가 싫은듯 서로 담화하며 즐거움을 나눈다. 다음 예배시간을 기다리다가 다시 모인다. 그곳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주일을 간절히 기다리다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집에서의 온라인 예배는 이런 감격이 빠지고 있는데 성전 예배에 참석하고자 일찍 준비하여 출발하는 마음이 흥분스러울 정도다. 40분 운전하는 동안은 기대와 소망으로 부풀어 주를 찬양한다. 성전 마당에 도착하자 마음이 설레고 주차장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멀어만 보인다. 마스크를 끼고 들어서자 환영을 받으며 체온 점검을 하고 예배실에 들어서는 것은 오래 떠나 있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엄마 품에 안기는 것 같은 포근함이다. 주의 임재 사랑이 그대로 가슴을 채워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 올라가던 것과 통한다. 시편 120-134는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전체 15편이 3편씩 다섯으로 나뉘어 지는데 각 3편의 첫째는 성전을 떠나 사는 삶의 고단함과 여러가지 고통을 말한다. 둘째는 성전을 향하여 출발하고 감격과 기대로 길을 가며 동료들과 함께 기쁨으로 노래하며 나아가는 장면이다. 셋째는 성전 마당을 밟고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예배하며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을 찬양하며 삶의 새힘을 얻는다. 다섯 번 반복하는 그 내용은 그들의 삶을 받쳐주는 기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종으로 고생하고 멸시를 당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에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고생을 하나 불만과 실망 속에 하나님을 떠나가지 않고 그들은 오히려 그를 잊고 살던 것을 뉘우치며 주를 향하여 눈을 든다. 그리고 하던 일을 멈추고 돌이켜 주의 전으로 나아간다. 어디나 하나님이 계시지만 성전은 그의 이름을 두시고 그의 눈이 살펴 보고 있는 곳이라 거기서 그를 기억하고 또 그들은 그의 기억하심을 받게 된다. 서로가 기억하고 만나는 즐거움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의 크고 놀라운 지난 날의 일을 현재화하고 그 일이 오늘도 일어날 수 있음을 붙잡는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고 지탱하며 뻗어가는 힘이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 올라가 함께 모여 예배하며 주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그것이 월요일부터의 우리 삶을 새롭게 하고 힘있게 함을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