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8, 2020

마지막 만찬의 감사Thanksgiving over the Last Supper

마지막 만찬의 감사Thanksgiving over the Last Supper 

 미국으로 이민 올 때 한국에서 가족 친지와의 마지막 음식을 나눌 때 무슨 기도, 어떤 말을 하였는가? 그런가 하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전쟁에 나가는 아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눈다면 어떨까? 미국이 자유인의 땅, 용감한 자의 집이기에 감사할 수 있을까?  

예수님 지상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온 때 그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을 원하였다. 제자 중 하나는 이미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고 다른 제자들도 몇 시간 안으로 모두 스승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과 함께 모였다. 제자들은 각자 자기가 높다고 생각하지만 예수께서는 종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다. 음식을 나누던 중에 주님은 떡을 들고 감사한 후에 떼어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고 감사한 후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 하신다.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식사가 끝난 후 주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시다. 주님은 기도하시다가 제자 유다가 인도하는 악당들에게 잡혀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 죽음을 당한다. 고통과 환난, 비참한 최후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찢길 몸, 쏟을 피를 들고 감사를 한다. 자기 생명을 내어주며 어떻게 감사기도를 할 수 있을까? 

유대인은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하고 음식을 먹는다.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24기도중 12번이 감사기도인데 10회는 음식을 먹기 전 감사다. 음식은 살기 위해 먹지만 그의 몸과 피는 죽지 않은 영생을 주는 참된 양식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들은 유월절 만찬으로 모였다. 이집트의 초태생 모든 남자와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밤에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음식을 먹고 있는 이스라엘 집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400년간 죽음같은 종살이에서 해방을 맞는다. 죽음이 지나갔기에 유월절이라 부르는 이 절기 만찬은 처음 유월절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새로운 능력의 삶을 시작하기에 가장 의미 있는 감사의 음식이다. 예수님은 이 만찬으로 앞으로의 새로운 유월절 곧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림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기 생명을 줌으로 세상에 온 목적 곧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감사하며 순종한다.  

이제 주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면 주께서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되고 동시에 그의 생명과 사명도 우리와 연합하기에 우리 삶을 통하여 주님이 나타나고 전파된다. 주를 모르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를 전하고 생명을 나누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기에 성도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주님을 전파할 것을 내다보며 감사한다. 

주의 몸과 피로 하나된 사람들은 모두 주의 사람으로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주님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주의 교회로 연결되어 모두 하나가 되고 그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것을 보며 감사함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 감사절 만찬을 나누며 이런 주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Saturday, November 21, 2020

나무와 잎 Trees and Leaves

                                            






 

나무와 잎 Trees and Leaves 

며칠 전 집 가까이 있는 프랫 삼림 보존 구역 공원을 찾아갔다. 짙은 숲을 이루었던 나무의 모든 잎은 떨어지고 벗은 몸이지만 호수에 비친 대칭의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나무는 잎이 떨어진 자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아물게 하며 새 봄에 다시 싹을 내기 위한 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보면서 나무와 잎을 생각하게 된다.  

따뜻한 봄기운이 오면 봉오리 속에 있는 작은 생명은 더 이상 갇혀 있을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고 나온다. 찬 겨울 휴식의 오랜 기다림을 지나 새로운 시작과 성장의 희망으로 부풀어 싹과 잎, 꽃을 피우며 찾아가는 우리에게 신기함과 생명의 힘을 더한다. 잎은 이산화탄소(탄산가스)와 물, 햇빛을 받아 광합작용의 부엌에서 영양이 풍부한 당분 음식과 에너지를 요리하여 나무에 공급한다. 잎이 푸른 것은 왕성한 광합작용으로 건강하다는 표시이며 나무를 옷 입히고 무성하게 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우리 생명을 위한 산소를 내어 뿜는다. 아마존을 세계의 허파라고 하는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산소가 세계를 살린다는 말이다. 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물은 소량이기에 뿌리가 빨아드린 과량의 물은 잎이 저장하다가 뜨거운 여름에 잎의 잔잔한 구멍을 통하여 발산함으로 더위를 식혀준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우리도 시원함과 함께 가슴을 펴서 산소를 받고 탄산가스를 내어주며 깊은 호흡으로 생명을 교류한다. 잎으로 덮인 산과 숲의 생명력은 약물과 의술로 치료되지 않은 여러 병을 회복시키는 실례가 많거니와 그 생명력으로 나무는 크게 자라고 뻗어나 관상이나 목재로 훌륭하게 사용된다. 

 잎이나 나무는 자연에 그대로 순응한다. 항상 봄이나 여름이 아니다. 가을과 겨울에 대비하여 여름 동안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양식을 만들어 저장하는 가운데 성큼 가을이 다가온다. 날씨가 시원해지면 잎은 광합작용을 중지하고 양식과 엽록소를 만들지 않으면서 잎의 색갈이 빨강 노랑 또는 주황으로 바뀌어 보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주기에 우리는 단풍을 즐기고자 멀리 찾아가기도 한다. 이 아름다움은 추수와 저장을 알리는 잎의 황금기요 나무의 겨울양식이 준비되었기에 잎은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표시다. 일이 끝나기도 하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잎이 있으므로 무거운 나무는 눈과 얼음의 추위와 강한 바람에 넘어갈 수 있기에 잎은 나무를 위하여 물러 앉고자 있는 곳을 스스로 떠나거나 또는 밀려나더라도 항거 없이 내리며 미풍에도 날려 여기 저기로 흩어진다. 잎은 어느 곳에 앉든지 뿌리를 감싸주는 이불이 되고 자기를 썩히며 땅을 새롭게 하여 생명을 일으키는 준비를 한다. 잎이 없는 나무는 겨울 동안 저장된 양식을 소비하며 생명의 봄을 기다린다. 

잎이 없으면 나무는 건강하고 힘있게 뻗어갈 수 없지만 동시에 잎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지면 그의 생명은 다한 것이다. 잎은 나무에 붙어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생명의 주인은 말씀한다. 우리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생명이 일어나고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잎인 우리가 없이는 나무가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없기에 나무와 잎은 생명과 활동의 상관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Sunday, November 15, 2020

원수를 친구로 Turning Enemies into Friends

원수를 친구로 Turning enemies into friends  

첫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관의 의무관으로 1884년 9월 입국한 때 그 이전 100년 한국 카톨릭 역사는 다섯 차례의 박해로 수 천명이 순교한 터전이었다. 갑신정변에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알렌이 수술하여 회복시킴으로 그는 왕실의 신임을 받아 광혜원 병원을 세우고 참판이라는 벼슬을 받고 그 뒤의 혜론 의사와 언더우드도 이 병원에서 일을 하며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마포 선교사가 도착하여 선교와 정치가 연계된 것을 보며 정치에는 항상 찬반 세력과 변화가 있기에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으므로 선교와 정치는 독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치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민 사회에서 친한 친구로 지나다가 작은 일에 생각이 달라 서로 갈라지며 아이들까지도 희생을 당하는 경우를 본다.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목동 다윗은 충성을 다하였다. 왕이 우울에 빠지면 악기를 연주하여 회복시키고 이웃 나라의 공격으로 전쟁하며 왕과 군인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다윗이 적장을 죽이고 승리를 가져오자 왕은 그를 시위대장으로 삼았다. 그런데 전쟁에서 다윗이 사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민심을 알자 사울은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질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울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지금도 정치나 사회에서 흔히 목격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평화와 생명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자가 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갔지만 13년 후에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풍년 흉년을 잘 관리하였다. 각국 사람들이 양식을 사러 온 때 요셉의 형들도 있었고 이들이 서로를 알게 되자 형들의 놀람과 두려움은 당연하였다.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니 내가 형님들과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창50:20). 그들은 함께 뻗어가며 세월이 지나 인구 200만의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이 노예문제로 고통하던 어려운 때의 대통령이다. 남부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가 대부분이라 노예제도를 원하고 북부는 고용을 통한 공장 산업 중심이라 노예 철폐를 주장하는데 링컨은 성경에 근거하여 인권의 동등을 믿고 노예 철폐를 제창하였다. 많은 반대와 인신공격이 있었다. 그는 고릴라 같다. 배우지 못했다. 그는 남부의 대통령은 아니다 등이었다. 남부가 독립하려고 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은 가장 중요한 전쟁(국방)장관에 이전 검찰총장을 지낸 에드윈 스탠튼을 임명하고자 하다. 참모들의 반대가 많다. 링컨이 일리노이에서 변호사로 있을 때 선배 변호사 스탠튼은 그를 모욕적인 태도로 무시하였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를 존중하지 않은 것을 링컨도 안다. 링컨은 그러나 남북전쟁을 해결하고 난국을 극복할 적격자는 스탠튼이라며 임명하였다. 스탠튼도 놀라며 받으드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링컨이 저격을 당하자 목놓아 울고 임종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 있다”고 하였다. 비판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품은 관용이 이룬 역사다.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 (잠16:7), 원수를 사랑하라(마태5:44)는 주의 말씀이 평화와 생명의 길임을 보여준다.

                                사울왕이 우울할 때 다윗이 수금 연주로 그를 회복시킴

                                                     다윗이 블레셋 적장을 무너뜨림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함  

                                                        형들이 요셉을 대상에게 팔다

                                        이집트의 총리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주다

                            링컨이 그를 비평하는 스탠튼을 남북전쟁 장관으로 임명

Tuesday, November 10, 2020

누구의 의견 (오피니언) Whose Opinion



누구의 의견 (오피니언) Whose Opinion (11/5/20) 

 역사상 유례 없는 대선이 끝났다. 팬데믹 한 가운데 국론은 양분되고 갈등과 대결이 심화하던 가운데 우편, 조기 또는 당일 투표로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였다. 투표는 자기 의견 표시다. 의견은 스스로 판단할 수도 있고 남의 의견을 참조하거나 또는 정당의 방침을 보며 결정이 된다. 의견 조성에 언론과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이 좋아하면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주택, 학교나 가족 의사, 자동차나 보험 등을 결정할 때 소위 리뷰라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한다. 의견은 어떤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전문가 또는 경험자의 판단이지만 이는 개인의 이해 관점 느낌 욕구 신념에서 나온다. 여론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모은 것이기에 정치인도 존중하고 따르며 투표에서 다수가 승자가 되는 것이 오늘 민주주의 사회다. 그렇다면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일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던 시대에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의 지동설을 말하다가 이단으로 몰렸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며 재판자리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 의견이지 사실이 아닌 것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현대 과학의 근거가 되기에 그 잘못을 알면서도 고집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 창조의 신비나 자연의 조화를 바꿀 수 있을까? 한 친구가 수년 전 직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다는 연락을 해 왔다. 수술하면 항문이 막히어 평생 주머니를 차야 할 것이라고 하니 의사의 말은 반반이라고 한단다. 함께 기도하고 맡겼는데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 의사가 이전에 반반이라고 한 것을 80/20으로 교정한다고 하였다. 그 말에 친구는 수술 받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대학병원을 찾아 갔더니 암의 흔적조차 없었다. 첫 의사의 오진인지 아니면 기도의 응답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나이 80이 되는 그는 감사하며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 사람의 판단과 의견이 그대로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과학자 정치인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지기에 남의 의견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자기 생각에 바른 길 같아도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있고 잘못된 것 같으나 생명을 얻는 길이 있다. 사람의 의견이 서로 다르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은 더욱 다르기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른 것이 하늘과 땅의 차이 같다” (사55:8) 하신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한다 (잠29:25). 누구 의견이 바른 것인가?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을 보고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나님이 없거나 죽었기에 저런 것이지!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존재나 의도를 결정할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사정이나 편리에 따라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며 낙태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체를 태속에 지을 때부터 알고 있다고 하신다. 아이가 태어날 때 남녀 구분을 하지 않고 그 아이가 자라나며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람은 생명을 위해 종교를 추구하지만 모든 종교가 동일할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Wednesday, November 4, 2020

역사의 주인 The Lord of History

 

역사의 주인 The Lord of History 

지난 10월12일(둘째 월요일)은 콜럼버스데이로 1937년 미국이 공휴일로 정하여 그가 1492년 10월12일 바하마 섬에 도착함으로 아메리카 개척과 발전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미대륙 발견은 콜럼버스의 해양 개척정신과 스페인 왕의 진취성이 결합되어 각자 부와 명성을 얻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진행된 탐험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날을 원주민의 날로 이름을 바꾸는 주와 나라가 일어난다. 콜럼버스가 도착함으로 바하마와 미대륙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는 길을 열었기에 정복자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원주민은 생명과 재산 모두를 잃은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과 나라의 사건, 이들의 연관성을 기록한 것으로 그것은 힘 있는 정복자가 자기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역사를 정복자의 관점이 아니라 정복당한 자의 입장에서 보자는 새로운 운동이 남미에서 일어났다. 이는 약한 자의 소리와 역할을 나타내는 해방운동으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고 콜럼버스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바꾸기까지 하며 누가 역사의 주역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실제 콜럼버스와 스페인 왕이 계획한 항해 목적지는 인도로 유럽에서 미지의 아시아로 통하는 길을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미대륙이 발견되고 미대륙을 통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청교도의 미국 도착도 마찬가지다. 섬나라 영국이 세력확장을 위하여 1607년 신대륙에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개척하고 꿈 있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였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지키면서 영국에서 박해를 피하여 제임스타운을 목표로 1620년 출발하였지만 도착한 곳은 제임스타운이 아니라 오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였고 그후 이들이 미국 독립운동과 건국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콜럼버스나 청교도의 항해는 그들의 목적에 비추어보면 실패라 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계획이나 실패, 우연을 넘어 보이지 않은 어떤 손길 곧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을 본다. 미대륙과 미국 역사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힘이 사람 밖에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건들을 묘사하는 역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것이 역사 시작이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자유를 행사하여 바로 자기 생각, 자기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떠날 뿐 아니라 사람사이에도 서로 대결, 투쟁하고 죽이는 죄와 실패를 연속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런 인간에게 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에게 복과 사명을 주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는 75세에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살고 100세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는 인간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통하여 자기 계획을 이루신다. 이스라엘은 큰 나라들의 정복과 포로가 되는 아픈 역사를 경험하는 가운데 역사의 주인 행세하던 정복자들은 사라지고 뒤로 물러 앉는다. 하나님은 미약한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은 약함과 실패로 보이지만 그를 부활시켜 죄와 죽음 아래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의 복을 얻는 길을 여셨다.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의 박해와 투옥, 죽임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시고 박해자 로마를 교회 확장의 도구로 만들며 귀양 중인 죄수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장차 역사가 어떠한가를 보여주신다. 역사(History)는 바로 그분의 이야기(His Story)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목적을 보면서 힘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청교도와 원주민이 함께

                          바벨탑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옥중에서 서신을 쓰는 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