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8, 2022

희망의 기대 Hopeful Waiting

희망의 기대 Hopeful Waiting (11/26/2022)
감사절에 많은 사람이 여행을 하며 가족이 함께 만나 즐거움을 나누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진다. 1년 동안 감사한 일 또는 가족 개개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나눈다. 지난 3년 동안 역사에 유례 없는 코비드 19 역병으로 세계 모든 나라와 단체가 활동과 접촉이 제한되고 위축될 뿐 아니라 세계인구 10분의 1 감염에 이들 100분의1에 해당하는 662만이 사망, 미국에서는 감염 980만에 사망 109만으로 그 두려움과 아픔을 직간접으로 겪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과 기대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자들 덕분에 백신이 개발되어 바이러스확산을 저지하고 또 치료제가 나와 회복이 신속하니 감사하다. 대역병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백신과 치료제 개발은 위기에서도 희망으로 기대한 결과이기에 감사하다. 이제 두려움을 벗어나 가족과 단체들이 모일 수 있음도 감사하다.
어느 시골아이는 첫돌이 되기도 전에 폐염에 걸려 숨을 몰아쉬었다. 60년 전 모든 면에 열악한 시절 엄마가 아이를 엎고 뛰어 도시 병원으로 가서 입원하고 치료를 받는다. 밤중에 숨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긴급요청 대량 산소공급으로 회생하여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 감사하다. 엄마의 사랑과 희망의 기대, 병원 혜택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 하나님 은혜와 어린아이 속에 있는 타고난 생명의 힘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감사하다. 태어난 삶은 살도록 설계되고 살도록 기대되고 있어 감사하다. 
희망이 없으면 기대할 것도 없다. 일본에서 플랜75라는 영화가 나와 물의와 함께 호응을 받고 있다. 고령화 일본이 2025년에는 국민 5분의 1이 후기 고령이라는 75세가 되어 생산력은 없으면서 의료 후생비로 국가에 부담이 된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택하라는 권고를 받고 죽음을 신청하면 위로금을 주어 마지막 온천욕 여행을 하고 죽게 한다. 성과가 좋은 것을 보며 정부는 플랜 65를 계획하며 다음에 당신은 어떠한가 묻는 영화다. 사람이 쓸모와 기대가 없을 때는 폐기처분 되는 도구와 같은 것인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 문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성경에서 지옥에 떨어진 한 부자가 고통 속에서도 물한방울 허락되지 않고 가족이 그곳에 오지 않게 하려는 소원도 말살되는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곳이다. 또한 희망의 기대가 없는 곳은 지옥과 같다.
오늘 세상에 희망을 가지고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람이 많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분위기가 분파와 대립, 혐오를 일으키며 생명의 활기를 박탈하고 있는 가운데 참 희망의 기대를 가질 수는 없을까? 성전에서 섬기던 고라 후손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는 놀림과 박해를 당하며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아 낙담하고 불안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희망의 기대로 바라보며 그의 도우심을 확인하고 감사와 찬양을 한다. 
지난 11월20일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크리스마스까지는 그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이라 한다. 바이러스를 코로나(왕관)라 부르며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죽음과 두려움으로 덮었지만 생명의 예수를 왕으로 모시면 희망과 생명을 얻기에 그가 내게 오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기다리는 자를 만나주시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삶의 활력회복(Resilience)을 기대한다. 








Tuesday, November 22, 2022

감사의 샘물 Spring of Thanksgiving

감사의 샘물 Spring of Thanksgiving 
감사절이 오면 청교도가 처음 지킨 감사 잔치를 생각하게 된다. 영국의 개신교 박해로 화란에 피신하였던 청교도들이 미국 새로운 대륙을 자유의 땅으로 바라보고 1620년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하여 험난한 대서양 풍파를 해치고 66일만에 6인치 눈이 덮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였다. 정찰대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땅 플리머스에 정박한 것이 1620년 12월20일, 혹독한 추위 속에 크리스마스날 102명은 살 집을 지으며 새 삶을 시작하였다. 겨울을 지나며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질병으로 반수가 죽고 남자 22명, 결혼 여자 오직4명 (18명중), 그리고 자녀들 25명이 살아남았다. 상상하기 어려운 비참한 첫 겨울이었다. 고통의 시련을 겪는 중 새봄이 왔다. 이 지역은 원주민이 씨를 뿌리는 곳이라 3월에 대표 3인이 침략자 정착민을 찾아와 함께 살도록 평화를 약속하고 씨를 뿌리고 농사를 하도록 도와 주었다. 가을 추수 때가 되어 청교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원주민의 친절과 도움에 감사하여 잔치를 열고 원주민 90여명이 참석한 큰 행사를 3일간 진행하였다. 바다의 고난과 겨울의 아픔은 그것으로 기억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수확은 이것으로 인정되며 감사가 넘쳐났다. 
하나님의 택한 나라요 도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이 안정된 형편에서 하나님을 떠나고 그 땅의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바벨론에 멸망할 것을 보며 예레미야는 눈물로 호소하고 경고하였다. 지도자는 그를 배신자로 보고 학대하며 때리고 감옥에 넣고 하는 가운데 나라는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그의 고통과 재난은 쑥과 담즙처럼 쓰고 아파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된다”고 애가로 한탄한다. 그러나 그와 그의 백성이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라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하며 아침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를 자기 기업으로 바라보았다 (애가3:19-24). 그것을 기억하면 삶의 의미를 잃지만 이것을 생각하면 힘과 소망이 일어나고 감사가 샘물이 됨을 본다. 슬픔이나 감사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것과 이것? 무엇을 기억하고 생각하는가 함이 중요하다. 
요셉이 꿈꾸는 자로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 이국 땅 남의 집 종이 되고 무고한 고발로 감옥에 갇히고 고난의 삶을 살 때 그것을 기억하면 얼마나 증오와 좌절이었을까? 감옥에 있는 동안 그가 풍년 흉년을 보여주는 왕의 꿈을 해석하고 현명한 양곡정책을 제안하자 왕은 그를 총리로 세웠다.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나며 그는 이것을 생명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알게 되자 마음에서 감사가 솟구쳤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행 불행의 삶과 관계가 달려 있다. 그것으로 미워할까 이것으로 용납하고 평화를 가질까?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기회를 상실한 그것을 기억하면 상심이요 낙담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매일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새롭게 체험하면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솟아 오르고 주의 성실하심을 찬양하게 된다. 이번 감사절은 그것을 기억하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운 이것을 마음 깊이 감사하며 기뻐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Tuesday, November 15, 2022

한 시간의 여유 One Hour More Space

한 시간의  여유 One Hour More Space(11/12/2022)
전기를 아끼고 일광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일광절약시간에 대한 많은 반론이 있다. 시계를 한 시간 당기고 늦추면서 몸시계에 혼란이 생겨 삶의 리듬이 깨어지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거나 배고픔이 일찍 오고 종일 피곤을 느낀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 일광절약시간 해제 첫날, 보통 잠자는 시간에 잠을 자고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면서 셀폰을 여니 한 시간이 뒤로 갔다. 시계대로 하면 한 시간 더 잘 수도 있지만 충분하게 잤기에 일어나 평소처럼 말씀묵상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도 시간이 넉넉하여 글을 쓰는 시간의 여유도 있었다. 거리가 먼 교회로 출발하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는 준비가 되고 길에서 여유를 가지고 운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분초를 다투는 일에 매여 바쁘다로 표현되는 현대의 삶에 주어진 여유의 한 시간, 60분, 3600초는 쫓기지 않고 여러 일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시간 여유로 25시간같은 하루가 나를 푸근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이 감사였다.
삶에 이런 여유가 요구된다. 셀폰은 일상생활에 필수품이지만 셀폰마다 저장공간이 있다. 여러 프로그램의 앱 자체가 차지하는 공간이 있지만 기억할 사진 비디오가 자리를 많이 점령하고 주고 받는 카톡이 또한 그러하다. 때로는 더 이상 공간이 없다는 신호가 온다. 소장된 내용을 검토하여 보전할 것과 지울 것을 구분하여 지울 것을 지우고 여유공간을 만들어야 그 자리만큼 다른 자료를 받을 수가 있고 통신도 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발전된 기술이라도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전화기도 일을 하려면 여유를 요구한다. 
고속도로에서 충돌 사고가 자주 일어나기에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하여 안전거리라는 것이 있다. 갑자기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앞차와 충돌하지 않고 차를 안전하게 멈출 수 있는 거리로 미국에서는 ‘2초 거리’라 한다. 앞차가 통과하는 어느 지점을 보고 그곳까지 가는데 2초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둘을 헤아리는 2초 거리를 지키면 속도가 40마일이든 70마일이든 충돌하지 않고 차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초 거리는 운전의 여유다. 
인간관계에서 없으면 좋을 갈등과 불화가 참으로 많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것으로 번지면서 걷잡지 못하다가 분쟁으로 번지고 결국 분리하는 일이 생긴다. 부부관계나 공동체에서 보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나? 누구나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 있어 자기의 생각, 의견을 말하고 용납되기를 원하나 상대가 그것을 받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발하거나 다른 의견을 강하게 제시할 때 충돌이 일어난다. 
평화의 주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 기준과는 달리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손에서 온다. 인간관계에서 진리의 근본이 아닌 사소한 문제에 대한 의견갈등은 상대방의 이기적인 자존심으로 이해하고 그를 존중하는 주님의 겸손을 가지면 어떨까? 상대에게 즉각 반응하지 않고 ‘2초 거리’를 적용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어떨까? 누구나 말을 하다가 웃을 일, 화날 일이 있지만 어떤 이는 다음 날 아침에 웃음이 나오고 화가 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하루, 한 시간은 못되어도 2초만의 여유를 가져도 불화를 줄이고 소원하는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Saturday, November 5, 2022

기도 응답 Answer of Prayers

기도 응답  Answer of Prayers (11/5/2022)
누구나 소원이 있지만 그것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경우에는 자기보다 능력 있는 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가족이나 동료 직장 상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기에 초월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로 자기 소원을 아뢴다. 많은 신이 존재하지만 사람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하여 자기의 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기도할 때의 응답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또는 시간이 걸리는 것도 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다. 부모가 자식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이상으로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녀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어떤 사람은 지혜와 부귀 영화를 구하였더니 그 모든 것을 응답 받았다고 한다. 감사한 일이다. 때로는 오래동안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있다. 응답은 응답하는 이에게 달렸기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 그의 뜻이라면 그것도 감사하게 받아드릴 일이다.
우리가 소원하는 바가 있듯이 하나님이 소원하는 바가 있다. 그는 소원을 스스로 이루신다. 그가 천지를 만드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코에 입기운을 불어넣어 자기 형상이 되게 하셨다. 이후로는 땅에 사는 자기 형상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이루시려고 그에게 자기 소원을 알리신다. 하나님의 기도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자기 뜻을 따르는 자가 복을 받아 번창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이 되기를 바라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다. 가족과 친구가 많은 고향에서는 이루기 힘든 것을 알기에 그의 집을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이 대신 함께 하며 자기의 소원을 이루게 하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큰 일을 하였지만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과 축복을 이스라엘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기 원하여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 일을 하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하였다. 가난하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고 병들고 어려운 자를 회복시키며 온전한 생명을 누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그 일을 맡기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예수께서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를 통하여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자들을 사랑하신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그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알고 채워 주신다. 그리고 그의 소원을 알리신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그가 인도하고 채우신다. 어떤 이는 평생 주께서 인도하고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 살았다. 미국에 오는 것이나 교회 목회를 하는 것도 스스로 원하여 원서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였다. 그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유익을 위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며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개인이 자기 소원을 기도로 응답 받고 뻗어가 잘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소원이 나를 통하여 응답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소원과 요구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Friday, November 4, 2022

만나고 싶어요 Willing to meet you

창세기 28:10-13 만나고 싶어요 (11-8-2022 시카고 기독교 방송 은목시간)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멀리 있는 친구 생각이 난다. 카톡으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여도 마음이 차지 않아 옆에 있고 싶어 찾아간다. 사랑하기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대화하고 싶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자 찾아 오신다.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추적하실 정도로 같이하며 우리를 만나신다. 우리가 어떤 형편 어느 곳에 있으나 상관 없이 우리를 찾아와 만나신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주께서 나를 살펴보시고 네 앞뒤를 둘러 싸신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음부에 내려가도 바다 끝에 가서 있어도 밝은 낮이나 캄캄한 훅암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추적하듯 찾아와 나를 만나신다고 고백하다. 다윗은 그를 잡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을 피하여 요새에도 숲에도 굴에도 심지어 이웃나라 블레셋에 갔다. 사울은 추적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따라가 그를 만나고 그를 보호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자 찾아와 만나시는 몇 실례를 보고자 한다. 
야곱을 만나심이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자 형이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한다. 두려움이다. 홀로 낯선 길을 가는 것이 모험이요 외로움이다. 광야에 밤이 되어 돌을 베개하고 누웠는데 하늘이 열리더니 사닥다리가 내려와 연결되고 그 위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러 오셨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를 축복한다. 네 누운 땅을 주고 네 자손은 번창케 하리라 하신다. 야곱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전혀 몰랐다. 더욱이 두려움과 외로움에 눌려 있는 그를 만나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형이 따라오지 못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오시어 야곱을 만나 주신 것이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 하고 베고 자던 돌을 제단으로 삼았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 자기 하나님이 되었다. 거짓과 술수가 가득한 야곱이지만 있는 그대로 만나주시고 복을 주신다. 그후 야곱은 어느 때나 벧엘에 오면 거기서 만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삶의 방향과 힘을 얻는다.
모세를 만나신다. 모세는 태어나자 곧 버림 받았지만 애굽 왕의 공주가 그를 발견하고 왕궁에서 왕자처럼 양육하였다. 애굽의 모든 학문과 무술을 모두 다 익혔다. 억압 받는 자기 백성을 돕고자 하다가 살인자가 되어 멀리 도망하여 애굽인이 천대하는 양치기가 되어 40년을 보내다. 영화와 희망은 사라지고 좌절과 체념 가운데 산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가시덤불에 불이 붙었으나 타 없어지지 않는 이상한 광경속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고 만나 주신다. 모세가 처음 만나는 하나님이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으로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라 한다. 애굽에서 종 생활하는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만들기 위하여 찾아와 만나시고 그 일을 이루신다. 체념 속에 있는 80세 모세에게 새로운 희망과 힘을 주시고 앞으로 40년간 사명을 수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만나시면 어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만나신다. 선지자 중에 그만큼 능력을 행한 자가 드물다. 3년6개월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대결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인 것을 백성에게 확인시키고는 바알 선지자를 모두 제거 하였다. 죽은 선지자들을 양육하고 후원하던 왕비가 이 소식을 듣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두려움으로 도망하여 가다가 나무 아래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곳까지 주께서 따라가서 그를 어루만지며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고 길을 가게 하였다. 엘리야는 더욱 도망하여 산의 굴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헛된 것 같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주를 믿는 선지자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다는 처절한 생각이 그를 엄습하였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만나신다. 어찌하여 굴에 숨어 있나? 밖으로 나오라 하시더니 그에게 힘과 할 일 사명을 주신다. 엘리야의 영적 근육이 새롭게 살아나고 엘리사를 제자로 선택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랑하여 만나고 받은 사명을 이룩하게 하시다가 마지막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데리고 가신다. 주와 함께 영원히 같이 하자는 것을 보여주신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갈릴리 바다에는 평생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중 시몬이 하루 밤, 고기를 잡는데 밤새껏 애를 썼으나 한 마리 잡지 못한 빈 배 빈 마음 허탈 속에서 그물을 씻고 있다. 주께서 그를 찾아와 만나시다. 배를 빌려 타고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는 시몬에게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한다. 말씀 따랐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주님은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쓰시겠다 하신다. 주께서 만나심은 있는 그대로 만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과 소망을 주시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시몬은 베드로가 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하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교회의 반석 같은 기초를 쌓았다. 할렐루야
한 사람 더 보면 바울이 된 사울이다. 사울은 바리새인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척결하는 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믿는 자를 박해하는데 앞장 섰다. 그는 교만하고 교만하여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다메섹 기독교인 박해를 책임지고 그곳에 가까이 가는데 갑자기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치자 그는 눈이 멀게 되어 땅에 엎드러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는가? 누구이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시며 주께서 정면으로 그를 만나시다. 그의 교만은 꺾이고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3일만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안수를 받으니 눈의 비늘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고 어둠에서 빛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의 모든 교만과 이론은 뒤집어지고 주의 손에 붙잡힌 주의 사람이 되어 소아시아와 구라파에 복음을 전하는 주의 그릇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주께서 각종 사람을 만나시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외로움, 좌절과 어둠. 포기 상태에서 만나 소생시키신다. 새로운 사람으로 일으켜 주의 일을 힘있게 하게 한다. 오늘 나는 어떠한가? 주께서 찾아오시어 나를 만나 주신 때가 있는가? 내게는 내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밤인 때 부활하신 주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 주셨다. 주님을 보는 순간 나의 모든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과 생명으로 채워져서 새로운 소명과 사명으로 생명 구원 사역에 삶을 더욱 헌신하게 되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감사하며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나를 만나 주신 주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라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신다. 나를 사랑하여 오늘이라도 찾아오시는 주님 만나기를 기다리며 주와 함께 걸어가고 사역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Tuesday, November 1, 2022

항상 개혁 Reforming Always

항상 개혁 Reforming Always (10/29/2022)
시카고지역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변화를 즐기지만 금년 가을은 여느 때보다 단풍이 더욱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변화는 새로움을 주지만 사람은 현상 유지를 원하여 변화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으나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은 자신도 부인할 수 없다. 
국가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총리를 바꾸고 바꾸다가  사상 처음 유색 인도인을 선출하고 침체한 경제에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현 대통령을 3선 선출하여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지만 독재와 억압의 장기 체제는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조직체인 교회도 그러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가 확장되며 많은 박해 속에서도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박해의 중심이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결국 국교로 만들었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안정되며 로마의 세력을 힘입어 로마교회는 세계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 수장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교회 수장과 정치 황제는 권력으로 대립 또는 조화를 이루고 교회는 수장의 권위와 전통을 고수하며 특정 특권을 가지는 성직을 매매하는 일도 성행할 정도였다. 
독일 한 지역의 성직을 구입한 이는 필요한 돈을 위하여 면죄권을 가진다는 수장과 협상한 후 면죄부 판매권을 받았다. 죄의 사면 면죄는 선행으로 되며 선행이 죄의 형벌보다 많아야 한다고 하였다. 순교자는 순교 자체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 얻기에 그의 평생 선행은 사용되지 않고 공덕으로 적립되기에 이 공덕을 얻으면 그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것이 면죄부의 근거다. 면죄부 판매자는 개인만 아니라 그의 부모가 지옥에서 고통하는 소리를 흉내 내고는 면죄부를 사는 대금이 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그는 연옥에서 낙원으로 옮겨간다고 하며 인기를 모았다. 
윗텐베르그 대학 성경교수며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고 있기에 면죄부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가를 토론하고자 95개조를 만들어 1517년 10월31일 게시판으로 사용되는 대학교회 정문에 부쳤다. 11월1일 만성절을 지키고자 각지에서 모여온 순례자들이 이를 읽으며 그 내용이 퍼지면서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개혁운동이 되고 스위스에서 쯔윙글리 프랑스에서 칼빈이 이에 합세하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핵심 진리가 무엇인가를 밝힘으로 개신교회의 바탕을 확립하였다.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께 영광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정체하지 않고 항상 개혁하는 교회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은 스스로 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를 고백하고도 여전히 자기중심이며 주께서 잡혀갈 때 주를 부인하고 도망하고 주의 부활 후에도 두려움으로 문을 닫고 숨어 있었지만 부활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함으로 변화를 받아 두려움을 벗어나 문을 열고 나와 반대와 박해에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였다. 개혁의 동력은 바로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역사다. 
오늘 교회는 어떠한가? 개혁과 변화가 요구되지 않는가? 초대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초창기 이민교회의 열정과 감격이 있는가? 개인의 신앙과 삶에도 항상 새로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날마다 성경말씀과 성령충만으로 삶에 힘과 감격이 넘치고 주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교회와 교인이 사회에 복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