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3, 2018

소수의 사람에게 Not to Many but to a Few


10:38-43 소수의 사람에게 Not to all but to a few (4/22/18 주일)
미네소타 역사에 기록을 깨는 4월의 폭설과 얼음으로 우리 교회 역사에 처음으로 지난 주일 예배를 모이지 못할 정도의 긴 겨울이 이제 지나듯 따뜻한 햇빛이 비치자 며칠 사이에 봄이 오는 것 같다. 봄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나? 날이 따뜻해지고 눈과 얼음이 녹아내린다. 입는 옷이 가벼워지고 밖에 나오는 사람이 많아진다. 죽은 것 같은 나무가지에 생명의 기운이 오르고 싹이 나오는 준비를 한다.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 이제 죽음 같은 어둠의 겨울이 지났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예수께서 겨울 같은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아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살아나신 그가 나타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40일을 계시면서 사람들을 10번이나 따로 따로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가 살아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되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몇 몇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 한다.
1  우리가 만일 주님 입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였다면 누구에게 나타나 자기를 보이고 싶겠나? 남의 집 종으로 학대를 당하며 고생하다가 나중에 그 집을 빠져 나와 인생에 성공을 하였다면 누구에게 자기를 보이고 싶겠나? 암행어사 출두요!! 하면서 자기에게 어렵게 한 사람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지 않겠나? 예수님 경우 재판장 빌라도가 심문하며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군중의 소리에 못 이겨 그를 처형하였으니 그가 살아나면 먼저 빌라도와 유대지도자에게 나타나 그들을 처단하려 하지 않겠나? 우리 같으면 그럴 생각을 가질만 하다. 주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난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무덤에 군인들을 파수병으로 세웠다. 무덤을 황제의 도장을 찍은 것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번개 천둥이 일어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내다. 군인들이 죽은 것 같이 엎드러져 정신을 잃다. 무덤은 비어 있고 시체는 없어지다. 그들이 그 사실을 유대 지도자에게 보고하자 그들에게 돈을 주며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하라. 만일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한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곳에서 전파하는데도 그들이 거짓을 말한다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오지 못한다. 예수께서 유대지도자나 로마 관료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난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시다. 이전 처럼 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지 않았다. ? 여전히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부활한 주님을 보아도 믿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예수를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 붙이고 그를 죽인 원수들이 부활한 예수라면 그들이 변하여 받아드릴 것 같나? 호화롭게 살고 있는 집 앞에 나사로가 얻어 먹는 거지로 있다. 둘 다 죽었다. 나사로는 낙원에 부자는 고통스런 불꽃의 지옥으로 가다. 그가 고통 중에 아브라함 에게 부르짖는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속에서 괴로워 하나이다. 대답은 그럴 수 없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자기가 있다. 그러면 나사로를 우리 집에 보내어 여기 오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이 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면 들을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 가도 듣지 않는다 (16:31). 죽은 자의 말이라고 듣지 않는다.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살아 났을 때 유대인은 그의 말을 듣기는 커녕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신 산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28:17). 주께서 살아나신 모습을 많은 사람께 보여 준다 해도 군중은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늘 호산나를 외치다가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것이 군중이다. 예수께서는 지상 사역하시던 때나 지금 부활하신 후라도 군중에게 자기를 맡기지 않으신다. 친히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신다 (2:25). 이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가 속에 없다.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심문하다가 왕으로 무엇을 하는가 묻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니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18:38) 비웃으며 관심도 없어 한다. 정의와 법을 대표한다는 로마의 총독이 그렇다면 일반 사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였지만 다시 그를 십자가로 몰고 갈 것이다.

2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부활 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몇몇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10:41) 주님은 소수의 사람에게 부활하신 자기를 나타내시었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의미를 가지나?
1)이 소수의 제자들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3년간 주와 함께 다니면서 교훈을 듣고 배우고 사역과 큰 능력의 이적으로 훈련 받았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이들은 실망하고 좌절할 뿐 아니라 두려움에 눌려 있었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 주께서 부활하시어 이들을 다시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주의 구원과 생명 사역은 이 제자들을 통하여 이어질 것이다. 이들이 주저 앉거나 사라지면 주의 사역도 진행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먼저 이들에게 자기가 죽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살아 있음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인가 환상인가 생각하기에 살과 뼈가 있음을 보이고 손과 발, 옆구리의 못 자국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한다. 죽음이 최후의 원수로 군림하지만 죽음은 예수의 부활로 정복된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로 가신 이유를 알게 하신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예수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것을 확신시킨다.
2)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 아니라 함께 음식을 나누다.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자들이라 한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시어 말씀을 나누다가 해가 넘어가자 그들의 제안에 따라 함께 여관에 들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다 (24:30).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나타나시어 놀라고 두려워하는 그들을 안심시킨 후 먹을 것이 있는가? 생선 토막 드리니 그 앞에서 잡수시다 (24:43). 제자들이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가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던 때에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게 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하고 그들이 육지에 나오니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서 조반 먹으라 (21:12).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가까운 관계의 친구라는 것을 말한다. 미국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서 공부 또는 일을 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누구와 같이 음식을 먹나? 생일 잔치에 누구를 초청하고 싶은가? 누구와 가까이 하고 싶은가? 내가 74년 공부하러 와서 식사 시간 되면 자주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같이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다. 같이 음식을 먹던 한 학생이 감사절에 버지니아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다. 나를 친구로 받아 준 것이다. 그 집을 방문하여 함께 며칠을 지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지금까지 학장 자문 위원, 모금 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음식 먹으면서 친구가 생긴 결과였다. 주께서 사역하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같이 음식을 잡수시다. 배가 고파서보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면서 그들과 가까운 사랑을 나누심이다. 그러면서 그들을 훈련시키신다. 그들이 부활의 증인인 것을 확인시킨다.
3)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다른 몸을 가지신다. 살과 뼈가 있지만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문을 닫고 있어도 중간에 들어오신다. 함께 음식을 잡수신다. 그리고 또 사라 지신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알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두려움에 있는 것 아시고 찾아 주신다. 의심과 문제가 있는 것 아시고 만나 풀어 주신다. 내가 항상 같이 있으리라 약속하신다. 주께서 함께 하심을 확인시킨다. 주님 살아 계신 때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더욱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염려가 있겠나?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 중에 함께 하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다 (18:20). 주께서 함께 하시니 힘이 생긴다. 주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니 제자들이 힘이 생긴다. 나가서 주의 부활을 말하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어 온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다.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니 듣는 사람 가운데 3000 명이 주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 집에 초청을 받아 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오늘 본문을 말씀한다.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한다. 주님은 종족 차별 하지 않음을 알게 되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다. 주께서 함께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베드로의 제자 이그나시우스가 살아 계신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로마 황제가 그를 잡아 심문하고 고문을 한다. 이그나 시우스는 자기를 테오포러서(Theophorus)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자라는 뜻 이라며 그는 하늘과 땅 바다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를 믿고 전한다고 하다. 로마 황제만 아니라 온 세상이 내가 전하는 복음에 반대하여도 내가 모든 세상을 대항한다. One against all. 요한의 제자 폴리갑도 잡혔다. 나이가 많다. 왜 그 나이에 어렵게 죽음을 당하려 하나? 지금이라도 예수 이름을 부인하라 하자, 내 나이 84가 되도록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은 주님을 내가 지금 모른다고 하겠나? 나를 어서 주께로 보내 주시오. 죽음을 자청 하였다. 세상이 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시기에 담대하게 죽음도 택하였다. 있는 곳 가는 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전한다.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4)부활하신 주님은 자기가 함께 하던 사람 외에 자기를 반대하던 자로는 한 사람 사울에게 나타나 보이시다. 그는 예수를 믿고 그의 부활을 전하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 서고 살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감옥에 넣고 죽이기 시작하다. 그가 그 일을 하고자 다메섹 으로 간다. 다메섹 교인들이 자기들의 생명과 복음을 위하여 물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주님이 햇빛보다 밝은 빛을 그에게 비치며 나타나자 시력을 잃고 땅에 엎드러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나?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는 부활의 주를 만나고 그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어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려고 하던 다메섹에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바울과 일행이 나중 데살로니 가에 가니 사람들은 그를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 (17:6), 천하를 뒤집어 엎는 자가 왔다고 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의 생명이 임하면 세상을 뒤집어 엎는 힘이 생긴다. 무엇 보다 주의 생명과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엎는다. 주를 반대하던 사울을 그대로 두면 생겨나던 주의 교회가 생존에 위협을 당하기에 그를 뒤집어 반대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 일을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는 오순절 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 한다.
5)부활하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택하신 소수의 사람에게 자기를 보이시고 확인 시켜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소수를 훈련하여 다수를 구원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위하여 아브라함 하나를 선택하고 그와 후손을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하시다. 소수 통하여 큰 일을 하신다. 기드온이 미디언과 전쟁할 때 군사를 모으자 32,000명 젊은이가 모였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으니 두려워 하는 자를 돌려 보내라 하자 22,000 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한다. 강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300명을 골라 부대를 만들다.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떼처럼 많고 낙타는 해변 모래와 같이 많으나 300명으로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창조적 소수로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주께서 택한 열두명으로 시작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 아직도 믿는 자는 생명을 가진 소수다. 우리가 그에 속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소수를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복을 전하여 주를 믿게 한다. 생명을 보고도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죽음과 정죄를 받게 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티에스 에리오트 영국 시인의 장편시 첫 머리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대학 시절 이 시를 읽으면서 왜 4월이 가장 잔인한가? 이해를 하지 못하다. 많은 해설을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한참 있다가 이해를 하게 되다. 4월은 죽은 가지에 생명이 올라온다. 겨울 동안은 모두가 잎이 떨어지고 죽은 것 같이 보인다. 4월 봄이 되자 생명이 나타난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뚜렷이 갈라진다. 살았다 죽었다 나누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산 것은 북돋우고 죽은 것은 잘라 불에 던지는 것은 가장 잔인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힌다. 망각의 눈으로 덮고 따뜻한 겨울을 지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이 있다. 주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부활하여 일어난다. 그런데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죽음에 남아 있다. 생명과 죽음이 구분되는 것이 잔인하다. 모두 같이 무덤에 있다가 한 쪽은 영생, 한 쪽은 영벌로 갈라지는 것은 가장 잔인함이다.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주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인이나 빌라도의 심령은 여전히 생명이 없는 겨울의 황무지다. 엘리옷이 시를 쓴 1922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생명을 외면하는 황무지의 삶을 살고 있다. 생명이 풍성한데 죽은 황무지는 잔인한 것이다. 예수 부활 증인은 겨울의 황무지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을 가져오는 일을 한다. 받아드리면 생명이요 거절하면 여전히 죽음의 황무지다. 오늘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나?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그 생명과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소수에 포함 되어 있나? 아니면 아직도 그 생명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을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결정할 그런 형편에 있나? 이 생명의 계절에 황무지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는 주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기를 기원한다.

동영상은 www.kpcm.org

죽기를 기다렸다가 Waiting Until He Dies


요한 11:3-14 죽기를 기다렸다가 Waiting Until He Dies (4/21/18 토요)
마리아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주께서 그 가족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또한 주의 사랑을 알고 있다. 사랑하시는 자라고 한다. 5절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한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도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라고 한다. 주의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는 복되다.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바로 응답하여 그에게로 오시든지 아니면 있는 곳에서 말씀하여 그 병을 낫도록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며 응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 마리아 마르다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죽을 병이 아니면 일어나야 할 것 아닌가? 어떻게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이런 반응을 하시나?
우리의 요구와 기도에 주님은 어떤 반응을 하시나?
1  즉각적인 반응을 하시되 소원대로 들어주시는 경우가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그곳 백부장이 주께 와서 간구한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나이다 한다(8:5,6). 주님의 대답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8:7). 즉시 응답한다. 백부장은 주님을 모실 처지가 아니라며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 믿음을 보였다.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하시며 그가 나았다고 하며 그를 돌려 보내다.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 군인 장교인데도 그의 기도를 바로 듣고 응답하여 그 집에 가겠다 할 정도로 응하며 그 하인을 고쳐 주시다.
예수께서 배로 바다 건너에 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 모이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와서 발 아래 엎드리어 간절히 구한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자 주께거 그와 함께 가시다 (마가 5:21-23). 가는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지고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시간이 지체 되었다. 그 사이 아이가 죽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집에 가서 아이가 죽어 있는 방에 들어가 아이야 일어나라 하며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일으켜 주셨다. 즉각적으로 기도를 듣고 이루어 주신다. 주님은 그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풀어 주신다. 바로 응답 하신다.
이런 경우가 있었나? 내게는 열살 때 이런 기도 응답이 있었다. 내가 직접 쓴 찬송가집을 찾지 못하여 그것 찾아달라고 기도한 후 책상 설합을 열자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이었다. 때로 이런 경우에는 기도 응답이라기 보다 우연이라 생각할 때도 있다.

2  기도에 안되 No 하시는 경우가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다. 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나 3일만에 살아날 것이라 하시다. 제자들은 주께서 예루살렘 가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앉을 것이라 기대하다.  제자들은 그때 누가 어느 자리를 차지할까 서로 논의하며 다툰다.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과 그 형 야고보가 주 앞에 나와 간구한다. 우리 두 형제를 주의 나라에서 주의 왼쪽 오른쪽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한다(10:37). 주께서 바로 응답하신다. 너희는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 자리는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10:40) 야고보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거절하신다. 알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구하는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은다. 그러나 이것도 응답이다.
바울은 주께서 특별히 선택한 귀한 그릇으로 그는 주를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여 사역 하다. 그러나 그의 몸에 가시가 있어 불편하고 지장이 있다. 이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 할 정도로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께 세번이나 간구하였다. 몇 번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세번을 기도하다. 주의 대답은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7-9)고 응답하시다. 가시보다 더 큰 은혜로 응답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다. 하나님이 그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과 산을 보게 하소서 하나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으시고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하 (3:26) 모세가 평생 순종하고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한다. 그의 일은 거기까지인 것을 말씀한다. 사람마다 자기 분량이 있는 것을 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 하며 기도하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잔을 옮겨주시지 않으시다. 백성의 죄가 예수의 죽음 외에 달리 용서될 길이 없기에 아들로 십자가를 지게 하시다.
기도 응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길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생명의 길을 여신다.

3  우리의 기도에 기다려라 하실 때가 있다.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한 달 두 달 일년 2년 평생을 기다릴 때가 있다. 나사로가 병든 때 누이들의 기도에 주님의 응답이 그러하다.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바로 응답하지 않고 이틀을 더 계시다가 제자들과 함께 가신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깨우러 간다. 주여 잠 들었으면 낫겠 나이다. 제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예수께서 밝히 말씀한다. 나사로가 죽었다(14). 그가 병으로 고생할 때 사람을 보내어 병들었다고 전했는데도 바로 응답하지 않고 그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그곳으로 가시는 것이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가 사랑하시는 가정이요 나사로인데 어떻게 그를 죽게 하시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그가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나?(11:37)
왜 주께서 늦추었나?  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을까?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신다. 병 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이런 경우라면 병이 든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주께서 이미 병든 자를 많이 고치셨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생명의 주로서 더 큰 영광을 나타낸다. 그래서 죽기를 기다린 것이다. 죽지 않으면 살릴 기회가 되지 않는다. 그가 죽어 무덤에 묻힌지 4일이 되고 이미 썩어 냄새가 난다. 인간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이요 소망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 무덤으로 행차하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이들은 죽은지 얼마 안 된 형편이나 나사로는 이미 썩어 냄새가 난다. 다시 산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 주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 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확실한 사실을 보여주신다. 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다. 죽음을 잠으로 보는 것은 큰 혁명이다. 잠든 자를 깨워 일으키듯이 죽은 자를 살려 일어나게 하는 것은 생명의 주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불러 내신다. 잠자는 자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죽기까지 기다린다.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다. 더 이상 생명이나 힘이 없다. 어떤 자랑도 없다. 죽은 것이 아니면 자기 자랑 자기 힘을 말하고 자기를 내 세운다. 완전히 죽으면 그 후에 되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다. 그래서 주께서 기다리신다. 그 사이 우리 믿음이 자라고 또 하나님의 때를 맞추는 것이다. 주의 은혜 크신 축복을 받게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도 완전히 죽다 싶이 하여 맥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지 않으면 물에 끌려 들어가 둘 다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 받은 것이 어떤가? 즉각적 응답 아니면 안된다 또는 기다리라 아직 때가 아니다 또는 믿음이 자라거라 한 것이 있나?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거나 못들은척 하지 않은다. 주께서 대답하시는 바를 듣고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가 어떠한지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나? Do You Love Me?

요한 21:12-17 네가 나를 사랑하나Do You Love Me?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사랑하여 돌보시되 그가 자기 형상으로 만든 사람을 더욱 사랑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자 하나님은 특별히 사랑할 대상을 찾으시다. 아브라함을 찾아 부르시고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큰 약속을 하시다. 그를 축복하여 창대케 하고 그 이름을 뛰어나게 하고 세상에 복을 주게 하리라. 그 후손 통하여 이 일을 하리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사랑하다. 어느 부모가 사랑하지 않은 자녀가 있겠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사랑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여러번 말씀하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라 사랑이지만 동시에 그가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그에게서 사랑이 넘쳐난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도 사랑한다. 주께서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시다. 양을 치는 목자에게 100마리 양이 있는데 한 마리가 없어졌다. 그 양을 찾아나가 결국 찾아 메고 돌아와 기뻐 잔치한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을 잊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한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을 다 사랑한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며 효도하는 아들을 사랑한다. 또한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가서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라도 품에 안고 큰 사랑으로 맞아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부족해도 길을 잃어도 사랑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다.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이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다. 주께서 친히 하시다. 그 날 밤 주께서 폭탄 선언을 하신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들의 약함을 주님이 아신다.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은다고 장담한다. 닭이 울기 전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 주님은 그의 약함을 아시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게세마네에 가시어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는데 잠을 자고 있다. 한 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하지만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이해하시다. 기도를 끝내는 시간 제자 유다가 앞장 서서 폭도를 이끌고 오다. 주께서 잡혀 가시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 종교 재판을 먼저 받는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어떻게 되는가 보고자 그곳에 가다. 여자 아이가 베드로를 예수의 제자라고 하자 그는 아니라고 부인하다. 사람들 앞에서 세번이나 같은 부인을 하다. 주께서 그를 바라보고 계신다. 시선을 마주 보자 닭이 운다.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 주님을 몰라서 모른다고 했다기 보다는 사람이 두려워 한 줄로 이해한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주께서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다. 주님 앞에 큰 소리를 하였으나 몇 시간 못 되어 주님을 실망시킨 못 난 인간이다. 주님을 대면하기 어려운 형편인데도 주께서 부활하신 후 가서 제자들 베드로에게 전달하라고 하며 그의 이름을 말씀한다. 주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베드로의 실수와 부족함에도 주께서 그를 사랑하심은 말만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난다. 21장에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지만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주께서 찾아가시다.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돕고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히도록 하였다. 주님인 것을 알았다.
그들이 육지에 나오니 주께서 모닥불을 피우고 불 위에 고기를 굽고 떡도 준비하여 두셨다. 제자들의 필요를 아신다. 밤 바다 고기 잡이에서 나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불이 필요하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사랑의 배려다. 가야바 대제사장의 뜰에도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추운 밤에 몸을 덥게 하기 위함이다. 따뜻한 불 옆에 사람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떡과 고기를 준비하시고는 그들을 조반에 초대하신다. 조반을 먹으라. 밤새껏 바다에 있던 그들은 아침이면 배가 고프다. 그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배려다. 춥고 배고픔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 본다. 주께서 직접 준비한 조반을 먹는다. 아무도 어떤 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할 말이 없다. 예수께서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신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그들은 송구하며 주의 사랑을 몸소 느낀다. 
식사가 끝나자 주께서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질문을 세번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베드로를 아신다. 그의 약함을 아신다. 그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나 물으시고 확인하기를 원한다. 더욱이 다른 사람 앞에서 확인한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시몬이다. 시몬의 의미는 약하다 가볍다 바람에 날린다. 모래와 같다. 주를 향한 믿음을 고백하자 주께서 그를 베드로 반석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라 하시다. 시몬과는 대조적인 이름이다. 지금 주님은 그를 시몬이라 부르시다. 그의 본래 자랑하고 성급한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며 시몬이라 하신다. 그의 약함을 보여주시는 호칭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나?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지! 너도 나를 사랑하지! 확인을 하고 싶다. 처음은 이들 보다? 이것들,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 고기 보다로 할 수도 있다. 비교급으로 물으신다. 모두 주를 버려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은다 누구보다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하였으니 지금도 그런가?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주님이 먼저인가?  사람이나 물건, 사역을 앞 세울 때가 있지 않나? 주님은 무엇보다 주께 우선을 둘 수 있나 물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신다. 무엇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예수께서 물으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나?

주님 그러합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그를 아시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베드로는 사실 주를 만나자 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아내와 가족도 뒤로 하였다. 주님을 사랑하여 3년간 따랐다.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주님이 물으신 네가 나를 사랑하나? 하는 사랑과 다른 말이다. 주께서 물으시는 네가 나를 사랑하나?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는 그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나? 베드로의 대답은 그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 친구로서의 사랑으로 사랑 필레오한다고 한다. 이전 같으면 그가 얼마든지 주님 사랑으로 사랑한다.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었으리라. 이제는 그가 시몬인 것을 알다. 여인 앞에서도 주를 모른다고 할 정도의 약한 인간이 주님이 사랑하는 사랑으로 주를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 두번 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은 무엇과 비교하지 않는 사랑 자체를 말한다. 좀더 주님과 가까워진 형편이다. 무엇과 비교하여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데이트 할 때 여러 대상자 중 한 사람을 고른다. 많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한다. 이젠 그 단계를 지나 애인이 되다.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단 둘의 관계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참 사랑이다. 인격적이다. 베드로의 대답도 같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전히 그는 약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주님처럼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을 할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친구를 위하여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 베드로는 나는 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마음, 그러나 마음 다해 사랑한다. 주님이 아신다. 세 번 째 주님의 질문, 우리 말로는 같지만 원어는 다르다. 베드로가 사랑 한다는 그 말을 받아 네가 나를 사랑하나? 사람으로서의 사랑,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다고 하시다. 친구로서 신뢰하여 의리를 지키며 사랑하겠나? 세 번 질문 받자 근심이 되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같다. 주님이 아신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하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그 사랑을 삶으로 행함으로 보이라고 하신다. 주께서 사랑한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다. 사랑을 매번 확인하고는 그 사랑을 보이라 하신다. 주께서 사랑을 실천하시다. 발을 씻어 주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주셨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어린양은 무엇보다 사랑을 필요한다. 엄마 품에서 젖을 먹어야 한다. 그 어린양을 주님이 자기 어린양이라 하신다. 주께서 엄마 심정으로 사랑한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였다. 주께서 하는 그 사랑, 엄마 심정으로 가슴에 품고 돌보고 먹이라. 어린양이 사랑 받고 양육되어 자라난다. 양이 된다. 그 양도 역시 돌봄이 필요하다. 어린양이나 양이나 모두 주께서 내 양이라 하신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의 양을 사랑해라 하신다. 주께서 이 땅에 남기신 것이 주의 양이다. 주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무엇인가? 그는 목수였지만 자기를 위한 집을 지어 내 집이라고 한 것이 없다. 땅을 가지고 내 땅이라 한 것도 없다. 책을 써서 내 책이라 한 것도 없다. 주께서 남긴 것 중에 내 것이라 주장한 것이 둘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라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위에 세운다. 내 어린양 내 양이라 하신다. 교회는 주님의 양무리다. 교회는 주님의 양으로 구성된다. 그가 생명 바쳐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주께로 오는 자를 양이라 한다. 어린양이 많다. 사랑 받아 자라나도 양은 양이다.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의 양을 사랑하고 돌보라 하신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는 삶을 다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고 주의 양들을 보살폈다. 베드로전서 서문에 그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사랑하여 편지를 보내다. 그가 다닌 곳이라 본다. 그곳 지도자들에게 권면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1:1-3). 실제로 그가 그렇게 사역했던 것임을 안다. 그는 결국 네로 황제 시에 잡혀 고난을 당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하게 되다. 유세비우스의 글에 그는 주를 부인했던 자로서 주님처럼 못박힐 수 없으니 거꾸로 못을 박아 달라고 하여 거꾸러 달렸다 한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쳤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식사 한 끼에 초대를 받아도 감사하여 응답을 한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주셨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고 있나?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삶으로 표현할 수 있겠나? 사랑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가슴 속에 있어서 일을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주를 사랑하기에 주의 일을 하는 것이 힘이 들어도 감사하고 기쁨이 있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주의 은총과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