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17, 2024

해맞이 The Suurise

해맞이 The Suurise
아침 해가 뜨는 것을 자주 보러 나가는 딸의 초청으로 새벽 일찍 프린스턴 카네기 호수변으로 갔다. 그는 이미 자리를 정하여 등불을 켜고 의자와 담요를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지도하는 소그룹 인도자들도 조용하게 같이 한다. 침묵으로 해가 뜨는 쪽으로 향한다. 왜 이렇게 해를 맞으려 할까? 장면이 아름답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준다. 빛은 생명이다 등 말할 수 있으리라.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불상은 동해에서 오르는 햇빛을 먼저 받는다. 이집트 왕들의 계곡에 위치한 왕의 묘는 왕의 시신만 아니라 사용하던  물품과 하인 종들이 같이 묻혀 있다. 가장 깊이 안전하게 묻혀 있는 왕의 시신에는 일년 한번 햇빛이 들어와 비치도록 되어 있다. 누구나 해와 빛을 요구한다. 
이집트 시내산 일출이 장관이기에 많은 여행객이 산을 오른다. 우리 부부는 산 아래 호텔에 투숙하여  밤 1시에 낙타를 타고 갈 수 있는 곳까지 한 시간을 오르고 나머지는 안내인을 따라 등불을 들고 걸어서 정상으로 올라간다. 모세의 집이 있는 곳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기다리던 동이 트고 반대편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고 모세의 집과 산전체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나무 없는 붉은 바위산의 위엄과 위용이다. 어둠에 덮여 있던 모든 것이 해오름과 함께 자기를 자랑하듯 보인다. 오션비치나 미시건 호수의 해오름이아름다우나 어찌 비교가 되랴! 도심의 카네기 호수 해맞이도 나름대로 아름답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나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물으신다. 
해는 호수 저편 멀리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더니 점점 올라온다. 작아 보이나 해는 어둠을 쫓아내며 빛으로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호수의 잔잔한 물결, 환영하듯 팔 벌린 나무가지와 잎, 이슬 품은 잔디의 영롱한 빛의 속삭임, 어둠에 덮인 태초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심을 동감한다. 주변의 어둠을 비치던 등불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나의 자랑 업적이 뛰어나고 빛나보였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다.노를 젓는 몇 척의 배가 시합하듯 호수를 달려 나간다. 길에는 자동차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분주한 하루, 경쟁의 일상이 활발하게 시작한다. 해가 점점 오르며 잠간 사이 내 앞의 호수를 채우고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며 광활한 하늘을 달린다. 그 속도가 시속 1670킬로이니 어떤 비행기가 그렇게 달릴 수 있으랴! 우리가 잠자며 쉬는 밤에도 태양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또한 가까워진 해를 나는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가 없고 눈을 들 수도 없다. 그 강한 빛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이는 미약한 존재로 나의 허물과 부족이 그대로 들어나 할 말이 없다. 그 빛 앞에 나는 그대로 노출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빛이요 생명이다. 그 아들 예수께서 빛이시라 그 앞에 숨길 것이 없다. 나의 부족 허물을 보여줌은 나를 정하게 하기 위험이다. 나의 죄를 깨닫고 정결함을 얻도록 그가 나의 죄의 형벌을 받고 나에게 용서와 생명의 길을 열었기에 나만 아니라 부처도 이집트 왕도 누구든지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 이외에는 생명길이 없기에 의의 태양과 빛이신 그를 사모하고 모시고 싶어한다.

**Welcoming the Sunrise**

Accepting the invitation of my daughter, who often goes out to watch the sunrise, my wife and I headed to the shores of Carnegie Lake in Princeton early at dawn. She had already chosen a spot, set up a lantern, prepared chairs and blankets and was waiting for us. Her small group of student leaders, whom she trains, quietly joined her. In silence, we all face the direction where the sun will rise. Why do we long to welcome the sunrise like this? The scene is gorgeousl. It dispels the darkness and brings light. One might say, "Light is life." The Buddha statue at Seokguram Grotto in Gyeongju receives the first sunlight rising from the East Sea. The tombs in Egypt’s Valley of the Kings are not only burial places for the kings but also contain the items they used in life and their servants, who are buried with them. A shaft is designed so that once a year, sunlight reaches the king's body, which is buried deep and safely. Everyone seeks light and the sun.

Many travelers hike up Mount Sinai in Egypt to witness its spectacular sunrise. My wife and I stayed at a hotel at the foot of the mountain and began our ascent at 1 AM, riding camels for an hour to the point where they could take us, then walking the remainder of the way to the summit with our guide carrying a lantern. Many people had already gathered at the site where there is a hut built in memory of Moses . As dawn broke, the opposite mountain peaks appeared, revealing the grandeur and beauty of Moses' house and the entire mountain. The splendor and majesty of the red, treeless rocky mountain were awe-inspiring. Everything that had been covered in darkness seemed to boast of itself as the sun rose. While the sunrise over Ocean Beach or Lake Michigan is beautiful, how could they compare? Even the sunrise over Carnegie Lake in the city has its own beauty. Through Zechariah, God asks me, "What do you see?"

The sun, barely visible between the trees far beyond the lake, gradually rises. Though it appears small, the sun drives away the darkness, revealing things as they truly are in the light. The calm ripples of the lake, the tree branches and leaves outstretched as if in welcome, the shimmering dew on the grass—these all whisper of the brilliance of light. I resonate with the moment in creation when God created light and saw that it was good. The lanterns that had illuminated the darkness are no longer needed. My pride and accomplishments, once seemingly great and bright, now mean nothing. A few rowboats race across the lake as if in a competition. Cars speed energetically down the road. A busy day, full of works to do, is well underway. As the sun continues to rise, it quickly fills the lake before me, drawing closer and running across the vast sky. With a speed of 1,670 km per hour, no plane could fly like that! Even as we sleep through the night, the sun is tirelessly at work. As the sun comes closer, I can no longer look at it because of its brilliance, and I can’t lift my eyes. In front of such powerful light, I bow my head as a weak being, exposed for all my faults and shortcomings, unable to say anything. I am entirely exposed before that light.

God, the Creator, is light and life. His Son, Jesus, is the light, and before Him, nothing can be hidden. Revealing my faults and shortcomings is not to condemn me but to cleanse me. By realizing my sin and receiving cleansing, I know and thank that He took the punishment for my sins, opening the way for forgiveness and life. Not only for me, but even Buddha and the kings of Egypt—everyone—must recognize that without Jesus, who is the light and life, there is no path to life. He, the Sun of Righteousness and the Light, is the one we long for and want to embrace.

나는 여호와라 I AM the LORD

나는 여호와라 I AM the LORD
대학을 졸업하고 60여년만에 만난 친구가 나에게 수석으로 대학입학한 것을 기억시킨다. 나는 하나님께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고 3때 교회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크리스마스 행사로 대학입시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다  장기간의 기침감기로 피곤하고 어머님이 곰국을 끓였으나 입맛이 없어 먹지도 못하는데 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주님, 입시는 다가오는데 준비를 제대로 못하였습니다. 내가 주를 믿는 것을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아는데 내가 시험에 떨어지면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피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주께서  도우셔서 합격하게 하옵소서. 주님, 이왕 입학시켜 주시려면 주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일등으로 입학시켜 주십시오 기도하고 시험에 응하였다. 입학자 명단을 일간신문에 발표하기에 날짜가 되어 신문을 보려고 도서관에 갔더니 어느 친구가 너 일등으로 입학하였더라 한다. 동명이인이겠지 하며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보고는 확인하였다. 다급하여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바로 응답하실 것을 상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축하한다. 어떻게 그렇게 하였나? 물으시기에 우연히 되었겠지요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하나님께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잘못을 깨달았다. 입학하자 대학신문사에서 대학별 수석합격자 면담한 것이 생각나 그 때 무슨 말을 하였을까 알고 싶어 65년이 지나 후배동료에게 부탁하여 받아보니 거기서 수석입학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나는 배은망덕한 것을 다시 깨달으며 그 후에 일어난 일과 연결이 된다. 
입학을 하고서도 기침이 계속되어 의사를 보았더니 당시 국민병이라던 폐결핵초기라며 약을 쓰면 곧 나을 것이라 하더니 6개월 후에는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입학 인터뷰 기사로 알려지며 당시 신문배달 구두닦이 식모살이 하는 이들을 위한 야간 고등 공민학교에서 영어교사와 담임선생이 되어 매일 저녁  가르치고 돌보는 기쁨을 가지고  또  믿음의 동아리로 활동하며 분주하게4년이 지나갔다. 졸업하면 군에 입대하든지 중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되는데 내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피를 토하여  쓰러진 것이다. 심한 폐결핵이다. 삶의 희망과 의욕이 사라지고 마지막이 다가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믿는 자의 창피를 피하고자 부모님은 나를 멀리 요양원으로 보내어 거기서 죽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입원 전날 밤을 여관에서 보내는데 주께서 내게 말씀을 주신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라 하신다. 주의 명령이 아니라 나의 결단이다. 죽으러 온 자에게 죽지 않는다며 사명을 주신다. 그러면 왜 죽을병인가? 그가 나를 경책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시118:17,18). 말씀을 받아들이니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6개월 후 퇴원하여 지금까지 건강하게 주의 하신 일을 나눈다고 한다. 지금 다시 기억되는 것은 대학 지원을 준비하며 법대에 가기로 작정한 때 주께서는 법관으로 판단하는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내 사랑을 전하면 어때? 하시는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주의 사랑, 주의 영광을 전하는 것을 주님은 원하신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으로 고생하는 자기 백성을 구하라고 모세를 부르시며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 하시며 능력과 기적으로 해방시키고 자기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리고  인정받기를 바라셨다. 인정과찬양이 그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라 하신다. 이름만 아니라 하시는 일로 그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그를 인정하고 찬양한다. 

I AM the LORD (Jehovah)
A friend I met for the first time in over 60 years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reminded me that I had been admitted to college as the top student. I felt ashamed before God. When I was in my senior year of high school, I was serving as the president of the church's student assembly and was unable to properly prepare for college entrance exams due to many activities including the Christmas event. On top of that, I was exhausted from a long-term cold amd cough, and my mother had made meat soup, but I had no appetite and couldn’t eat, while the exam date was fast approaching. I had no choice but to pray. "Lord, the entrance exam is approaching, but I haven’t been able to prepare properly. My friends and teachers all know that I am a Christian. If I fail the exam, it is not I but You that will be ashamed. Lord, you are the Lord of wisdom and knowledge, please help me to pass. Lord, once You are going to help me get into college, please allow me to be admitted at the top ranking for Your name and glory." After praying, I took the exam.

The day the list of admitted students was announced through the daily newspaper, I went to the library to check the paper, and a friend told me, "You were admitted as the top student." I didn’t believe it, thinking it must be someone with the same name. But when I checked the paper, it was me I couldn’t imagine that God would answer that quickly to my desperate prayer. When a teacher at school congratulated me and asked how I had managed to do it, I responded, "It must have been a chance." As I turned away, I felt deeply ashamed before God and realized my mistake.

I remembered the interview with the university newspaper where they interviewed the top students from all colleges. I wanted to know what I had said back then 65 years ago about my privilege admission, I asked a junior colleague to retrieve the paper for me. When I read it, I realized that I had not even mentioned that my admission as the top student was by God’s grace. I realized once again how ungrateful I had been, and it connected to what happened afterward.

Even after entering college, my cough persisted. When I saw a doctor, he diagnosed me with early-stage tuberculosis, which was considered a national disease at the time. The doctor said that with treatment, I would soon recover, and six months later, there was no trace of the illness. As the news of my admission interview spread, I was recruited as an English teacher and homeroom teacher at a night school for underprivileged poor youth, such as newspaper sellers, shoeshine boys, or housemaids. Every evening, I taught and cared for them with joy and love, while also playing a part in a Christian club. The four years of college life passed quickly. Upon graduation, I was supposed to either enlist in the military or be appointed as a high school teacher, but neither applied to me. Suddenly, I collapsed, coughing up blood. It was severe tuberculosis. Hope and desire for life disappeared, and the end seemed near. How could this happen? My parents, wanting to avoid the shame of having a Christian believer suffer, sent me to a distant sanatorium, hoping I would die there.

The night before I was admitted to the sanatorium, I stayed at an inn. That night, the Lord spoke and gave me a word: "I shall not die but live, and proclaim the deeds of the Lord." (Psalm 118:17) It was not a command from the Lord, but my resolution. To someone who had come to die, a word of promise of life and mission was given. Then why this fatal illness? "Though He has chastened me severely, He has not given me over to death." (Psalm 118:18) When I accepted this word, I was filled with joy and hope. Six months later, I was discharged, and to this day, I have tried to share what the Lord has done for me

As I remember now, when I was preparing for college and had decided to study law, the Lord approached and proposed, "How about leaving judging as a judge to me and spreading My love yourself?" I accepted this suggestion. The Lord desires us to spread His love and deeds. When God called Moses to deliver His people who were suffering as slaves in Egypt, He revealed His name as the LORD (Jehovah) and delivered them with his power and miracles. He wanted to make Himself known and acknowledged as Jehovah God. Acknowledgment and praise are His glory and joy. Even now, God says, "I AM the LORD." Not only His name but also His deeds show that He is the one and only Jehovah God, incomparable to anything else. Therefore, I acknowledge and praise Him.

기도와 노동 Ora et Labora

기도와 노동 Ora et Labora 
9월 첫 월요일은 노동절 공휴일이다. 노동자들이 땀을 흘리며 육체 정진 영적인 노동을 하여 모두가 잘 살게 되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의 수고를 치하하며 하루를 쉬게 한다. 노동은 힘든 노고이기에 누구나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3D곧 어렵고 추하고 위험한 (difficult dirty dangerous) 일은 피하고자 한다. 일을 존중하나 막일손이 부족한 미국에서 멕시칸들의 노동이 없다면 일반생활이 얼마나 불편할까? 백의민족 우리 문화도 흰옷을 입고 땀을 흘리며 흙에서 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래 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쉬는 시간에 정구 치는 것을 갓을 쓰고 담뱃대를 문 당시 양반들이 구경하다가 그들이 땀을 흘리자 여보 선교사 양반 왜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오? 우리 집 하인에게 시키시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땀을 흘리고 힘들게 하는 일은 하인의 담당이다. 
그러나 땀 흘리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사람에게 명령 하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특권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일에 함께 하여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평생토록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노동을 하여야 먹을 것을 얻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처방하였다. 사람이 생명을 누리고 사는 기본 조건은 육체나 정신 영의 일과 노통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시며 쉬지 않고 일하셨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며 사람을 얽어 매는 많은 속박을 풀어 주셨다.  이런 일을 위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른 새벽 한적한 곳에서 때로는 높은 산에서 또는 밤을 새워 철야기도로 아버지의 뜻과 힘을 의지하여 일을 하셨다. 함께 일할 제자들을 선택하여 함께 있게 하고 내어 보내 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게  한 것도 그러하다. 먼저 주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훈련하는 것으로 기도가 중요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자 주께서는 기도가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일하기 전에 기도하고 기도하고는 일을 하기에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바로 기도라 본다. 
6세기의 성자 베네딕트는 자기가 훈련하는 수도사들의 삶의 원칙을 기도와 노동(Prayer and  Labor, 라틴어로 Ora et Labora) 으로 삼았다. 주를 따르는 자들의 첫째 의무는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주와 함께 하는 시간이고 다음은 땅에서 사는 동안 먹어야 하기에 이를 위하여 밭에서 또는 길쌈을 하며 땀 흘리는 노동을 하는 것이라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지금도 그것을 수도원의 규율로 정하고 있다.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고통일까? 예수께서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라 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얼굴의 땀이 핏방울 같았다. 그리고 담대하게 십자가로 나아가  아버지의 뜻을 기쁨으로 다 이루었다. 땀 흘리는 기도는 힘든 노동이요 땀 흘리는 노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그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이겠는가!



**Prayer and Labor - Ora et Labora**

The first Monday of September is a public holiday known as Labor Day. It’s a day to acknowledge and appreciate the physical and spiritual labor of workers, who sweat and strive to ensure a better life for all, and to give them a day of rest. Labor is hard work, so naturally, people tend to avoid it. Especially jobs that are difficult, dirty, and dangerous—the so-called “3D” jobs—are often shunned. While work is respected, imagine how inconvenient everyday life in America would be without the labor of Mexican workers, especially given the shortage of manual laborers. 

In Korean culture, too, the notion of wearing white clothes and toiling in the fields is not easy. There's an old story about missionaries who came to Korea long ago. While they were playing tennis during a break, some yangban (Korean nobility), who wore traditional hats and smoked long pipes, watched them. When they saw the missionaries sweating, they asked, “Why are you working so hard, sir? Why don’t you have one of our servants do it for you?” For the yangban, sweating and hard work were tasks for servants.

However, working and sweating is a gift from God. When God commanded humans to be fruitful, multiply, subdue the earth, and rule over all living creatures, it was a blessing and a privilege—a way to participate in God’s creative work. When humanity turned away from God, the earth produced thorns and thistles, and God decreed that people would have to toil and sweat for their food throughout their lives. The basic condition for human life is the labor of the body, mind, and spirit, through which God’s will is accomplished.

Jesus came into the world so that people might have life and have it more abundantly. He worked tirelessly, preaching the gospel, healing the sick, casting out demons, raising the dead, and breaking many forms of bondage that held people captive. To accomplish this work, He spent time in prayer before God. Whether early in the morning in a quiet place, on a high mountain, or through all-night prayer, He relied on the Father’s will and strength. He also chose disciples to be with Him and sent them out to do the work He was doing. The first priority was to spend time with the Lord, listening to His word, learning, and being trained in prayer. When the disciples couldn’t heal a demon-possessed boy, Jesus told them that such things could only be done through prayer. Thus, prayer before work and work done in prayer become one—prayer is labor, and labor is prayer.

In the 6th century, Saint Benedict made “Prayer and Labor” (Ora et Labora in Latin) the guiding principle for the lives of the monks he trained. The first duty of those who follow the Lord is to pray, meditate on the Word, and spend time with Him. The next is to labor, whether in the fields or in weaving, to sustain life on earth. This balance between prayer and labor is still maintained as the rule of monastic life today.

How great was the suffering of the crucifixion, endured to save humanity from sin and death? When Jesus prayed in the Garden of Gethsemane, He was so deeply distressed that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Yet, He boldly went to the cross and joyfully fulfilled the Father’s will. If laboring in prayer and laboring to accomplish God’s will is a blessing and privilege, how great indeed is that blessing!

너는 살아라 Live!

너는 살아라  Live!
코비드로 세상은 역사상 처음으로 폐쇄되는 경험을 하였다.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으로 피하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2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미국의 록밴드 메탈리카의 제임스 헤트필트는 스트레스에 눌려 자살을 시도하다가 살아라는 음성을 듣고 돌아섰다고 한다. 삶이 힘들고 우울과 외로움이 심하고 정신장애가 겹치어 죽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있지만 살아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님은 생명이라 그가 창조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다.사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시작에 대하여 돌보는 이 없이 길가에 버려진 피투성이 태아로 발짓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라 하며 그를 안고 살려 자라게 하였다. 사방이 깜깜한 시련과 고통이라도 하나님은 살아라 말씀하고 붙들어 주신다.
살려면 삶의 힘을 얻어 자라고 일을 하기 위하여 적절하게 먹고 움직이며 활동하고 쉬며 자는 시간을 가지고 동료를 만나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이다.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다.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나 한 가지 금지된 것은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옳다 그러다 판단하면 생명을 해치기에 서로 받아주고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이 자라고 열매 맺게 하였더니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자 하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돌아서서 회개하고 살아라 하신다. 예수님의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것이 생명이요 천국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왜 살아라 하시나? 할 일이 있어서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생명의 근원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두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대치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영원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는 것이다. 시인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라 한다. 그는 나와 함께 하여 나를 지키시고 나의 필요를 채우시며 나를 어려운 고통과 환난에서 구하시고 아들 예수를 보내시어 나의 죄를 용서하고 죽음에서 건져 영생을 주셨다. 내 주변에서 또는 멀리 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여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다른 마을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신다.  생명 있을 동안에 주어진 사명이다. 
이집트에서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세는 남자 아이는 모두 강에 던져 죽이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강에 버려졌지만 너는 살아라는 왕의 왕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공주가 건져내어 왕궁에서 양육하고 광야에서 훈련 받아 80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40년이 걸려 사명을 이룬 때 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지만 그의 사명이 끝났으니 이제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살게 하고자 그들 불러 가셨다. 모세는 먼 훗날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나 인간 해방의 길을 의논하고 우리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었으니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Live!**

The world experienced its first-ever shutdown in history due to COVID. Watching loved ones die, people avoided and were cautious out of fear. However, many choose death for themselves. In Korea, the leading cause of death among people in their 20s is said to be suicide. James Hetfield of the American rock band Metallica attempted suicide under the pressure of stress but turned back after hearing a voice telling him, Live. Life can be hard, with intense depression, loneliness, and overlapping mental disorders, leading to suicidal impulses, but the voice of God telling us to live can be heard.

God is life, and He blessed those He created with the command to be fruitful and multiply. Living is a blessing. When Israel began, God took and nurtured a bloody newborn abandoned on the roadside, telling it to live, even though it was covered in blood. Even in the darkest trials and sufferings, God tells us to live and holds us up.

To live, we must gain the strength to grow and work, and must eat, move, and rest appropriately, meet companions to be with.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follow the word of God, who commands us to live. Not just by bread alone, but by the word of God, which is the nourishment of life. In the Garden of Eden, Adam was allowed everything except one thing: he was not to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Judging what is right or wrong harms life; thus, God’s word tells us to accept one another and love each other. When Israel grew and bore fruit but then betrayed and left God, He asked, "Why do you choose to die? Turn back, repent, and live." Jesus' first words were,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Knowing our relationship with God and returning to Him is life and heaven.

Why does God tell us to live? Because there is work to be done. Each person has work given to them. It is to know, acknowledge, and accept God, the source of life. What God hates most is for his people to set up idols other than Himself. Sometimes we may want to replace the invisible God with something visible, but what is visible is temporary, while the invisible God is eternal, so we praise God. It is to tell others who God is and what He has done. The psalmist says that the reason he is alive and not dead is to proclaim what God has done. He is with me, protects me, provides for my needs, rescues me from suffering and hardship, and sent His son Jesus to forgive my sins and save me from death, giving me eternal life. By telling people around me, or going far away to proclaim who God is and what He has done, life is spreaded. Jesus said, "I must go to the other villages too, to preach the gospel, for that is why I have come." It is the mission given to us while we have life.

Moses, born as a Hebrew in Egypt, was abandoned in the river under the king’s order that all male babies be thrown into the river to die. But the princess rescued him, raising him in the palace under the command of the King of Kings, God, who said, "You shall live." He was trained in the wilderness and at the age of 80 was given the mission by God to liberate His people and lead them to the Promised Land. When he accomplished his mission after 40 years, his eyes were not dim, and his strength had not weakened, but his mission was over, so God called him to live with Him forever. Moses, along with Elijah, met Jesus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long after, discussing the path of human liberation, opening the way for our salvation and eternal life. How blessed it is to be alive!

해방 절기 Liberation Feast

해방 절기 Liberation Feast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라 
이 날이 40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 길이 지키세 길이 길이 지키세
1945년 8월15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을 경축하여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광복절 노래다. 독립을 위하여 뜨거운 피와 땀을 흘리던 많은 어른 친구들이 이 날을 보지 못했으나 나라를 다시 찾아 자유를 누리는 국민은 새나라의 흙을 만지며 꽹과리 울리고 바닷물처럼 춤을 추는 축제를 길이 지키자고 한다.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4월26일 이를 광복절 노래로  확정하였으나 두 달 후 625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 노래가 알려지고 불릴 기회조차 놓쳤고 전정과 기아에 시달리며 살기가 힘들어 해방과 자유의 감격과 즐거움을 누릴 틈도 없었다.  더욱이 해방은 국민의 소원이었지만 쟁취한 것이 아니라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항복함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처음에는 축제였으나 점점 잊어버리는지도 모른다. 해방이 없었다면 어떠할까? 오늘의 한국과 국민이 있을까? 땅과 국권만 아니라 나와 나의 인권도 없을 것이 다. 그러기에 해방 절기를 감사하며 축하하고 즐거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유대인만큼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도 없지만 그들만큼 세계 역사에 기여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들 조상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역하며 신음하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 이집트에 내리는 여러 재앙 중에 유대인들은 양을 잡고 떡을 먹으며 잔치하는 가운데 이집트의 초태생이 모두 죽음으로 그들은 쫓겨나듯이 해방되며 그들은 대대로 그날을 유월절로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들 스스로 해방을 쟁취할 수 없어 고통으로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해방을 선물로 주셨기에 유월절로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능력과 사랑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3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은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을 높이고 민족적으로 단합이 된다. 내가 목회할 때 한 여성도가 유대인과 결혼하겠다고 하여 결혼 예비교육을 하며 종교가 다른데 둘의 생활과 자녀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신랑 될 사람이 자기는 개혁파라 부인이 지키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 기독교 절기에 참여할 것이며 아내 될 사람도 자기의 절기에 참여하고 함께 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혼예식은 유대교 랍비와 내가 공동으로 집례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해방 절기가 중요하지만 해방을 가져온 힘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이 핵심이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이지만 그들은 유월절 장막절 같은 절기를 지키며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기를 쉬지 않기에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하여 세계에 기여하며 미국의 과학 교육 언론 경제의 중심적 힘을 가지게 하고 있음을 안다. 고난으로 훈련 받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다. 
해방 중에 가장 큰 것은 영원한 죽음에서의 해방이다. 오만과 죄의 종으로 죽음을 안고 신음하는 인간 곧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었기에 누구든지 그를 받아드리고 믿기만 하면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주일마다 교회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나를 죽음에서 해방시킨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고 찬양함으로 나의 삶을 새롭게 하고 주의 힘을 얻는 것이라 참으로 감사와 기쁨을 가진다. 



성령을 받았느냐? Received the Holy Spirit?

성령을 받았느냐? Received the Holy Spirit?
어느 일이나 처음 시작할 때는 배우는 기간이 있다,. 나는 아내의 소원을 따라 목회하지 않고 교수가 되려고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한 과정을 끝내고 교회의 청빙을 받아드릴 형편이었다. 목회를 모르기에 목회를 하며 목회를 배우고 싶었다. 다른 한인교회가 없어 저녁 예배가 있는 미국교회를 찾다가 사도 오순절교회 둘을 알아 시간이 될 때 번갈아 가며 참석하여 목회를 배우기로 하였다. 
어느 저녁 한 교회에 갔더니  강사로 와서 설교하던 목사가 나를 가리키며 저기 있는 한국 목사 너 성령 받았느냐 한다 그럼요! 하니 너 방언을 말하나? 한다. 아니요! 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방언은 이상한 사이비 현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렇다면 너는 성령 받지 못하였다! 단언하!는 것이 아닌가! 내게는 그 목사를 향하여 저게 목사인가 하는 분노가 일고 동시에 성령 받지 못한 목사가 목회를 하다니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설교  후 교인들은 앞으로 나가 서로 위하여 기도하기에 우리 부부도 나가니 담임목사가 나에게 마이크를 주며 한 마디 하라고 한다. 나는 장로교 목사 답게 고전 12장에는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9은사가 나오는데  왜 방언으로 성령 받았다 받지 않았다 판단하나 하였더니 내 말이 끝나자 그들은 나를 둘러 서서 기도한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성령 받지 못한 목사 성령 받게 해달라는 것인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역사는 목회만 아니라 신앙에 필수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고 말씀을 깨닫고 가르치고 설교하며 교인들을 심방하고 상담하기에 나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 교회에 돌아와 기도하는데 음성이 들린다. 종형아 너 성경을 믿나? 예 제가 믿기에 그 말씀을 붙들고 살지요. 너 성령을 믿나? 예 믿어요 하니 그렇다면 왜 방언은 믿지 않나 하신다. 내게 큰 충격이다. 생각하지 않던 부분임을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믿겠습니다 대답하였다. 
그 후 참석한 다른 교회 목사가 교인들에게 방언으로 기도할 사람은 기도하셔요 단 통역이 있을 때만 하십시오 하자 한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한다. 바로 다른 사람이 통역을 한다. 참으로 질서와 평화가 있는 것을 보며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경험이다. 방언은 언어가 다른 사람이 알아듣는 것이 있고(행2)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언(고전14)이 있으나 교회에서는 대개 후자가 통역 없이 통용되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믿는 자를 만나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물었더니 그들은 성령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예수를 전하여 믿게 하고 기도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다른 은사와 달리 방언은  바로 나타나기에 그것을 성령 받은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라 이해하게 된다.
성령 사역과 방언을 믿으면서 내 믿음과 목회가 달라지고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되고 이민목회를 감당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놀라운 일은 3년 목회후에 신학교수가 되고자 박사과정에 돌아가려고 할 때 교수를 원했던 아내가 말한다. 목사가 목회하면 되지 박사공부를 더하면 무엇해요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순종하며 받아들이자고 하다.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주께 감사사고 찬양한다.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start anything, there is a period of learning. I came to the United States to study with the intention of becoming a professor, not a pastor, following my wife's wishes. After completing one course, I found myself in a situation where I had to accept a call to pastoral ministry. Since I knew nothing about pastoral work, I wanted to learn about it by actually doing it and from other pastors.. As there were no other Korean churches, I decided to attend American churches with evening services. I found two Apostolic Pentecostal churches and planned to alternate between them as time allowed, to learn about pastoral work. 
One evening, I went to one of these churches, and the pareacher, who was a guest speaker, pointed at me and asked, 'You, the Korean pastor over there, have you received the Holy Spirit?' I replied, 'Of course!' Then he asked, 'Do you speak in tongues?' I said, 'No!' At that time, speaking in tongues was a strange, cult-like phenomenon in Korea. He then declared, 'If that's the case, you have not received the Holy Spirit!' Anger welled up within me, wondering if he could really be a pastor, and at the same time, I felt ashamed that a pastor who hadn't received the Holy Spirit was doing ministry. After the sermon, the congregation went forward to pray for each other, so my wife and I also went forward. The pastor  of the church handed me the microphone and asked me to say a few words. I, as a Presbyterian pastor, said that in 1 Corinthians 12, there are nine gifts of the Holy Spirit, including speaking in tongues, so why judge whether someone has received the Holy Spirit based on whether they speak in tongues or not? As soon as I finished speaking, they surrounded me and began to pray. I felt grateful. Were they praying for the pastor who had not received the Holy Spirit to receive it? 
The work of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is essential not only in ministry but also in faith. I believed I had already received the Holy Spirit, as I had been inspired by the Holy Spirit to believe in Jesus, understand the Word, teach, preach, visit church members, and counsel them. 
When I returned to my church and prayed, I heard a voice: 'Do you believe in the Bible, Jong-hyeong?' I responded, 'Yes, I believe, and I live by that Word.' 'Do you believe in the Holy Spirit?' 'Yes, I believe.' Then, the voice asked, 'Why do you not believe in speaking in tongues?' I was deeply shocked. I admitted that this was something I had never considered and answered, 'I was wrong. From now on, I will believe.' 
Later, at another church, the pastor said to the congregation, 'If anyone wants to pray in tongues, please do so, but only when there is an interpreter.' Someone began praying in tongues, and immediately another person interpreted. Seeing such order and peace was a very different experience from what I had seen in Korea. There are tongues that are understood by people who speak different languages (Acts 2), and there are tongues of prayer offered to God (1 Corinthians 14), but in most churches, the latter was practiced without interpretation. When Paul met believers in Ephesus, he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didn’t even know that the Holy Spirit existed. After sharing Jesus with them and praying for them, the Holy Spirit came upon them, and they spoke in tongues and prophesied. Unlike other gifts, speaking in tongues manifests immediately, so I came to understand that it is often seen as evidence of receiving the Holy Spirit. 
As I came to believe in the Holy Spirit’s work and speaking in tongues, my faith and ministry changed. I realized that it wasn’t me but the Holy Spirit who was directly at work, and that it was the Holy Spirit’s help that enabled me to carry out my ministry among immigrants. The remarkable thing was that after three years of ministry, when I was about to return to the doctoral program to become a seminary professor, my wife, who had originally wanted me to be a professor, said, 'Why pursue more doctoral studies? A pastor should just do ministry.' We agreed to accept the opportunity God was giving us and obey. It was all the work of the Holy Spirit, and I give thanks and praise to the Lord."



서로 사랑하자 Love One Another

서로 사랑하자 Love One Another
결혼 60년을 맞은 부부에게 어떻게 결혼하였는가 물으니 부인이 말한다. 교회예배에서 누군가 기도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 마음에 닿는데다 그 내용이 자기가 할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라 참으로 감사하고 좋았는데 얼굴을 알지 못하다가  교회에서 개인 새벽기도를 하며 만나게 되고 마음이 통하여 사랑이 일어나 결혼하였다고 한다. .
반면 좋아하지 않다가 상대를 알면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 남북이 나누어지고 이념과 체제가 다른 대립이라 좋아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한 피 받은 한민족임을 생각하면 가까움을 느낀다.  80년대 초까지는 남한보다 잘 살던 북한이 점점 가난해지다가 기근으로 나라 전체가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7년에 시카고 우리민족 서로 돕기는 모금한 10만불로 그들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대표자 대신 부대표인 내가 책임을 맡아 심양 주재 선교사가 구입한 양곡 480톤을 객차로 먼저 보내고 우리 4명팀은 기차로 평양에 도착하였다. 양각도 호텔에 안내되고 우리는 양식을 배달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양식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내인이 알아보는 동안 나는 한 팀원과 같이 빠져나가 평양시내를 다니며 구석 구석 삶의 현장을 보고 뼈저리는 일이 많았다. 배고픈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어버이 수령 모독이라 배가 아프다고 해야 하였다. 수령은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을 공약했지만 오히려 백성의 가진 모든 것은 사라지고 평양을 벗어나면 50년대 한국 모습이라 가슴이 아프다. 
주일을 맞아 우리 팀은 김일성 외가 곳 칠골교회에서 예배하다. 평양 봉수교회에는 빌리그래함 사모 일행이 방문하고 있어서다. 두 교회가 있어 종교 자유를 보여주지만 외빈이 있을 때만 모인다고 알려졌다. 내게 설교하라고 한다. 외빈에게 설교하라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특별 대우였다.  예배시작 시간 10분 늦게 도착하자 목사 부목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내인을 책망한다. 바로 강단에 올라가며 설교 본문을 알려주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이 은혜롭고 팀의 한명이 기도하는데 간절한 반응이 있다. 목사가 요일4:7-12을 말하자 교인들은 일제히 성경을 펴고 목사가 봉독하며 은혜로운 부분은 반복하여 읽고 강조하는 것을 보며 나는 충격을 느낄 정도로 이들이 외형만 아니라 참으로 진지한 것을 보았다 말씀과 기도 찬양이 있는 곳에는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믿는다. 
나는 우리 팀의 방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라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기에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 믿기 어렵기에 그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인 아들 예수로 오시어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는 지혜 능력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여 모든 문제를 돕고 필요를 채우며 섬기신다. 그는 죽음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죄의 형벌을 받아 대신 죽어 화목제물이 되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죄의 용서와 영생을 주시는 것이 참 사랑이다. 누가 듣고 믿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날 수 있을까? 북한 동포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여 찾아가 그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사랑을 받는 자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은 자의 올바른 삶이 아니겠나!

강아지 똥 Doggie Poo

강아지 똥  Doggie Poo
길을 걷다가 간혹 강아지 똥을 만나면 이를 피하고자 한다. 이 강아지 똥을 권정생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런 가치와 쓸모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던 강아지 똥이 민들레 씨를 만나 자기를 주며 그것이 자라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자 그는 자기의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를 내가1978년 수난주간 목요일 예배에서 사용하였다. 은혜를 받고자 사순절 금식을 하며 절정이 되는 주간 주께서 마지막만찬을 하신 목요일 저녁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고 성찬식을 행하고 설교에서  강아지 똥 이야기를 하며 주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난다는 말씀으로 나 스스로 은혜가 되었다. 
예배 후 아내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목회초년생 답게 예배가 어떠하였는가 물으며 은혜로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금식하고 나는 교회에서 금식하며 준비한 예배였으니 당연히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사모의 응답은 그걸 설교라고 하는가? 거룩한 예배에서 강아지 똥을 말하다니 말이 되는가? 나를 충격과 미궁으로 빠뜨렸다. 집에서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목욕은 무슨 목욕! 돌아가 기도하라고 내 몰아친다. 이런 잔혹한 일이 또 있을까? 자고 있는 아이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쫓겨나듯 교회로 돌아갈 때 금식의 은혜는 사라지고 마음에 어둠이 내리 덮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도도 나오지 않고 아무런 의욕이 없어진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밤이 지나 성금요일 태양은 올라 왔으나 내 영혼은 가장 어두운 칠흑 같은 밤이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날 대낮에  임한  캄캄함이 이정도였을까? 
토요일이 다가온다.  어떻게 부활주일을 맞이하나? 그래도 부활주일은 오고 있어 컴퓨터가 없던 시기 원지를 긁어 주보를 만들고 있는데 한 미국목사가 전화로 아직도 교회에서 금식하나 하면서 찾아오겠다고 한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아 오고 싶으면 오라 하였더니 그가 11시 경에 왔다. 본당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아 무슨 말을 하였는지 기억이 되지 않으나 서로 대화하던 중 내가 강대상 쪽을 보니 그곳에는 인자하신 주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순간 내 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올라오며 어둠은 사라지고 밝은 빛이 찾아왔다. 옆의 목사에게 너는 내 친구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며 크게 포옹을 하였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그는 고민에 빠져 있다. 내게 일어난 일을 말하며 저녁 아이들이  잠든 후에 교회로 데리고 왔다. 그가 기도하는데 11시 누군가 옷자락 펄럭이며 앞문으로 들어와 강단으로 가서 서는데 너무 눈이 부시어 처다 볼 수 없었지만 순간 주님임을 알고  주님 사랑합니다 크게 고백하며 기뻐 춤을 추듯이 변화가 왔다. 그날 아침 그는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말씀을 읽는데 백낙희의 딸 남선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큰 글자로 나타나는데 주님 저는 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대답함으로 덮친  마음의 어둠과 무거움이 벗어지고 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3월 26일 흰 눈이 내린 올바니 한인교회의 부활주일 새벽, 보도의 눈을 쓸고  새벽예배에 나아오는 성도들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증거하는 감격이 내 삶의 방향을 전환한 계기였다. 
강아지 똥으로 덮친 무덤 같은 어둠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주어진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목적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

주는 나의 비전The Lord is my Vision

주는 나의 비전The Lord is my Vision
고등학교는 한 사람의 인생 길을 정하는 중요한 기간이다. 진로를 생각하며 전공과목과 대학을 정하거나 아니면 사회로 나간다. 인생의 꿈 비전 소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내 외손자는 게임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라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이에 맞는 대학을 찾고자 부모와  함께 대학 다섯을 방문하고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꿈이 있지만 하나님이 나의 비전이라 한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Be thou my vision 이 찬송은 영어 세계에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와 같이 많이 불리운다. 이는  아일랜드 (Ireland)의 성자 패트릭(Patrick)을 생각하며 작사 작곡되었다. 패트릭 은 영국에서 16세에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종으로 팔리고 양을 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예수를 믿기에 여러 해를 열심히 일하다가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고 프랑스에 가서 공부도 하였다. 어느 날 아일랜드 사람이 나타나 젊은이여 와서 우리와 함께 살자고 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야만과 해적의 아일랜드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여  선교하였다. 
433년 부활주일에 아일랜드 왕은 그들의 신Druid 축제를 위해 모든 물을 끄고 켜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교신은 어둠을 가지고 온다.  패트릭은 아일랜드 제일 높은 Slane산 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며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밝혔다, 왕명을 어기며 생명을 걸고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였다. 그는 결국 아일랜드를 복음화하고 후에 성자 칭호가 주어졌다. 그의 비전 꿈 소망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누군가 패트릭을 생각하며 Slane산이라는 곡을 썼다. 6세기에 아일랜드의 시인 Dallan Forgaill이 패트릭을 기억하고 시를 썼다.  1905년 25세의 대학생 Mary Byune이 이 시를 발견하여 영어로 번역 도선관에 소장하고  1917년 아일랜드 연구가 Eleanor Hull이 Slane곡과 시를 연합하고  이는 1919년 발간 찬송가에 수록되어 사랑받는 찬송이 되었다. 주께서 나의 비전 소망임을 말한다.
사랑하는 시카고를 떠나 딸들의 소망을 따라 새로운 곳에 와서 어떻게 살까? 여기서의  꿈과 비전은 무엇일가? 고등학교 시절 주님이 주신 비전을 살리라. 고교 3학년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선생님의 추천과  아버님의 소원을 받아 법대에 가기로 하고 준비하였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음성이 들려오고 대화가 이루어지다. “종형아 법대에 간다고?” “예 그러려고 합니다”. “법대에 가면 무엇하는데?” “졸업하고 과정을 거쳐 결국은 판사가 되겠지요” “판사는 무엇하는데?” “송사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러다고 하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판단하는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내 사랑을 전하면 어떻겠어?”  항거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다.  내 꿈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꿈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나의 비전으로 삼는 시간이다.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공부를 할가? 자문하고 알아보니 목사가 되는 길이라 신학 공부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사대 영문과를 택하고 입학하며 발탁되어 무산아동을 위한 야학에서 주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시작되었으니 이를 계속할 것이다.

Saturday, September 7, 2024

홈 베이스 Homebase

홈 베이스 Homebase
야구에 홈이 있다. 투수가 볼을 던지면 주자는 치고 홈에서 출발하여 일루를 향하여 달리고 2루 3루를 지나 홈으로 향하는데 그 과정은 본인만 아니라 관중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투수와  포수 그리고 수비는 주자가 홈에 이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주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린다. 신경과 힘을 겨루다가 일단 주자가 홈에 이르면 관중의 박수와 갈채를 받지만 본인도 만족과 안도감을 가지고 마음을 놓고 쉬며 힘을 모아 다음 타순을 기다린다. 홈을 떠나 달리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홈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요 소망이 된다. 
사람에게는 홈이 필요하다. 삶과 일에 시달리고 힘들어도 홈은 휴식이요 다음 날을 위한 준비가 된다. 집과 같은 곳이 없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집, 아내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은 풍성한 나의 휴식처였다.  목회하며 격무에 시달리고 또한 관계의 불편함으로 힘들 때가 있지만 홈에 이르면 감사와 자유 평안이 있고 새로움으로 전환된다. 나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회복시키는 홈이다.
은퇴 후 전환기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임기가 끝나면 돌아올 홈이 있다는 것이 위로와 힘이었다. 아내에게도 그러하다.  선교지 사역으로 탈진상태에 이르러도 휴가기간에 돌아올 홈이 있는 것은 힘과 평안과 새롭게 달릴 바탕이었다. 집과 환경이 삶과 사역의 홈베이스가 된다.  이런 베이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역할 때 자라난 자녀들은 멀리 있어도 부모가 있는 집이 그들의 홈이라 서로  후원하고 힘을 더하였다. 이제 나이로 많은 제약을 가지자 자녀들은 그들 가까이 오기를 원하더니 한 딸은 생일 소원이 엄마 아빠가 그들 가까이 오는 것이라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그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 주기로 하다. 정든 곳 여러 친구와 작별하고 딸 옆으로 가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편하였다. 단 시일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볍게 이사하도록 그들이 도왔다.  집과 장소, 사역이 홈 베이스가 되었지만 이제는 자녀들과 함께 하는 홈베이스를 구축한다. 세 딸이 팀이 되어 두 딸이 있는 곳으로 순조롭게 이사를 하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평안이요 기쁨이요 내가 원하는 바다. 그들과 같이 있음이 행복한 나의 새로운 홈베이스다. 사는 집은 달라도 이제는 가족이 홈이다. 언제든지 만나고 즐기고 사랑을 나누며 삶의 동력을 얻고 기쁨을 가진다. 가족 같은 것이 없다. 시달리고 피곤할 때 엄마 품에 기대고 또 약하고 힘이 없어도 자녀들 옆에서 힘을 얻는 것이 최고의 홈이 아니겠나! 
이런 홈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 곁을 떠날 날이 온다. 슬픔과 아픔이지만 현실이다. 세상의 홈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홈이 기다린다. 주께서 팔을 벌리고 “잘 하였다. 내가 주는 평안을 누리며 안식하라” 하신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아버지의 사랑 성령님과 천사들의 위로가 함께 하는 완전한 홈이다.  더 이상 세상에서 달리며 시달릴 것이 없는 주께서  마련하신 홈베이스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하며 주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그 날의 홈베이스를 향하여 한 걸음 씩 나아가고 있음을 감사한다.

떠나도 떠나지 않아 Leaving but Not Leaving

떠나도 떠나지 않아 Leaving but Not Leaving
살아 있는 사람은 항상 이동을 한다. 미국의 원주민은 아시아에서 그리고 개척자는 영국과 구라파에서 옮겨와 이 나라를 건설하였다.  우리도 조국을 떠나 이곳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떠나고 도착하여 앞을 바라보고 힘들게 개척하며 떠난 곳을 생각할 틈이 없기도 하고 또는 잊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계획에 없던 목회를 미국에서 시작하여 처음은 한 교회 3년 기간으로 정하여 교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며 여러 교회를 개척하다가 뉴욕에서는 떠남이 허락되지 않아 10년을 지나며 전도자에서 목회자로 전환하고 시카고에 와서 그 교회 최장 13년 사역 후 최초의 은퇴자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목회자가 공석인 전환기  교회들을 섬기면서 전체적으로 여러 지역 여러 교회들에 부임하고 떠나고 또 선교사로 3년간 섬기며 남달리 많은 이동을 하였다. 나의 동갑 친구는 전도사로 부임한 교회에서 강도사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가 되어 은퇴하고 원로목사기 되기까지 45년을 한 교회에서 사역한 것과는 아주 다른 많은 경험을 하였다. 
한 교회 목사로서 얼마나 오래 있었든지 상관 없이 일단 교회를 떠나면 다른 목사가 부임한다. 교인은 양이요 목사는 목자이기에 양떼에 새로운 목자가 오면 그 목자가 중심이 되고 이전 목자는 상관할 것이 없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 완전히 떠난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관련할 것이 없다. 그 양떼는 맡겨진 목자의 돌봄을 받게 된다.
지역을  떠나는 것도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로 고향을 떠난 후에 다시 돌아가기  않았다. 아들의 배필을 고향에서 구하지만 아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떠나면 떠난 것이다.  
그런데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이 있다. 고국을 떠나 이민을 왔지만 항상 고향과 고국을 그리며 내왕하기도 한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경우 시카고에 가장 오랜 30년을 살면서 목회자로, 은퇴한 후에는 하나의 자연인으로 동료와 이웃을 친구로 삼아 지나다가 이들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눈 많은 이들을 어이 잊을 수 있겠나? 한 집에서 28년을 살며 아내가 창조하여 아름다움이 풍성한 정원에서 팬데믹기간 막내의 결혼을 아빠가 주례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집에 들어설 때마다 밝고 시원한 공간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하던 그 집을 어떻게 잊겠나? 떠나지만 떠나지 못하고 마음에 그것을 품고 있다. 또한 한국일보 칼럼을 통하여 만나던 독자들의  아쉬워하는 격려를  받아들여 이들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만나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3년을 지나다가 떠나간다 하시니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였다. 주님은 떠나면서도 떠나지 않는다고 하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그들 속에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 하신다. 보이는 주님은 떠났지만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믿는 자로서 모두 주님을 새롭게 만나 영원한 주의 나라에서 더 이상 이별이나 떠남이 없이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한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무엇을 가지고 갈까 What to Take With

무엇을 가지고 갈까 What to Take With
시카고 생활 30년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소원을 따라 그들 가까이 프린스턴에 가서 살기로 결정을 하다. 이사하며 말하는 다운사이즈는 집과 살림을 줄인다는 것이다. 큰 집이 필요 없이 두 사람이 단출하게 살 수 있는 아파트면 충분하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고 별로 사용하지 않던 것 또 있어도 잊고 살던 것들은 모두 버리거나 필요한 이들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내가 가지고 갈 것을 결정한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과 또 기억과 연결된 사진이나 물품이 포함되고 이사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줄이고 줄여도 짐은 많아진다. 
이민할 때 가방 몇개 들고 왔으나 지금까지 50년간 잘 살게 된 것이 감사하다. 미국에서 이사를 많이 하며 지역 안에서 옮기고 또 타지역으로 옮기었다. 은퇴 후에는 전환기사역을 담당하고 선교사로 먼 나라에도 살았지만 살던 근거지는 두고 가서 사역하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이제는 근거지를 정리하고 섭섭하게 떠나게 된다.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성경에서 실례를 본다.
베데스타 못은 물이 크게 움직일 때 누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기에 못 가에는 많은 병자가 모였다. 전신불구로 들것에 누워 있는 한 환자는 물이 움직일 때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기에 절망이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를 만나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그는 바로 일어나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간다. 완전한 새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주님은 왜 환자로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실까? 아마도 그것을 보면서 그가 병자로 있다가 고침 받은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개인이 사용하던 것을 버려 두어 남에게 불편을 주지 말라는 것인가? 그가 성한 사람이라도 밤에 잠잘 때는 침상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주님의 의도는 확실히 모르지만 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선지자 엘리야는 악한 왕에게 선포한대로 3년6개월 비가 내리지 않고 왕이 옹호하는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그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 것을 증명하고 훗날 변화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별세를 의논할 정도로 위대하였다. 그는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겼나? 그는 예언서, 집이나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 단벌 옷을 입고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가며 그의 겉옷을 벗어 내린다. 가지고 가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남겼다. 그가 가는 곳에는 겉옷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옷과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신다. 삶의 열매는 가져가지 않고 타인을 위하여 남겨 둔다. 추수를 하여도 다 거두지 말고 밭이나 나무에 얼마를 남겨두어 가난한 자 나그네가 즐기도록 하라고 하신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온다. 무엇을 가지고 갈까? 내가 도미니카에서 강의하다가 졸도하여 죽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가져갈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남기고 간다. 오직 믿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요 구원자라는 믿음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여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자유한가? Are You Free Indeed?

참으로  자유한가? Are You Free Indeed?
이민일세는 대개 누구나 잘 살기 위하여 밤낮 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 우리 일세는 많은 경우 가난을 피하고자, 자신이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또는 기회를 찾아 왔기에 한국에서 하던 일을 지속하는 전문인 외에는 대개 무슨 일이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면 하였다. 세탁소나 청소 네일 미용 식품 생선 잡화 등 모두 남달리 부지런하게 일에 일을 하였다. 너무나 분주하고 피곤하여 어떤 이는 번 돈을 셈하거나 은행에 가지고 갈 틈도 없었다. 남자는 집에 오면 쉬는 시간이 있지만 부인은 바로 부엌에 들어가고 빨래나 다른 많은 일과 아이들 돌보며 눈코 뜰 짬도 없어 피곤이 쌓였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삶이라 이민 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는가 물으면 특히 부인이 아니라며  여기가 좋다고 한다. 이유는 마음이 편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기를 살리며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만족하다. 너무 고단하고 힘들지만  자기를 발견하는 해방감으로 자유를 누리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집을 구입하고 고국에 송금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일이다. 
미국에서 6월19일 Juneteenth라는 노예해방 기념일이 몇 년 전 제정되었다. 영국에서 건너온 소수의 개척자들이 넓은  대륙을 농산물 생산지로 개발하는데 필요한 많은 일손을  아프리카인으로 충당하면서  노예산업과 시장이 형성되고 사람이 물품으로 거래되어 인권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이 무자비하게 취급되었다. 뿌리라는 소설에서 쿤타킨테라는 노예 몸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주인이 보며 그도 자기와 꼭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차차 노예도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어나며 이로 인하여 미국은 남북으로 분리된다. 북부는 공장이 많아 시간제 임금과 고용제도가 발전하나 세계의 곡창 남부는 고용된 인부로 운영할 수 없어 노예제도가 옹호되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남부는  항복했지만 2년 반이 지나도록 텍사스는 여전히 노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부의 Gordon Granger 장군이 1865년 6월 19일 텍사스 Galveston에 들어가 노예 해방을 요구하였다. 속박을 당하던 사람들이 자유의 선언을 들을 때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미국에 사는 우리든지 공식으로 노예에서 해방된 그들이 참으로 자유로운가! 여전히 많은 억압과 얽매는 사슬이 있다. 경제가 부요하고 학식과 지위로 많은 것이 갖추어졌는데도 육체의 고통, 우울과 좌절에 빠진 자가 많고 술과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하는 자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은 진정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해방되고 자유가 주어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자유는 죄와 죽음이라는 폭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결과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두려움이요 억압이다. 죽는 것만 아니라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면 어찌 마음에 평안이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고 죄와 죽음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고자 피를 흘려 죽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참 자유인이 된다. 서부 개척자들의 표어였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말씀과 진리인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자유를 우리가 가져야 하리라.

하늘을 담는 그릇 Embracing the Heaven

하늘을 담는 그릇  Embracing the Heaven
짐 근처에 삼림공원이 있어 자주 방문한다. 걷는 길은 숲이 많아 자연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며 원더 워킹 묵상을 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겨울철에 잎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뻗어 있는 것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더니 잎이 나고 뻗어 나며 풍성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 같았는데 곧 잎이 무거운지 가지는 땅으로 숙이고 하늘이 가려 잊어버리고 땅을 누리는 것 같다. 성경통독 말씀을 들으며 주와 친밀함을 가진다. 
걷는 길은 크고 작은 네 호수 길이라 많은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봄마다 타운에서는 호수에 송어를 방류하는 기간을 가지고 낚시꾼이 즐기게 한다. 나는 낚시하지는 않지만 낚시하는 사람들이 조용하게 인내하며 고기가 물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때로는 누군가 고기를 잡아 올리면 함께 기뻐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봄이면 오리와 캐나다 거위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모이더니 어느 새 많은 애기들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엄마는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아빠는 뒤에서 주변을 살피며 가족의 안전을 지킨다.  열심히 헤엄치고 풀에서 양식을 찾아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더니 부모 품을 떠날 정도로 크게 되어 날아간다. 이런 자연의 변화에서 나 자신의 변화를 보며 순응하는 것을 배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호수에 비치는 하늘을 보는 것이다. 하늘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지만 하늘이 호수에 비치고 호수가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은 감동이다. 큰 호수는 큰 대로 작은 호수는 작은 대로 하늘을 담고 있어 호수는 하늘을 담는 그릇이 된다. 맑은 하늘만 아니라 하늘의 여러 형태의 구름이든지 해와 달, 하늘을 나르는 새와 비행기 모두가 조용한 호수에 담기고 호수 주변의 숲들이 그대로 나타나 보여 호수는 신비로운 거울과 같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의 얼굴도 비친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일고 물결이 치면 호수가 담고 있던 하늘이 흔들리더니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 호수를 지나면 풀과 이끼가 여기 저기  있는 호수를 만난다. 이 호수도 같은 하늘 아래 있어 하늘을 담고 있으나 제 모양이 아니다. 여기 저기가 가리워져 있어 보이는 부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얼마나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호수에 달려 있다. 그것을 지나 만나는 호수는 전체가 이끼에 덮여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은 하늘 아래서 길 하나로 나뉘어 있는 호수 가족으로 같은 하늘을 담는 그릇이지만 하늘을 담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 호수의 형편이다. 
이를 보며 호수는 내 마음이라 생각된다. 내 마음은 하늘과 하나님을 담도록 만들어진 그릇이다. 하나님을 담을 때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청결은 주께서 처음 외치신 말씀처럼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서 된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정결하여도 세상 물결이 들어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 염려와 걱정 정욕의 이끼가 마음을 덮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주여 나의 마음을 정하게 하시고 이끼를 걷어내어 주 안에서 고요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담고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기도한다. 

깨끗하게 하리라 To Be Cleansed

깨끗하게 하리라 To Be Cleansed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어떨까? 태초에는 모두가 어둠이요 혼돈이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빛이 들어오니 사물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 우리를 비치시고  빛은 생명이라 우리가 그 안에 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을 얻는다.
빛은 실상을 보여준다. 밤에는 창문이 어떤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빛이 비치면 창문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보고 알게 된다. 안경도 그러하다. 안경이 깨끗해야 잘 보이기에 자주 닦는다. 불순한 것을 닦아 내면 새롭게 잘 볼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고 관리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은 우리 속 마음은 어떠한가?  겉으로 좋은 옷을 입고 단장을 하여 흠이 없는 것 같은데 속은 겉과 다를 수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 위선이라 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 하며 그들을 회 칠한 무덤이라 부른다. 겉은 아름다운 비석을 세우고 있으나 속은 썩은 송장이다. 그들 속에서 나오는 것은 탐욕과 거짓 교만과 분노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속의 더러움을 어떻게 정결하게 할 수 있나? 주께서 빛으로 그 더러움을 보시고  나의 더러움을 비치고 나에게  보여주실 때 내가 인정하고 내가 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의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은 나를 사랑하기에 자기 피로 나의 죄를 씻어내고 정결하게 하신다. 오직 예수를 통해사민 죄를 씻고 깨끗함을 입는다. 우리 수도물에 한 때 정수기를 사용하였다. 보기에는 좋은 식수 같은데 조사를 하여 불순물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정수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시에서 물 근원을 정수함으로 이제는 맑은 물을 마시고 있어 감사하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데리고 왔다.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임을 담한다. 어떻게 할까요 하며 주를 시험한다.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모두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씩 돌아가고 여인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은다 돌아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용서 받은 자는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나 과연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은 다시 넘어진다. 어떻게 하나? 창문이나 안경을 깨끗하게 닦지만 다시 또 더러워진다. 다시 닦는다. 우리가 다시 죄를 저질러 심령이 더러워져도 낙심할 것이 아니라 다시 인정하고 고백하면 주님은 다시 용서하신다.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관용이요 사랑이다. 세상에서는 누구를 정죄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위로하시며 죄를 이기게 하신다. 
용서 받지 못하는 자는 자기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는 거짓이요 위선이지만 스스로 인정하는 죄인과 세리에게는 주님이 가까이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셨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그는 자기 죄를 깨닫는 자에게 친구와 구주가 되심을 말씀한다. 
나는 깨끗한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주의 빛이 비치어 내가 깨끗하지 못하여 부정함을 알고 인정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 위로하시며 깨끗하게 씻기시고 새 옷을 입혀 주시기에 평안과 자유를 가지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