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4, 2020

자 유 Liberty

  Liberty
이민 초창기 전문직이 아닌 사람은 더욱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한국에서는 자기를 펼치며 편하게 살았더라도 여기 와서는 살기 위하여 야간 청소를 하든지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작은 사업을 시작하고 남여 모두가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뛰었다. 아내는 남편보다 일이 더 많았다. 하루 종일 같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대개의 남편은 신문이라도 읽는 시간을 가지는데 아내는 바로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정말 힘들게 살았다. 그래도 미국이 좋단다. 미국의 자유가 좋단다. 전에는 남의 눈치보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 자동차, 아파트나 집, 학교 어떤 것이든지 비교가 되어 어른이나 아이들이 마음에 자유가 없었지만 여기서는 이런 면에 마음이 편하고 자유롭다.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다.
미국이 처음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원주민이 살고 있던 이 넓은 대륙에 영국이 식민지를 개설하였다. 1607년 일차 개척자가 도착하여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건설하고 그 후 계속 사람이 옮겨 왔다. 청교도들은 국교의 박해를 피하여 화란으로 갔다가 새로운 땅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1620년 출발하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버지니아였으나 풍랑에 밀려 도착한 곳이 Cape Cod로 여기서 제임스타운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대륙이 발전하여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펜실바니아 뉴욕 등 13개 식민지가 되고 각각 대표자를 뽑아 미국대회를 만들었으나 영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제한을 가하였다. 1차 버지니아 대회에서 영국 죠지 왕에게 부당한 세금정책에 대해 많은 항의를 하자 왕은 더 강경하였다. 1775 3 23 2차 대회로 버지니아 리치몬드 성요한 교회에서 모여 영국과 갈등 완화를 의도하였다. 참석자 120여명 중에는 나중 대통령이 될 죠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도 있었다. 연사들 중에 변호사 Patrick Henry는 대륙이 각 식민지로 구분되고 있어 자기는 그동안 버지니아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버지니아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라고 천명하며 눈에 불꽃이 튀듯이 미국이 영국의 위협에서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군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며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letter opener를 가슴으로 향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외치고 앉았다. 회중은 숙연해지고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이것이 미국 독립선포의 도화선이 되고 결국 독립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내고 자유를 쟁취하였다.
자유는 쉽게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군인들이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쳐서 획득한 것이다. 이를 뉴멕시코 군사학교 공군대령 Walter HitchcockFreedom is not Free로 표현하며 민주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군인들의 모험과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 자유를 위하여 생명 바친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군인들에게 자유를 위한 희생을 격려하였다. 이 구절은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의 한 벽에 새겨져 있어 낯선 땅 한국의 자유를 위하여 38개월간의 전쟁에 참가한 미군 150만과 33,652 전사자에게 경의와 추모를 표하고 있다. 오늘 한국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이런 희생에 의한 것이라 한국은 큰 빚을 지고 있다. 미국은 자유를 위해 독립전쟁에서 아프칸전쟁까지 수많은 전쟁에 참전하여 120만명 정도가 생명을 잃었고 지금도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생명과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고 있다.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아 자유를 위한 미국의 헌신에 감사하며 나도 그렇게 살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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