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2, 2025

우리 하나님 여호와 LORD Our God

우리 하나님 여호와 LORD Our God 100여년 전 할머니는 둘째 아들이 병든 때 그가 섬기는 신들에게 빌고 굿까지 하여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멀리 사는 친척이 ‘예수 믿으면 병이 나을텐데’ 하기에 시도하기로 했다. 산을 넘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예수를 믿고 기도하였다. 아들의 병이 나았다. 그는 참 신을 만난 감격으로 그간 모시던 모든 신을 파기하고 열성으로 예수를 믿었다. 조상이 섬기던 신들과 전통을 버린 것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한계를 가진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을 찾고 그에게 구한다. 로마는 만신전을 세워 섬기며 그것이 나라 부강의 근간이라 생각하였다. 바울이 아덴을 방문하여 많은 신전을 보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것도 보았다. 알지 못하여 빠뜨림으로 화를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집트도 많은 신상을 만들고 섬김으로 강대국이 되었다고 믿었다. 히브리인들이 그곳에 살며 번창하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노예로 삼고 학대하며 고역을 시켰다. 히브리인은 고통속에 부르짖지만 그들을 도울 자가 없다. 조상의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양치는 모세를 만나신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며 이집트에서 압제 받는 백성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 하신다. 모세는 조상의 하나님이 생소하여 그 이름을 묻는다. 신은 바알 그모스 등 이름이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신다. 누가 만들지 않았고 그는 모든 있는 것의 근원으로 시공을 초월하며 언제나 살아 일하는 자라는 말이다. 모세는 설득과 굴복을 당하여 그 일을 맡았다. 이집트와 그들의 신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40년간 광야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있는 자’는 누구보다 강하고 사랑이 있는 분임을 확인하였다. ‘스스로 있는 자’는 히브리어로 YHWH 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에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아버지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절대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스스로 있는 자’가 나오면 ‘나의 주 ‘곧 아도나이 (Adonai)로 부르고 그 모음을 붙여 우리 말로는 여호와라 한다. 하나님은 일반 이름이나 여호와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이름으로 모세를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었다. 나라를 건설한 히브리인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 바알을 숭배하였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여 3년6개월간 우로를 내리지 않았다.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과 여호와 중에 누가 참 신인가 시험하기를 제안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가 모였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얹어두고 기도하여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불의 신이라는 바알은 그 많은 선지자의 부르짖음에도 응답이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자 불이 제물과 제단을 모두 태웠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택하여 섬기라’고 한다. 여화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을 얻는 약속을 하신다. 그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여호와이심을 확인시킨다. 할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어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일하신 것을 감사하며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144:15)를 다윗과 함께 고백한다.

그대는 어린아이인가?Are You A Child?

그대는 어린아이인가?Are You A Child? 너는 어찌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가 하는 말을 듣는다. 나이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철이 없고 순진 천진하고 거짓 없이 솔직하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본다. 이런 어린아이는 고대로마사회나 성경에서도 인구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예수님 주위에 수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다. 시간도 배고픈 것도 잊는다.주께서 그들을 먹이고자 하나 가진 음식이 없다.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았다. 자기가 먹을 것을 그대로 드렸다. 예수께서 축복하고 나누어 주게 하니 배부르게 먹은 사람이 5천명이나 이 수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음식을 제공한 어린아이라도 숫자를 말할 때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어린아이는 믿을만한 책임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라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거나 가정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 대상이기에 그에게 책임을 맡기거나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생존율이 낮았기에 그가 얼마나 살지 보장이 없다. 태어나지만 작명이나 출생신고를 미루기도 하고 때로는 죽은 형의 이름과 생일을 받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는 질서를 잘 지키지 못하고 마음대로 떠들기에 어른의 모임에서 제외되고 그들을 물리치기도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며 그들을 안고 축복하며 사랑하시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그는 어린아이를 어른과 꼭 같은 인격체로 인정하고 천국을 허락하신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방정환 같은 선각자가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하였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천국을 소유하는 표본이 되나? 어린아이는 감동이 많고 감수성이 강하며 잘 신뢰하고 따르며 의지하기에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이 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에 감동을 받고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영접하지 않겠나? 어린이가 천국에 들어가면 어른은 들어가지 못하는가? 확실하게 들어간다. 어린아이와 대조되는 어른의 특성은 독립성이 강하며 감정을 표현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깊이 생각하고 평가하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가 한 말이나 일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다. 이런 어른이라도 어린아이 같은 감동과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일단 확인하고 믿게 되면 확실하게 신뢰하고 그것을 나누고 전하며 이 일에 평생을 헌신하기도 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 뛰노라/삶이 시작할 때 그러했고 자금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라/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나는 나의 모든 날이 자연 경외로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한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한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릴 때의 감동과 경험이 어른의 바탕이 된다. 어릴 때 무지개를 보던 감동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 창조주의 자연세계를 감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을 주는 사랑과 은혜에 감동하여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을 맡긴다면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믿음이 아니겠는가. 어린아이가 주의 품에 안기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주 앞에서 어린아이인가 스스로 묻는다. test

모든 산 자의 어머니 Mother of All Living

모든 산 자의 어머니 Mother of All Living 니카라과 단기선교를 갔을 때 만난 한 여인에게 아이 여섯이 있었는데 이들의 아버지가 다 다르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고 밝고 행복하게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니카라과는 한 때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는데 점령자들이 지나가며 여인들을 임신시키던 행태가 남아 있어 지금도 아버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자 없이는 생명이 생기지 않지만 아버지를 몰라도 엄마는 애기를 낳아 잘 기르고 있는 것이 장하였다. 이 여인이 살아 있는 여섯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며 아담이 그 아내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부른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처음 아담과 그의 배필 여자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고 축복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출산하게 했지만 그보다 앞서 생명 자체를 위한 명령을 주셨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살려면 그 명령을 지키고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간교한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그것을 바라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것 같아 그것을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들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나무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으면서 뱀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자 그는 잘못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형벌로 아담에게는 가시가 있는 땅을 개간하는 수고와 여인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고 뱀에게는 배로 다니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였다. 평화롭고 안전하던 땅에 고통과 갈등이 왔다. 그때 아담은 아내를 하와(생명)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이름하였다. 어머니는 근원이라는 말로 살아 있는 아이를 출산하여 어머니가 되고 모든 산 자는 그에게서 시작하여 내려간다는 의미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에 따라 이들은 죽었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의 대가로 일하는 수고와 임신과 해산의 고통을 겪게 하시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살아 있는 것을 알았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말은 생명을 가지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 뿌리를 두고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마(움)가 품고 보호하며 생명으로 결실하도록 인내한다. 여자의 후손에서 죄를 짓게 한 뱀, 곧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예수께서 태어나고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고 부활함으로 죄와 죽음을 가져온 사탄을 정복하고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셨다. 하와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생명 공동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뜻을 따라 그의 생명사역에 참여한다. 교회는 또한 어머니로서 믿는 자들을 품고 보호하며 자라게 하고 또한 주의 생명을 나누고 많은 사람을 초대함으로 새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간다. 산 자의 어머니 하와로 시작된 생명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뻗어가면서 세상의 모든 산 자가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산 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test

만남 Encounter

만남 Encounter 숲길 아파트 옆으로 겨울동안 앙상하던 나무들이 봄 기운의 햇빛을 만나며 꽃을 피우고 잎을 내더니 어느새 숲을 이루어 간다. 사람도 만남으로 삶의 방향과 인격이 형성된다. 부모와 만남은 인생의 첫 단추로 중요하다. 시각 청각을 상실한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을 만남으로 삶의 힘과 희망이 싹트고 교육가 작가 사회운동가로 꽃피웠다.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엘리트로 조지아 원주민 선교사로 2년간 사역하였으나 실패를 자인하고 돌아가는 배에서 폭풍에 시달리며 죽음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놀란 일은 갑판 한 곳에 둘러 앉아 조용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두렵지 않은가?’ 물었더니 애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이 애기가 두려워할까요’ 반문한다. 그는 충격을 받고 그들 모라비안늘이 모이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체험하고 감리교 창시자가 되었다. 간디가 예수님 산성설교를 읽으며 그 정신이면 인도의 계급제도를 철폐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남아프리카를 방문 중 교회를 찾았다. 안내자가 그를 보더니 잘못 왔으니 건너 편에 있는 (흑인)교회로 가라고 한다. 간디는 ‘이것이 기독교의 실상이라면 나는 평생 힌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누구를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가장 위대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예수를 믿고 기대하며 따르던 제자들은 그가 잡히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보며 실망과 좌절 두려움으로 숨어 있다가 살기 위하여 고기 잡으러 나갔다. 한 마리 잡지 못한 새벽에 누군가 바닷가에 서서 지시하는 대로 따랐더니 그물 가득하게 고기가 잡혔다.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았다. 주님은 모닥불과 조반을 준비하여 그들을 영접하고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고 사명을 맡겼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삶을 바쳤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기에 사람을 만나신다.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척결하던 사울은 해보다 더 밝은 빛속에서 그의 이름을 거듭하여 부르는 이가 바로 자기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뒤집혔다. 그는 박해하던 예수를 생명의 주라고 전파하고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세웠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에서 왕위 쟁탈전쟁을 하던 콘스탄틴은 십자가로 이기라는 환상을 보고 승리하여 왕이 되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법학도가 되려던 루터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천둥번개를 만나 둘이 땅에 쓰러지며 ‘성인이여 나를 살려 주시면 수도가가 되겠나이다’ 약속하고 살아나 수도사가 되었다. 윗덴베르크 대학 교수로 강의하며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95개조 토의 제목을 게시한 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근대 기독교 역사에서 무디, 스펄전, 가가와 도요히꼬, 이성봉 등은 모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되고 쓰임 받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으며 많은 체험이 있어도 믿음의 굴곡을 겪는다. 나는 1978년 수난주간 금식하며 목요일 세족예배를 하고 큰 시험이 덮쳐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밤 성금요일을 맞았다. 부활주일을 어떻게 맞이하나? 고민하며 토요일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강단에서 나를 바라보신다. 순간 나의 어둠은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교수에서 목회자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고 평생 살아 계신 예수님을 전하며 섬기는 기쁨과 감격을 가진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하며 달려가게 하신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