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3, 2025

새 일 The New Thing

새  일  The New Thing
미국에 이민한 사람은 대개 이전과는 다른 새 일을 한다. 생존과 적응, 편리와 유익을 위한 발전이 역사의 사실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처럼 지금 있는 것이 이전에 있었고 새 것은 금방 옛 것이 된다. 종류와 기능은 달라도 삶을 위하여 항상 시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완전히 새 일을 행하신다 (사43:19)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 창조주로서 자연과 사람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이집트 노예에서의 해방은 새 일이지만 그것은 바벨로 포로귀환에서도 본다. 새 일이지만 이전에 또한 있던 일이다.
가장 새로운 일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죄의 문제 해결이다. 죄를 범한 사람은 법에 따라 형벌을 받고 보상 또는 제례를 드리고 사면 받지만 다시 죄를 반복한다. 죄의 결과인 죽음은 보편적이라 여기서 면제 받을 사람은 없다. 죽음을 애도하지만 죽음의 원인인 죄를 슬퍼할 것이다.
자식이 죽을 병으로 고생하거나 범죄로 중형이나 사형 판결을 받을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부모를 거역한 자식이라도 부모는 그를 대신하고 싶고 그 죄를 소멸하고 싶으리라. 하나님은 이런 심정으로 새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사람 예수로 와서 죄로 죽음에 처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 죄의 벌을 받고 죽음으로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의 사면과 영생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전적으로 새 일이요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다. 예수를 사형집행한  로마 군인이 죽음을 확인하고 그는 무덤에 장사되었다. 그가 무덤으로 끝이 나면 어떨까? 일반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리라. 
그가 의도하신 죄 용서와 구원 영생을 이루려면 무엇인가 달라야 할 것이다. 그는  무덤에서 살아 일어나 많은 사람에게 보이시며 그가 부활한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 사렙다 과부의 아들,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등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지만 이들은 얼마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다. 부활한 주님도 그랬다면 일반 사람 중에 들어갈 것이다. 
그는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나 그가 산 것을 확인시키고 사랑을 나누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하늘로 올리어 가셨다. 그는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땅에 오신 인류 대속의 사명을 완성하고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이는 인류 역사에 처음 일어난 새로운 일로서 이제 누구든지 그를 메시아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면 사죄와 구원 영생을 얻는다. 예수를 믿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 곧 거듭난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일찍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고 이는 물(육체)로 난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였다. 죄로 주의 영이 떠난 육체의 상태에서 주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 기쁨과 감격으로 전도하니 모인 15나라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말로 알아듣고 자기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세례 받고 교회를 이룩하였다.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이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 약속대로 그는 다시 오시어 죄와 죽음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으로 믿는 자를 옮겨 영원히 주와 함께 사는 것이 마지막 새일이요 모든 성도가 기대하는 바다. 주의 고난과 부활을 체험하며 오실 주님과 낙원의 새 삶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Saturday, April 12, 2025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d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d
지난 주일 교회에 들어서니 찬양대가 ‘세상 죄 지고가는 어린양 보라’는 찬양을 연습하고 있어 나는 그 말씀으로 관상기도를 하였다. 
양은 성경의 배경 중동지방에는 지금도 그때와 같이 많다. 양은 개인의 소중한 재산이며 양식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된다. 야곱, 모세, 다윗은 모두 양을 쳤고 양은 목자가 없으면 방향감각 부족으로 쉽게 길을 잃고 유순하기에 맹수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양은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이름이지만 어린양은 1년 미만으로 주인의 사랑과 돌봄을 많이 받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하자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고 그를 중단시키며 숫양을 제공하여 제물로 드리게 하였다.  이후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죽이는 밤에 이스라엘은 가족별로 일년 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가족은 안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때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그 집 문에서  피를 보며 이미 누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지나갔다. 이것이 유월절로서 이스라엘은 쫓겨나듯이 애굽을 탈출하여 자유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죽음을 면하고 해방을 얻었다. 여기서 죽임 당한 양은 일년 된 수컷으로 10일에서 14일까지 5일동안 가족과 함께 지나게 하였다.
일년 된 어린양은 건강하고 생명력이 제일 왕성한 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최상의 것으로 한다. 수컷은 가족을 대표하고 5일간 함께 지난다는 것은 흠이 없이 온전한가  관찰하는 기간이며 동시에 친밀한 사랑을 나누며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양이 죽어 피를 흘림은 가족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으로 전체 가족이 살고 해방을 얻는다.
여기서 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양으로 제물을 드리고 사죄를 선포하나 이는 매년 반복된다. 양이 죽음으로 그들은 한 해의 죄를 용서받지만 어린양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일회적이요 영구한 것이다. 이 유월절을 유대인이 매년 지키며 그날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양이나 어린양의 희생은 상징적인 의미로는 충분하지만 양과 사람의 생명이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 생명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존귀하다. 사람의 생명을 대속하려면 양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아들 예수로 세상에 오셨다. 세례 요한은 그를 가리키며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그는 죄가 없이 온전하시다. 유대지도자들은 그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신성모독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법의 나라 로마의 총독은 그에게 어떤 죄를 찾지 못하면서도 민중의 소리에 굴복하여 예수를 33세 생명과 사역 절정기에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는 고통속에 최후를 마치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며  누구든지 그 피를 문인방에 바르듯이 자기 심령에 받아 믿으면 그는 죄의 속박과 죽음에서 해방과 영생을 허락하신다. 
유대인이 유월절을 지키듯이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에 어린양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참회하며 동시에 죄 용서와 생명을 확인하며 찬양하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닌가
The Lamb of God

Last Sunday, as I entered the church, the choir was rehearsing the hymn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I meditated on that Word through contemplative prayer.

In the Middle Eastern context of the Bible—just like back then—sheep are still plentiful. They are valuable property, a source of food, and are used as offerings to God. Jacob, Moses, and David all tended sheep. Sheep easily lose their way without a shepherd due to their lack of sense of direction, and because of their gentleness, they often fall prey to wild animals. While “sheep” is a general term, a “lamb” refers specifically to one less than a year old, receiving much love and care from its owner.

When Abraham tried to offer his only son Isaac as a burnt offering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God, having confirmed his faith, stopped him and provided a ram to be sacrificed instead. From then on, the priest would offer a lamb to God on behalf of the people.

On the night of the final plague that God sent to free Israel from slavery in Egypt—the death of every firstborn—each Israelite family slaughtered a one-year-old lamb, painted its blood on the doorposts and lintel, and ate the roasted meat inside. When the angel of death came and saw the blood, it passed over that house, knowing a death had already occurred. This is the origin of Passover. Israel escaped Egypt like fugitives and became a free people. Through the slain lamb, they were spared from death and granted liberation. This lamb had to be a one-year-old male, kept with the family from the 10th to the 14th day—five days.

A one-year-old lamb is at its healthiest and most vigorous, symbolizing that only the best is to be offered to God. A male represents the family, and the five days of dwelling together allow time to observe whether the lamb is without blemish, while also building intimacy and bonding as part of the family. When that lamb dies and sheds its blood, it substitutes for the family; through its death, the whole family lives and is freed.

The priest offers the lamb as a sacrifice on behalf of the people and proclaims forgiveness, but this must be done every year. While the lamb’s death provides forgiveness for a year, the deliverance of Israel from Egypt through the lamb’s blood was a one-time, eternal act. Jews commemorate this Passover every year with remembrance and gratitude.

While the sacrifice of a lamb is symbolically powerful, the life of a lamb can never be equal to that of a human. Human life i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and is of such great worth that not even the whole world can replace it. To truly redeem human life, a lamb is not enough—it must be a sinless person. So God Himself became a man and came into the world as His Son, Jesus. John the Baptist, seeing Him, declared,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esus, being both God and man, was without sin and perfect. Jewish leaders accused Him of blasphemy for claiming to be the Son of God—a charge punishable by death. Yet the Roman governor, though finding no fault in Him, succumbed to the crowd and sentenced Jesus to be crucified at the age of 33, the peak of His life and ministry. In His agony, Jesus prayed, “Father, forgive them.” As the Lamb of God, He shed His blood, and whoever receives that blood—not on a doorpost, but in their heart through faith—is granted release from sin and death, and given eternal life.

Just as Jews observe the Passover, Christians during Lent remember the suffering and death of Jesus, the Lamb of God. They repent, affirm forgiveness and life, and give praise—what greater blessing could there be?



왜 광야인가? Why Wilderness?

왜 광야인가? Why Wilderness?       
한국은 세계 역사의 기적이다. 조그만  나라가 긴 역사에서 국호를 잃은 것은 오직 일제 35년이라 이런 나라는 없다고 미국의 신학 윤리정치 역사가 라인홀드 니이버 Reinhold Niebuhr 는 말하였다.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역사는 광야였다. 광야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절대 부족이라 삶은 투쟁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때가 그러하였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인천)에 도착하고 복음 전도 사역을 시작함으로 은둔의 나라는 서방세계에 소개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시대가 2차대전 종료와 함께 끝이 났으나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남한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착도 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나라는 초토가 되고 휴전을 하였으나 나라는 광야였다. 당시 세계 130여 나라 중에 가장 가난한 나라로 유엔을 위시하여 미국의 원조와 함께 나라 재건을 위하여 지도자가 앞장 서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꿈으로 국민 모두 팔을 걷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부르짖었다. 교회마다 철야기도 산마다 기도원으로 금식하며 부르짖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이 과연 계시고 신도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가!  반란과 혁명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나라는 앞으로 달렸다. 고속도로  교통시설, 회사 설립과 공장 건설,24/7 생산과 수출에 모두 땀과 피를 쏟았다. 나라는 틀이 잡히고 세계 올림픽 경기를 주최하고 IMF 세계 경제대란을 이겨내며 세계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갔다. 놀라운 기적으로 광야가 낙토로 바뀌어 갔다. 모두의 합심 협력이지만 하나님의 도움이시다. 어느덧 가난은 옛말이 되는 것 같다. 자랑스런 민족이요 믿을만한 하나님이다. 
나라가 경제대국 10위에 들어갔지만 개인의 만족과 행복지수는 경제발전국 중에 밑바닥이고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하위, 보이는 것으로 비교 경쟁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듯 철야기도 산상기도는 역사에만 남고 감사와 웃음을 모르고 스트레스와 우울 좌절에 시달리는  인생 광야가 되었다. 낙토의 모습은 사라진다. 다시 부르짖을 때가 돌아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복주시고 후손에게 낙토를 약속했지만 그들은 이집트로 가서 안전하게 살며 번창하자 이집트는 그들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노예로 삼아 고역을 시켰다. 그들은 고난 속에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이들을 해방하였다. 자유를 찾은 기쁨은 잠간, 홍해가 앞을 막고 이집트군대는 뒤를 추격하였다.죽음의 두려움으로 부르짖자  홍해는 갈라지고 그들은 육지로 건넜으나 추격하던 이집트군인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낙토를 향해 출발하지만 그 길은  광야다. 물도 양식도 길도 없다. 그 때마다 부르짖고 하나님은 응답한다. 광야와 낙토가 계속 교차한다. 왜 그럴까? 낙토만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살 것 같기에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며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다. 어느 누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 
인생의 가장 큰 두려움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심판이라 이에 부르짖음이 크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그는 가난과 질병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을 해방하여 낙토를 경험하게 하였다.최후의 언수 죽음을  인간 대신 죽음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에서 해방과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주셨다. 광야 같은 그의 고난 죽음은 믿는 자에게 영광스런 낙토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는 주께 더욱 감사한다.  

하나님과 대화 Talking with God

하나님과 대화   Talking with God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며 아파트 옆 숲길을 걸으며 많은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을 듣는다. 서로가 짝을 찾고 새 삶을 시작하자는 꿈으로 가득하다. 사람도 대화를 하며 서로의 형편과 소식 의견 감정 등을 나누며 마음이 통하면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다시 대화하기를 기대한다. 때로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상대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이 끝을 내는 수도 있다. 그간 말을 하지 못하여 속에 쌓인 것을 쏟아내는 것이라 이해를 하지만 소통의 즐거움은 별로 맛보지 못한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소중하지만 하나님과 소통하는 대화는 더욱 귀하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만든 사람과 인격적으로 대화하기를 기뻐하신다. 이 대화를 잘 진행하는 자들은 역사에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나이 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자 그의 아들과 후계자, 소돔의 운명 등을 서로 친구처럼 대화하였다.  하나님과 대화하면 삶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온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기도로 표현되고 응답을 받는다. 다윗과 예수님에게서 본다. 우리의 기도는 대화인가 아니면 일방적인 요청인가!? 기도는 대화라 내가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직접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또는 주어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음성을 들을 수도 있다. 듣고 그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면 하나님에게 얼마나 기쁨이 될까?
내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나의 삶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고등학교 시절 법대에 가기로 작정하고 준비하였다. 어느 날 음성이 들린다. 종형아 너 법대에 간다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의 응답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법대에 가면 무엇 하는데? 결국 판사가 되겠지요. 판사는 무슨 일을 하는데? 송사가 있을 때 양쪽 말을 듣고 법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요. 그래! 그런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내 사랑을 전하면 어떻겠어? .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그는 나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알겠습니다.  대화는 끝이 나고. 내 삶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신학공부 준비를 위해 대학 전공을 택하고 전도사 목사  사역 40년에 은퇴를 하며 나와 아내는 이제 자유롭게 여행하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자 하며 한달 여행을 하는데 당시 치료가 없다는 대상포진이 옆구리에 왔다. 한달동안 그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뭐라고? 40년 일을 하였으니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40년이면충분하지 않습니까? 네가 나와 한 말을 기억하지 않나? 하시며. 그로부터 43년 전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라는 말씀을 주시고 나를 회복시키고 그후 건강하게 사역하게 하신 것을 기억시키시며 살아 있는 동안 할 일이 있지 않는가 하신다.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잘못하였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목회자가 없는 교회의 부름을 받아 교회 장로들을 만난 첫날 저녁 내내 평생 최대의 웃음을 함께 웃었다. 이 웃음으로 내 속에 있던 목회의 스트레스 아픔이 모두 씻겨지고 자유와 기쁨으로 사역하며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놀랍지 않은가!
기도는 대화로 주의 음성을 듣고 대가 응답하며 주의 뜻을 이루고 나는 기쁘고 주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겠나!



Talking with God

Walking along the forest path next to my apartment, feeling the full presence of spring, I hear the joyful chirping of many birds. They are filled with dreams of finding a mate and starting a new life. Humans, too, communicate with one another, sharing their circumstances, news, opinions, and emotions. When hearts connect, conversations bring happiness and joy, making us look forward to speaking again. However, sometimes, one may speak only of their own matters, unwilling to listen to the other, ending the conversation without true exchange. While I understand that some speak to release what has been pent up inside, the joy of true communication is lost in such cases.

While communication between people is precious, conversation with God is even more valuable. God delights in personally communicating with those He created in His image. Those who engaged in such dialogue with Him throughout history were blessed. When the elderly Abraham responded to God’s calling, they conversed as friends about his son, his successor, and even the fate of Sodom. Speaking with God brings renewal and transformation to life.

Our conversations with God take the form of prayer, and through prayer, we receive answers. We see this in the lives of David and Jesus. But is our prayer truly a conversation, or is it just a one-sided request? If prayer is a conversation, can we listen to God’s words before we speak? Sometimes, we may hear Him directly, or we may recognize His voice through the words of Scripture. Imagine how much joy it would bring to God if we not only listened but also respected His guidance!

For me, talking with God changed the direction of my life. In high school, I had decided to study law and was preparing for it. One day, I heard a voice:

“Jonghyung, you plan to study law?”

I immediately recognized it was God.

“Yes, that’s what I’m thinking.”

With that response, our conversation began.

“And what will you do if you go to law school?”

“Eventually, I’ll become a judge.”

“And what does a judge do?”

“They listen to both sides in a dispute and determine right from wrong according to the law.”

“I see. But what if you leave the task of judgment to Me and instead spend your life sharing My love?”

He spoke gently, then waited for my response.

“Alright.”

That conversation ended, and the course of my life completely changed. I chose my university major to prepare for theological studies, became a pastor, and served for 40 years before retiring. My wife and I then decided to finally live for ourselves, embarking on a month-long trip. However, during that time, I developed shingles—an illness said to have no cure—on my side. I had never experienced such pain in my life.

I asked God, “What is happening?”

“What did you say? After serving for 40 years, you now want to live freely for yourself?”

“But isn’t 40 years enough?”

“Do you not remember the words we shared?”

He reminded me of something from 43 years earlier. At that time, I was wandering through the valley of death, but He had given me a promise: ‘You will not die but live and proclaim the works of the Lord.’ He had restored me and enabled me to serve in good health. Now, He asked, “Do you not still have work to do while you are alive?”

I had no more words.

“I was wrong. I will obey.”

The next day, I received a call from a church without a pastor. That evening, I met with the church elders, and together, we laughed harder than I had ever laughed in my life. That laughter washed away the stress and pain I had carried from ministry, filling me with freedom and joy. Was this not the amazing grace and mercy of God?

Prayer is a conversation—hearing the Lord’s voice, responding, fulfilling His will. This brings joy to us and glorifies His name. What greater blessing could there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