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0, 2020

누구의 의견 (오피니언) Whose Opinion



누구의 의견 (오피니언) Whose Opinion (11/5/20) 

 역사상 유례 없는 대선이 끝났다. 팬데믹 한 가운데 국론은 양분되고 갈등과 대결이 심화하던 가운데 우편, 조기 또는 당일 투표로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였다. 투표는 자기 의견 표시다. 의견은 스스로 판단할 수도 있고 남의 의견을 참조하거나 또는 정당의 방침을 보며 결정이 된다. 의견 조성에 언론과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이 좋아하면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주택, 학교나 가족 의사, 자동차나 보험 등을 결정할 때 소위 리뷰라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한다. 의견은 어떤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전문가 또는 경험자의 판단이지만 이는 개인의 이해 관점 느낌 욕구 신념에서 나온다. 여론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모은 것이기에 정치인도 존중하고 따르며 투표에서 다수가 승자가 되는 것이 오늘 민주주의 사회다. 그렇다면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일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던 시대에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의 지동설을 말하다가 이단으로 몰렸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며 재판자리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 의견이지 사실이 아닌 것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현대 과학의 근거가 되기에 그 잘못을 알면서도 고집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 창조의 신비나 자연의 조화를 바꿀 수 있을까? 한 친구가 수년 전 직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다는 연락을 해 왔다. 수술하면 항문이 막히어 평생 주머니를 차야 할 것이라고 하니 의사의 말은 반반이라고 한단다. 함께 기도하고 맡겼는데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 의사가 이전에 반반이라고 한 것을 80/20으로 교정한다고 하였다. 그 말에 친구는 수술 받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대학병원을 찾아 갔더니 암의 흔적조차 없었다. 첫 의사의 오진인지 아니면 기도의 응답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나이 80이 되는 그는 감사하며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 사람의 판단과 의견이 그대로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과학자 정치인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지기에 남의 의견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자기 생각에 바른 길 같아도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있고 잘못된 것 같으나 생명을 얻는 길이 있다. 사람의 의견이 서로 다르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은 더욱 다르기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른 것이 하늘과 땅의 차이 같다” (사55:8) 하신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한다 (잠29:25). 누구 의견이 바른 것인가?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을 보고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나님이 없거나 죽었기에 저런 것이지!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존재나 의도를 결정할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사정이나 편리에 따라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며 낙태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체를 태속에 지을 때부터 알고 있다고 하신다. 아이가 태어날 때 남녀 구분을 하지 않고 그 아이가 자라나며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람은 생명을 위해 종교를 추구하지만 모든 종교가 동일할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Wednesday, November 4, 2020

역사의 주인 The Lord of History

 

역사의 주인 The Lord of History 

지난 10월12일(둘째 월요일)은 콜럼버스데이로 1937년 미국이 공휴일로 정하여 그가 1492년 10월12일 바하마 섬에 도착함으로 아메리카 개척과 발전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미대륙 발견은 콜럼버스의 해양 개척정신과 스페인 왕의 진취성이 결합되어 각자 부와 명성을 얻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진행된 탐험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날을 원주민의 날로 이름을 바꾸는 주와 나라가 일어난다. 콜럼버스가 도착함으로 바하마와 미대륙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는 길을 열었기에 정복자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원주민은 생명과 재산 모두를 잃은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과 나라의 사건, 이들의 연관성을 기록한 것으로 그것은 힘 있는 정복자가 자기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역사를 정복자의 관점이 아니라 정복당한 자의 입장에서 보자는 새로운 운동이 남미에서 일어났다. 이는 약한 자의 소리와 역할을 나타내는 해방운동으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고 콜럼버스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바꾸기까지 하며 누가 역사의 주역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실제 콜럼버스와 스페인 왕이 계획한 항해 목적지는 인도로 유럽에서 미지의 아시아로 통하는 길을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미대륙이 발견되고 미대륙을 통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청교도의 미국 도착도 마찬가지다. 섬나라 영국이 세력확장을 위하여 1607년 신대륙에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개척하고 꿈 있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였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지키면서 영국에서 박해를 피하여 제임스타운을 목표로 1620년 출발하였지만 도착한 곳은 제임스타운이 아니라 오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였고 그후 이들이 미국 독립운동과 건국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콜럼버스나 청교도의 항해는 그들의 목적에 비추어보면 실패라 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계획이나 실패, 우연을 넘어 보이지 않은 어떤 손길 곧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을 본다. 미대륙과 미국 역사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힘이 사람 밖에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건들을 묘사하는 역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것이 역사 시작이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자유를 행사하여 바로 자기 생각, 자기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떠날 뿐 아니라 사람사이에도 서로 대결, 투쟁하고 죽이는 죄와 실패를 연속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런 인간에게 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에게 복과 사명을 주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는 75세에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살고 100세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는 인간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통하여 자기 계획을 이루신다. 이스라엘은 큰 나라들의 정복과 포로가 되는 아픈 역사를 경험하는 가운데 역사의 주인 행세하던 정복자들은 사라지고 뒤로 물러 앉는다. 하나님은 미약한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은 약함과 실패로 보이지만 그를 부활시켜 죄와 죽음 아래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의 복을 얻는 길을 여셨다.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의 박해와 투옥, 죽임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시고 박해자 로마를 교회 확장의 도구로 만들며 귀양 중인 죄수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장차 역사가 어떠한가를 보여주신다. 역사(History)는 바로 그분의 이야기(His Story)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목적을 보면서 힘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청교도와 원주민이 함께

                          바벨탑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옥중에서 서신을 쓰는 바울



Wednesday, October 28, 2020

예수님과 정치 Jesus and Politics

 예수님과 정치 Jesus and Politics  

대통령 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는데 정당 대표 후보자의 정책과 치적을 서로 공방하며 정당과 민심이 분리되고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다. 예수께서 오시면 어떻게 하실까 물을 수 있지만 예수의 삶은 전체가 정치와 관련되었다. 로마 황제가 임명한 유대의 헤롯 왕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것을 듣자 그를 죽이려 하였고 예수께서 마지막에 처형된 십자가는 노예 또는 국가 반역자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그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경쟁과 대결의 정치 세상에서 정치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첫 설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며 천국이 하늘에서처럼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하였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다. 
한 나라의 통치는 백성에게 생명과 안녕, 평화와 자유를 제공하며 정의와 공평,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세상 통치는 힘 있는 자의 이기적인 욕심과 투쟁, 거짓과 살상으로 가득하다. 예수께서 선포한 천국은 가난하고 울며 정의를 추구하고 핍박을 당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온유하며 평화를 원하는 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 가르치며 그렇게 살고 활동하였다. 예수는 자기 집이 없는 홈리스로 살며 불치병자, 불구자, 나환자, 귀신 들린 자 등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 생명을 회복하고 돌 맞아 죽을 죄인을 용서하고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둘로 5천명을 배부르게 먹이며 천국 실상을 보였다. 예수에 대한 정치적인 기대로 로마를 뒤집어 엎고 새로운 나라가 올 것을 바라며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의 12제자는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로 소외된 사람들, 혁명당파, 로마에 부역하는 세리 등 모두 나라가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스승 예수를 그리스도라 불렀다.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주라는 의미로 주는 로마 황제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에 대결구조에서 로마 황제를 정복할 주로 기대하였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 운동이 일어났으나 그는 피하여 산으로 갔다. 주님은 오히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로마 장교의 신하를 고쳐주며 세상 권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인정하며 순응하였다. 그가 폭도에게 잡힐 때 제자 중의 하나가 칼을 뽑아 휘두르자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 기도하여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는가 하며 체포와 심문, 형벌을 받아드렸다.  
주님은 심문 받는 자리에서 왕이요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유대 종교회의에서는 그가 영광 중에 올 것이라 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는 그가 왕이요 왕으로 났으며 그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재판관은 그가 위험 존재가 아니기에 무죄로 인정하였으나 백성의 소리에 굴복하여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였다. 죄 없는 그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와 죽음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부활함으로 죽음을 정복한 생명의 주요 영원히 다스리는 왕의 왕 그리스도임을 확인하였다. 
예수께서 설교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에서 천국은 무력이나 혁명이 아니라 회개 곧 마음의 변화, 거듭남에서 일어난다. 성령으로 중생하여 심령에 변화가 일어날 때 가정과 사회 나라가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의 나라가 된다. 주를 믿고 중생한 사람만이 주의 나라 백성이 되고 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오늘 정치인이 회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과 통치를 받아드리는가 함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길이다.
                                    박사들이 왕으로 난 예수를 방문, 왕의 선물 증정
    
                                                                 로마 황제

                                                  예수를 왕으로 삼자는 군중 운동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가!

                                                      새하늘 새땅의 하나님 나라

Thursday, October 22, 2020

눈을 들라 Lift your eyes

 

눈을 들라 Lift your eyes (시121:1) 2020년 10월20일 은퇴 목사 교회 방송설교  

한국 산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한 소년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 숲과 냇물, 꽃과 열매 등이었으나 교통수단은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볼 수 없고 오직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 볼 수 있다. 저 비행기는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나? 산 넘어 어느 동리가 있어 그곳으로 가는가 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다른 나라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진다. 청년이 되어 그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 이민을 오게 되다. 이 소년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눈을 들어 하늘 저편, 바다 저편을 보며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미국으로 왔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며 뻗어나간다. 꿈을 이루고자 밤낮을 달린다. 생각과는 달리 고생에 고생, 지치고 지치면서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고 일만 하다가 스트레스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코비드로 사업은 불황 중 불황이나 문을 닫을 수도 없다. 어느새 나이 들어 은퇴한 사람은 이젠 일을 할 수도 없고 불러 주는 사람도 없으니 마지막 내 삶이 어떻게 되나? 또 다른 걱정도 일어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외국의 공격을 당하다가 결국 나라가 넘어가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외국으로 끌려갔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그들은 마음에 시험과 의심이 일어난다. 포로 생활의 힘든 여정에서 도움을 구하나 도움이 없다. 
이런 형편에 눈을 들어 위를 보라 한다. 무슨 말인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한다. 산은 철이 바뀌어도 여전하고 꾸준한 모습이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다스리신다. 시온산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이 성전은 그들을 하나님과 바로 연결시킨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들면서 그들은 성전과 하나님과 연결된다. 살기가 바쁘다고 매일 삶에 얽매여 땅만 보고 현실만 보며 위를 보지 못하였다. 눈을 들지 못하였다. 눈을 들고 위를 보며 숨을 크게 쉬니 창조주 하나님이 보이고 그가 모든 것을 다스림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움이요 힘이다. 그 힘이 그들로 어떤 형편에서나 굴하지 않고 견디고 이길 뿐 아니라 뻗어 나가게 한다. 세상의 어떤 부자나 권세자가 가지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 풍부와 자유를 가진다. 그들의 정체와 자신감,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실망 좌절이 없다. 천만도 안되는 인구로 2억이 넘는 아랍인과 대결하며 든든히 서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도움과 힘을 얻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2:5) 하며 매일 새 힘을 얻는다.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새 힘을 얻는다고 고백한다(사40:31).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누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 힘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6)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어찌 새와 비교되겠나? 주께서 날마다 우리를 돌보시고 채워주신다. 영국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가진 것 없지만 주의 심정으로 길거리의 버려진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이들을 돌보며 2만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아 많은 고아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지 말고 눈을 들어 주를 보라 하신다. 

 주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요4:35) 하신다. 할 일이 많은 것을 보게 하신다. 세상에 시달리며 영혼이 메말라 있는 자들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라 하신다. 주님을 만나 복음을 받은 사마리아 여인은 삶의 수단인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 주님을 소개하자 동리 사람들이 모두 주께로 몰려 왔다. 눈을 들어 굶주린 심령을 본다.  
오드리 헵번은 한 때 미모에 훌륭한 연기의 배우로 뛰어났다. 벨기에에서 출생 3개월에 백일해로 죽을 고생, 10살에 부모 이혼, 아빠는 나치를 따라 떠나고 조부모 손에서 자라다. 발레리나가 되고자 영국으로 가서 길거리에서 연극에 데뷔하고 로마의 휴일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고 그 후 대단한 인기 배우가 되었다. 영화에서 은퇴한 후 제 2의 인생, 유엔의 아동복지 단체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지원하다. "제 자신이 이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다. 연 1달라와 여행 비용만을 받으며 희생적으로 섬기다. 눈을 들어 제 3세계의 고통 당하는 어이들을 보았다. 특히 소말리아의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이들을 위해 남은 삶을 헌신하였다. 눈을 들어보면 나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많은 사람이 보이고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헌신하면 행복과 감사를 누린다. 오늘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마지막으로 주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일어나 머리를 들라, 눈을 들라 하신다. 세상에 이전에 없던 큰 전쟁과 죽음, 지진과 기근, 역병과 재앙, 하늘의 일월성신에 변화가 일어나거든 일어나 눈을 들라, 주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하신다 (눅21:27,28). 주의 백성들이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 받는 시간이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나? 땅만 보고 세상만 보며 답답해 하지는 않나? 눈을 들 때가 되었다. 하늘과 자연을 보며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가 나를 돕고 계신 것을 확인해야겠다. 내일의 삶이 어떻게 될지 염려가 될 때 지금까지 지키시고 채우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겠다.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다가 이제 복음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주의 사랑을 베풀며 감사와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겠다. 한국을 떠난 때가 있듯이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올 것이기에 눈을 들어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겠다. 눈을 들자. 주를 바라보자. 주의 은총을 기원한다.

Saturday, October 17, 2020

선거와 투표 (Election and Vote) 
금년 대선 날짜가 다가 오는데 대통령을 위시하여 연방 상하의원, 각주 상하의원, 지방 공직 등 수가 많은데다 누가 누구인지 알기도 힘들어 나로서는 투표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바르게 투표하기 위하여 스스로 미국의 정치 형편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로 영국과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시작되고 이들은 그들의 전통과 뿌리를 가지고 왔다. 이들의 사상 관점 정치 철학은 당시 서구의 대조되는 두 이념 곧 그리스-로마 사상과 유대-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로마에서는 절대권인 왕정을 벗어나 시민이 참정을 열망하여 아덴에서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민회를 통한 직접 민주제도가 시작되고 로마에서는 시민의 대표자를 통하여 치리하는 공화제가 시작된 것이 오늘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시민이 투표, 토의, 법률제정, 배심, 관직 등에 참여하고 제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삼권을 분리하였다. 이들은 자연법과 이성을 존중하고 미신을 타파하였다. 유대-기독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고 동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며 가난한 자와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었다. 
신관은 그리스-로마는 다신 숭배로 그들의 신은 사람과 같은 정서를 가지고 과오도 저지르며 많은 여신은 남신 또는 사람과도 관계를 맺었기에 사람과 친근한 위치에 있었다. 유대-기독교는 유일신으로 그는 완전하고 전능하며 영원하여 경배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스-로마는 인본주의로 자기 이성과 생각을 따라 인간의 쾌락을 중요시하여 극장 문화가 발전하고 피를 흘리는 잔인한 경기를 즐기며 동성애가 유행하고 아내와 어린아이는 남편의 소유이며 노예제도와 인신매매가 성행하였다. 반면 유대-기독교는 신본주의로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람의 피를 흘리거나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오직 남녀간의 결혼만 인정하였다. 
기독교가 일어난 때 이미 그리스-로마 철학이 당시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바울, 어그스틴 등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이런 철학 사상으로 훈련되어 있었기에 기독교 신학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유대인이 포로로 각지에 흩어지고 기독교인이 박해로 흩어지며 그들의 신앙을 전파하는 가운데 그리스-로마 사상과 교류하고 융화하게 됨으로 구라파는 두 이념이 공존하면서 점점 기독교 나라로 전환하였다. 
 미국 건국자와 헌법 제정자의 배경과 뿌리에는 구라파의 그리스-로마 사상으로 교육되고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기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고 각자 내재하는 능력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 공화국을 만들었다. 미국의 양대 정당 민주당과 공화당은 시작과 이념이 서로 대조적이다. 
미국이 왕정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며 민주당이 결성되고(1824) 공화당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자들이 결성하여(1854) 선출한 대통령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포하였다. 두 정당은 많은 면에 서로 대조가 된다. 민주당은 인간의 균등함을 국가/공동체가 책임지나 공화당은 개인의 자유 권리 책임을 강조한다. 전자는 큰 정부로서 기회, 평등의 조절 역할을 강조하고 후자는 작은 정부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며 낙태, 동성애, 이민, 메디케어, 총기, 금융, 기후변화, 전쟁, 세금 등에도 대조되는 정책을 가진다.  
낙태, 동성애 등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일상적인 것일 수 있으나 한국 문화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인 내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자유와 평화, 근실한 노동의 정당한 대우가 마음에 들어 이민한 내게는 균등을 내세운 사회(공산)주의는 맞지 않다. 후보자 개인을 알지 못해도 소속 정당을 보고 미국이 건국자/청교도의 이상인 산 위의 도시 역할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내게 주어진 투표 권리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

                                                            하나님의 사람 창조

청교도의 신대륙 도착

링컨과 노예

자랑스러워하는 동성 결혼

산 위의 빛나는 동리



Monday, October 12, 2020

밤이 없어지나? The End of Night?

밤이 없어지나? The End of Night? 
어느 여름 알라스카를 방문한 때 밤이 없는 백야를 실감하였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5시에 퇴근하자 저녁을 먹은 후 낚시를 나갔다. 일과 놀이를 좋아하는 활동적인 사람에게는 적격인 것 같다. 사람은 낮의 속성을 갖고 있다. 어둠은 악의 원천이요 귀신의 세계라 태양이 올라오면 떠나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빛을 밝힌다. 촛불이나 호롱불, 횃불 시대에서 전기와 조명 구조의 변화로 이젠 온 밤을 밝혀 뉴욕 서울 파리등 세계의 큰 도시는 밤이 끝난 세상처럼 보인다. 유익한 면이 있지만 또한 밤과 낮이라는 생의 리듬을 파괴하는 많은 문제가 일어난다. 인공 빛이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밤에 자면서 멜라토닌이 생성되어 면역력이 강화되고 낮에는 새로운 힘으로 일을 하는데 오염된 빛이 유방암 전립선암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있다. 
이제 이전에 즐기던 밤 하늘의 은하계와 북극성 북두칠성 별자리를 찾던 낭만은 사라지고 빛에 덮인 도시의 하늘은 텅빈 공간이 되고 있다. 케냐의 암보셀리 공원에서 하룻밤을 지나며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운 별들이 내게로 쏟아지는 놀라운 아름다움을 즐기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알라스카의 독립기념일 밤 11시 폭죽은 소리는 들리나 공중에 불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퍼지니 화이어웍의 즐거움이 없었다. 밤이 없어지자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밤에 활동하고 이동하는 철새와 곤충, 박쥐와 거북이, 개구리와 두꺼비, 닭이나 노래하는 새의 시간에 혼란과 멸종이 발생한다.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위해서는 밝은 낮과 어둔 밤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이 덮여 있는 형편에 빛을 창조하시니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고 밤과 낮을 구분하셨다. 하나님이 어둠의 세계에 빛을 만드셨지만 모든 것을 빛으로 바꾸지 않고 어둠을 남겨두시어 빛과 어둠이 공존, 교체하게 하시고 생명과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신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에 빛이 들어오니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캄캄한 밤하늘 은하계와 달과 별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오는 태양빛이 있어서가 아닌가! 
 이태리의 한 수필가는 어둠은 인간사회의 윤활유라, 어두운 밤하늘은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라 하였다. 밤하늘은 천문대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일으키고 사람의 지적 영적 탐구와 성장의 촉매가 되어 시간 수학 철학의 기본이 되었다. 칸트는 “내 심장을 경이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 하나는 내 속의 도덕심, 또 하나는 내 위에 있는 하늘의 질서, 표현할 수 없어도 일단 경험하면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낮만 있고 빛만 있으면 경험하지 못하는 인생의 실상이다. 어둠을 통하여 인생의 깊이와 의미를 얻는다. 밤의 어둠을 경험하지 않고 인생을 이해하기 어렵다.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의 깊은 밤에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보고 찬양하였다. 죽음의 병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칠흙같이 어두운 영혼의 밤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나를 평생 주의 종으로 살게 한 감격이다. 밤이 없고 어둠이 사라지면 가장 귀한 인생의 보배를 놓치게 된다. 어두운 인생의 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Saturday, October 3, 2020

교인이 설교에서 듣고 싶은 것 What a congregation wants to hear in a sermon

교인이 설교에서 듣고 싶은 것 What a congregation wants to hear in a sermon 한 때 교인들이 담임목사 몰래 소위 유명 목사의 테이프를 돌려가며 듣기도 하고 어느 경우는 주일 예배에 오기 전 설교 셋을 듣고 온다고 담대하게 목사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는 교인의 영적 목마름, 열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사에게 도전과 위협이 되기도 한다. 일주일에 주일예배, 수요 저녁, 금요 저녁, 그리고 매일 새벽 예배를 인도하며 산 넘어 또 산과 같은 10개의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목사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겠나! 요즘은 텔레비로 인터넷으로 또 그로서리 앞에 놓인 수 많은 씨디가 있어 한 번 클릭하면 설교에 둘러 쌓이는 소위 설교 홍수 시대를 맞고 있어 마음대로 골라 듣기도 한다. 코비드 팬데믹 현상으로 교회에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를 하든지 교회에 모여 예배하든지 예배에는 설교가 중심이라 할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교인은 설교에서 무엇을 듣고 있으며 또 무엇을 듣고 싶어하며 설교자는 무엇을 전달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미국 신학교 설교학 교수들이 팀이 되어 미국 내 여러 교단 크고 작은 교회의 각 연령층 남녀 263명을 선정하여 인터뷰한 결과를 2004년 네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설교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교인은 설교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알고 주의 임재와 뜻을 알고 나아가 그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알아 가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허공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주어진 것이기에 교인은 설교가 생활 현실에 연결되기를 바라며 그 말씀을 통하여 삶의 목적과 방향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믿는 것이 가정과 직장, 사업, 학교, 여가 활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듣고자 한다. 교인은 또한 설교자가 그들의 실생활과 사회 형편의 복잡함을 이해하며 설교자가 교인의 신을 신고 있거나 같은 배에 타고 있음을 보고 싶어한다. 이는 설교자가 직접 사회 경험을 하거나 아니면 교인의 가정, 사업 직장을 심방하고 대화하며 얻어지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의 대상인 교인과 그 형편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인은 또 세상에서 많이 논쟁되는 문제 곧 전쟁이나 폭동, 인종 차별, 낙태, 동성애/결혼 등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그 문제를 성경적 견지에서 보고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할지를 알고 싶어한다. 교인은 설교자가 교인의 의견을 듣고 참조함으로 설교 구성, 내용, 발전에 기여하기를 원하며 함께 설교의 세계로 들어가 동감하고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삶의 실제 문제와 설교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어느 목사는 강단 위원회를 만들어 일년 동안 중요한 설교 주제들을 정하기도 하지만 일반 목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설교는 교인이 듣고 싶어하는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꼭 필요하고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설교 준비와 전달은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과 같지만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과 영광이며 설교자에게는 놀라운 특권이요 무엇보다 큰 기쁨이라 설교자와 교인은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설교가 되어 교인의 삶과 주위에 영향을 미치기를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