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18, 2018

영생과 이웃 Eternal Life and Neighbor


누가복음 10:25-29 영생과 이웃 Eternal Life and Neighbor (6/10/18 주일)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어느 나라에서 나고 싶은가? 2013Economist 에서 태어나고 싶은 나라 80을 정하였다.  스위스 호주 노르웨이 스웨덴등이 앞서고 미국은 17번 한국은 19, 1988년 조사에는 미국 프랑스가 1,2번 한국은 10번이었다.정하는 기준은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와 객관적인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들 곧 경제, 환경, 건강, 사회 정치, 공공 기관 신뢰 등이었다. 100세 시대에 어떻게 하면 마지막까지 9988건강하게 활동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관심이다. 진시황이 아니라도 불사약을 구하고 영원을 추구한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이 영생을 위한 것이다. 복음서에 영생을 구하는 자가 나온다. 마태 마가에는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께 와서 영생 얻는 길을 묻다. 누가에는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나이까? 묻는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율법 전문가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여 그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께서는 이를 아시고 그에게 반문한다.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율법 전체의 요약이라 말씀하신 그 내용을 이 율법 교사가 대답한다. 제대로 율법을 알고 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다. 율법이 말씀하는 바를 지키고 행하면 살게 된다.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나? 우리 생명을 위함이다.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다. 18:5 너희는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29:9 20:11,13,21 9:29). 여기 살리라 하는 말은 원어에 영원히 산다는 말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죽지 않고 산다는 의미가 있다. 끝 없는 생명의 길이를 말하며 이는 죽을 때 죽지 않고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그의 생명을 오늘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영생은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함께 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생명을 잃고 죽음에 처한 인생이 영생을 추구한다.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니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되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는 영원하기에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 때는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다. 아름다운 생명 풍성한 생명 하나님의 죽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다. 그러다가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떠나니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인터넷 와이파이가 주위에 가득하지만 그것이 끊어지면 아무런 혜택을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의 영이 육체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떠나다. 사람은 생명에서 떠나게 되고 죄의 대가인 죽음을 가지게 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그러자 사람 관계도 깨어지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 하더니 이젠 그로 인하여 자기가 죄를 짓게 되었다고 그를 원망하고 자기 책임을 전가한다. 아담 하와를 통하여 난 아들 가인과 아벨은 서로 갈등하다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 관계가 깨어지니 죽고 죽이며 생명을 잃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 영생에서 멀리 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59:2)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다. 조화와 질서가 모두 깨어지다. 배반과 갈등과 살상이 만연하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로 회복시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길을 주셨다. 그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지키고 행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율법 교사가 자신있게 말하다. 그는 이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다시 묻는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입니까? 예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웃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하다. 유대인은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친구가 되지 않은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그 이웃은 한 가족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10:18,19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 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 느니라. 그들이 이전에 나그네 생활을 하였기에 나그네를 돌보아 주라고 하신다. 이웃하여 함께 사는 자들을 돌보고 사랑하라. 이런 말씀 하실 것으로 기대하다. 
한 목동이 소를 먹이러 뒷동산에 가서 소를 놓아두고 놀다 보니 소가 인색하기 유명한 최영감 콩밭에 들어가 콩을 먹고 짓밟아 두었다. 큰 일이나 묘안이 떠 올랐다. 그 집으로 뛰어가 할아버지 소가 우리 콩밭에 들어와 콩을 먹고 짓밟았어요. 어이, 소가 콩 좀 뜯어 먹는다고 이웃간에 뭐 그리 대단한가? 서로 이해해야지. 뜯어먹으며 똥과 오줌을 쌋으면 거름으로 갚았겠구나. 정말 그래요 그런데 제가 말씀 잘못드렸어요 할아버지 소가 우리 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우리 소가 할아버지 밭에 들어갔어요 이해하시죠 이웃간인데.
이웃이니 서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살라고 하실 것을 기대하다. 그러나 주님은 직접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한 이야기를 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이 길은 17마일 3300 피트 내리막 길로 강도들이 출몰해 많은 사람을 해치기에 강도의 길이라 불린다. 피해를 입은 자는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있기에 그가 누구인지 종족 신분을 알 길이 없다. 가진 모든 것을 강탈 당하고 거의 죽게 된 것을 길가에 버리고 갔다. 그는 스스로 일어나 살 길이 없다. 누군가가 그를 도와야 한다. 그 길로 사람이 지나간다. 한 제사장이 내려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지나간다. 이들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피를 흘리는 사람, 죽은 사람에게 접촉하면 부정해질 것이라 접촉을 피할 수 있다. 성전에서 섬기다가 피곤하게 가는데 그 사람에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제사장 레위인, 종교 제도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자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같은 이스라엘의 핏줄기를 가지고 있으나 아수르 사람이 정복하여 외국인을 이주시키자 그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기에 유대인은 그들을 부정한 혼혈민이라 하여 외면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강도만난 자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생기고 이로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 후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예수께서 제사장 레위인을 정죄하거나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율법 교사에게 판단을 맡기며 그렇게 하라 하신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인생 여정이다. 누구나 그 길을 지나간다. 그곳에 강도가 출몰하여 생명과 가진 것을 탈취한다. 죽음이 있다. 두려움 불안이 있다. 율법교사는 예수를 시험하여 그의 잘못된 것을 들어내고 자기를 옳게 보이고 인정 받고 싶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그와 좋은 관계가 있고 또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는 영생 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다. 그런데 그는 주님의 이야기에서 자기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길가에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누가 도와 주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기를 기다린다. 도움은 세상에서 존중 받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종교 제도를 통하여 오지 않는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자비를 베푼 자라 한다. 멸시 받고 버림 받는 사마리아인이 죽어 가는 자를 도와 주었다. 강포와 죽음이 있는 곳에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섬김이 생명을 일으킨다. 여기 삶이 있다. 제도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에 시달리고 억압을 받는다.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하기에 죄인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에 빠진다. 강도 만난 자는 지나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한 것이 없다. 그가 도움을 받고 생명을 얻은 것은 순전히 은혜요 선물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영생이 그렇게 주어진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주시는 선물이다.
여기 강도만난 자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 가난하고 병든 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떤 면에 눌리고 뺏기고 죽임을 당한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국면에 있다. 지금까지 내가 다 한다고 하던 자가 얼마나 비참한 형편에 있는가를 알게 될 때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때 이웃을 깨닫게 된다. 이런 비참한 형편에 있는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웃으로 오시다. 예수께서는 죄악에 눌리고 세상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하여 오시었다. 자기 피와 생명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싸매고 구하여 주신다. 우리가 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상처 투성이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실을 알고 오신 것이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99마리 양보다 길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을 찾아오시다. 주님께서 만나 사역하신 대상이 모두 잃은 양과 같은 자들이다 이들을 찾아 구원과 생명을 주시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그의 피를 흘려 우리를 살려주시다. 그의 피를 받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의 도움과 구원을 받아드리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은혜요 사랑이다. 주께서 회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가지게 하신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지만 영생을 누림은 하나님 관계만 아니다. 사람 관계에도 일어난다. 서로 돕고 사랑하여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2005년에 창끝 End of the spear라는 영화가 나왔다. 실제 이야기에 근거하다. 1956년 미국 선교사 5명이 에콰돌 밀림 속에 사는 사나운 와우다니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다. Nate Saint가 비행기 조종을 하며 비행기에서 상자로 먹을 것과 물품을 내려 주다가 그들과 얼굴 얼굴을 대하며 주의 사랑을 나누고자 내리다. 그들이 내리자 창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 들어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쏘지 않았다. 가족과 미국은 이를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Nate 의 누나 Rachel이 에콰돌 다른 곳에서 사역하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와우다니 종족에게 들어가다. 죽임 당한 선교사 가족들이 또한 들어가 그들을 위하여 섬기는 일을 하다. 종족끼리도 서로 죽이는 잔인한 부족이나 이들이 필요한 것은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그들을 품고 섬기는 사랑임을 안 것이다. 결국 그 종족이 사랑에 녹아 주께로 돌아 오다. 당시 5세인 Nate아들 Steve 9살 때부터 고모를 방문하러 매년 가다. 아버지 죽인 민카예를 만나 14살 때 아버지가 죽은 곳 가까이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아들이 되다. 1994Rachel이 죽자 스티브가 그곳에 가서 살게 되다. 한 가족이 되고 그들은 창을 끝내고 주의 사람들이 되었다. 콜럼바인 학교 총기 사고가 생기자 영화 창끝을 만들어 세상 폭력을 물리쳐야하겠다고 하다. 5명의 선교사 중 하나인 Jim Elliot은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간직할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은 바보가 아니다라고 그 일기장에 기록하고 그대로 생활하여 그 부족 전체를 주의 사랑에로 돌아오게 하고 영생을 얻는 놀라운 일을 하게 하다.
영생은 선물로 주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다 지킬 때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실망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하고자 자신을 내어 주시다. 5:24 누구든지 주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 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하신다. 영생은 요17:3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안에서 그가 주시는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 이제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되어 그 생명의 복음을 사랑으로 나누게 된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라 하신다.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하신다.
영생은 삶의 길이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삶의 질이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생명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생명에서 떠나 죽음에 시달린다. 병원에 있는 사람만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인생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나도 그런 형편에 있다.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요 구주다. 내가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 어디나 있다. 사랑과 섬김이 있는 곳에 생명과 기쁨이 있다. 주님 안에서 가지는 영생의 축복을 오늘 여기서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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