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19-26 기억 회상 그리고 소망 (12/31/16 송년예배)
몇 시간 후면 2016년은 역사로 기록이 된다. 2016년이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우리 개인적으로 어떻게 기록이 될까? 2016년 미국과 한국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Populism 대중의 소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은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혼란하고 이북의 핵무기 개발로 동북아만 아니라 세계를 위협한다. 세계는 테러와 폭력 가난과 피난민으로 더욱 어려움이다. 개인은 어떤가?
1 슬픔의 현실
오늘 성경 예레미야 애가는 슬픔의 노래다. 애가의 본래 명칭은
1,2,4장 시작의 첫 말 어찌 이런 일이?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기록한 것이라 하는데 그는 눈물의 선지자다. 그가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의
앞 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였으나 전혀 듣지 않다. 결국 바벨론이 주전 586년 침략하여 포위를 하고 멸망시키다.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 되고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려 통곡한다. 1.2장은 나라와 예루살렘 멸망의 슬픔을 말하지만 3장은 예레미야 개인의 슬픔이다. 나라가 망하는데 자신이 겪는 아픔을 표현한다.
하나님이 매를 들고 그를 친다고 한다. 빛이 없이 어둠에 처하고 양 사방이 포위를
당하고 도망할 길을 막고 곰과 사자 같이 삼키려 하고 화살로 겨누어 그의 심장을 꿰뚫고자 한다. 이런 어려움에
도움을 청하고 불러도 아무 대답이나 도움이 없다. 사람들이 조롱한다. 이를 꺾고 재로 몸을 덮고 쓴 것으로 배를 채운다. 심령에 평안이 없고 복을 보지 못한다.
아무 힘이나 희망이 없다. 오늘 19.20절에
내 고초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니 아주 낙심이 된다. 현실을 그대로 말한다. 그러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있다고 현실을 말한다.
겪는 아픈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사정을 아신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요16:33. 제자들을 내어 보낼 때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 마10:16.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심정(고후1:9)
주의 백성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깊은 골짜기를 경험한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로 오신 이 계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마음에 아픔과 상처가 있다.
여론 조사 전문가 George Barna 가 전국적 조사를 하다.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겠나? 가장 많은 대답은 어찌 아픔과 고통pain
and suffering이 있나요? 어찌 어찌 어찌? 애가의 제목이다. 현실을 보면 도움이 없고 힘이 빠진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된다 한다. 현실을 보면 낙심이 된다.
2 낙심에서 소망으로:
여기 낙심이라는 말은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다. 깊이 생각, 항복하는 것이다. 사건과 고통 앞에 머리를 숙인다. 내게
다가오는 고통 슬픔에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면 낙심이 된다. 그러나 낙심의 또 다른 뜻은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보니 낙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회상한다 마음에 담아 둔다고 한다. 기억은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이지만
회상은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보는가,
누가 기록하는가에 따라 그 사건 해석이 달라진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망하는 것이
아픔이요 눈물이지만 바벨론 사람들이 기록하면 그들은 축하와 기쁨일 것이다. 예레미야가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
머리를 숙이니 낙심이 되나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니 새로운 생각으로 회상한다. 깊이 생각하고 돌아본다.
그러니 슬픔과 아픔 중에도 소망이 생긴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생각을 하니 멸망하는 가운데 모두 다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도 살아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나라가 망하였지만
살아 남은 자가 있음이다.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고 땅은 빼앗기고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살아 있다. 나라는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을
들어 다른 면을 보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나? 하며 좌절
아픔에 머리 숙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니 새로운 면이 보이고 소망이 생긴다. 진멸되지 않은 것이
여호와의 무궁한 인자와 긍휼 덕분이다. 모두 망하여 없어질 수 있었는데 진멸되지 않고 남겨진 것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사랑이다. Hesed라는 말로 영어나 우리 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아
사랑 인자 자비라고 하나 이는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많고 많았다는 말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어머니의 태라는 의미다. 어머니 태는 애기가 태어 나기 전에 사는 곳이다. 먹을 것을 공급받고 보호를 받는다.
독이 들어와도 그 독이 태를 뚫고 들어와 애기를 상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태는
든든하다.
3 인자와 긍휼의 역사
예레미야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물이 없는 깊은 우물에 빠뜨림을 당하고 배신자로 놀림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은 태 속에서 보호하듯 그를 지키시고
사랑을 베푸시사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러하다. 이들이 처음 에짚트에서 종생활 하며 부르짖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 하여 보호하고 한 사람 상하지 않게 해방시켜 내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 곳에서 만나와
물을 주시고 길이 없는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다.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침략을 받아
전멸 당할 뻔 했지만 모세의 기도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전쟁에 승리를 하였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었다.
미디언 블레셋 암몬 모압족, 아수르가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하여 왔지만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로 그들을 지켜 주셨다. 낙심이 되어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니 이런 하나님을 회상하게 되고 그러니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많다. 낙심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형편에 머리 숙이면 낙심이다. 슬픔과 외로움에 머리 숙이면 좌절이 온다. 누구 말에 머리 숙이면 실망이 온다. 오직 하나님께 머리 숙이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보게
되고 소망을 가진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그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 주는 변치 않고 성실하심을 알게 된다.
24절 내 심령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기
기업은 분깃이다. 내게 돌아올 몫이다. 우리가 받는 몫이 있다.
돈이나 땅을 얼마 받으면 그것은 다 사용하거나 남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받으면 그는 영원하시다. 다함이 없는 분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넘겨 주나? 돈과 재산, 교육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들의 기업으로 넘겨준다면 그는 다함이 없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주신다. 자기 백성들을 굶게 하지 않으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바라고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러 나간다. 무엇을 먹을가 염려할 것이 없다. 주께서 말씀하시다.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다.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고 그를 여호와를 바라라. 잠잠히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여기 좋다는 말은 만족한다는 의미다. 주를 바라며 조용히 기다림은 우리의 만족이 된다.
4 고백과 확인
고통과 염려가 다가올 때 말한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심령에 말한다. 주는 나의 기업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나? 불안과 두려움에 고개 숙이지 말고 마음에 말을 하라. 스스로에게 말을 하라. 주는 나의 기업이시다. 인자하고 긍휼이 많으신 주께서 사랑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을 하면 마음에
두려움이 가고 평안을 가진다. 예레미야는 주를 향하여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기업입니다. 나의 분깃입니다. 다윗은 주여 주는 나의 복이오니
주 밖에는 복이 없나이다 (시16:2). 그러면 태 속의 아기가 엄마로부터
공급 받듯이 주께서 책임 지고 돌보신다. 이 애가는 예레미야가 쓴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노래하게 되어 있다.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 기업이시다. 미국 감리교 Chisholm
목사는 주의 인자가 크다는 이 말씀으로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지키시니 어제나 오늘이 한결 같네” (393장)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인자와
긍휼로 신실함을 나타내 주셨다. 그는 죄 없으면서도 우리 대신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이방 땅 두로에 가시다 (막7:24). 왜? 그곳에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해보라. 딸이 하나 있는데 귀신이 들려 있다. 불에도
물에도 들어간다. 소리 지르고 자기 몸 상하게 한다. 얼마나 큰 고통인가?
주께서 그를 위하여 가시고 그 딸을 고쳐 주시다. 그리고는 갈릴리로 돌아가시다.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다.
지금도 주님은 성실하시게 일하신다. 주의 성실하심을 생각하면 우리 삶에 소망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환난과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간다고 하다. 이 골짜기를 통하여 주님은 주의
뜻을 이루신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보다 어려운 역경에서 주께 머리를 숙이며 주의 인자와 궁휼을 발견할
때 믿음이 자란다.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금년 일년간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 어찌 어찌? 한 일이 많다.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이다. 낙심이 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사건과 우리 감정,
사람의 소리에 머리를 숙이면 절망이다. 주께 머리를 숙이고 회상하면 주의 인자와
긍휼이 있고 그의 성실하심을 본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어 함께 모여 예배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닌가.
새해에 무엇이 달라질까? 형편이 얼마나 달라질까? 형편은 어떠하든지 누가 어떤 말을 하든지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지고 그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요 만족이라고 한다.
낙심이 될 때 주께 머리를 숙이고 주를 바라고 기다리면 주님은 우리 믿음과 소망을 주시고 우리로 만족을 경험하게 할 것을
내다보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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