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oul Ministry
One Soul Ministry supports mission for one soul Jesus loves more than the whole world (Mark 8:36)
Thursday, May 22, 2025
우리 하나님 여호와 LORD Our God
우리 하나님 여호와 LORD Our God
100여년 전 할머니는 둘째 아들이 병든 때 그가 섬기는 신들에게 빌고 굿까지 하여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멀리 사는 친척이 ‘예수 믿으면 병이 나을텐데’ 하기에 시도하기로 했다. 산을 넘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예수를 믿고 기도하였다. 아들의 병이 나았다. 그는 참 신을 만난 감격으로 그간 모시던 모든 신을 파기하고 열성으로 예수를 믿었다. 조상이 섬기던 신들과 전통을 버린 것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한계를 가진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을 찾고 그에게 구한다. 로마는 만신전을 세워 섬기며 그것이 나라 부강의 근간이라 생각하였다. 바울이 아덴을 방문하여 많은 신전을 보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것도 보았다. 알지 못하여 빠뜨림으로 화를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집트도 많은 신상을 만들고 섬김으로 강대국이 되었다고 믿었다. 히브리인들이 그곳에 살며 번창하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노예로 삼고 학대하며 고역을 시켰다. 히브리인은 고통속에 부르짖지만 그들을 도울 자가 없다. 조상의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양치는 모세를 만나신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며 이집트에서 압제 받는 백성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 하신다. 모세는 조상의 하나님이 생소하여 그 이름을 묻는다. 신은 바알 그모스 등 이름이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신다. 누가 만들지 않았고 그는 모든 있는 것의 근원으로 시공을 초월하며 언제나 살아 일하는 자라는 말이다. 모세는 설득과 굴복을 당하여 그 일을 맡았다. 이집트와 그들의 신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40년간 광야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있는 자’는 누구보다 강하고 사랑이 있는 분임을 확인하였다.
‘스스로 있는 자’는 히브리어로 YHWH 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에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아버지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절대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스스로 있는 자’가 나오면 ‘나의 주 ‘곧 아도나이 (Adonai)로 부르고 그 모음을 붙여 우리 말로는 여호와라 한다. 하나님은 일반 이름이나 여호와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이름으로 모세를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었다.
나라를 건설한 히브리인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 바알을 숭배하였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여 3년6개월간 우로를 내리지 않았다.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과 여호와 중에 누가 참 신인가 시험하기를 제안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가 모였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얹어두고 기도하여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불의 신이라는 바알은 그 많은 선지자의 부르짖음에도 응답이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자 불이 제물과 제단을 모두 태웠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택하여 섬기라’고 한다.
여화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을 얻는 약속을 하신다. 그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여호와이심을 확인시킨다.
할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어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일하신 것을 감사하며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144:15)를 다윗과 함께 고백한다.
그대는 어린아이인가?Are You A Child?
그대는 어린아이인가?Are You A Child?
너는 어찌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가 하는 말을 듣는다. 나이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철이 없고 순진 천진하고 거짓 없이 솔직하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본다. 이런 어린아이는 고대로마사회나 성경에서도 인구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예수님 주위에 수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다. 시간도 배고픈 것도 잊는다.주께서 그들을 먹이고자 하나 가진 음식이 없다.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았다. 자기가 먹을 것을 그대로 드렸다. 예수께서 축복하고 나누어 주게 하니 배부르게 먹은 사람이 5천명이나 이 수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음식을 제공한 어린아이라도 숫자를 말할 때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어린아이는 믿을만한 책임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라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거나 가정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 대상이기에 그에게 책임을 맡기거나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생존율이 낮았기에 그가 얼마나 살지 보장이 없다. 태어나지만 작명이나 출생신고를 미루기도 하고 때로는 죽은 형의 이름과 생일을 받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는 질서를 잘 지키지 못하고 마음대로 떠들기에 어른의 모임에서 제외되고 그들을 물리치기도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며 그들을 안고 축복하며 사랑하시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그는 어린아이를 어른과 꼭 같은 인격체로 인정하고 천국을 허락하신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방정환 같은 선각자가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하였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천국을 소유하는 표본이 되나? 어린아이는 감동이 많고 감수성이 강하며 잘 신뢰하고 따르며 의지하기에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이 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에 감동을 받고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영접하지 않겠나?
어린이가 천국에 들어가면 어른은 들어가지 못하는가? 확실하게 들어간다. 어린아이와 대조되는 어른의 특성은 독립성이 강하며 감정을 표현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깊이 생각하고 평가하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가 한 말이나 일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다. 이런 어른이라도 어린아이 같은 감동과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일단 확인하고 믿게 되면 확실하게 신뢰하고 그것을 나누고 전하며 이 일에 평생을 헌신하기도 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 뛰노라/삶이 시작할 때 그러했고 자금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라/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나는 나의 모든 날이 자연 경외로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한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한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릴 때의 감동과 경험이 어른의 바탕이 된다. 어릴 때 무지개를 보던 감동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 창조주의 자연세계를 감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을 주는 사랑과 은혜에 감동하여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을 맡긴다면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믿음이 아니겠는가. 어린아이가 주의 품에 안기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주 앞에서 어린아이인가 스스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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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자의 어머니 Mother of All Living
모든 산 자의 어머니 Mother of All Living
니카라과 단기선교를 갔을 때 만난 한 여인에게 아이 여섯이 있었는데 이들의 아버지가 다 다르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고 밝고 행복하게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니카라과는 한 때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는데 점령자들이 지나가며 여인들을 임신시키던 행태가 남아 있어 지금도 아버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자 없이는 생명이 생기지 않지만 아버지를 몰라도 엄마는 애기를 낳아 잘 기르고 있는 것이 장하였다. 이 여인이 살아 있는 여섯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며 아담이 그 아내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부른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처음 아담과 그의 배필 여자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고 축복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출산하게 했지만 그보다 앞서 생명 자체를 위한 명령을 주셨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살려면 그 명령을 지키고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간교한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그것을 바라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것 같아 그것을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들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나무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으면서 뱀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자 그는 잘못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형벌로 아담에게는 가시가 있는 땅을 개간하는 수고와 여인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고 뱀에게는 배로 다니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였다. 평화롭고 안전하던 땅에 고통과 갈등이 왔다.
그때 아담은 아내를 하와(생명)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이름하였다. 어머니는 근원이라는 말로 살아 있는 아이를 출산하여 어머니가 되고 모든 산 자는 그에게서 시작하여 내려간다는 의미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에 따라 이들은 죽었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의 대가로 일하는 수고와 임신과 해산의 고통을 겪게 하시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살아 있는 것을 알았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말은 생명을 가지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 뿌리를 두고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마(움)가 품고 보호하며 생명으로 결실하도록 인내한다.
여자의 후손에서 죄를 짓게 한 뱀, 곧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예수께서 태어나고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고 부활함으로 죄와 죽음을 가져온 사탄을 정복하고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셨다. 하와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생명 공동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뜻을 따라 그의 생명사역에 참여한다. 교회는 또한 어머니로서 믿는 자들을 품고 보호하며 자라게 하고 또한 주의 생명을 나누고 많은 사람을 초대함으로 새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간다.
산 자의 어머니 하와로 시작된 생명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뻗어가면서 세상의 모든 산 자가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산 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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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Encounter
만남 Encounter
숲길 아파트 옆으로 겨울동안 앙상하던 나무들이 봄 기운의 햇빛을 만나며 꽃을 피우고 잎을 내더니 어느새 숲을 이루어 간다. 사람도 만남으로 삶의 방향과 인격이 형성된다. 부모와 만남은 인생의 첫 단추로 중요하다.
시각 청각을 상실한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을 만남으로 삶의 힘과 희망이 싹트고 교육가 작가 사회운동가로 꽃피웠다.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엘리트로 조지아 원주민 선교사로 2년간 사역하였으나 실패를 자인하고 돌아가는 배에서 폭풍에 시달리며 죽음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놀란 일은 갑판 한 곳에 둘러 앉아 조용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두렵지 않은가?’ 물었더니 애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이 애기가 두려워할까요’ 반문한다. 그는 충격을 받고 그들 모라비안늘이 모이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체험하고 감리교 창시자가 되었다.
간디가 예수님 산성설교를 읽으며 그 정신이면 인도의 계급제도를 철폐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남아프리카를 방문 중 교회를 찾았다. 안내자가 그를 보더니 잘못 왔으니 건너 편에 있는 (흑인)교회로 가라고 한다. 간디는 ‘이것이 기독교의 실상이라면 나는 평생 힌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누구를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가장 위대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예수를 믿고 기대하며 따르던 제자들은 그가 잡히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보며 실망과 좌절 두려움으로 숨어 있다가 살기 위하여 고기 잡으러 나갔다. 한 마리 잡지 못한 새벽에 누군가 바닷가에 서서 지시하는 대로 따랐더니 그물 가득하게 고기가 잡혔다.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았다. 주님은 모닥불과 조반을 준비하여 그들을 영접하고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고 사명을 맡겼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삶을 바쳤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기에 사람을 만나신다.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척결하던 사울은 해보다 더 밝은 빛속에서 그의 이름을 거듭하여 부르는 이가 바로 자기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뒤집혔다. 그는 박해하던 예수를 생명의 주라고 전파하고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세웠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에서 왕위 쟁탈전쟁을 하던 콘스탄틴은 십자가로 이기라는 환상을 보고 승리하여 왕이 되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법학도가 되려던 루터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천둥번개를 만나 둘이 땅에 쓰러지며 ‘성인이여 나를 살려 주시면 수도가가 되겠나이다’ 약속하고 살아나 수도사가 되었다. 윗덴베르크 대학 교수로 강의하며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95개조 토의 제목을 게시한 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근대 기독교 역사에서 무디, 스펄전, 가가와 도요히꼬, 이성봉 등은 모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되고 쓰임 받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으며 많은 체험이 있어도 믿음의 굴곡을 겪는다. 나는 1978년 수난주간 금식하며 목요일 세족예배를 하고 큰 시험이 덮쳐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밤 성금요일을 맞았다. 부활주일을 어떻게 맞이하나? 고민하며 토요일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강단에서 나를 바라보신다. 순간 나의 어둠은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교수에서 목회자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고 평생 살아 계신 예수님을 전하며 섬기는 기쁨과 감격을 가진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하며 달려가게 하신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Wednesday, April 23, 2025
새 일 The New Thing
새 일 The New Thing
미국에 이민한 사람은 대개 이전과는 다른 새 일을 한다. 생존과 적응, 편리와 유익을 위한 발전이 역사의 사실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처럼 지금 있는 것이 이전에 있었고 새 것은 금방 옛 것이 된다. 종류와 기능은 달라도 삶을 위하여 항상 시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완전히 새 일을 행하신다 (사43:19)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 창조주로서 자연과 사람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이집트 노예에서의 해방은 새 일이지만 그것은 바벨로 포로귀환에서도 본다. 새 일이지만 이전에 또한 있던 일이다.
가장 새로운 일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죄의 문제 해결이다. 죄를 범한 사람은 법에 따라 형벌을 받고 보상 또는 제례를 드리고 사면 받지만 다시 죄를 반복한다. 죄의 결과인 죽음은 보편적이라 여기서 면제 받을 사람은 없다. 죽음을 애도하지만 죽음의 원인인 죄를 슬퍼할 것이다.
자식이 죽을 병으로 고생하거나 범죄로 중형이나 사형 판결을 받을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부모를 거역한 자식이라도 부모는 그를 대신하고 싶고 그 죄를 소멸하고 싶으리라. 하나님은 이런 심정으로 새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사람 예수로 와서 죄로 죽음에 처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 죄의 벌을 받고 죽음으로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의 사면과 영생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전적으로 새 일이요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다. 예수를 사형집행한 로마 군인이 죽음을 확인하고 그는 무덤에 장사되었다. 그가 무덤으로 끝이 나면 어떨까? 일반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리라.
그가 의도하신 죄 용서와 구원 영생을 이루려면 무엇인가 달라야 할 것이다. 그는 무덤에서 살아 일어나 많은 사람에게 보이시며 그가 부활한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 사렙다 과부의 아들,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등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지만 이들은 얼마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다. 부활한 주님도 그랬다면 일반 사람 중에 들어갈 것이다.
그는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나 그가 산 것을 확인시키고 사랑을 나누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하늘로 올리어 가셨다. 그는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땅에 오신 인류 대속의 사명을 완성하고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이는 인류 역사에 처음 일어난 새로운 일로서 이제 누구든지 그를 메시아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면 사죄와 구원 영생을 얻는다. 예수를 믿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 곧 거듭난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일찍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고 이는 물(육체)로 난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였다. 죄로 주의 영이 떠난 육체의 상태에서 주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 기쁨과 감격으로 전도하니 모인 15나라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말로 알아듣고 자기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세례 받고 교회를 이룩하였다.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이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 약속대로 그는 다시 오시어 죄와 죽음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으로 믿는 자를 옮겨 영원히 주와 함께 사는 것이 마지막 새일이요 모든 성도가 기대하는 바다. 주의 고난과 부활을 체험하며 오실 주님과 낙원의 새 삶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Saturday, April 12, 2025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d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d
지난 주일 교회에 들어서니 찬양대가 ‘세상 죄 지고가는 어린양 보라’는 찬양을 연습하고 있어 나는 그 말씀으로 관상기도를 하였다.
양은 성경의 배경 중동지방에는 지금도 그때와 같이 많다. 양은 개인의 소중한 재산이며 양식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된다. 야곱, 모세, 다윗은 모두 양을 쳤고 양은 목자가 없으면 방향감각 부족으로 쉽게 길을 잃고 유순하기에 맹수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양은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이름이지만 어린양은 1년 미만으로 주인의 사랑과 돌봄을 많이 받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하자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고 그를 중단시키며 숫양을 제공하여 제물로 드리게 하였다. 이후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죽이는 밤에 이스라엘은 가족별로 일년 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가족은 안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때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그 집 문에서 피를 보며 이미 누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지나갔다. 이것이 유월절로서 이스라엘은 쫓겨나듯이 애굽을 탈출하여 자유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죽음을 면하고 해방을 얻었다. 여기서 죽임 당한 양은 일년 된 수컷으로 10일에서 14일까지 5일동안 가족과 함께 지나게 하였다.
일년 된 어린양은 건강하고 생명력이 제일 왕성한 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최상의 것으로 한다. 수컷은 가족을 대표하고 5일간 함께 지난다는 것은 흠이 없이 온전한가 관찰하는 기간이며 동시에 친밀한 사랑을 나누며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양이 죽어 피를 흘림은 가족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으로 전체 가족이 살고 해방을 얻는다.
여기서 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양으로 제물을 드리고 사죄를 선포하나 이는 매년 반복된다. 양이 죽음으로 그들은 한 해의 죄를 용서받지만 어린양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일회적이요 영구한 것이다. 이 유월절을 유대인이 매년 지키며 그날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양이나 어린양의 희생은 상징적인 의미로는 충분하지만 양과 사람의 생명이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 생명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존귀하다. 사람의 생명을 대속하려면 양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아들 예수로 세상에 오셨다. 세례 요한은 그를 가리키며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그는 죄가 없이 온전하시다. 유대지도자들은 그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신성모독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법의 나라 로마의 총독은 그에게 어떤 죄를 찾지 못하면서도 민중의 소리에 굴복하여 예수를 33세 생명과 사역 절정기에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는 고통속에 최후를 마치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며 누구든지 그 피를 문인방에 바르듯이 자기 심령에 받아 믿으면 그는 죄의 속박과 죽음에서 해방과 영생을 허락하신다.
유대인이 유월절을 지키듯이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에 어린양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참회하며 동시에 죄 용서와 생명을 확인하며 찬양하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닌가
The Lamb of God
Last Sunday, as I entered the church, the choir was rehearsing the hymn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I meditated on that Word through contemplative prayer.
In the Middle Eastern context of the Bible—just like back then—sheep are still plentiful. They are valuable property, a source of food, and are used as offerings to God. Jacob, Moses, and David all tended sheep. Sheep easily lose their way without a shepherd due to their lack of sense of direction, and because of their gentleness, they often fall prey to wild animals. While “sheep” is a general term, a “lamb” refers specifically to one less than a year old, receiving much love and care from its owner.
When Abraham tried to offer his only son Isaac as a burnt offering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God, having confirmed his faith, stopped him and provided a ram to be sacrificed instead. From then on, the priest would offer a lamb to God on behalf of the people.
On the night of the final plague that God sent to free Israel from slavery in Egypt—the death of every firstborn—each Israelite family slaughtered a one-year-old lamb, painted its blood on the doorposts and lintel, and ate the roasted meat inside. When the angel of death came and saw the blood, it passed over that house, knowing a death had already occurred. This is the origin of Passover. Israel escaped Egypt like fugitives and became a free people. Through the slain lamb, they were spared from death and granted liberation. This lamb had to be a one-year-old male, kept with the family from the 10th to the 14th day—five days.
A one-year-old lamb is at its healthiest and most vigorous, symbolizing that only the best is to be offered to God. A male represents the family, and the five days of dwelling together allow time to observe whether the lamb is without blemish, while also building intimacy and bonding as part of the family. When that lamb dies and sheds its blood, it substitutes for the family; through its death, the whole family lives and is freed.
The priest offers the lamb as a sacrifice on behalf of the people and proclaims forgiveness, but this must be done every year. While the lamb’s death provides forgiveness for a year, the deliverance of Israel from Egypt through the lamb’s blood was a one-time, eternal act. Jews commemorate this Passover every year with remembrance and gratitude.
While the sacrifice of a lamb is symbolically powerful, the life of a lamb can never be equal to that of a human. Human life i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and is of such great worth that not even the whole world can replace it. To truly redeem human life, a lamb is not enough—it must be a sinless person. So God Himself became a man and came into the world as His Son, Jesus. John the Baptist, seeing Him, declared,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esus, being both God and man, was without sin and perfect. Jewish leaders accused Him of blasphemy for claiming to be the Son of God—a charge punishable by death. Yet the Roman governor, though finding no fault in Him, succumbed to the crowd and sentenced Jesus to be crucified at the age of 33, the peak of His life and ministry. In His agony, Jesus prayed, “Father, forgive them.” As the Lamb of God, He shed His blood, and whoever receives that blood—not on a doorpost, but in their heart through faith—is granted release from sin and death, and given eternal life.
Just as Jews observe the Passover, Christians during Lent remember the suffering and death of Jesus, the Lamb of God. They repent, affirm forgiveness and life, and give praise—what greater blessing could there be?
왜 광야인가? Why Wilderness?
왜 광야인가? Why Wilderness?
한국은 세계 역사의 기적이다. 조그만 나라가 긴 역사에서 국호를 잃은 것은 오직 일제 35년이라 이런 나라는 없다고 미국의 신학 윤리정치 역사가 라인홀드 니이버 Reinhold Niebuhr 는 말하였다.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역사는 광야였다. 광야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절대 부족이라 삶은 투쟁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때가 그러하였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인천)에 도착하고 복음 전도 사역을 시작함으로 은둔의 나라는 서방세계에 소개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시대가 2차대전 종료와 함께 끝이 났으나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남한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착도 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나라는 초토가 되고 휴전을 하였으나 나라는 광야였다. 당시 세계 130여 나라 중에 가장 가난한 나라로 유엔을 위시하여 미국의 원조와 함께 나라 재건을 위하여 지도자가 앞장 서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꿈으로 국민 모두 팔을 걷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부르짖었다. 교회마다 철야기도 산마다 기도원으로 금식하며 부르짖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이 과연 계시고 신도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가! 반란과 혁명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나라는 앞으로 달렸다. 고속도로 교통시설, 회사 설립과 공장 건설,24/7 생산과 수출에 모두 땀과 피를 쏟았다. 나라는 틀이 잡히고 세계 올림픽 경기를 주최하고 IMF 세계 경제대란을 이겨내며 세계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갔다. 놀라운 기적으로 광야가 낙토로 바뀌어 갔다. 모두의 합심 협력이지만 하나님의 도움이시다. 어느덧 가난은 옛말이 되는 것 같다. 자랑스런 민족이요 믿을만한 하나님이다.
나라가 경제대국 10위에 들어갔지만 개인의 만족과 행복지수는 경제발전국 중에 밑바닥이고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하위, 보이는 것으로 비교 경쟁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듯 철야기도 산상기도는 역사에만 남고 감사와 웃음을 모르고 스트레스와 우울 좌절에 시달리는 인생 광야가 되었다. 낙토의 모습은 사라진다. 다시 부르짖을 때가 돌아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복주시고 후손에게 낙토를 약속했지만 그들은 이집트로 가서 안전하게 살며 번창하자 이집트는 그들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노예로 삼아 고역을 시켰다. 그들은 고난 속에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이들을 해방하였다. 자유를 찾은 기쁨은 잠간, 홍해가 앞을 막고 이집트군대는 뒤를 추격하였다.죽음의 두려움으로 부르짖자 홍해는 갈라지고 그들은 육지로 건넜으나 추격하던 이집트군인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낙토를 향해 출발하지만 그 길은 광야다. 물도 양식도 길도 없다. 그 때마다 부르짖고 하나님은 응답한다. 광야와 낙토가 계속 교차한다. 왜 그럴까? 낙토만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살 것 같기에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며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다. 어느 누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
인생의 가장 큰 두려움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심판이라 이에 부르짖음이 크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그는 가난과 질병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을 해방하여 낙토를 경험하게 하였다.최후의 언수 죽음을 인간 대신 죽음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에서 해방과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주셨다. 광야 같은 그의 고난 죽음은 믿는 자에게 영광스런 낙토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는 주께 더욱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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