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3, 2018

소수의 사람에게 Not to Many but to a Few


10:38-43 소수의 사람에게 Not to all but to a few (4/22/18 주일)
미네소타 역사에 기록을 깨는 4월의 폭설과 얼음으로 우리 교회 역사에 처음으로 지난 주일 예배를 모이지 못할 정도의 긴 겨울이 이제 지나듯 따뜻한 햇빛이 비치자 며칠 사이에 봄이 오는 것 같다. 봄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나? 날이 따뜻해지고 눈과 얼음이 녹아내린다. 입는 옷이 가벼워지고 밖에 나오는 사람이 많아진다. 죽은 것 같은 나무가지에 생명의 기운이 오르고 싹이 나오는 준비를 한다.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 이제 죽음 같은 어둠의 겨울이 지났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예수께서 겨울 같은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아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살아나신 그가 나타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40일을 계시면서 사람들을 10번이나 따로 따로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가 살아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되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몇 몇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 한다.
1  우리가 만일 주님 입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였다면 누구에게 나타나 자기를 보이고 싶겠나? 남의 집 종으로 학대를 당하며 고생하다가 나중에 그 집을 빠져 나와 인생에 성공을 하였다면 누구에게 자기를 보이고 싶겠나? 암행어사 출두요!! 하면서 자기에게 어렵게 한 사람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지 않겠나? 예수님 경우 재판장 빌라도가 심문하며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군중의 소리에 못 이겨 그를 처형하였으니 그가 살아나면 먼저 빌라도와 유대지도자에게 나타나 그들을 처단하려 하지 않겠나? 우리 같으면 그럴 생각을 가질만 하다. 주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난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무덤에 군인들을 파수병으로 세웠다. 무덤을 황제의 도장을 찍은 것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번개 천둥이 일어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내다. 군인들이 죽은 것 같이 엎드러져 정신을 잃다. 무덤은 비어 있고 시체는 없어지다. 그들이 그 사실을 유대 지도자에게 보고하자 그들에게 돈을 주며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하라. 만일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한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곳에서 전파하는데도 그들이 거짓을 말한다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오지 못한다. 예수께서 유대지도자나 로마 관료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난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시다. 이전 처럼 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지 않았다. ? 여전히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부활한 주님을 보아도 믿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예수를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 붙이고 그를 죽인 원수들이 부활한 예수라면 그들이 변하여 받아드릴 것 같나? 호화롭게 살고 있는 집 앞에 나사로가 얻어 먹는 거지로 있다. 둘 다 죽었다. 나사로는 낙원에 부자는 고통스런 불꽃의 지옥으로 가다. 그가 고통 중에 아브라함 에게 부르짖는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속에서 괴로워 하나이다. 대답은 그럴 수 없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자기가 있다. 그러면 나사로를 우리 집에 보내어 여기 오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이 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면 들을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 가도 듣지 않는다 (16:31). 죽은 자의 말이라고 듣지 않는다.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살아 났을 때 유대인은 그의 말을 듣기는 커녕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신 산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28:17). 주께서 살아나신 모습을 많은 사람께 보여 준다 해도 군중은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늘 호산나를 외치다가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것이 군중이다. 예수께서는 지상 사역하시던 때나 지금 부활하신 후라도 군중에게 자기를 맡기지 않으신다. 친히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신다 (2:25). 이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가 속에 없다.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심문하다가 왕으로 무엇을 하는가 묻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니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18:38) 비웃으며 관심도 없어 한다. 정의와 법을 대표한다는 로마의 총독이 그렇다면 일반 사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였지만 다시 그를 십자가로 몰고 갈 것이다.

2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부활 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몇몇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10:41) 주님은 소수의 사람에게 부활하신 자기를 나타내시었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의미를 가지나?
1)이 소수의 제자들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3년간 주와 함께 다니면서 교훈을 듣고 배우고 사역과 큰 능력의 이적으로 훈련 받았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이들은 실망하고 좌절할 뿐 아니라 두려움에 눌려 있었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 주께서 부활하시어 이들을 다시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주의 구원과 생명 사역은 이 제자들을 통하여 이어질 것이다. 이들이 주저 앉거나 사라지면 주의 사역도 진행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먼저 이들에게 자기가 죽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살아 있음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인가 환상인가 생각하기에 살과 뼈가 있음을 보이고 손과 발, 옆구리의 못 자국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한다. 죽음이 최후의 원수로 군림하지만 죽음은 예수의 부활로 정복된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로 가신 이유를 알게 하신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예수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것을 확신시킨다.
2)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 아니라 함께 음식을 나누다.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자들이라 한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시어 말씀을 나누다가 해가 넘어가자 그들의 제안에 따라 함께 여관에 들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다 (24:30).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나타나시어 놀라고 두려워하는 그들을 안심시킨 후 먹을 것이 있는가? 생선 토막 드리니 그 앞에서 잡수시다 (24:43). 제자들이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가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던 때에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게 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하고 그들이 육지에 나오니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서 조반 먹으라 (21:12).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가까운 관계의 친구라는 것을 말한다. 미국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서 공부 또는 일을 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누구와 같이 음식을 먹나? 생일 잔치에 누구를 초청하고 싶은가? 누구와 가까이 하고 싶은가? 내가 74년 공부하러 와서 식사 시간 되면 자주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같이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다. 같이 음식을 먹던 한 학생이 감사절에 버지니아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다. 나를 친구로 받아 준 것이다. 그 집을 방문하여 함께 며칠을 지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지금까지 학장 자문 위원, 모금 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음식 먹으면서 친구가 생긴 결과였다. 주께서 사역하는 동안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같이 음식을 잡수시다. 배가 고파서보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면서 그들과 가까운 사랑을 나누심이다. 그러면서 그들을 훈련시키신다. 그들이 부활의 증인인 것을 확인시킨다.
3)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다른 몸을 가지신다. 살과 뼈가 있지만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문을 닫고 있어도 중간에 들어오신다. 함께 음식을 잡수신다. 그리고 또 사라 지신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알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두려움에 있는 것 아시고 찾아 주신다. 의심과 문제가 있는 것 아시고 만나 풀어 주신다. 내가 항상 같이 있으리라 약속하신다. 주께서 함께 하심을 확인시킨다. 주님 살아 계신 때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더욱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염려가 있겠나?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 중에 함께 하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다 (18:20). 주께서 함께 하시니 힘이 생긴다. 주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니 제자들이 힘이 생긴다. 나가서 주의 부활을 말하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어 온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다.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니 듣는 사람 가운데 3000 명이 주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 집에 초청을 받아 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오늘 본문을 말씀한다.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한다. 주님은 종족 차별 하지 않음을 알게 되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다. 주께서 함께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베드로의 제자 이그나시우스가 살아 계신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로마 황제가 그를 잡아 심문하고 고문을 한다. 이그나 시우스는 자기를 테오포러서(Theophorus)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자라는 뜻 이라며 그는 하늘과 땅 바다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를 믿고 전한다고 하다. 로마 황제만 아니라 온 세상이 내가 전하는 복음에 반대하여도 내가 모든 세상을 대항한다. One against all. 요한의 제자 폴리갑도 잡혔다. 나이가 많다. 왜 그 나이에 어렵게 죽음을 당하려 하나? 지금이라도 예수 이름을 부인하라 하자, 내 나이 84가 되도록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은 주님을 내가 지금 모른다고 하겠나? 나를 어서 주께로 보내 주시오. 죽음을 자청 하였다. 세상이 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시기에 담대하게 죽음도 택하였다. 있는 곳 가는 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전한다.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4)부활하신 주님은 자기가 함께 하던 사람 외에 자기를 반대하던 자로는 한 사람 사울에게 나타나 보이시다. 그는 예수를 믿고 그의 부활을 전하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 서고 살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감옥에 넣고 죽이기 시작하다. 그가 그 일을 하고자 다메섹 으로 간다. 다메섹 교인들이 자기들의 생명과 복음을 위하여 물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주님이 햇빛보다 밝은 빛을 그에게 비치며 나타나자 시력을 잃고 땅에 엎드러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나?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는 부활의 주를 만나고 그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어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려고 하던 다메섹에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바울과 일행이 나중 데살로니 가에 가니 사람들은 그를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 (17:6), 천하를 뒤집어 엎는 자가 왔다고 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의 생명이 임하면 세상을 뒤집어 엎는 힘이 생긴다. 무엇 보다 주의 생명과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엎는다. 주를 반대하던 사울을 그대로 두면 생겨나던 주의 교회가 생존에 위협을 당하기에 그를 뒤집어 반대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 일을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는 오순절 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 한다.
5)부활하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택하신 소수의 사람에게 자기를 보이시고 확인 시켜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소수를 훈련하여 다수를 구원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위하여 아브라함 하나를 선택하고 그와 후손을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하시다. 소수 통하여 큰 일을 하신다. 기드온이 미디언과 전쟁할 때 군사를 모으자 32,000명 젊은이가 모였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으니 두려워 하는 자를 돌려 보내라 하자 22,000 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한다. 강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300명을 골라 부대를 만들다.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떼처럼 많고 낙타는 해변 모래와 같이 많으나 300명으로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창조적 소수로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주께서 택한 열두명으로 시작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 아직도 믿는 자는 생명을 가진 소수다. 우리가 그에 속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소수를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복을 전하여 주를 믿게 한다. 생명을 보고도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죽음과 정죄를 받게 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티에스 에리오트 영국 시인의 장편시 첫 머리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대학 시절 이 시를 읽으면서 왜 4월이 가장 잔인한가? 이해를 하지 못하다. 많은 해설을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한참 있다가 이해를 하게 되다. 4월은 죽은 가지에 생명이 올라온다. 겨울 동안은 모두가 잎이 떨어지고 죽은 것 같이 보인다. 4월 봄이 되자 생명이 나타난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뚜렷이 갈라진다. 살았다 죽었다 나누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산 것은 북돋우고 죽은 것은 잘라 불에 던지는 것은 가장 잔인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힌다. 망각의 눈으로 덮고 따뜻한 겨울을 지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이 있다. 주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부활하여 일어난다. 그런데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죽음에 남아 있다. 생명과 죽음이 구분되는 것이 잔인하다. 모두 같이 무덤에 있다가 한 쪽은 영생, 한 쪽은 영벌로 갈라지는 것은 가장 잔인함이다.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주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인이나 빌라도의 심령은 여전히 생명이 없는 겨울의 황무지다. 엘리옷이 시를 쓴 1922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생명을 외면하는 황무지의 삶을 살고 있다. 생명이 풍성한데 죽은 황무지는 잔인한 것이다. 예수 부활 증인은 겨울의 황무지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을 가져오는 일을 한다. 받아드리면 생명이요 거절하면 여전히 죽음의 황무지다. 오늘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나?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그 생명과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소수에 포함 되어 있나? 아니면 아직도 그 생명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을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결정할 그런 형편에 있나? 이 생명의 계절에 황무지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는 주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기를 기원한다.

동영상은 www.kpc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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