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1, 2019

내 탓입니다 It is my Fault


사도행전 6:1-7 내 탓입니다 It is my fault (3/31/19 주일)
처음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 무엇이 많이 다른 것을 발견했나? 말과 행동, 관습이 다른 것으로 혼란을 겪지는 않았나? 무엇이 힘들었나? 오기는 왔으나 이웃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은 것이 고통이다. 나는 뉴욕에서 목회할 때 주택가의 미국교회를 빌려 모이면서 어른 아이들이 많아지고 복잡하니 동리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며 짜증을 내다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하다. 문화가 다른데서 오는 고난이다. 일세 이세 사이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다 자녀가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부모를 무시하는 경우에 너는 내 자식 아니라며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다. 피차 받아주지 못하고 마음이 상한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다른 문화, 가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 수 있나? 어떻게 적응하며 화합하며 살 수 있나?
오늘 성경에 이 때에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많은 다른 사람이 모인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때 12명 제자들이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할 때 120,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하자 주를 믿고 세례 받은 자가15나라에서 온 다양한 배경을 유대인 3천명으로 늘어나며  큰 기적이 일어난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고 주를 찬양한다. 많은 질병이 나음을 받는다. 교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함께 나눈다. 더욱 사람들이 많아져 5천명이 된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넣고 다시는 예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데도 그들은 사람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며 고난 당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들은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봉헌하여 함께 나누며 구제하고 봉사하기에 핍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1  교회 내의 문제: 이렇게 활발하게 뻗어가는 교회에 문제가 들어온다.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밭을 팔아 바친다고 하면서 일부를 숨기고 위선과 거짓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생명체에 닥친 비극이다. 6장에는 교회 안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다. 교회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갈등이 있다. 헬라파는 유대인이지만 본국을 떠나 외국에 가서 살던 사람들로 이들은 헬라말을 사용하고 자기 본국 말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브리파는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헬라말 사용을 잘 하지 못한다. 이들은 말만 아니라 문화가 서로 다르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헬라는 희랍으로 철학이 발달하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 사랑이다. 이들은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찾는다. 그들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말하며 배우기를 좋아한다. 개인을 존중하고 사람을 영과 육으로 구분한다. 반면 히브리파는 유대인들로 인간 지혜보다 하나님의 계시와 표적을 소중하게 여기며 인간 생명은 시작부터 육과 영을 나눌 수 없는 복합체요 할례는 하나님 언약 백성의 표시다. 헬라인은 다른 민족을 야만이라 하고 히브리인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 하며 받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에 사회에서 같이 살면서 많은 갈등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로 들어오다. 교회의 구제 대상에서 과부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기에 그들을 돌보라고 하신다. 추수할 때 다 거두지 말고 이들을 위하여 조금 남겨두라고 하다. 모압 여인 룻이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우러 밭에 나간 때 주인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룻을 위하여 이삭을 남겨주라고 하였다. 정부나 다른 자선 단체가 없기에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그들을 돌보라고 하신다. 초대교회에도 과부가 많아 그들을 구제한다. 그런데 헬라파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원망이 나오다. 히브리파 사람들이 헬라파 과부들을 일부러 구제에서 누락시켰는지는 모르나 아뭏든 그들이 구제에 빠진 것으로 원망이 들어왔다. 이 원망은 히브리파를 향한 것이지만 결국 사도들을 향한 것이다. 사도를 향해 그런 원망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일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몹시도 상한 것이라 본다. 이 때의 사도들은 권위와 능력이 누가 흉내내거나 항거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 이름으로 일으키는 능력을 발휘하고 그 외의 많은 병자를 치유하되 베드로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이 고침 받는다고 할 정도다. 또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아나니아 삽비라가 죽어 나가자 모든 사람들께 두려움이 닥쳤다. 유대 최고기관인 공회도 이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석방시킬 정도로 이들은 당당하고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한 원망이 일어났다. 사리가 분명한 헬라파로서는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식탁을 나누고 구제를 하는데 소외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도 만일 소외를 당하면 그런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사도들의 반응과 해결책: 이런 불평과 원망이 일어날 때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누가 감히 우리를 원망하나 하며 원망하는 자들을 축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일은 의례 있는 것이니 못들은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원망이 처음 시작하는 교회에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았다. 교회가 안에서 헬라파 히브리파로 분리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잘못하면 교회가 분쟁 속에서 분리되고 교회의 생존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교회 내에는 외국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이 매우 많기에 이들이 모두 떠날 수도 있다. 또 중요한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주께서 주신 마지막 사명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인데 예루살렘 교회 안의 두 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리된다면 어떻게 인종 언어를 넘어서서 온 세계로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의 교회로 뻗아나갈 수 있겠나? 시간을 끌 문제가 아니다. 헬라파든 히브리파든 과부들이 당장에 살도록 도와야 하지만 교회의 생명과 사명을 위하여 당장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을 알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그들에게 말한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 앞에서 말한다. 그들을 피하지 않고 그들 앞에 서서 말한다. 이 문제가 일어난 것은 우리 탓이다. 우리가 잘못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밥상 차리며 봉사하는 일을 한 것이 잘못한 것이다. 사도들이 하는 일은 말씀과 기도 사역인데 구제와 봉사 사역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인정하였다. 자기들의 권위 위신을 접었다. 구제에 빠진 사람들과 불평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자기 위치와 위신을 그대로 지키고자 하면 잘못하였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을 벗고 내리고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대책을 제안한다. 우리가 잘못하였으니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리라. 사도들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스스로 사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지 않고 그들에게 선택하라 하다. 사람 선택의 헬라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다. 원망하는 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대표자 선택을 위임하며 그들의 자격을 말한다. 구제 봉사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기에 칭찬 듣는 사람, 곧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 뜻을 따름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주께서 하시던 일을 주의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만하여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온 무리가 그 말을 기뻐하고 만족하였다. 선출 방식은 말하지 않지만 이들이 사도들이 말한 자격에 합한 자로 스데반 빌립 등 일곱명을 선택하였다. 놀라운 일은 일곱명의 이름이 모두 헬라파 사람이다. 마지막 사람 니골라는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이방인으로 유대교를 믿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히브리파는 한 사람도 없다.
사도들은 그들이 뽑은 일곱 사람에 대하여 아무 이의가 없다. 사도들이 제시한 자격 기준에 맞는다고 보았기에 그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린다.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 일곱을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이들은 봉사하고 구제 사역을 할 사람들로 처음 집사 안수를 받은 것이다. 사도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안수하였다. 안수하는 것은 구약에서 내려오던 전통이다. 하나님이 내 사람이라 인정하고 세움이다. 이스라엘은 할례로 하나님 백성이라 하지만 안수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안수는 사도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사도들이 행하는 영적 능력을 이들에게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주의 사람으로 내어 보내며 주의 일을 하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사도와 헬라파의 합동 으로 구제와 봉사의 일을 위하여 일곱 사람이 세움을 받았다. 헬라파만 아니라 온 교회가 사도들의 권위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 드린다.

3  결과: 온 교회가 기뻐하며 하나가 되었다. 주께서 마지막 기도에서 주의 백성이 하나 되게 기도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17:21)
교회 내의 갈등과 원망이 내 탓이라고 하는 사도들의 말을 받아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시행하니 문제가 풀어지고 평화로 하나가 되었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고 일곱 집사는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도록 교회 조직과 사역을 분담하게 되니 더욱 체계적으로 일이 된다.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게 되니 하나님 말씀이 왕성하게 뻗어 예루살렘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다. 제사장이 전에는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반대하고 고발하였으나 이제 말씀을 받아드린다. 사실 사람이 믿고 구원받는 것은 구제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다. 홈레스들이 10년동안 밥과 옷, 잠자리를 받았으나 속사람의 변화가 없었는데 말씀과 기도,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삶이 새로워지고 직장 훈련을 받아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보았다. 말씀의 능력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니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아가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된 교회는 밖으로 뻗어간다. 집사 스데반이 말씀을 증거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아시아의 길리기아와 다른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외국에 살아 본 헬라파 사람이 헬라 문화에 속한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또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베푼다. 히브리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헬라 세계로 뻗어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길이 열린다. 교회 안에서 소외와 불공평한 처사에 대한 원망이 일어날 때 사도들이 내 탓이라 고백하며 불편한 그 사실을 받아드리고 해결책을 내어 시행할 때 일어난 일이다.

뉴욕에서 내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던 동리 사람들이 미국 교회 목사에게 회의를 요청하고 수 십명이 교회에 모여 나를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내게 말을 하라고 한다. 기대하지 않던 일이었기에 머리 숙여 주님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먼저 불편을 드려 미안하다고 하며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내 말을 들어보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교육 받은 자들로 미국 정부로부터 영주허락을 받고 와서 열심히 일하고 세금내며 좋은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이민 일세가 함께 모여 언어 문화의 차이점을 극복하는 힘을 기른다고 하다. 그 동리 사람들이 오래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인 것을 내가 알기에 묻다. 여러분은 언제 미국으로 왔나? 여러분의 이민1세 조상도 우리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나? 정부에서 우리에게 이곳에 와서 살도록 허락하였으니 우리 같이 협력하며 함께 살자고 호소하였다. 듣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 자리를 떠나고 몇 사람만 남았다. 그들과 악수하고 좋은 관계가 되고 친구처럼 되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히브리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그의 백성이기에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그들을 애굽의 종생활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안내하다. 그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거역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세우겠다고 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중재한다. 내탓입니다. 내가 잘못 인도하여 이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이들을 용서하소서. 하나님이 감동되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한다.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주께서 대신 죽으신 것을 알지만 지금도 나는 계속하여 잘못을 저지른다. 그 때마다 주님은 아버지 앞에서 나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내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시고 저를 용서하소서. 이런 기도가 있기에 오늘 내가 살고 있음을 감사한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도 많은 문제와 갈등, 불평과 원망, 소외와 분파가 있을 수 있다. 마음 아파하는 자가 있다. 이들의 신음과 고통이 있을 때 그들을 품으며 이것이 내 탓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지도자에서 시작할 것이다. 목사는 목사 대로 집사는 집사 대로 각자가 나름대로 내 탓이라, 내 잘못이라고 할 때 일이 풀리고 평화 가운데 기쁨으로 하나가 되고 새로운 생명과 능력으로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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