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0, 2019

어떤 반응? What Reactions?


사도행전 4:1-12 어떤 반응? What reactions? (3/17/19  전하는 교회 주일 설교)
개구리 나오는 경칩을 지나 춘분이 다가오며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니 완연한 봄기운을 느낀다. 봄이 오면 우리의 옷이 가벼워진다. 방 안에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온다. 변화에 반응을 한다. 몸에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가 여러 조사를 하고 처방 약을 받는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반응한다. 미국으로 이민하여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반응을 하며 사나? 사람은 평생토록 반응하며 산다. 어린 때 가정에서 부모와 형제, 학교에서 교사와 친구, 사회에 나가 직장, 사업에서 만나는 많은 환경과 사람, 제일 큰 것은 가정을 이루는 부부, 모두 관계 속에서 어떤 도전을 받고 그것에 반응하며 배우고 발전한다. 반응이 없다면 죽은 것이지만 살아 있기에 반응한다.

1 복음에 대한 반응:
1)복음의 능력: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첫 이적은 날때부터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다가 베드로 요한을 만나 예수 이름으로 고침받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자 베드로 요한은 이에 대하여 설명하며 복음을 전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건강하게 하였다. 예수 이름 외에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전한다. 예수는 생명이다. 죽은 것 같은 땅에서 생명이 올라오듯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요 능력이다. 병 나은 사람이 증거로 그곳에 같이 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드리고 믿으며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1) 4절 믿는 자가 5천이나 되었다.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가 3천명이었는데 기적을 보면서 복음을 듣자 사람들이 더욱 믿게 된 것이다.
2)지도자의 반응: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와서 보고 듣더니 싫어하여 베드로 요한을 잡아 감옥에 넣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자로 예배와 희생을 담당한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내에서 소란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담당하는 오늘 경찰과 같은 자다. 사두개인은 성전 치리회 담당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올바른지 살피는 자다. 이들은 베드로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한다. 왜 싫어하나?
그들이 볼 때 베드로 요한은 갈릴리 시골 사람들로 유대인 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은 범인이라 (13) 백성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다. 가르치는 내용에 상관 않고 가르치는 자의 자격을 논하고 있다. 소위 자격증 없이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은 이전까지 없었으나 지금은 사실이 되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다. 그들의 믿음과 전통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생각 전통이다.
이들은 사도들을 공회에 고발하다. 다음 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이 모이고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였다. 사도들을 불러 내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 이 질문은 주님이 받은 질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나? (21:23).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 권세를 내세우고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고자 한다. 여기 나오는 이름들, 안나스 가야바는 몇 달 전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다. 어쩌면 베드로 요한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주인 예수와 같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여 있다. 그들은 자기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따르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반응하나?
1)이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고 주와 함께 3년을 지나며 배우고 많은 이적을 보고 실습하였다. 이들의 꿈은 부풀었다. 나라가 새롭게 되고 자기들이 주와 함께 다스리는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그가 행하던 능력이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잡히어 죽을 것을 말씀하고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그들은 주를 모른다 부인하고 도망하였다. 이전 같으면 여기서도 부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풀려나거나 도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2)그런데 이들은 이전의 베드로 요한이 아니다. 무슨 권세로 누구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나? 하는 질문에 아주 대담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이 사람이 병에서 어떻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는지 물으면 확실히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여기 서 있다. 역사상 앉은뱅이로 태어난 자가 일어나 걸은 적이 없고 어떤 의사가 고칠 수 없는데 그가 건강하게 되어 그곳에 있는 것은 능력의 주께서 하신 일이라 한다. 확실하게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심문하던 자들이 다른 말 할 것이 없다.
3)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지만 베드로 요한은 담대하게 너희 말 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20). 병 나은 사람이 그곳에 있고 또 많은 사람이 믿으니 그들이 어찌하지 못하고 풀어주게 되었다. 5장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가다 (5:41). 이들은 대항하거나 분노하거나 싸우지 않고 오로지 예수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분명히 전하면서 박해 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3 사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한 자들로 변하였을까?
1)성령이 충만함이다. 여기 충만하다고 함은 과거 오순절에 성령 충만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함은 주의 영, 주의 생각이 그들의 생각 삶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무슨 생각이 먼저 있다. 생각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어떤 일을 당할 때 내가 주의 뜻 생각 따라 응하나 아니면 내 생각을 따라 응하나? 여기 심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모두 자기 권위 자기 자리 자기 생각 전통을 따라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병자가 고침 받고 하나님 찬양하는 일에 함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한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병자에게 행한 일은 착한 일이요 그가 건강하게 되고 구원의 생명 얻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2)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13). 예수로부터 배우고 훈련 받으며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다. 주의 능력과 기사를 보았다. 생명과 능력의 주를 믿는데 왜 이런 고난이 따르나? 주의 능력이 있는데 왜 물리쳐 주지 않나? 내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어린양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잡히어 심문당하고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정죄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주께서 그렇게 고난 당할 것을 말씀 하셨다. 또한 나를 미워하는 세상이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16:33) 하심을 기억한다. 주님이 당한 고난을 나도 받는다면 그것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담대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뒤를 따른다. 욥이 재산 자식 건강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생할 때 부인은 믿음은 무슨 믿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한다. 욥은 부인에게 어찌 그리 어리석은고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데 재앙은 받지 않겠나?(2:10)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하며 마음으로 입으로 범죄하지 않다.
주께서 고난 당하였고 그 전과 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고난을 당하였다. 나혼자라 생각하면 고통이 심할 수도 있으나 나와 같이 고난 당하는 자가 많이 있음을 알면 잘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면 그대로 되었다. 말 한 마디에 3 6개월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았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시키고 바알신 아세라신 선지자 850명을 모두 죽이다. 3년 반 기근이 끝나고 비가 내릴 것을 말하다. 아합왕이 마차를 타고 갈멜산에서 이스르엘로 돌아갈 때 그 먼 길을 엘리야가 마차 앞에 달려갈 정도로 주의 능력을 힘 입었다. 다음 순간 왕비 이세벨이 아합을 죽이고자 하니 그가 살겠다고 도망하여 먼 길 호렙산으로 가 굴에 숨다. 주를 향한 열심이 특별했으나 나만 홀로 남았으니 나를 죽여 달라고 한다. 살려고 도망했지만 이젠 죽고 싶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남긴다 (왕상19:18) 한다. 엘리야가 새 힘을 얻어 후계자를 세우고 왕을 세우는 일을 한다.
3)사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그와 함께 있었다.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깨치고 영원한 생명, 죽지 않은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 것이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시나? 고난 후에 영광 생명이 있는 것을 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11장 믿음장 마지막에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주의 길을 걸었기에 이런 사람을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11:38)고 한다.
로마에서의 기독교 박해와 순교를 기억한다. 네로로부터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겠다 할 정도로 오가작통법을 적용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화형, 원형극장에 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하는 고통이 왔으나 많은 이들이 감당하다. 그러나 250년이 못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지금 캐톨릭 중심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순교자의 피를 통해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 준다.

4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가?
1)일단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음으로 살고 있음이 감사하다. 베드로 요한 같이는 못 되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 구원과 생명의 감격을 가지고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전하는 교회 교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믿는 그 분을 전하고 나눌 수 있을까?
2)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하나? 부부간이나 친구나 이웃, 교회 안에서 어려움과 아픔이 어떻게 일어나나? 내 생각 내 주장에 이끌려 다른 사람과 그가 하는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나? 또 내가 판단 받고 정죄를 받을 때 나는 어떻게 응하나? 피하거나 아니면 다투거나 갈라지거나 하지 않나? 베드로 요한을 보면서 내가 주 안에서 묵묵히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나?
3)그 비결은 바로 성령 충만이다. 날마나 아침마다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기도하며 주의 말씀과 그의 삶을 기억하고 주께서 하신 일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나? 오늘 피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주의 은혜로 사람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세워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동영상은 www.diasporachurc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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