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4, 2019

성전 문에서 At the Temple Gate


사도행전 2:1-10 성전 문에서 At the Gate of the Temple (3/3/2019)
교회에 올 때나 집에 가면 문을 들어선다. 대학 입학이나 직장 취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말을 시작하면 말문을 연다고 한다. 문은 무엇을 말하나?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한다. 제한을 둔다는 말이다. 문은 안에 있는 것을 지키고 보호한다. 밖에 있다가 집의 문에 이르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기대하나? 안에 들어가면 안에 있는 것을 누리고 즐긴다. 왕의 집이나 남의 집이면 대화와 교제를 통하여 가까워지고 형편 소원 계획을 나눈다. 내 집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다음 날을 준비한다. 교회에 올 때 어떤 생각, 어떤 기대를 가지나?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중요하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이다. 유대인은 어디 있든지 일년 세 번은 이 성전을 찾아가 예배하기를 원한다. 성전에는 희생제물을 드리고 예배하는 자, 기도하는 자들이 찾아 온다. 다윗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부르짖고 기도했듯이(55:17) 유대인은 하루 세 번 아침Shacharit과 오후 Minchah 저녁Arvith에 기도하였다. 기도는 내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앞에 엎드려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며(11:13) 사정을 말하고, 하나님이 또한 마음 문을 열고 만나주시기를 바란다. 다니엘은 포로로서 바벨론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하루 세번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다 (6:10). 예수님도 기도 하셨다. 새벽 미명, 사역하며 낮에 또 밤에 철야하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와 교제하며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인류 구원의 일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쳤다.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후 3시 운명하고 저녁 6시 무덤에 묻히었다.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에 맞추어진 것이라 본다.
제자들의 기도: 9(우리 시간 오후 3)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다. 이들이 성전에 간 것은 기도할 뿐 아니라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기도하며 오순절 성령 체험 후에 복음을 전하자 3천명이 회개 하고 세례 받았다. 이제 성전에 가서 기도하며 전도할 것이다. 베드로 요한 둘이 같이 가다. 주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여 둘 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사역할 때 서로 협력 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게 하다. 복음을 전하거나 치유 사역을 할 때 한 사람이 사역 하면 다른 사람은 기도하며 힘을 더한다. 이들은 이전에 주님과 같이 지날 때 별로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께서 모든 것을 먼저 아시고 해 주신다. 예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고 기도하며 변형되실 때에 이들은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하여 졸고 있었다(9:32).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이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 주님이 떠나셨다. 함께 계시지 않은다. 두렵고 힘이 없다. 기도하며 주님을 가까이 만나고 그의 사랑 그의 능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주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 성전에 간 것이다.

1 성전 문에서의 기대: 성전 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기도하는 시간은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때라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와서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 둔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함이다. 기도하러 가면서 자선을 베풀 마음이 생기고 동정하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문, 미문 앞에 앉아 있다. 성전 구조는 외벽이 있어 문이 여럿이 있다. 맨 밖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 안에 내 벽이 있어 그것을 지나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번제단 물두멍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건물이 있다. 첩첩이다. 성소와 지성소에는 정해진 사람 외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나 일단 외벽 안에 들어가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고 주님이 이 성전 뜰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미문이 어디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이방인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라 하며 구리로 만든 높고 아름다워 미문이라 이름하다. 여기 앉은뱅이가 앉아 있다. 그는 나이 40여세(4:22)라 하나 한 번도 일어나 걸어 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잘못되어 일어나 걸을 수 없었다. 걷겠다는 소망을 잃고 좌절과 낙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살 길은 구걸하는 것 뿐이나 스스로 성전문 앞에 올 수도 없어 누군가 그를 데려다 놓아야 한다. 그의 기대는 무엇일까?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 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내일은 오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마침 베드로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오는 것을 보자 그들에게 구걸하다. 베드로 요한 앞에 앉은뱅이 거지가 있다. 기도시간 되었다 하고 못본체 하고 들어갈까? 왜 이 사람이 우리 길을 가로 막나? 할 수도 있으리라. 베드로는 요한과 같이 그 사람을 주목해 보았다. 눈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보며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우리를 보라 한다. 걸인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본다. 베드로가 말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금이나 은 돈이 없었다. 걸인이 구하는 돈은 없지만 그의 참 필요가 무엇인지 베드로는 알았다. 돈 한 푼을 주면 그것이 한 끼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다음은 또 다시 와서 구걸해야 한다. 걸인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불구자로 그대로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것이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40년을 지났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6:49-51). 베드로는 그가 생수, 생명의 떡 예수를 만나야 다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음을 알다. 그는 그 예수를 모시고 있다. 예수가 그에게 있다. 그 예수를 나눌 수 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그에게 주다. 걸인의 손에 돈을 담아 줄 수 있지만 그의 빈 영혼에 주님을 담아 주게 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다가 오지 않아 심방을 가다. 교회가 거짓말하기에 가지 않은다 한다.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하여 갔더니 구원 아니라 일원도 주지 않더라. 서울 지하철 안에서 어떤 젊은 두 사람이 논쟁을 하다가 떠들며 싸운다. 옆에서 보고 있던 노인이 여보 젊은이들 여기가 교회인 줄 아나? 싸우려면 교회에 가서 싸우라고 하였단다. 사랑과 평안을 찾아 교회로 모이지만 분쟁과 대립을 보면서 떠나게 된다. 얻는 유익 구원과 평안을 발견하지 못한다. 돈을 구하나 주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주님을 얻고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었이 문제 되겠나? 이 걸인은 몇 푼의 돈을 구하였지만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성전 문에서 되어진 일이다.

2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는다. 놀라운 일이다. 이 앉은뱅이는 나면서 불구라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걷는지를 모른다. 자라면서 일어나라 걸으라 수 없이 듣던 말이다. 되지 않은다. 일어나 걷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40살이 넘은 지금은 그 말이 불가능이라 잊어버리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을 하고는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킨다. 말만 아니라 오른 손을 잡는 순간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벌떡 일어서게 되고 걷고 뛰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가 걷지 못하는 걸인인 것을 알기에 깜작 놀라며 베드로 요한을 주목한다. 우리가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을 믿기에 그가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불편하게 앉아 움직이지도 제대로 못하고 누가 옮겨주어야 어디 갈 수 있던 사람이 이제 자유롭게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다. 주께서 하신 일이다.
이런 사람이 많이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 중에도 겉으로는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나 걷지 못하는 자가 많다. 속으로 상처나고 병이 들어 앓고 있기에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자가 많이 있다. 20 40년 평생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 아직도 걷지 못하고 앉아 있는 상태가 많다. 누구의 도움만 받는 형편이라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를 도울 생각은 더더욱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상하고 아파 찢어지는데도 아무런 도리가 없다. 교회의 일이 여기 저기 많이 있지만 일어나 할 수가 없다. 주변에 구원 얻을 사람이 많이 있지만 전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나사렛 예수의 능력을 아직 만나지 못하여서다. 성전 문에서 내가 얻을 것만 생각하고 있다. 사람을 구경하며 비평을 할 수 있다. 인심이 좋다 나쁘다 옷을 어떻게 입었다 등등을 말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이름의 능력을 만나야 한다. 손을 붙잡고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앉은뱅이는 베드로 요한을 처다 보고 무엇을 얻을까 간절한 심정이 있다. 우리에게 이런 기대와 간절한 소망이 있나? 주여 오늘도 주의 긍휼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3 베드로가 그 사람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가 누구인지 알기에 보고 심히 놀랐다. 그는 평생 성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슬픈 기색으로 들어간 사람이 기쁜 얼굴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 주를 경배하며 그와 교제하며 주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데 그는 완전히 외인이었다. 그는 40평생 불구자로 신세 한탄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을 하였다. 왜 나를 이렇게? 무슨 전생의 죄가 있나? 부모가 죄를 지었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거동이 불편하고 몸이 괴로울 때마다 부모와 하나님께 불평이 나올만 하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그에게 전하여지고 주의 능력이 임하자 달라지다. 그가 평생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고 베드로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걷고 뛰며 주를 찬양하다. 주의 이름을 높여 드린다. 하나님의 집 문간에만 있다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감격이 얼마나 클까?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던 평생 불구를 바로 주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을 알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께서 하신 일이다. 주께서 그를 사랑하여 고쳐주시고 이제 떳떳하게 살라, 가족과 친구와 같이 건강하고 복되게 살라 하시는 것을 느낀다. 너무 감사하다. 그는 집으로 가족에게로 뛰어가지 않고 먼저 성전에 들어가 자기를 성하게 하신 주 하나님, 예수님을 높이며 찬양하다. 하나님은 높임 받고 인정과 찬양 받기를 기뻐하신다.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여 주셨나? 죄 용서 받은 자유와 평화를 알고 감사하며 주를 인정하고 높이기 위함이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이름이 예수 외에 따로 없음을 알고 찬양한다. 우리 예배와 기도가 모두 받은 은혜 감사와 찬양이면 주께서는 기뻐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성전문에 앉아 한 푼의 돈을 기대하듯이 육적인 세상적인 어떤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나? 일어나 걸으며 활동하지 못하고 앉아 있지나 않나? 더욱 교회에 오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주께서 앉은뱅이 걸인을 만나 주시듯 우리를 만나주신다.
성전 문에 사람들이 많다. 우리 몸은 주께서 계시는 성전이다. 우리 앞에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의 참 필요가 무엇인지 보며 그 해결은 예수 이름 뿐임을 알고 예수 이름을 전하고 주의 능력을 나눌 수 있겠나? 주께서 우리 앞에 주시는 사명을 알고 수행하는 가운데 기쁨과 감격 주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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