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6, 2017

내가 주를 보았다 I have seen the Lord

내가 주를 보았다 I have seen the Lord (요한 20:11-18; 4-16-2017부활주일)

어느 집사님 한분이 아들을 데리고 낙시를 가서 배를 타고 낙시를 하다가 돌아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사라진 것이다. 찾을 길이 없다. 이런 수가 있을가? 현실이다. 같이 갔다가 아들 없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나? 이런 경우만 아니다. 같이 잘 살다가 어느 날 아들,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실종이 된 것이다. 미국에 실종이 많다. FBI보고에 의하면 작년 1년간 647,435 명이 사라지다. 어떤 사람은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사라지고 없다. 캠프힐 월마트 벽에 이런 사진이 붙어 있다. 가족의 마음이 어떨까?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1 이런 일이 오늘 본문에 일어나고 있다. 갈릴리 어촌 시골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면서 놀라운 꿈이 생겼다. 그의 가르침, 사랑, 기적의 능력 등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3년이 되자 예루살렘 서울로 간다. 이제 때가 왔다. 현 로마 체제를 정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이룩할 것이라는 감격과 흥분을 가지고 함께 간다. 대대적인 환영 퍼레이드로 호산나 호산나 외친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힘이 없이 흉악한 죄수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장사된다. 꿈과 삶 모두가 깨어진다. 어떤 이는 슬픔과 좌절을 안고 허탈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과 몇몇 사람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난다. 그중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며 새로워진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본부 가버나움 남쪽 7마일 갈릴리 바닷가 막달라 출신이다. 그의 집은 모직 염색을 하는 부자라 한다. 부족함이 없이 사는 그에게 문제가 오다. 귀신이 들어온 것이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 잡다. 그가 바닷가를 배회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그를 잡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고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다.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자기 가진 소유로 예수와 그 제자들을 섬겼다(눅8:2).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와 다른 여인들이 함께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다. 금요일 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서 지켜보다. 안식일이 다가오기에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급하게 요셉의 무덤에 장례하자 이 여인들은 소위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고 또 향유를 바르지 못하였다. 안식일 지나기를 기다려 안식후 다음 날 곧 오늘 아침 일찍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무덤은 열지 못하게 로마 황제가 도장을 찍어 봉함을 하였는데 누가 돌을 옮겨 줄가? 걱정을 하였는데 도착하고 보니 이미 돌이 옮겨지고 무덤이 비어 있다. 무덤에 자는듯이 누워 있어야 할 주님이 없어진 것이다.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겠나? 급하게 뛰어 베드로 요한에게 가서 전하다. 누가 주님의 시체를 가져 갔다. 베드로 요한이 무덤으로 가서 확인한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몸을 쌌던 수의가 그대로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옆에 그대로 놓여 있다. 이상한 일이다. 알몸이 빠져 나간 것이다. 매미가 껍질을 남기고 빠져 나간 것과 같다. 그들은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는 돌아갈 수가 없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 사랑하는 자가 있어야 할 곳에서 없어진 것이다. 마지막 사랑으로 향유를 부어 장례절차를 밟지도 못하였다. 주님이 삶의 의미와 기쁨이요 전부였는데 사라진 것이다. 자기 인생과 모든 것을 다 잃은 마음이다.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 앉아 있다. 천사들이 묻는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울 이유가 없는데 울고 있나?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기나 하는지! 누가 내 주님을 옮겨가고 없어요! 더 이상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나가려고 돌아서니 예수께서 무덤 앞에 서서 묻는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나? 그를 장지관리인으로만 생각하고 당신이 옮겨 갔으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 줘요 내가 가져가리이다. 어떻게 여인이 장정의 시체를 혼자 옮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사랑과 열정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신다. 그의 음성을 듣자 바로 누구인지 알고는 랍오니 선생님! 하고 엎드려 발을 붙잡고 경배하다.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하지만 음성을 듣고 알게 되다. 얼마나 큰 감격인가! 주님은 어린양, 잃은 양의 이름을 부르고 만나주신다. 무덤 안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온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다. 살아계신 주님은 이름 불러 사람을 만나신다. 시몬을 이름불러 주시고 삭개오를 이름 부르시고 사울을 이름불러 만나주신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친근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오늘도 일어난다.
백남선 사모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날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주일학교 교사 찬양 대원으로 섬기면서 부활주일을 31절 기념식하듯이 하고 찬양대에 앉아 목사가 설교하는 시간에 낙서하여 옆엣 사람과 주고 받는 일을 하였단다. 목사와 결혼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교수를 한다는 말에 결혼을 하여 미국에 먼저 온 남편 뒤 따라 왔다. 자기 인생 예정에 전혀 없던 목회의 길에 들어 갔다. 목사도 생각지 않던 목회를 한다. 어려운 이민사회 적응도 어려운데 더욱 이민 교회가 쉽지 않아 혼자라도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다. 금식을 밥 먹듯이 하는 가운데 사순절이면 적어도 10일 금식을 한다. 1978년 수난주간 토요일 아침 남편은 교회에서 주일을 위해 금식을 끝내고 주일을 준비하고 자기는 집에서 아이들 돌보며 금식을 끝내고 성경을 읽다.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만들고 대접을 하신다. 식사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을 읽는데 말씀이 큰 글자로 보이면서 백낙희의 딸 남선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로 음성과 함께 나타난다. 솔직하게 대답을 해야 하는데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세번 질문 세번 대답이 같이 반복되다. 대답을 그렇게 하고보니 자기의 허물과 부족이 들어나며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밥을 먹을 수도 없다. 그런데 남편 목사는 그날 아침 11시에 큰 은혜 체험하였다고 전화를 하는데 자기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아이들 재운 후 저녁 교회 와서 함께 기도 하자. 강대상 밑에 괴로운 심정 죄인으로 엎드려 주의 자비하심을 바란다. 밤 11시가 되어 예수께서 교회당에 들어와 강대상 뒤로 가서 두 팔을 축도하듯 들고 내려다 보신다. 주님이라는 확인을 하며 처다보고자 위로 눈을 뜨니 눈이 부셔 볼 수가 없다. 순간 마음 속에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마음에 기쁨 감사 확신이 나온다. 확실하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간증을 하게 된다. 삶이 달라지다. 다음 날 부활주일 새벽 예배에 가장 무서운 장로를 껴 안아주며 주님이 장로님 사랑하십니다. 길 가다가 신호등에 차가 서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내려가 껴 안고 주님이 사랑합니다 말 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다.

2 마리아가 슬피 울며 고통 중에 주님이 오시어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말씀이시라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신다. 그런 예가 너무 많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우리 교회 안에서 되어진 일을 소개한다. 안대현 장로님은 12년 전 70세에 지붕을 고치고자 사닥다리에 올라 갔다가 떨어져 콩크릿 바닥에 뇌가 부딛혔다. 혼수 상태에 홀리 스피릿 병원에 실려 가다. 의사들이 둘러 서서 조사를 하고는 살 가망이 없다고 하며 무어 의사는 포기하다. 아서달 의사는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니 수술해 보겠다고 하다. 뇌를 수술하고 20일을 혼수 상태에 있다. 살 가망성이 없어 가족의사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주자동차 면허청에 보고하여 이름과 면허증이 말소되었다. 20일이 되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며 하나님 내가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고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무슨 죄를 하나님께 지었습니까? 질문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살아 있다. You are alive 세번을 말씀하시다. 확실하게 주님이 그를 만나시고 만져 주셨기에 그가 살아난 것을 확인시키신 것이다. 내가 작년 3월 21일 왔을 때도 병원에 입원하여 계셨지만 우리 부부에게 그의 건강회복에 대한 확신을 주셨는데 지금 95%의 기억이 회복되어 성경구절 영어 일본어 등이 술술 입에서 나온다. 할렐루야. 주님이 만나주시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살아난다(요5:28)고 하신 그대로다. 우리가 눈물 절망 고통 환난,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주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난다. 오늘이 그날이다.

3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주께서 내게 매달리지 말고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하고 두려움으로 숨어 있는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며 자기 부활 소식을 알리기 원한다. 마리아가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그는 살아나셨다 하니 제자들은 그것을 허탄한 말로 듣다 (눅24:10). 그날 저녁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있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다.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 하며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다. 왜 두려워하나? 내 손과 발을 보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 여기 먹을 것이 있나 하시고 음식을 잡수신다 (눅24:36-42). 부활한 주님은 우리처럼 살과 뼈가 있고 음식도 잡수시나 문을 닫아도 상관 없이 들어 오신다. 부활로 변화된 영화로운 몸이다.
내가 에티오피아에서 사역할 때 함께 일하던 카나다 의사 댄 포나루는 대학졸업 때까지 무신론자였다. 그리스도인을 보니 그들은 모두 위선자였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버려둘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없다. 교회는 위선자의 모임 단체였다. 무신론자로서 마음대로 술 마약 갬블 섹스 모든 것을 즐기며 대학과 의대를 마치다. 의대 수련을 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일할 마음이 생기는데 콩고 병원에서 의사를 구하는 광고가 났다. 신앙 간증서, 목사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전혀 모르는 말이나 웹에 들어가 간증서를 찾아 쓰고 의과대학 원목의 추천을 받아 원서를 보냈다. 초청을 받고 가니 수풀이 있는 시골에 병원이 있는데 실망하다. 술집도 놀음할 곳도 없고 여자와 지날 곳도 없다. 의사 간호사를 보니 그들은 모두 사랑이 넘치고 진실하고 열심히 일을 하다. 이런 기독교인들도 있구나! 자기 혼자 무신론자라 친구할 사람도 없다. 어느 날 동료 의사 하나가 책을 한 권 가져다 주며 요한 복음 부분을 읽어보라 한다. 저녁 시간 읽어 보려고 하니 모두가 거짓말 지어낸 말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다 마지막 예수께서 고발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보고 잘 하는 일이라고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무덤이 비게 된다. 이런 거짓말? 누가 훔쳐 간 것이지 하고 논리를 정리한다. 누가 훔쳐가? 유대인이? 부활했다고 해도 시체를 보라고 내어놓지 않는다. 군인들? 황제의 이름으로 지켰는데 시체를 잃었다면 처형감! 제자들이 훔친 것? 후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가 살았다고 전하다가 처형을 받았다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거짓을 위해 목숨을 바칠까? 이런 저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누군가 자기 뒤에 와 서는 것을 느끼고 본다. 바로 살아 계신 예수라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게 되자 그 앞에 엎어지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며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을 치며 바닥에 뒹굴게 된다. 전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내가 주를 보았다 고백이 나온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가 부인하고 욕하던 예수를 좋아하게 되고 그를 전할 마음이 생긴다. 켄냐 키자베 병원에 가서 10년을 일하며 베다니키즈 단체 만들어 어린아이들을 돌보다가 에티오피아에 와서 의과대학 학감으로 주의 사랑 나누며 함께 일을 하였다. 문을 닫고 있어도 주님은 오신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예배하며 문을 닫고 있지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신다. 이 강단에 서시어 말씀하실 수 있다. 우리 뒤에 서실 수도 있다. 우리 심령을 닫고 있어도 오신다.우리 눈이 열리면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일단 만나면 우리 삶에 기쁨과 감격 그것을 나누게 된다.

내가 주를 만났다. 만나기만 하면 변화와 생명 열정이 생긴다. 그러지 못한 사람과 큰 차이가 난다. 영국 시인 티 에스 엘리옷의 시 황무지 처음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어떻게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인가? 황무지에 생명이 올라오면 본래 죽음 같던 황무지가 더욱 죽음같이 나타나니 잔인한 것이다. 겨울에는 모든 나무가 죽은 것 같이 보이지만 4월이 되어 나뭇잎이 나오고 꽃이 피면 겨울에는 꼭 같이 보이던 것이 산 것과 죽은 것으로 판가름된다. 이것이 가장 잔인함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만나주신다. 그를 만나 변화와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가 하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여 생명을 피우지 못한다면 가장 잔인한 것이 아닌가? 나는 주님을 보고 만났는가? 오늘 우리가 마음으로 주를 사모하며 원하면 주는 우리를 사랑을 만나주신다. 오늘이 그런 복된 날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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