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17, 2024

주는 나의 비전The Lord is my Vision

주는 나의 비전The Lord is my Vision
고등학교는 한 사람의 인생 길을 정하는 중요한 기간이다. 진로를 생각하며 전공과목과 대학을 정하거나 아니면 사회로 나간다. 인생의 꿈 비전 소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내 외손자는 게임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라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이에 맞는 대학을 찾고자 부모와  함께 대학 다섯을 방문하고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꿈이 있지만 하나님이 나의 비전이라 한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Be thou my vision 이 찬송은 영어 세계에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와 같이 많이 불리운다. 이는  아일랜드 (Ireland)의 성자 패트릭(Patrick)을 생각하며 작사 작곡되었다. 패트릭 은 영국에서 16세에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종으로 팔리고 양을 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예수를 믿기에 여러 해를 열심히 일하다가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고 프랑스에 가서 공부도 하였다. 어느 날 아일랜드 사람이 나타나 젊은이여 와서 우리와 함께 살자고 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야만과 해적의 아일랜드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여  선교하였다. 
433년 부활주일에 아일랜드 왕은 그들의 신Druid 축제를 위해 모든 물을 끄고 켜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교신은 어둠을 가지고 온다.  패트릭은 아일랜드 제일 높은 Slane산 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며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밝혔다, 왕명을 어기며 생명을 걸고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였다. 그는 결국 아일랜드를 복음화하고 후에 성자 칭호가 주어졌다. 그의 비전 꿈 소망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누군가 패트릭을 생각하며 Slane산이라는 곡을 썼다. 6세기에 아일랜드의 시인 Dallan Forgaill이 패트릭을 기억하고 시를 썼다.  1905년 25세의 대학생 Mary Byune이 이 시를 발견하여 영어로 번역 도선관에 소장하고  1917년 아일랜드 연구가 Eleanor Hull이 Slane곡과 시를 연합하고  이는 1919년 발간 찬송가에 수록되어 사랑받는 찬송이 되었다. 주께서 나의 비전 소망임을 말한다.
사랑하는 시카고를 떠나 딸들의 소망을 따라 새로운 곳에 와서 어떻게 살까? 여기서의  꿈과 비전은 무엇일가? 고등학교 시절 주님이 주신 비전을 살리라. 고교 3학년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선생님의 추천과  아버님의 소원을 받아 법대에 가기로 하고 준비하였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음성이 들려오고 대화가 이루어지다. “종형아 법대에 간다고?” “예 그러려고 합니다”. “법대에 가면 무엇하는데?” “졸업하고 과정을 거쳐 결국은 판사가 되겠지요” “판사는 무엇하는데?” “송사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러다고 하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판단하는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내 사랑을 전하면 어떻겠어?”  항거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다.  내 꿈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꿈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나의 비전으로 삼는 시간이다.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공부를 할가? 자문하고 알아보니 목사가 되는 길이라 신학 공부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사대 영문과를 택하고 입학하며 발탁되어 무산아동을 위한 야학에서 주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시작되었으니 이를 계속할 것이다.

Saturday, September 7, 2024

홈 베이스 Homebase

홈 베이스 Homebase
야구에 홈이 있다. 투수가 볼을 던지면 주자는 치고 홈에서 출발하여 일루를 향하여 달리고 2루 3루를 지나 홈으로 향하는데 그 과정은 본인만 아니라 관중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투수와  포수 그리고 수비는 주자가 홈에 이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주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린다. 신경과 힘을 겨루다가 일단 주자가 홈에 이르면 관중의 박수와 갈채를 받지만 본인도 만족과 안도감을 가지고 마음을 놓고 쉬며 힘을 모아 다음 타순을 기다린다. 홈을 떠나 달리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홈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요 소망이 된다. 
사람에게는 홈이 필요하다. 삶과 일에 시달리고 힘들어도 홈은 휴식이요 다음 날을 위한 준비가 된다. 집과 같은 곳이 없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집, 아내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은 풍성한 나의 휴식처였다.  목회하며 격무에 시달리고 또한 관계의 불편함으로 힘들 때가 있지만 홈에 이르면 감사와 자유 평안이 있고 새로움으로 전환된다. 나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회복시키는 홈이다.
은퇴 후 전환기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임기가 끝나면 돌아올 홈이 있다는 것이 위로와 힘이었다. 아내에게도 그러하다.  선교지 사역으로 탈진상태에 이르러도 휴가기간에 돌아올 홈이 있는 것은 힘과 평안과 새롭게 달릴 바탕이었다. 집과 환경이 삶과 사역의 홈베이스가 된다.  이런 베이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역할 때 자라난 자녀들은 멀리 있어도 부모가 있는 집이 그들의 홈이라 서로  후원하고 힘을 더하였다. 이제 나이로 많은 제약을 가지자 자녀들은 그들 가까이 오기를 원하더니 한 딸은 생일 소원이 엄마 아빠가 그들 가까이 오는 것이라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그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 주기로 하다. 정든 곳 여러 친구와 작별하고 딸 옆으로 가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편하였다. 단 시일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볍게 이사하도록 그들이 도왔다.  집과 장소, 사역이 홈 베이스가 되었지만 이제는 자녀들과 함께 하는 홈베이스를 구축한다. 세 딸이 팀이 되어 두 딸이 있는 곳으로 순조롭게 이사를 하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평안이요 기쁨이요 내가 원하는 바다. 그들과 같이 있음이 행복한 나의 새로운 홈베이스다. 사는 집은 달라도 이제는 가족이 홈이다. 언제든지 만나고 즐기고 사랑을 나누며 삶의 동력을 얻고 기쁨을 가진다. 가족 같은 것이 없다. 시달리고 피곤할 때 엄마 품에 기대고 또 약하고 힘이 없어도 자녀들 옆에서 힘을 얻는 것이 최고의 홈이 아니겠나! 
이런 홈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 곁을 떠날 날이 온다. 슬픔과 아픔이지만 현실이다. 세상의 홈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홈이 기다린다. 주께서 팔을 벌리고 “잘 하였다. 내가 주는 평안을 누리며 안식하라” 하신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아버지의 사랑 성령님과 천사들의 위로가 함께 하는 완전한 홈이다.  더 이상 세상에서 달리며 시달릴 것이 없는 주께서  마련하신 홈베이스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하며 주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그 날의 홈베이스를 향하여 한 걸음 씩 나아가고 있음을 감사한다.

떠나도 떠나지 않아 Leaving but Not Leaving

떠나도 떠나지 않아 Leaving but Not Leaving
살아 있는 사람은 항상 이동을 한다. 미국의 원주민은 아시아에서 그리고 개척자는 영국과 구라파에서 옮겨와 이 나라를 건설하였다.  우리도 조국을 떠나 이곳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떠나고 도착하여 앞을 바라보고 힘들게 개척하며 떠난 곳을 생각할 틈이 없기도 하고 또는 잊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계획에 없던 목회를 미국에서 시작하여 처음은 한 교회 3년 기간으로 정하여 교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며 여러 교회를 개척하다가 뉴욕에서는 떠남이 허락되지 않아 10년을 지나며 전도자에서 목회자로 전환하고 시카고에 와서 그 교회 최장 13년 사역 후 최초의 은퇴자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목회자가 공석인 전환기  교회들을 섬기면서 전체적으로 여러 지역 여러 교회들에 부임하고 떠나고 또 선교사로 3년간 섬기며 남달리 많은 이동을 하였다. 나의 동갑 친구는 전도사로 부임한 교회에서 강도사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가 되어 은퇴하고 원로목사기 되기까지 45년을 한 교회에서 사역한 것과는 아주 다른 많은 경험을 하였다. 
한 교회 목사로서 얼마나 오래 있었든지 상관 없이 일단 교회를 떠나면 다른 목사가 부임한다. 교인은 양이요 목사는 목자이기에 양떼에 새로운 목자가 오면 그 목자가 중심이 되고 이전 목자는 상관할 것이 없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 완전히 떠난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관련할 것이 없다. 그 양떼는 맡겨진 목자의 돌봄을 받게 된다.
지역을  떠나는 것도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로 고향을 떠난 후에 다시 돌아가기  않았다. 아들의 배필을 고향에서 구하지만 아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떠나면 떠난 것이다.  
그런데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이 있다. 고국을 떠나 이민을 왔지만 항상 고향과 고국을 그리며 내왕하기도 한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경우 시카고에 가장 오랜 30년을 살면서 목회자로, 은퇴한 후에는 하나의 자연인으로 동료와 이웃을 친구로 삼아 지나다가 이들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눈 많은 이들을 어이 잊을 수 있겠나? 한 집에서 28년을 살며 아내가 창조하여 아름다움이 풍성한 정원에서 팬데믹기간 막내의 결혼을 아빠가 주례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집에 들어설 때마다 밝고 시원한 공간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하던 그 집을 어떻게 잊겠나? 떠나지만 떠나지 못하고 마음에 그것을 품고 있다. 또한 한국일보 칼럼을 통하여 만나던 독자들의  아쉬워하는 격려를  받아들여 이들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만나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3년을 지나다가 떠나간다 하시니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였다. 주님은 떠나면서도 떠나지 않는다고 하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그들 속에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 하신다. 보이는 주님은 떠났지만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믿는 자로서 모두 주님을 새롭게 만나 영원한 주의 나라에서 더 이상 이별이나 떠남이 없이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한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무엇을 가지고 갈까 What to Take With

무엇을 가지고 갈까 What to Take With
시카고 생활 30년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소원을 따라 그들 가까이 프린스턴에 가서 살기로 결정을 하다. 이사하며 말하는 다운사이즈는 집과 살림을 줄인다는 것이다. 큰 집이 필요 없이 두 사람이 단출하게 살 수 있는 아파트면 충분하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고 별로 사용하지 않던 것 또 있어도 잊고 살던 것들은 모두 버리거나 필요한 이들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내가 가지고 갈 것을 결정한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과 또 기억과 연결된 사진이나 물품이 포함되고 이사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줄이고 줄여도 짐은 많아진다. 
이민할 때 가방 몇개 들고 왔으나 지금까지 50년간 잘 살게 된 것이 감사하다. 미국에서 이사를 많이 하며 지역 안에서 옮기고 또 타지역으로 옮기었다. 은퇴 후에는 전환기사역을 담당하고 선교사로 먼 나라에도 살았지만 살던 근거지는 두고 가서 사역하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이제는 근거지를 정리하고 섭섭하게 떠나게 된다.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성경에서 실례를 본다.
베데스타 못은 물이 크게 움직일 때 누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기에 못 가에는 많은 병자가 모였다. 전신불구로 들것에 누워 있는 한 환자는 물이 움직일 때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기에 절망이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를 만나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그는 바로 일어나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간다. 완전한 새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주님은 왜 환자로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실까? 아마도 그것을 보면서 그가 병자로 있다가 고침 받은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개인이 사용하던 것을 버려 두어 남에게 불편을 주지 말라는 것인가? 그가 성한 사람이라도 밤에 잠잘 때는 침상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주님의 의도는 확실히 모르지만 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선지자 엘리야는 악한 왕에게 선포한대로 3년6개월 비가 내리지 않고 왕이 옹호하는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그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 것을 증명하고 훗날 변화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별세를 의논할 정도로 위대하였다. 그는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겼나? 그는 예언서, 집이나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 단벌 옷을 입고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가며 그의 겉옷을 벗어 내린다. 가지고 가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남겼다. 그가 가는 곳에는 겉옷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옷과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신다. 삶의 열매는 가져가지 않고 타인을 위하여 남겨 둔다. 추수를 하여도 다 거두지 말고 밭이나 나무에 얼마를 남겨두어 가난한 자 나그네가 즐기도록 하라고 하신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온다. 무엇을 가지고 갈까? 내가 도미니카에서 강의하다가 졸도하여 죽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가져갈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남기고 간다. 오직 믿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요 구원자라는 믿음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여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자유한가? Are You Free Indeed?

참으로  자유한가? Are You Free Indeed?
이민일세는 대개 누구나 잘 살기 위하여 밤낮 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 우리 일세는 많은 경우 가난을 피하고자, 자신이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또는 기회를 찾아 왔기에 한국에서 하던 일을 지속하는 전문인 외에는 대개 무슨 일이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면 하였다. 세탁소나 청소 네일 미용 식품 생선 잡화 등 모두 남달리 부지런하게 일에 일을 하였다. 너무나 분주하고 피곤하여 어떤 이는 번 돈을 셈하거나 은행에 가지고 갈 틈도 없었다. 남자는 집에 오면 쉬는 시간이 있지만 부인은 바로 부엌에 들어가고 빨래나 다른 많은 일과 아이들 돌보며 눈코 뜰 짬도 없어 피곤이 쌓였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삶이라 이민 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는가 물으면 특히 부인이 아니라며  여기가 좋다고 한다. 이유는 마음이 편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기를 살리며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만족하다. 너무 고단하고 힘들지만  자기를 발견하는 해방감으로 자유를 누리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집을 구입하고 고국에 송금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일이다. 
미국에서 6월19일 Juneteenth라는 노예해방 기념일이 몇 년 전 제정되었다. 영국에서 건너온 소수의 개척자들이 넓은  대륙을 농산물 생산지로 개발하는데 필요한 많은 일손을  아프리카인으로 충당하면서  노예산업과 시장이 형성되고 사람이 물품으로 거래되어 인권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이 무자비하게 취급되었다. 뿌리라는 소설에서 쿤타킨테라는 노예 몸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주인이 보며 그도 자기와 꼭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차차 노예도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어나며 이로 인하여 미국은 남북으로 분리된다. 북부는 공장이 많아 시간제 임금과 고용제도가 발전하나 세계의 곡창 남부는 고용된 인부로 운영할 수 없어 노예제도가 옹호되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남부는  항복했지만 2년 반이 지나도록 텍사스는 여전히 노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부의 Gordon Granger 장군이 1865년 6월 19일 텍사스 Galveston에 들어가 노예 해방을 요구하였다. 속박을 당하던 사람들이 자유의 선언을 들을 때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미국에 사는 우리든지 공식으로 노예에서 해방된 그들이 참으로 자유로운가! 여전히 많은 억압과 얽매는 사슬이 있다. 경제가 부요하고 학식과 지위로 많은 것이 갖추어졌는데도 육체의 고통, 우울과 좌절에 빠진 자가 많고 술과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하는 자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은 진정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해방되고 자유가 주어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자유는 죄와 죽음이라는 폭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결과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두려움이요 억압이다. 죽는 것만 아니라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면 어찌 마음에 평안이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고 죄와 죽음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고자 피를 흘려 죽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참 자유인이 된다. 서부 개척자들의 표어였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말씀과 진리인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자유를 우리가 가져야 하리라.

하늘을 담는 그릇 Embracing the Heaven

하늘을 담는 그릇  Embracing the Heaven
짐 근처에 삼림공원이 있어 자주 방문한다. 걷는 길은 숲이 많아 자연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며 원더 워킹 묵상을 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겨울철에 잎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뻗어 있는 것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더니 잎이 나고 뻗어 나며 풍성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 같았는데 곧 잎이 무거운지 가지는 땅으로 숙이고 하늘이 가려 잊어버리고 땅을 누리는 것 같다. 성경통독 말씀을 들으며 주와 친밀함을 가진다. 
걷는 길은 크고 작은 네 호수 길이라 많은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봄마다 타운에서는 호수에 송어를 방류하는 기간을 가지고 낚시꾼이 즐기게 한다. 나는 낚시하지는 않지만 낚시하는 사람들이 조용하게 인내하며 고기가 물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때로는 누군가 고기를 잡아 올리면 함께 기뻐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봄이면 오리와 캐나다 거위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모이더니 어느 새 많은 애기들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엄마는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아빠는 뒤에서 주변을 살피며 가족의 안전을 지킨다.  열심히 헤엄치고 풀에서 양식을 찾아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더니 부모 품을 떠날 정도로 크게 되어 날아간다. 이런 자연의 변화에서 나 자신의 변화를 보며 순응하는 것을 배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호수에 비치는 하늘을 보는 것이다. 하늘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지만 하늘이 호수에 비치고 호수가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은 감동이다. 큰 호수는 큰 대로 작은 호수는 작은 대로 하늘을 담고 있어 호수는 하늘을 담는 그릇이 된다. 맑은 하늘만 아니라 하늘의 여러 형태의 구름이든지 해와 달, 하늘을 나르는 새와 비행기 모두가 조용한 호수에 담기고 호수 주변의 숲들이 그대로 나타나 보여 호수는 신비로운 거울과 같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의 얼굴도 비친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일고 물결이 치면 호수가 담고 있던 하늘이 흔들리더니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 호수를 지나면 풀과 이끼가 여기 저기  있는 호수를 만난다. 이 호수도 같은 하늘 아래 있어 하늘을 담고 있으나 제 모양이 아니다. 여기 저기가 가리워져 있어 보이는 부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얼마나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호수에 달려 있다. 그것을 지나 만나는 호수는 전체가 이끼에 덮여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은 하늘 아래서 길 하나로 나뉘어 있는 호수 가족으로 같은 하늘을 담는 그릇이지만 하늘을 담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 호수의 형편이다. 
이를 보며 호수는 내 마음이라 생각된다. 내 마음은 하늘과 하나님을 담도록 만들어진 그릇이다. 하나님을 담을 때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청결은 주께서 처음 외치신 말씀처럼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서 된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정결하여도 세상 물결이 들어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 염려와 걱정 정욕의 이끼가 마음을 덮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주여 나의 마음을 정하게 하시고 이끼를 걷어내어 주 안에서 고요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담고 나타내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기도한다. 

깨끗하게 하리라 To Be Cleansed

깨끗하게 하리라 To Be Cleansed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어떨까? 태초에는 모두가 어둠이요 혼돈이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빛이 들어오니 사물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 우리를 비치시고  빛은 생명이라 우리가 그 안에 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을 얻는다.
빛은 실상을 보여준다. 밤에는 창문이 어떤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빛이 비치면 창문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보고 알게 된다. 안경도 그러하다. 안경이 깨끗해야 잘 보이기에 자주 닦는다. 불순한 것을 닦아 내면 새롭게 잘 볼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고 관리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은 우리 속 마음은 어떠한가?  겉으로 좋은 옷을 입고 단장을 하여 흠이 없는 것 같은데 속은 겉과 다를 수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 위선이라 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 하며 그들을 회 칠한 무덤이라 부른다. 겉은 아름다운 비석을 세우고 있으나 속은 썩은 송장이다. 그들 속에서 나오는 것은 탐욕과 거짓 교만과 분노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속의 더러움을 어떻게 정결하게 할 수 있나? 주께서 빛으로 그 더러움을 보시고  나의 더러움을 비치고 나에게  보여주실 때 내가 인정하고 내가 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의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은 나를 사랑하기에 자기 피로 나의 죄를 씻어내고 정결하게 하신다. 오직 예수를 통해사민 죄를 씻고 깨끗함을 입는다. 우리 수도물에 한 때 정수기를 사용하였다. 보기에는 좋은 식수 같은데 조사를 하여 불순물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정수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시에서 물 근원을 정수함으로 이제는 맑은 물을 마시고 있어 감사하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데리고 왔다.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임을 담한다. 어떻게 할까요 하며 주를 시험한다.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모두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씩 돌아가고 여인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은다 돌아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용서 받은 자는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나 과연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은 다시 넘어진다. 어떻게 하나? 창문이나 안경을 깨끗하게 닦지만 다시 또 더러워진다. 다시 닦는다. 우리가 다시 죄를 저질러 심령이 더러워져도 낙심할 것이 아니라 다시 인정하고 고백하면 주님은 다시 용서하신다.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관용이요 사랑이다. 세상에서는 누구를 정죄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위로하시며 죄를 이기게 하신다. 
용서 받지 못하는 자는 자기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는 거짓이요 위선이지만 스스로 인정하는 죄인과 세리에게는 주님이 가까이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셨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그는 자기 죄를 깨닫는 자에게 친구와 구주가 되심을 말씀한다. 
나는 깨끗한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주의 빛이 비치어 내가 깨끗하지 못하여 부정함을 알고 인정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 위로하시며 깨끗하게 씻기시고 새 옷을 입혀 주시기에 평안과 자유를 가지고 감사한다!